방 안은 고요했다.오직 바둑알 놓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황제는 자줏빛 비단 옷을 입고, 눈빛은 깊고 날카로웠다.그저 바둑을 둘 뿐인데도 살기가 느껴졌다.“부맹주는 매우 신중한 것 같소.”그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사람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은근히 떠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폐하의 바둑 실력이 워낙 뛰어나니, 제가 신중하게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녀는 소욱과 바둑을 둔 적이 있기에 바둑 스타일이 같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됐다.소욱은 냉소하며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신중해야겠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면 오히려 더 많은 실수를 드러내게 되지.”봉구안은 바둑알을 놓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왠지 모르게 오늘의 황제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그녀의 바둑 흐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그날 밤, 소욱은 그녀와 바둑만 두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하지만 봉구안이 알지 못했던 사실은, 바둑을 두는 동안 소욱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꿰뚫을 듯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소욱은 개인적으로 변장술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뛰어난 변장술사는 눈매를 바꾸거나 손에 상처를 만드는 등의 변화를 줄 수 있지만, 뼈를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즉, 손 모양은 바꾸기 어렵다.소환의 손에도 옅은 상처가 있었다.이것이 과연 그의 과도한 의심일까, 아니면 그녀가 감추려 했던 흔적일까...소욱은 속으로 이미 답을 내리고 있었다.…이튿날, 서왕은 먼저 선성을 떠났다.동방세는 창가에 서서 중얼거렸다.“서왕께서도 떠났는데, 폐하는 왜 우리를 계속 여기 머물게 하는 걸까…”봉구안은 그의 뒤에서 책상에 앉아 검을 닦으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날 그 밥 욕심만 내지 않았어도, 우린 벌써 폐하에게 작별 인사를 드렸을 것이오.”동방세는 팔짱을 낀 채 머리를 날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마치 무림맹의 맹주 같았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알고 싶소. 선성의 혼란은 대체 누구의 소행인지 말이오.”봉구안
식탁 위의 쟁반에는, 무려 잘린 머리들이 담겨 있었다!!!간이 작은 관리들은 자리에서 떨어지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소욱은 태연히 이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한껏 즐기는 듯했다.“대체 내가 엄중히 조사하라 했는데, 왜 이렇게들 긴장하는 것이냐?”“폐, 폐하… 이, 이것은 대체…”곁에 서 있던 진한길이 대신 대답했다.“모두가 선성 군비를 횡령한 죄인들입니다. 제각기 한번 살펴보시죠. 혹시 아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르니.”관리들은 겁에 질려 급히 무릎을 꿇었다.“폐하께서는 실로 총명하십니다! 부패한 관리들을 처단하여 선성의 평화를 되찾으셨습니다!”“탐관오리는 죽어 마땅합니다!”동방세는 피투성이 머리들을 보며 눈앞에 놓인 닭 머리가 갑자기 메스껍게 느껴졌다.이때, 소욱의 시선이 자리한 몇몇 관리들을 향해 겨눠졌고,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맞다.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쿵’하고 닫혔다.관리들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곧이어, 몇 명의 호위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칼을 뽑아 목에 겨누었다.관리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폐, 폐하… 이건…”진한길이 황제 옆에서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유현의 서용, 남주의 왕문걸, 초현의 왕우…”이름이 불린 자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해지며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진한길이 이름을 모두 부르고 나서, 호위들은 일제히 외쳤다.“폐하, 모두 모였습니다!”곧바로 소욱은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손에 든 술잔을 느긋하게 흔들며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참수.”그 순간, 관리들은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머리가 단칼에 베여 바닥에 굴러떨어졌다.잘린 머리들은 여기저기로 굴러다녔고, 그 참혹한 광경에 남은 관리들은 혼이 나간 듯 얼어붙었다.동방세는 조용히 비웃듯 말했다.“닭 잡아 원숭이를 경계하게 한다더니, 오늘 제대로 보네.”봉구안은 태연히 술 한 잔을 들이켰다.“먹던 닭이나 마저 먹으시오.”말이 많은 걸 보니
다음 날.역관 밖.일행은 짐을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가마는 하나뿐이었고, 이는 당연히 황제의 것이었다.봉구안과 동방세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주국공은 배웅하러 나와 있었고, 소욱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봉구안은 가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려 했는데, 갑자기 가마 커튼 사이로 머리가 하나 튀어나왔다.소군주가 가마 안에 앉아있던 것이다.그녀는 분홍빛 보따리를 안고 있었고, 봉구안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오라버니! 나 황제 오라버니랑 황성에 잠시 머물기로 했어요! 같이 가마에 타요!”봉구안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소군주, 자고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그녀가 물러서자, 바로 뒤에 서 있던 소욱과 부딪힐 뻔했다.그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괜찮다. 소군주가 자넬 벗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소군주의 명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지.”소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오라버니…”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손을 빼내어 뒤로 감췄다.“저는 말을 타는 것이 더 편합니다.”“알겠어요…”소군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얌전히 물러섰다.이때, 주국공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소소야, 정말 나도 없이 괜찮겠느냐? 길이 멀고 험한데 시녀가 없으면 어찌하겠느냐.”소군주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저 벌써 여덟 살이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오라버니처럼 협객이 되고 싶었다.협객 곁에 시녀가 있다니, 그것만큼 창피한 일은 없었다.주국공은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말했다.“간간히 편지 쓰는 것 잊지 말거라.”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문을 닫았다.그의 잔소리를 듣기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그와 동시에, 소욱은 봉구안을 스치듯 흘겨본 뒤 가마에 올라탔다.그 곁에는 진한길 한 명의 호위무사만 있었다.선성을 떠난 뒤, 앞에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더러 그들을 황성까지 호송하라니?”봉구안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동방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방에 우리 둘뿐이니 솔직히 말해보시오. 폐비 봉씨가 그렇게 떠들썩하게 이혼한 것이 그대와 관련이 있으시오?”소환과 오랜 세월 함께한 동방세는, 그가 어린 혈기왕성한 소년에서 풍채 좋은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소환은 언제나 많은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규방에 갇혀 자란 아가씨들에게는 그의 자유로운 성격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동방세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황제가 소환에게 보여주는 특별한 관심을 간파했다.더구나 황제가 굳이 폐비 봉씨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니, 황제가 소환을 견제하는 이유가 폐비 봉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아니. 나와 폐비 봉씨는 그 어떤 사사로운 관계도 없소.”동방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연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그렇다면 황제와 잘 이야기해보시오.”“남자라면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약 황제가 네가 폐비 봉씨와 엮였다고 의심한다면, 아마 널 죽이려할 지도 모르니 말이오.”“겉으로는 호위를 명하지만, 가는 길에 자네를 묻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봉구안이 눈을 들어 올리자 동방세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그는 어쩐지 그녀가 황제에게 미움받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봉구안은 그의 손길을 밀치고 나지막이 말했다.“알겠소. 내 직접 황제와 이야기하겠소.”어쩌면 동방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그래서인지 황제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날카롭고 의심스러운 것 같았다.…황제와 군주는 간이 농가에 머물고 있었다.마당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소욱은 방 안에서 황성에서 온 밀서를 읽고 있었고, 진한길은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똑똑.“폐하, 신 소환입니다. 안에 계십니까?”소욱은 서신을
황성에서와 달리, 무림맹에 도착한 후로 오백은 줄곧 가면을 쓰고 다녔다.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오늘 황제가 무림맹에 온다는 소식에 그는 더욱 모습을 숨겼다.게다가 소장군이 황제와 소군주를 호송해 황성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그는 어쩐지 난스러웠다.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너는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먼저 방성으로 가라.”오백은 명령을 받들며 말했다.“알겠습니다!”…남제의 외진 곳.부하의 보고를 듣고 나서 방 안의 법사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왕수인이 감히 황제를 죽이려고 한다니? 누가 그렇게 몰아가라 하였는가?”이때, 하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장막 안쪽의 사람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왕수인을 만났을 때 그는 황제를 죽일 계획 따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궁지에 몰린 탓일 것입니다.”장막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군량을 요구한다는 명목은 핑계일 뿐, 진짜 목적은 선성의 보물이다. 왕수인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제멋대로 일을 그르쳤구나.”흰옷을 입은 이는 냉정하게 말했다.“왕수인은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법사님, 이제 어떻게 교주님께 보고할지 생각해 보셔야겠군요.”“조정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천룡회를 조사하게 된다면, 교주께서도 불쾌해하실 겁니다.”“교주께서는 아직 조정과의 정면 충돌을 원치 않으십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그 말을 남기고 흰옷을 입은 이는 방을 나갔다.장막 안쪽의 좌호법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부하에게 물었다.“보물 지도를 찾지 못했나?”부하가 대답했다.“법사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문에 따르면, 보물 지도는 이미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법사님, 황제를 노릴 계획을 세울까요? 지금 황제 곁에는 호위병도 얼마 없습니다.”쾅!장막 안쪽에서 좌호법사가 손을 내려치자 부하는 깜짝 놀랐다.좌호법사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백룡왕의 말을 못 들었느냐? 지금은 조정을
봉구안은 소녀들로부터 깊은 인기를 얻어 이미 술을 몇 잔이나 마신 상태였다.또 한 명의 소녀가 술잔을 건네자, 동방세가 대신 받았다.“여러분, 우리 부맹주는 아주 훌륭하지만, 우리 무림맹 안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이 많답니다!”사람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맞아요! 맹주님도 아직 장가가지 않으셨잖아요! 아가씨들, 맹주님께도 술 한잔씩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아름다운 이성의 호의를 거절하기란 어려운 법이다.동방세는 차라리 자기가 먼저 몇 잔을 자책하며 마셨다.그는 곧 봉구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일 길을 떠나야 하니, 일찍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봉구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보였다.오랜만에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심가오, 이곳은 무림맹의 보호 아래 존재하는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이곳에 온 후로 그녀는 전쟁의 살벌함을 잠시나마 씻어낼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맹주님, 부맹주님과 춤 한 번 춰주세요!”“맞아요, 춤 한 번 춰주세요! 어차피 두 분 다 사내지 않습니까!”동방세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벌떡 일어섰다.“좋습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내 특별히…”놀이에는 경계가 있지만, 봉구안은 스스로의 선을 넘지 않았다.그녀는 동방세를 거절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거대한 그림자가 앞을 가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소욱은 봉구안 앞에 서서 동방세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맹주는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인가?”동방세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저... 저...”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그 큰 남자가 그렇게 울면서 뛰쳐나가다니 소욱은 동방세의 예상 밖의 행동에 적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그는 고개를 돌려보니, 주변 모든 사람이 책임을 묻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봉구안은 북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맹주는 젊었을 적 아내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맹
정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녀의 입술, 그녀의 손, 술을 마시는 그 동작, 무심코 드러내는 모든 자세, 말투의 습관까지...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법이다.소장군… 그는 그의 황후 봉구안이었다. 그는 확신하였다.달빛 아래, 소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그를 철저히 속였다.그녀는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는 맹 소장군일 뿐만 아니라, 무림을 평정한 부맹주 소환이기도 했다.그 면죄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자신을 위해 구한 것이었다.그러니 어찌 궁에 머무르길 좋아했겠는가?그녀가 보아온 세상은 광활한 북방뿐만 아니라, 끝없는 강호이기도 했다.그녀는 열세 살에 이미 강호를 누볐다.황궁은 그런 그녀에게 너무도 작았다.마치 강과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를 작은 수조에 가두는 것과 같으니, 답답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그녀가 심가오의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어떤 삶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가까이에 그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욱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그는 그녀의 정체를 폭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떠나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모르는 척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는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터였다.다음 날 아침.소군주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봉구안의 방 문을 두드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라버니, 우리 이제 황성으로 가요!”봉구안이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어젯밤, 아마 술을 마신 탓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소욱의 그 아련한 눈빛과 자신이 그립다는 말이 떠올랐다.동방세는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봉구안은 그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났다.그리하여 일행은 심가오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봉구안은 선성의 난 이후, 천룡회가 반드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을 것이라 직감했다.그래서 더 평범한 가면을 쓰고, 말을 타는 대신 가마에 올랐다. 황제와 소군주에게 화를 불러올 위험을 줄
앞쪽 산체가 무너져 더는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관아에서 사람을 보내 돌멩이와 나무더미를 치우고 있었으나, 시간이 걸릴 터라, 봉구안과 일행은 근처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소군주는 마음이 큰 아이인지라, 잠시 후에는 다시 활짝 웃으며 “황제 오라버니!”를 연발하였다.“황제 오라버니, 여기서 쉬어가는 건가요? 오늘 밤엔 소환 오라버니랑 함께 잘 수 있나요?”비록 소욱이 허락한다 하여도, 봉구안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근처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소군주가 물고기가 먹고 싶다 하자, 소욱은 진즉 진한길에게 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라 명하였다.진한길은 솜씨가 제법 있어, 잠시 뒤 크고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왔다.봉구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을 피워 간단한 나뭇가지로 만든 구이 틀을 설치하였다.소욱은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소군주는 그의 곁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소환 오라버니는 참 좋으십니다. 황후마마가 되신다면 더 좋을 텐데요!”소욱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의 마음엔 이미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녀는 황궁의 삶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그와 그녀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는 이미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며, 더는 억지로 붙잡지 않을 터였다.다만 지금은 그녀를 몇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몇 번만이라도...마치 꿈처럼, 황궁으로 돌아가면 이 꿈은 깨어나고 말리라.소욱은 그런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그 꿈 속에 머물고 싶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곁으로 가, 함께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그는 능숙한 손길로 나뭇가지를 물고기 몸에 꿰었다.“부맹주는 아마 물고기를 구워보신 적이 없을 터, 이 일은 짐이 하겠소.”봉구안은 실로 물고기를 구워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였고, 물고기 구이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차라리 마른 빵을 먹거나 들에서 과일을 따먹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