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경성 사람들 모두가 조원철을 올곧고 정직하며 금욕적인 사람이라, 바라만 보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말했다. 오직 강유영만이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겉과 달리, 속으로는 한 덩이 불과 같다는 것을. 그녀에게 닿는 순간, 거침없이 타올라 뜨겁고도 격렬해진다는 사실을. 은밀한 사정을 주고받던 나날에, 그는 '사랑하는 이'라고 다정하게 그녀를 불러주었지만, 그의 그런 비뚤어진 애정은 점점 그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금욕적이고 정직한 사람? 그건 모두 거짓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날, 조원철의 혼사가 정해졌다. 강유영은 그동안 모든 은자를 들고 도주를 준비하는데, 결국 폭설이 내리던 야밤에 그에게 잡히고 만다. “어딜 도망치려고?”
View More하지만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다도 솜씨가 형편없어 서왕의 눈 밖에 난다면, 진국공부에 화를 미치지 않고도 그의 첩실로 들어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원철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상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다도는 좀 더 익혀야겠구나.”이내 건정제가 강유영을 의미심장하게 곁눈질하며 한마디 던지자, 강유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예, 폐하.”건정제는 더는 책잡지 않고 나지막이 명했다.“모두 자리로 돌아가거라.”강유영은 다른 귀녀들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와 연회를 이어갔다.손가락 끝이 찢어질 듯 아파왔지만, 그녀는 억지로 자세를 바르게 세우고 앉아 고통을 참아냈다.다행히 연회가 끝날 때까지 건정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고, 황자들 중 누구도 그녀를 첩으로 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가슴을 쓸어내린 강유영은 연회가 끝나자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대경전의 문턱을 막 넘어섰을 때, 곁에서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아팠을 텐데 제법 잘 참더구나.”고개를 드니 경화 공주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조소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괜찮았습니다.”강유영은 숨을 나직이 들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공주 전하께서 하신 일은 전각에 들기 전 소은경 군주께서 미리 일러주셨습니다. 손가락에 약을 발라둔 덕에 통증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이간계.언젠가 조원철이 가르쳐 준 계책이었다.경화 공주와 소은경이 매번 손을 잡고 그녀를 적대하는데, 가만히 있다가는 제 명을 살지 못할 것이다.그렇다면 차라리 조원철의 말대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편이 나았다.호적수인 두 사람이 서로 물고 뜯느라 바빠지면,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것이다.“지금 뭐라 하였느냐?”경화 공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비웃었다.“네까짓 게 감히 나와 은경이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어?”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웃음이었다.“전하께서 왜 이토록 저를 핍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강유영은 긴 속눈썹에 눈물을 매단 채 애처로운
강유영은 손에 든 흑자기 주전자와 찻잔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는 틀림없이 경화 공주의 짓 같았다.소은경이 아무리 군주라 한들 결국 황궁 사람이 아니니, 이토록 대담하게 황실 기물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때 조원철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한 눈빛이었다.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강유영은 가슴 한구석이 씁쓸하게 아려왔다.‘내가 꾸물거려서 진국공부의 위상에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아니면 서왕의 눈 밖에 날까 봐 걱정하는 걸까?’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칼로 베이는 듯 아파왔다.경화 공주나 소은경이 그녀를 함정으로 몰아간 것은 결국 조원철 때문이었다.강유영은 오기가 생겨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이윽고 펄펄 끓는 물을 주전자에 부으며 잔을 데우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경화 공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이미 손은 써두었고, 설령 강유영이 다도를 안다 해도 단열이 안 되는 흑자기 주전자로는 제대로 된 차를 우려낼 수가 없었다.‘어디 그 뜨거운 물을 얼마나 버텨내는지 볼까? 네가 끝까지 의연한 척할 수 있을지 두고 보지.’끓는 물이 닿자마자 찻잔 가장자리를 겨우 쥐고 있던 강유영의 손가락 끝으로 어마어마한 열기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마치 수많은 바늘이 손가락을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놓을 뻔했지만, 이내 고통을 참으며 다시 잔을 쥘 수밖에 없었다.하얀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황제께서 두 눈을 서슬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계시는 자리였고,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자리였다.자칫 잘못했다간 그녀뿐만 아니라 진국공부 전체가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비록 양녀일지라도 자신을 길러준 양육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었다.뜨거운 물을 연거푸 부을 때마다 손가락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에 강유영은 몸을 바르르 떨었고, 눈가에는 결국 눈물이 고였다.그
한 무리의 내관들이 일사불란하게 탁자와 의자를 내왔다.자리는 앞뒤 세 줄로 나뉘어 무려 스물한 석이나 마련되었다.강유영은 연회장에 온 규수들이 어느 가문의 여식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평소 세가의 규수들과 교류할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그저 몇몇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단연 조연화였다.그녀는 강유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노려보았다.조연화 입장에서는 비록 강유영이 어전에서 실수를 범하면 진국공부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겠지만, 차라리 경화 공주의 계략에 빠져 당장 목이 날아갈 만한 대역죄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조연화는 언젠가 저잣거리에서 서왕을 한번 마주친 뒤, 우연히 그의 신분을 알게 되면서 남몰래 연모의 정을 품어왔다.비록 서왕은 아직 그녀가 뉘 집 여식인지조차 모르지만, 조연화는 진국공부의 적녀라는 자신의 신분이라면 능히 황가와 맺어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서왕부에 발을 들일 수만 있다면 측비 자리라도 감지덕지였다.그런데 어찌 근본도 없는 양녀 따위와 한 지아비를 모실 수 있단 말인가.“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한 궁녀가 다가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자리를 안내했다.궁녀의 뒤를 따라간 강유영은 뜻밖에도 맨 앞줄 정중앙 자리에 배정되었다.치맛자락을 여미며 자리에 앉은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이토록 성대한 자리는 난생처음이라 잔뜩 얼어붙어 있었는데, 수많은 이들의 시선, 그것도 황제와 황후, 태후의 앞에서 다도를 시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탁자 아래로 꽉 마주 잡은 두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인 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저쪽에 앉은 조원철을 바라보았다.저도 모르는 새 어느새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조원철은 평소와 다름없이 냉담하고 고요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그녀가 시선을 보내자, 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축이
건정제의 곁으로 다가간 고익은 몸을 굽히고 나직이 아뢰었다.“당도했다면서 어찌 들지 않는 게냐?”건정제의 목소리에는 딱히 책망하는 기색이 없었다.고익은 조심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건정제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국공, 그대의 양녀가 누구인가?”전각 안이 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지며 모든 이의 시선이 진국공에게로 쏠렸다.진국공은 강유영에게 일어서라는 눈짓을 보낸 뒤, 상석을 향해 예를 올렸다.“폐하, 이 아이가 소신의 양녀 강유영이옵니다.”“소녀 강유영, 폐하와 황후마마, 태후마마를 뵈옵니다.”강유영은 전각 중앙으로 걸어 나가 예법에 맞춰 절을 올렸다.원래 세가의 예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기에, 급히 한씨가 사람을 붙여 이틀간 일러준 몸가짐이 전부였다.대강 모양새는 갖추었으나, 어릴 때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세가의 규수들과 비교하기에는 미흡한 구석이 많았다.긴장감이 엄습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만큼 두렵지는 않았다.건정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가까이 나오거라.”강유영은 몇 걸음 더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마침 그곳은 조원철의 앞이었다.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의 고귀하고 준수한 얼굴이 슬쩍 눈에 들어왔다.그는 제 앞의 술잔만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지금 서왕이 나를 간택할지 고심하고 있는 걸까?’쓰라린 한탄이 가슴을 후벼 파자,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바닥만 응시했다.“고개를 들라.”건정제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댄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강유영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감히 용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건정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고, 황후와 태후의 시선 역시 고스란히 그녀에게 꽂혔다.전각 안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자, 가시방석에 앉은 듯 숨이 막혀왔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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