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황태후가 갑작스레 궁으로 돌아오자, 궁중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자녕궁. 태후는 더욱 긴장했다. “왜 갑자기 회궁하신 거지?” 태황태후가 회궁을 하면 적어도 2주 전에는 알려 하고, 회궁 당일에는 환영식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 이렇게 급히 돌아온 것이라면 아마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일 것이다. 태후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지 의심했다. 무엇이 그 “늙은 마귀할멈”을 불러들인 걸까? 계 상궁이 위로하며 말했다.“태후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태황태후 마마께서 이번에 돌아오시면 바로 황후 마마를 보러 가겠다고 하셨어요. 마마랑은 무관하실 겁니다.”태후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전 그분의 행동으로 봤을 때, 궁으로 돌아온 직후 하루 동안은 쉬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문안 인사를 허락하셨어. 당일에 사람을 불러들인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어. 설마 진짜로 황후 때문에 온 것일까? 그런데 황후가 어떻게 옥양산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던 태황태후를 노하게 한 거지?” 계 상궁은 잠시 고민하더니 추측에 나섰다. “태후 마마, 혹시 귀비 마마와 관련 있는 건 아닐까요?” 태후는 순간 의아해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능연은 마구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고, 비록 범인은 찾지 못했어도 황후를 어느 정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를 상대하기 위해 태황태후를 부른 것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태황태후처럼 현명한 사람을 쉽게 끌어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능연이 황후의 큰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태후는 벽 쪽의 불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이번의 위기를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러나 그녀도 더 이상 도울 수 없었다. 영소전. 춘하가 귀비를 모시고 약을 드리던 중, 기쁜 소식을 전했다. “마마, 태황태후 마마께서 벌써 궁으로 돌아오셨어요. 황후 마마께서도 함께 불려갔습니다.” 귀비
“뭐라? 폐하께 그 천한 여자랑 합방을 하라고 하셨다고?!" 귀비의 좋았던 기분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소식을 전하러 온 궁인은 고개를 숙였다. 귀비의 분노를 감히 마주하지 못했다.“소인은…소인은 그저 전해 들은 겁니다. 태황태후 마마께서…”“됐다!”귀비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놀람을 넘어 의심이 생겼다.태황태후가 궁에 돌아온 건 황후의 정조를 조사하기 위함이 아니었는가!왜 이렇게 서둘러 황후와 합방하게 하려는 걸까?귀비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했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본궁이 다시 묻겠다. 태황태후께서 황후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추궁했느냐?”궁인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내전에는 몇 명만 모셨고, 소인은 전각 밖에 있었어서 상전분들의 대화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사옵니다.”그 말을 듣자 귀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태황태후가 도대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알고 싶었다!황후가 순결하지 않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이 아닌가?태황태후의 칼 같은 성격상, 어떻게 그런 일을 용납하겠나...귀비는 혼란스러웠다.마치 무언가가 서서히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다급히 궁인에게 물었다.“그렇다면 지금은?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시느냐!”궁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황제 폐하께서는 태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지금 영화궁에 가 계십니다.”귀비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이 대낮에 태황태후께서 당장 합방을 하라고 하셨단 말인가!설마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일일까?“춘하, 당장 옷을 가져와라! 본궁이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겠다!”귀비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비록 황제 폐하께서 황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태황태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게 된다면 어떻겠나?그녀는 어떠한 돌발 상황도 용납할 수 없었다!“빨리!”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재촉했다.춘하는 허둥지둥 움직였
봉구안은 합방 준비물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갈수록 기가 찼다!소욱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주 상궁은 궁녀들에게 명령했다.“물건들을 내려놓고, 황후 마마의 목욕을 준비해라.”“예.”봉구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연상 한 명이면 충분하네.”주 상궁은 태황태후의 명을 받들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 꽤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봉구안에게 상전의 태도를 취했다.“황후 마마, 처음으로 폐하의 총애를 받으시니, 궁중의 규칙을 잘 모르실 겁니다.”“합방 전 목욕은 평소 목욕과는 다릅니다. 절차가 세세하게 정해져 있어요!”“한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마마, 폐하를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마시지요."주 상궁은 공손하게 한쪽 팔을 내밀며 “이쪽으로 오라”는 행동를 취했다.봉구안의 눈빛은 싸늘했고,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 있었다.“태황태후께서 널 보낸 것은 본궁과 황제 폐하가 원만히 합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과연 본궁의 기분이 상해 합방을 거부하게 돼도 일이 잘 풀릴지 한번 지켜보거라.”주 상궁은 순간 깜짝 놀랐다.황후 마마의 말이 너무나 당돌하지 않은가!그러나 곧 생각을 바꿨다. 황후가 이토록 강경한데, 만약 그 뜻을 거스르면 태황태후의 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고, 자신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잠시 고민한 후, 주 상궁은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나가 전각 밖에서 대기하라.”그리고 봉구안에게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소인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모든 사람들이 떠난 후, 연상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봉구안 곁으로 빠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마마, 저 주 상궁도 꽤나 까다로운 사람인데 어떻게 이리 순순히 물러난 거예요?”봉구안은 별다른 말없이 내실로 들어가 모든 옷을 벗어 던진 후 욕조에 몸을 담갔다.그녀 주변의 분위기는 점점 차가워졌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연상은 욕조에 꽃잎을 뿌리며 걱정스럽게 물었
봉구안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눈빛은 동요 없이 평온했다.소욱은 책을 내려놓았다. 표정은 어둡고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왜, 주 상궁이 합방 예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소?”봉구안은 그의 작은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했다.보아하니, 그 역시 이 합방을 원치 않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소욱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그의 손가락이 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눌렀다.그녀에게 꽂힌 그의 시선은 서늘하면서도 강한 폭력성을 품고 있었다.“아플까 두려운 것이오?”봉구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아프다는 거지?그가 말하는 고통이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일까?그는 정말 태황태후의 말을 따르며 착한 손자 역할을 할 작정인가? 봉구안은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이빨을 꽉 물고 불꽃이 튈 듯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자의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손에는 단검을 들고 있었다.봉구안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칼을 들고 있는 걸까?짧은 순간, 그녀는 혼례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그녀의 순결을 의심하며 스스로 단검으로 증명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에게 스스로 순결을 증명하게 하려는 건가?봉구안의 미간이 조금씩 풀어졌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오히려 일이 간단해질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직접 하는 편이 낫다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한 봉구안은 순순히 단검을 받아들려고 했다.그러나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를 베어도 상관없소. 그저 침구에 피를 묻혀 명을 따랐다는 걸 보여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그는 그녀에게 자해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 거짓으로 일을 꾸며내라고 요구한 것이다.이 말을 들은 봉구안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욱은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미간에는 짜증이
귀비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말도 안 돼!폐하께서 봉장미를 총애하실 리가 없다!그리고 저 침구의 피도 봉장미의 처녀혈일 리가 없다!봉장미는 분명 오래전에 순결을 잃은 게 분명하다!귀비의 눈빛은 시시각각 변했지만 모두 불신을 품고 있었다.태황태후는 매우 만족한 듯 보였고, 곧 귀비에게 물러날 것을 허했다.귀비는 만수궁을 나선 뒤 줄곧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춘하 또한 마찬가지였다.폐하와 황후 마마가 정말로 합방을 하셨단 말인가?하지만 황후 마마는 분명... 춘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모시는 마마를 바라보았다. 귀비의 눈빛은 마치 독기를 품은 듯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합방은 틀림없이 거짓이다! 귀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빨리 황제를 만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한편. 자녕궁 안.태후는 황제가 합방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 사실이 확실한가?”계 상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태후 마마, 틀림없습니다. 태황태후 마마께서 주 상궁을 보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하셨고, 침구도 만수궁으로 보내졌습니다.”태후는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폐하가 정말 그렇게 순순히 따랐단 말인가? 예전에 내가 앞서 조정의 관료들과 함께 자손을 위해 더 이상 귀비만 총애해서는 안 된다고 권했잖는가.”“그때 폐하는 말을 듣지 않으셨고 몇몇 대신들을 처벌하기까지 하셨지.”“이번 일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게 분명하네.”계 상궁이 추측했다. “귀비 마마께서 낙마로 부상을 입으셔서 얼굴을 크게 다치시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아직 젊고 혈기가 왕성하신데, 기거 일지에도 오랫동안 기록된 것이 없었으니, 마침 시기 좋게 태황태후 마마께서 밀어 부치셔서 폐하께서도 어쩌면…”뒤의 말은 그녀도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웠다.태후도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폐하께서 정말로 부인들을 고르게 사랑해 준다면, 내 마음의 짐도 덜 것 같구나
영화궁 안, 이미 새 침구가 깔려 있었다. 봉구안은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 입었다. 연상은 따뜻한 차를 들고 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마, 정말로... 폐하를 모신겁니까?” 봉구안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선 더 묻지 마.” 마마의 말을 들은 연상은 더욱 혼란스러웠지만, 마마가 묻지 말라 하니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마마, 귀비 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연상은 가슴이 철렁했다.“귀비 마마께서 이 시간에 온 거라면 틀림없이 마마의 합방에 관해 물으시려는 걸 겁니다. 마마, 만나시겠습니까?”봉구안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한결 나아진 것을 느꼈다.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들어오시라 해라.”……전각 안에는 봉구안과 귀비, 단둘뿐이었다.귀비는 봉구안을 보자마자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황후 마마, 참으로 기세등등하시군요.”봉구안은 자리에 앉아, 맑고 차가운 눈빛으로 귀비를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그녀는 귀비의 말을 받아 치지 않고 침묵으로 상황을 주도했다.귀비는 스스로 자리에 앉으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보기에 마마께서 폐하의 승은을 입으신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하게 차 잔을 들어 뚜껑을 열고 차를 마셨다.귀비의 표정은 순간 싸늘하게 굳어졌다. “마마, 언제까지 연기하실 수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순결은 이미 잃으신 뒤 일 겁니다. 폐하를 속이실 수는 없으셨을 테니, 침구의 피도 당연히 가짜겠죠!”“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모두를 속이신 겁니까?"봉구안은 순간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나는 항상 궁금했네. 귀비께서 왜 그렇게 확신을 갖고 내가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하는지.”귀비의 눈빛이 싸늘 해졌다.“제가 왜 확신을 갖냐고요? 왜
귀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봉장미가 어떻게 그 철저한 신체검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이 여자가 진짜 봉장미가 아니다”라는 결론만이 유일하게 납득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봉장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귀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봉구안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비를 똑바로 응시한 채 싸늘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맞네. 나는 봉장미가 아니야.” “산적에게 납치된 이후, 나는 더 이상 봉장미가 아니게 되었지.” 귀비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그녀는 뒷걸음 질 치려 했으나, 이내 옷깃을 붙잡혔다. 그녀는 강제로 허리가 굽혀졌고, 상처가 벌어지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 손을 놓으세요!” 봉구안은 그녀를 붙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귀비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고, 마치 지하 세계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보였다. 봉구안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이국에 기이한 약이 있네. 그것을 바르면 약 49일 후에 허물을 벗듯 새롭게 태어날 수 있지.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러워져.” “또 복원술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걸 쓰면 여인의 몸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지.” “정말이지, 고통스럽더군.” “하지만 효과는 정말 뛰어나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감히 궁으로 시집올 수 있었겠나?” 귀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눈 밑이 두어 차례 떨려왔다. 어쩐지… 이 천한 여자가 비밀의 약을 썼던 것이다! …… 영소전.귀비는 화병 여러 개를 연달아 바닥에 내던졌다. “비밀의 약이라니. 그 천한 여자가 정말 모든 걸 걸었구나!” “그 약,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걸 먹은 열의 아홉이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그 약을 찾았고, 살아남았다는
봉구안은 몽화지독에 중독되었다. 궁 밖의 오백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며 그녀는 스스로 독을 빼내보려 했다.그러다 한순간의 실수로 갑자기 기절해버렸다. 그 뒤로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꿈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구안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궁 안은 고요했고,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연상은 침상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마마... 깨… 깨어나셨군요...”봉구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다시 둘러보니, 소욱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싸늘하고 어두웠으며, 마치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같았다. 지금은 그는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봉구안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설마 그가 그녀가 몽화독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휙— 남자가 순간 일어섰고 긴 옷자락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황후, 정말 잘 하는 짓이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소매를 휘날리며 떠나갔다. 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리고 곧장 연상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느냐?” 연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마, 마마께서 기절하시고 제가 곧바로 태의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폐하께서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폐하께서 침상에 가까이 다가가시자, 마마께서 폐하의 손을 잡으시고는, 많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봉구안은 자신이 알고 싶은 핵심이 있었다. 그녀는 목적에 맞게 물었다. “태의가 내가 왜 기절했는지 알아냈느냐?” 연상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태의께서는 마마께서 기혈이 부족하시고, 최근 잠을 잘 이루지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