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이 얘기는 비서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경비원마저 이 일과 연관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심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생각하니 억울한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 그녀는 옷소매를 거두고 다친 상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이것 봐요. 경비원이 긁어놓은 상처예요. 종아리에도 있어요.”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딱지가 앉은 상처가 두 군데 있었다. 마치 값비싼 예술품에 스크래치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보광 중신의 흉을 계속 듣던 성연신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심지안은 억울했던 기분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성연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를 콕콕 찔렀다.“왜 그래요?”‘설마 보광 중신의 대표랑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아무것도 아니에요.”“네...”성연신이 고개를 내리뜨리며 감정을 거두었다.“일찍 자요. 설거지 잊지 말고요.”“알았어요.”심지안은 그가 밥을 했으니 자신이 설거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심씨 저택, 밤이 깊어졌지만 여전히 불이 환히 밝혀있었다.심전웅이 의자에 앉아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누군가 지안이를 위해 나선 바람에 보광 중신의 면접관이 해고당한 게 확실해?”심연아가 그의 옆에 앉아 팔을 잡아당겼다.“정말이에요. 안 그러면 무슨 이유겠어요? 이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어요. 지안이가 오르지 말아야 할 나무에 오른 게 틀림없어요.”“고작 걔 주제에?”심전웅이 하찮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그 귀한 분들이 바보도 아니고.”딱 봐도 가족을 속이고 밖에 내연녀를 둔 상황인 게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이런 일이 상류층에서는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심지안은 밖에서 몰래 만나는 내연녀일 것이고.“아빠, 지안이가 잘못된 길을 가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내일 지안이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요.”은옥매가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사회가 험악해서 귀한 분들의 돈도 쉽게 얻어쓰지 못해요.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어떤 한 젊은 내연
원래 경비원 대신 생김새가 단정한 젊은이로 바뀌었는데 전혀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심지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녀가 길을 잃은 줄 알고 먼저 다가와 물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면접 보러 왔어요.”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면접 보러 왔을 때 경비원님을 본 적이 없는데 혹시 교대 근무인가요?”“저 어제까지 창고에서 일하다가 오늘 이쪽으로 발령받았어요.”“그럼 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경비원은요?”심지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비원은 화들짝 놀라더니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에 심지안은 모든 걸 알아챘고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해고당했나 보네.’처음에 그녀는 보광 그룹의 높은 연봉 때문에 지원했지만 지금 보니 관리 임원분들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자기 사람이라도 감싸고 돌진 않으니 말이다.어제 소동이 있고 난 뒤 오늘 재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 많지 않아 과정이 빨리 진행됐다.필기시험을 순조롭게 통과한 심지안은 곧장 면접 보러 갔다. 면접이 끝났을 때 벌써 오후가 되었다.“심지안 씨, 보광 중신의 면접에 참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면접은 끝났고 면접 결과는 내일 메일로 통지할 겁니다.”“네, 감사합니다.”보광 그룹을 나선 심지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이거야말로 대기업의 면접이지. 어제는 정말 개판이었어.’건물 사무실.성연신이 창가 앞에 서 있었다.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어 더욱 훤칠해 보였고 안에는 단정하게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은 긴바지가 그의 곧고 기다란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앞머리 밑의 그윽한 두 눈에 쉽게 다가가지 못할 싸늘함이 담겨있었다.그는 건물 아래의 미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비서 실장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셨다.“대표님, 심지안 씨 방금 면접 보고 가셨습니다. 인사팀에서 심지안 씨 조건이 괜찮다면서 내일 아침에 면접 합격 통지
심연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심연아의 도움으로 연설아는 연예 뉴스 기자와 연락이 닿았고 돈을 내고 댓글 아르바이트까지 구했다.그날 오후.심지안은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요리를 배웠다. 성연신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고 영상에서 가르치는 대로 팬에 각종 양념을 넣는 심지안을 발견했다.“밥할 줄 모르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음식은 먹는 거지, 낭비하는 게 아니에요.”배달이든 괴상한 요리든 그는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심지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예쁜 얼굴로 히죽 웃었다.“낭비 안 해요. 이번에는 맛이 꽤 괜찮아요.”성연신은 그녀가 말한 맛이 꽤 괜찮다는 요리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그냥 혼자 먹어요. 배탈 나면 구급차 부르고요.”“내 체면 좀 살려줘요. 이번에는 진짜 지난번보다 훨씬 맛있어요.”“먹고 싶지 않아요.”성연신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내가 얘기했었잖아요. 돈 말고는 당신이 원하는 거 줄 수 없다고요.”심지안이 움직이던 두 손을 멈추었다.“알아요. 난 그냥 어제 연신 씨가 국수를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하려는 것뿐이에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마음대로 해요.”성연신은 아무런 표정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석양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였고 마지막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심지안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흥, 안 먹겠으면 말아요. 나 혼자 먹을 테니까. 배고파 죽든 말든 상관 안 해요!”한 시간이나 고생한 끝에 그녀는 반찬 세 개와 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심지안은 굳게 닫힌 2층 서재 문을 올려다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올라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밥이 다 됐는데 정말 안 먹을 거예요?”하지만 방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자요? 신이 씨?”성연신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방문을 열고는 심지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당황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당신이 한 밥 안
성연신은 그녀에게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위층에서 카드 한 장을 가져와 심지안에게 건넸다.“이건 내 카드인데 앞으로 필요한 생활비랑 쇼핑하고 싶을 때 이 카드로 긁어요.”심지안은 채소를 사는데 돈이 얼마 들지 않는다고 얘기하려다가 자신이 백수라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고 카드를 받았다.“알았어요.”“장 보고 싶으면 오카마트로 가요. 거기 물건이 신선해요.”“그런데 수입 마트는 너무 비싸요. 작은 배추 한 포기도 몇만 원씩 하더라고요.”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시장에서 사면 엄청 싸요. 게다가 농장에서 당일에 딴 거라 싱싱해요.”“난 지금 분부하는 거예요, 상의하려는 게 아니라.”배가 부른 성연신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지안 씨 임무는 나를 도와서 집안 어른들을 해결하는 것이지, 현모양처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배역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심지안은 그를 째려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수입 마트는 뭐 달라? 외국 물건이라면 다 좋은 줄 아나. 그거 먹으면 뭐 불로장생이라도 할 수 있어?’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난 그냥 연신 씨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거죠.”“난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까 아낄 필요 없어요.”성연신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시간 나면 옷도 몇 벌 사요. 주말에 나랑 같이 할아버지 뵈러 가요.”심지안은 앞치마 밑의 치마를 보여주며 말했다.“지금 입고 있는 거 입으면 안 돼요? 그때 200만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에요.”“중요한 자리에 갈 때 작년 디자인을 입으면 안 돼요.”심지안이 애써 웃는 척 말했다.“알았어요...”어차피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고 돈도 그의 돈을 쓰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설거지를 마친 심지안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화면에 딩동 하고 메일 알림이 떴다. 확인해보니 보광 중신에서 보낸 면접 합격 메일이었다. 드디어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심지안은 너무도 흥분되어 늦은 밤까
두 사람의 오고 가는 대화를 들은 후 심지안을 쳐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재산을 더 많이 나눠 가지기 위해 막무가내로 아버지와 싸우는 그런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심지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변호사한테 늦게 오라고 하세요.”“안 돼. 변호사가 얼마나 바쁜 분인데 널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그녀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자 심전웅은 그냥 가려 했다.“시간이 없으면 내가 대신 먼저 관리하다가 나중에 네가 시집갈 때 줄게.”“아니요! 같이 가요.”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꾸고 심전웅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일도 물론 중요했지만 어머니가 남긴 물건이야말로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심전웅이 그녀를 협박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가져오지 못하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진다.이따가 보광 그룹 인사팀에 상황을 설명하고 입사를 하루 미루거나 오늘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얘기해야겠다. 만약 상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갑자기 약속을 어긴 건 그녀이기에 남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심전웅이 길옆에 세워져 있는 차에 올라타고는 심지안이 손에 꽉 쥐고 있는 휴대 전화를 힐끔거렸다.“변호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집에 가서 얘기하자.”차 양 쪽에서 지키고 있는 경호원을 본 심지안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경호원은 왜 데리고 나왔어요?”“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어디 다녀오느라고 그랬어. 얼른 타, 시간 지체하지 말고.”심지안은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전웅이 아무리 그녀를 미워한다고 해도 백주대낮에 그녀를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네.”심지안도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녀가 제대로 앉기도 전에 차가 출발해버렸다. 심지안은 몸을 비틀거리며 겨우 제대로 앉았다. 심전웅에게 어머니가 남긴 혼수에 관하여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그녀는 재빨리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요! 내려야겠어요.
“네 능력이 어떤지 아니까 그만두라고 하는 거야. 우리 회사랑 보광 그룹 같은 대기업이 비교가 돼?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니야?”심지안은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휴대 전화만 꽉 쥐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심전웅의 편애가 심해 진작 적응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고 심전웅도 누리꾼들과 같은 편에 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어렸을 적부터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심연아에 대한 심전웅의 칭찬과 격려였다. 그녀는 마치 남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심전웅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의 휴대 전화를 확 빼앗아갔다. 심지안이 휴대 전화를 다시 가져오려 했지만 경호원에게 제압당해 꼼짝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반항하는 도중에 심전웅은 그녀의 휴대 전화에서 보광 그룹 HR의 연락처를 찾아내 사직하겠다는 문자를 보낸 후 휴대 전화를 꺼버렸다.“당신은 제 아빠예요. 아빠라는 사람이 딸이 잘되는 게 그렇게 싫어요?”도무지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심지안은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그만해! 난 네가 망신당하는 걸 막으려는 거야!”심전웅이 버럭 화를 내더니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얘를 집에 가둬서 집 밖에 나오지 못 하게 해.”그러고는 차에서 내렸다. 당황한 심지안이 여러 번이고 차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30분 후, 심씨 저택에 도착한 심지안은 그대로 방에 버려졌고 그녀가 도망갈까 봐 문까지 걸어 잠갔다....보광 그룹 HR은 문자를 받자마자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꺼진 상태였다.“수진 언니, 안 오겠다면 그냥 내버려 둬요. 연 전무님까지 내쫓을만한 능력을 지닌 분을 걱정해서 뭐 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상사가 될지도 몰라요.”“하하하. 그럼 회사의 능구렁이 같은 임원들이 가만히 있겠어요?”보광 그룹의 HR은 그들과 달리 성숙한 여성이었고 이름은 오수진이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화들짝 놀란 성연신은 컴퓨터에 대고 몇 마디 얘기한 후 회의를 마쳤다. 그가 다리를 꼬며 차분하게 물었다.“이유는?”“그건 잘 모르겠어요. 인사팀 얘기로는 심지안 씨가 출근 시간이 거의 될 때쯤에 출근 안 하겠다는 문자만 보내고 소식이 뚝 끊겼답니다.”성연신은 심지안이 아침에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춰보는 모습을 떠올렸다.“전화해봤대?”“했는데 꺼져있대요.”그녀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연신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사에 지원한 것도 그녀이고 갑자기 안 오겠다고 하는 것도 그녀였다.단지 표정만으로 대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던 정욱은 휴대 전화를 꺼내 실시간 검색어를 그에게 보여주었다.“다른 일이 하나 더 있어요. 아무래도 연봉기가 해고당한 게 억울한지 인터넷에 손을 쓴 것 같아요.”성연신은 기사를 대충 훑어보더니 십분의 일도 채 읽지 않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심지안 씨가 여론 때문에 안 온 거 아닐까요? 인사팀에서 심지안 씨네 집에 사람을 보내 상담해주는 건 어떤지 여쭤보더라고요. 어쨌거나 보광 그룹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보광 그룹이 필요한 건 프랑스어 통역사지, 심지안 씨가 아니야.”성연신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재면접을 보게 한 건 심지안 씨한테 기회를 준 거야.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몇몇 댓글 때문에 일자리를 포기한다면 멘탈이 너무 약해. 앞으로 함께 일을 하면서도 엄살을 부릴 수 있어.”지금 젊은이들은 성적이 조금만 높아도 제 분수를 모르고 높은 곳만 바라본다.정욱이 멋쩍게 물었다.“그럼 이 일은 신경 쓰지 말란 말씀입니까?”“그래. 평소 하던 대로 처리해.”그의 시선은 줄곧 컴퓨터 화면에만 머물러있을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오늘 회사에 별다른 일이 없어 성연신은 제시간에 퇴근한 후 별장으로 돌아갔다. 텅 빈 집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신발장에 놓여있는 여성용 슬리퍼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맨날 집에 있지도 않으면서 밥을 해주겠다고?’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던 성연신은 위층으로 올라가 샤
심지안이 아무런 표정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언니 엄마가 내연녀인 걸 알았을 때도 창피한 줄 모르더니만.”심연아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옷장을 어루만졌다.“너 기억나? 이 옷장 원래 내 방에 있던 건데 네 옷장이 더 이뻐 보여서 아빠한테 바꿔 달라고 했어. 이 집안의 모든 게 다 내 것인데 엄마가 내연녀면 뭐? 그래도 안주인이 됐잖아.”출발이 늦어도 충분히 다채롭게 살 수 있다.심지안의 어머니는 명문가의 규수였지만 심전웅과 함께하기 위해 부모님과 등까지 돌렸다. 그런데 결국 심전웅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고작 옷장 하나 빼앗은 거 갖고 우쭐거리기는.”심지안은 그녀를 한껏 조롱하며 웃었다.“옷장 얘기하니까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새 옷장이랑 낡은 옷장을 바꾸는 바보가 어디 있어.”그녀는 강우석 같은 인간쓰레기를 마치 보물인 것처럼 아꼈다.심연아의 낯빛이 사색이 되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가슴을 쭉 폈다.“자기가 가지지 못하니까 마음이라도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 알아.”“그딴 건 가지고 싶지도 않아. 언니랑 언니 엄마는 똑같아. 대놓고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지.”드디어 화가 난 심연아가 손을 들고 그녀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심연아가 손을 들 거라고 진작 예상한 심지안은 옆으로 피하면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세게 확 잡아당겼다.‘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 우르르 떨어졌고 심연아도 바닥에 넘어졌다.그녀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고 예쁜 원피스에도 먼지가 묻은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심연아가 목적에 달성했다는 듯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너 이제 끝났어.”그러고는 곧장 심전웅에게 고자질하러 달려갔다. 방을 나가면서 방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심연아가 나가는 동시에 심지안은 민첩하게 창문을 열었다. 일부러 심연아의 화를 돋우어 그녀가 나간 틈에 도망치려는 계획이었다. 바닥 잔디와의 높이가 약 3m 정도 되었다. 심지안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두 눈을 감고 펄쩍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