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의 모든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기에 조심하면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초보라 시윤은 여전히 걱정이 앞서 도준의 제안이 놀라 뒷걸음쳤다.“안 돼요. 그러다 절제력을 잃고 애 다치게 하면 어떡해요.”거리가 멀어졌지만 도준의 눈빛은 공격성을 띄고 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도준은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리며 점점 뒷걸음치는 시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있던 테이블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시윤은 얼른 경고했다.“함부로 굴지 마요. 여기 아래층이에요.”도준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시윤의 턱을 들어 올리며 허리를 숙이더니, 시윤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멈춰 선 채로 속삭였다.“지금 보니 엉큼한 생각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기인 것 같은데?”눈을 뜬 순간 도준의 장난기 섞인 눈과 마주치자 시윤은 화가 나 사람을 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도준을 밀어내고는 혼자 제 방으로 돌아갔다.‘사람이 진짜 너무하네. 어쩜 선물도 잊었으면서 놀리기만 하고.’시윤은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너 나중에 나오면 아빠 절대 따라 배우지 마. 아빠는 반면교사야.”한창 ‘태교’에 열중하고 있을 때 목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져 확인하니 목걸이였다.시윤은 고개를 숙여 정교한 목걸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체인에도 작은 다이아가 달려 있어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보석의 크기는 작은 체인 구멍에 딱 들어맞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반짝반짝 눈 부신 빛을 발산하고 잇었다.놀란 시윤은 이내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도준 씨가 산 거예요?”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당연한 거 아니야? 자기 목걸이 사면서 그 컵은 겸사겸사 산 거야. 누구 때문에.”시윤은 목걸이가 마음에 꼭 들었는지 기쁨을 숨기지 못했지만 애써 도도한 표정을 유지했다.“샀으면서 놀리긴. 진짜 못됐어.”응석을 부리는 듯한 귀여운 모습에 도준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
시윤은 얼굴부터 귀밑까지 화끈 달아오른 채 고개를 돌려 욕망 가득한 눈으로 저를 보는 도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그런데 도준 씨가 조절 실패로 애가 다치면 어떡해요?”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더니 시윤의 얼굴을 쥐고 제 쪽으로 돌렸다.“그럼 자기가 결정해. 강약 조절 자기가 하면 되잖아.”‘그럼...’시윤은 생각할수록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더니 나른한 손으로 도준을 밀어 버렸다.“나빴어.”도준은 시윤의 허리를 감싸며 저를 밀던 시윤의 손마저 함께 안아버렸다.“나 안 그리웠어?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싫어?”모두 성인 남녀인 데다, 그동안 진하게 몸을 섞었던 밤마저 떠올라 시윤을 완전히 욕망 속을 끌어내렸다.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시윤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그럼 제 말 들어야 해요. 너무 몰아붙이면 안 돼요... 아!”외마디 비명과 함께 시윤은 남자에게 번쩍 들려 어깨를 꼭 짚은 채 애써 중심을 잡았다.그때 아래에 있던 도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자기 말대로 하라는 거네.”도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자 그의 눈에 드리운 욕망이 훤히 보여 시윤은 실수로 늑대 굴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대에 도착한 시윤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커튼, 커튼 안 쳤어요”도준은 웃으며 시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급할 거 뭐 있어. 우선 자기 제대로 보게 가만 있어 봐.”아까 욕실에서 친 손장난 때문에 시윤의 옷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고, 평평하기만 하던 아랫배에 곡선이 보였다.도준이 제 아랫배를 빤히 쳐다보자 시윤은 왠지 부끄러웠다.“이젠 알리죠?”도준은 눈을 들어 시윤을 바라봤다.“응.”그 눈빛에 시윤은 가슴이 두근거려 한참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남자의 입술이 시윤의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에 떨어졌다.분명 민감한 부위가 아니지만 도준의 동작에 시윤의 심장도 따라 흔들렸다.“하지 마요...”도준은 저를 밀어내는
또 3개월이 지나자 두 사람이 몸을 섰는 횟수는 전보다 줄어 들었지만 전처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도준은 여전히 기력이 왕성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게을러졌다.5개월 되던 때 기형 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의사로부터 많이 운동하라는 권유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 낳을 때 힘들다면서.시윤은 움직이기 싫었지만 의사가 권유까지 한 데다 아이를 생각하니 결국 운동을 시작했다.10월의 날씨는 딱 적당했다. 이제는 너른 옷을 입어도 배가 불룩해진 모양이 제법 선명해져 겉에 면 소재로 된 원피스와 니트를 입으니 보온도 되는 동시에 포근한 인상을 주었다.도준과 처음 만났을 때 갖고 있던 풋풋함 대신 이제는 동작 하나하나에 여성미가 넘쳐 마치 오래 된 술 같은 느낌을 주었다.도준은 시윤의 단추를 제대로 채우며 물었다.“힘들어?”두 사람이 집에서 내려와 걸은 지 이제 5분이 지났는데 시윤은 이미 지쳤다. 하지만 아이를 생각하자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힘들어요. 허리 조금 욱신거리는 것만 빼면요.”“그럼 잠깐 쉬자.”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햇빛을 오래 받은 벤치에 앉자 따뜻하고 편안했다.시윤은 도준의 어깨에 기대 멀리서 공놀이하는 남자애와 미끄럼틀을 타는 여자애들을 바라보더니 문득 중얼거렸다.“우리 애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네.”“알고 싶어?”도준이 고개를 돌렸다.“응? 혹시 알아요?”“알아.”시윤은 놀라운 듯 따져 물었다.“알면서 왜 말 안 했어요?”그러자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자기가 서프라이즈를 원한다며?”“그건 우리한테 서프라이즈였으면 좋겠다는 거지. 전 모르고 도준 씨만 아는 걸 말한 게 아니라고요. 게다가 이건 내 배인데 도준 씨만 알고 저는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알고 싶다면 알려 주면 되잖아.”도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도준 씨는 몰라요.”도준과 말다툼하려던 그때, 시윤은 갑자기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도준도 잔뜩 놀라 기색을 하고 있는 시윤을 보자
늦은 밤.시윤은 침대에서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저 준비됐어요.”그러자 도준이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우리 애...”“잠깐만요!”시윤은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여 갑자기 도준의 말을 끊었다.“이러는 거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잖아요.”도준은 시윤의 말에 피식 웃었다.“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알려주는데 낭만이 뭐가 필요해?”“하... 도준 씨는 몰라요!”“그럼 내가 좀 아는 거로 얘기해 봐. 어떻게 할까? 폭죽이라도 터뜨릴까? 아니면 파티라도 주최해?”“그렇게 복잡한 거 말고, 그냥 기록만 하면 돼요.”시윤은 말하다가 아이디어가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도준을 찍기 시작했다.“됐어요. 말해 봐요.”“남자애야.”답을 들은 순간 시윤의 얼굴에 드리웠던 부드러움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지어 딸에게 공주 치마를 입히려던 꿈이 산산조각 났다.‘이러다가 아들이 도준 씨를 닮기라도 하면 어떻게 감당하지? 이거 큰일이네.’...아이가 나날이 자랄수록 시윤의 몸도 점점 무거워졌다. 원래 가늘던 다리도 부종이 생기기 시작했고 매일 밤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특히 7달이 되었을 때부터는 허리에 쿠션을 받히고 자야 했고, 자다가 일어나는 횟수도 많아졌다.잠귀가 밝은 도준은 시윤이 뒤척일 때마다 눈을 떠 불을 켜고 화장실까지 함께 가주곤 했다.곁에 함께 있으려고 경성과 해원을 쉴 새 없이 오가고, 매일 밤 저 때문에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도준을 보자 시윤은 마음이 아팠다.그리고 오늘 시윤은 도준이 저를 위해 정리해 놓은 방을 보며 풀이 죽어 말했다.“아니면 우리 따로 잘까요? 저 때문에 자꾸 깨면 피곤하잖아요.”“나 혼자 자면 추 위 타.”그 말에 시윤은 피식 웃으며 입을 삐죽거렸다.“거짓말.”도준은 시윤을 품에 안은 채 시꺼메진 그녀의 눈 밑에 입을 맞췄다.“이 애만 낳고 낳지 마. 힘들잖아.”그러자 시윤도 눈을 스르르 같으며 중얼거렸다.“그러니까요. 너무 힘들어요. 이게 다 도준 씨 때문이에요.”“그래,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충성심이 없는 개하고 잘될 거 뭐 있어?”“왜 꼭 그렇게 말을 고약하게 해요?”두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은 터라, 저와 도준보다도 힘들었다는 걸 아는 시윤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하, 그래도 두 사람 사귀는 건 좋은 일이네요.”동정심이 발동한 시윤을 보며 도준은 비웃는 대신 손을 들어 그녀의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나 없는 이틀 동안 밖에 나가지 마. 내가 돌아오면 같이 산책하자.”“네.”시윤은 애틋하게 제 고개를 도준의 어깨에 기댔다.다음날.도준이 깨어났을 때 시윤은 여전히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도준이 몸을 숙여 시윤의 얼굴에 입을 맞추자 시윤은 불편한 듯 그를 뿌리쳤다. ‘양심 없기는.’도준은 화가 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어제는 헤어지기 싫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하루 지나니 싫어하네.’하지만 시윤이 어제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걸 봐서 도준은 이불을 꼭 덮어주고는 시윤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내가 꼭 기억하고 있겠어.”오전 10시.눈을 떴을 때 옆이 텅텅 비어 있자 시윤은 깨어날 기운조차 사라졌다. 결국 양현숙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끌어내서야 겨우 점심을 먹었다.그렇게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윤영미가 허리 디스크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상태가 심각하여 함께 가지 않겠냐는 수아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윤영미는 은사일 뿐만 아니라 인생 선배이기에 가야 하는 건 당연했다....병실에 누워 있는 윤영미는 많이 초췌해 보였다.60도 넘은 나이에 평생 결혼하지 않아 아이도 없어 병상 주위에는 온통 학생들뿐이었다. 비교적 늦게 도착한 시윤에게 남은 건 문 쪽에 위치한 자리뿐이었다.하지만 시윤이 들어서자마자 윤영미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이제 배가 불러왔는데 밖엔 왜 나왔어? 누가 너한테 이른 거야?”병상 옆에 서 있던 수아는 그 말에 이내 친구의 뒤로 몸을 피했다.시윤도 따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쌤 보고 싶어서 왔죠.”“난 아주 잘 있으니 볼 거
레스토랑에 도착한 뒤, 태준은 불편하게 앉은 시윤을 보자 얼른 웨이터에게 쿠션을 부탁했다.이에 시윤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쿠션을 받아 자리에 앉고는 습관적으로 배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에는 이미 어머니의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태준은 그런 시윤을 한참 응시하다가 싱긋 웃었다.“7, 8개월 됐겠네요?”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7개월이야.”“아들이에요? 딸이에요?”“아들.”“아들이면 다루기 어렵겠는데.”“그러니까.”시윤은 눈을 내리깔며 제 배를 바라봤다.“아빠를 조금만 닮으면 감사할 따름이지.”물론 입으로는 원망하는 듯했지만 태준은 시윤의 표정에서 그녀가 얼마나 기대하는지 보아낼 수 있었다.이윽고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난 내가 아름이 보살핀다는 말 들으면 윤이 씨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태준 씨는 아름 씨 오빠잖아. 보살피는 건 당연하지.”부드럽고 다정해진 시윤의 얼굴을 본 태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축복이라도 하는 듯 입을 열었다.“행복한 것 같네요.”“응.”시윤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너무 행복하기에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원망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까 태준이 아름의 얘기를 꺼냈을 때도 마치 지난 생에 벌어진 일인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시윤은 제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완화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말 하면 웃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배 속에 새생명이 자라나고 있지만 왠지 우리 아이가 생긴 게 오히려 나한테 새 생명을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지난 일에 미련도 없어졌고.”태준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깐 멈칫했다.“하긴, 지난 일은 다 털어버려요.”시윤은 태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뭐든 복잡하게 생각하는 버릇도 이미 버린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은 두려울 게 없으니까. 게다가 도준이 저에 대한 사랑을 더 이상 의심하고 싶지 않으니까.어찌 보면 지난 몇 년 동안 시윤은 한 번도 도준을 솔직하게 대하지 못했다. 본인
뒷좌석에 앉은 시윤은 아름이 차에 오른 순간 바로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시윤은 도준과 대화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아름을 설득했다.“공아름, 지금 나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안 본 지 2년 사이, 아름은 아름답던 모습이 사라지고 무서울 정도로 비쩍 말라 있었다. 나뭇가지처럼 여윈 손은 그동안 잘 케어 받았던 예쁜 손이 더 이상 아니었다. 심지어 손목에 그어진 몇 줄의 흉터는 보기에도 섬뜩했다.원래의 아름도 극단적이긴 했지만 지금은 마치 광증을 가진 여자에 가까웠다.백미러로 시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아름은 시윤의 불러 오른 배를 본 순간 눈에 독기가 서렸다.“당연히 널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거지.”독기 서린 아름의 말에 시윤은 소름이 돋아 손으로 제 배를 감싸면서 여전히 통화 중인 핸드폰을 바라봤다. 지금으로써 도준이 통화 내용을 듣고 저와 아이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아름은 잔뜩 긴장한 시윤을 보며 병적으로 크게 웃었다.“하하하, 왜? 무서워? 하긴, 넌 가진 것도 많으니까 잃는 게 두렵겠지. 그런데 난 아무것도 없어! 공씨 가문도 무너졌고, 네가 나한테서 도준 씨도 빼앗아 갔잖아.”“우리 오빠도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집에 가둬놓고 내보내지 않았어! 내가 단식하든 자해하든 못 본 척했다고. 내가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날 병원으로 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그럼 난 평생 집에 갇혀 살아야 했을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구구절절 말하는 아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그러다가 마치 화를 풀기라도 하듯 엑셀을 쾅쾅 밟으며 속도를 점점 올리기 시작했다.점점 빨라지는 차 때문에 시윤은 눈꺼풀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지만 차 문손잡이를 잡고 중심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그제서야 도준이 저를 구하기를 기다리는 걸 기다리면 늦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시윤은 스스로 자신을 구하려고 방법을 물색하더니 아름과 대화를 시도했다.“공태준이 네 병을 치료해 주려는 것도 널 관심해서 그
아름은 순간 설레어 차 속을 늦추었다.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내가 왜 이러는지 묻지도 않는 걸 보니 날 믿지 않는가 보네? 내가 지금 널 속인다고 생각해?”태준이 멀리 가지 않기를 바라며 문자로 도움을 청하던 시윤은 아름의 말을 듣자 대충 대답했다.“아니, 믿어. 도준 씨 같은 사람이 날 사랑할 리 없잖아. 그냥 잠시 재미 보려는 거겠지. 지금 마침 나한테 재미를 잃은 것 같으니까 가서 꼬셔봐. 바로 넘어갈지 누가 알아. 나한테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잖아.”“하하하...”아름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멍청할 줄 몰랐네. 정말 민도준이 너를 솔직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목숨 걸고 구해준 것도 정말이라고 믿는 거야?”시윤은 속으로 어이없었지만 겉으로는 아름에게 맞춰 연기를 했다. 그도 그럴 게, 그러지 않으면 아름이 엑셀을 밟아 속도를 미친 듯이 높일까 봐 무서웠으니까. 시윤은 심호흡을 하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뭐야? 도준 씨가 날 구해준 걸 네가 어떻게 알아?”아름은 이를 갈았다.“당연히 우리 오빠 덕이지. 오빠가 이성호의 부탁을 받고 그 폭발 사고가 진짜인지 조사했더라고. 역시 하늘은 내 편인지, 내가 마침 그 대화를 들어버렸지 뭐야.”아름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윤은 그 순간 아름의 말이 진짜라고 생각돼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가 공태준에게 부탁했다고?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흥분하면 할수록 아름의 표정은 점차 광기가 차 넘치더니 시윤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나도 공태준이 그렇게 바보 같은 줄은 몰랐어. 기회가 찾아왔는데 알려주지도 않다니. 그런다고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봐. 네가 그런다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나? 꿈 깨라 그래! 내가 그 가면을 벗길 거거든. 민도준한테도 내 진심을 알릴 거고.”마지막 한 마디를 마치자마자 아름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끼익-“곧이어 타이어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귀청 찢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