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은 벌써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도준의 장난기 섞인 말에 당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윽고 그게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 삐진 듯 투덜댔다.“벌써 도준 씨를 잊었는데 어떻게 보고 싶을 수가 있어요?”도준은 몇 번 웃더니 시윤에게 바싹 다가갔다.“도윤이 엄마도 나 안 잊었는데, 도윤이가 어떻게 날 잊어? 그거 뭐였더라? 모전자전이란 말도 있잖아.”말로는 한 번도 도준을 이긴 적 없는 시윤은 아예 그를 무시했다.그때 도준이 도윤을 품에 안은 채로 시윤을 빤히 바라봤다.“아직도 약 먹고 있어?”시윤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이제 끊었어요. 나 쌤이 두 달 전에 이제 상태가 안정됐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먹을 필요 없어요.”사실 이 모든 걸 도준은 진작 석훈한테서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윤한테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그도 그럴 게, 시윤이 그렇게 미쳐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도준의 관심에 시윤도 예의상 반문했다.“요즘 잘 지내요? 소식도 없던데.”“응. 자기랑 우리 아들 위해 일하느라 바빠.”도준은 그룹 지분을 모두 시윤에게 넘겼기에 이 말도 어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하지만 시윤은 그 말이 불편했는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아직 이혼 서류에 사인도 안 하는데, 저를 위해 일한다고 할 순 없죠.”말을 마친 순간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져 시윤은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 그때, 도준의 뜨거운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그제야 시윤은 방금 제가 한 말이 화해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걸 인지하고 바로 설명했다.“전 그런 뜻이 아니라...”“쉿.”도준은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나 지금 무척 기뻐. 자기가 설명하고 나면 나 기분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설명하지 마.”그 말에 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사람이 왜 이래요? 어떻게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해요?”도준은 시윤의 성화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우리 아들 태어난 데 나도 한몫했잖아
시윤은 이번에 교훈을 삼았는지 빠른 속도로 손을 넣어 단번에 물건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손에 쥐어진 물건을 본 순간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이거 뭐예요?”시윤이 꺼낸 물건은 다름 아닌 작은 시계였다. 물론 정교한 디자인이긴 했지만 여주 여성스러워 도윤이 하기에는 조금 어색할 수 있었다.결국 그 선물에 시윤은 실망하고 말았다.‘아무리 도윤한테 감정이 별로 없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본인 지식인데. 첫돌 생일 선물을 어쩜 이렇게 대충 고를 수 있지?’잔뜩 찌푸린 시윤의 표정만 봐도 그녀가 적잖게 화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윤의 괴상야릇한 목소리가 이내 들려왔다.“고마워요. 도윤이한테 어울리지 않는 것 빼고는 괜찮네요.”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더니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응. 원래 도윤이 거 아니야.”“그럼 누구 건데요?”“자기 거.”시윤은 잠깐 어리둥절했다.“저요? 오늘 도윤이 생일인데.”“자기가 도윤이 낳은 날이기도 하잖아.”도윤은 시윤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도윤이는 선물 많이 받았는데 자기만 못 받았잖아.”왠지 모르겠지만 분명 특별할 것 없는 말이었지만 시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도윤이 아들이라 시윤은 당연히 아들한테서 선물을 뺏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특별한 날 선물 하나는 저한테 차려진다는 게 왠지 대접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시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도준은 유혹하듯 속삭였다.“열어 봐.”시윤은 고분고분 시계 뚜껑을 열었다. 시계 안쪽에 그들 세 식구의 사진이 찍혀 있었는데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생동감이 넘쳤다.도준은 도윤을 한 순으로 안아 들고 시윤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이 시계는 도윤이가 태어나던 날 만들어진 거라 도윤이랑 동갑이야.”“정말요?”“응, 정말.”시계는 원래도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만 가격이 이런 특별한 의미보다 중요할 리는 없었다.사람은 물론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기록할 수는 있다. 시윤도 도윤의 엄마가 된
도준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시윤은 등골이 오싹해 피하는 것조차 잊었다.그동안 참아 온 도준은 코끝을 시윤의 몸에 대고 향기를 맡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려 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윤은 다급히 도준을 밀어냈다.“안 돼요. 저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어요.”입가에 있던 고기가 도망치자 도준은 아쉽다는 듯 혀끝으로 뺨을 꾹 밀며 욕망을 애써 억눌렀다.“그래, 결정할 때까지 기다릴게.”도준의 의외의 대답에 시윤은 놀랍기만 했다. 시윤의 인상 속에 도준은 항상 횡포하고 막무가내라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다.시윤은 의아한 듯 도준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그가 무슨 여지를 남겨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자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계속 나 그렇게 보면 유혹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그제야 고개를 숙인 시윤은 도윤을 안아오려고 팔을 내밀었다. 그제야 도윤이 벌써 잠들었다는 걸 발견하였다.잠이 든 도윤은 아기 천사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했다.그걸 본 시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이리 줘요, 살살.”도준은 고분고분 도윤을 넘기자 시윤은 조심히 받아 안았다. 지난 1년 동안 도윤을 기르다 보니 이제는 아이 안는 자세가 제법 익숙해졌다. 등을 토닥여주고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지자 시윤은 도윤을 침대에 내려놓고 옆에 있는 담요로 주위를 둘러 작은 ‘둥지’를 만들어 주었다.그러고 나서 도윤에게 이불을 덮어주자 곧바로 뒤에서 도준이 시윤을 안았다.조금 높은 남자의 체온이 등 뒤에서 느껴지더니 익숙하고도 힘 있는 팔이 시윤의 허리를 감쌌다.익숙한 온기에 시윤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 말까지 더듬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도준은 귀까지 빨개진 시윤을 보며 등 뒤에서 피식 웃더니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아들 보고 있어.”하지만 그걸 믿을 시윤이 아니었다.“아들 보는데 나는 왜 안고 그래요?”도준은 허리를 숙여 시윤에게 꼭 붙더니 입술로 시윤의 귀를 스치며 말했다.“도윤이 깰까 봐 작
한참 동안 대꾸가 없자 진태섭은 종업원이 실수로 길을 잘못 안내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돌아서려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하지만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건 귀염둥이 증손주가 아니라 그늘진 얼굴을 한 손주였다.진태섭은 흠칫 놀라 대뜸 물었다.“도준이? 네가 어떻게 여기...”그때 정은숙이 마침 손주 목덜미에 난 손톱자국을 보더니 진태섭을 잡아끌었다.“됐어, 그만해. 도준이도 시윤이랑 할 얘기가 있나 보지. 우리도 얼른 자리 비켜주자고.”진태섭은 여전히 증손주 얼굴이 보고 싶었는지 연신 뒤를 돌아봤다.“우리 어쩌다가 증손주를 보는데...”“도준이 우리 손주며느리랑 다시 합치면 증손주는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거잖아.”“그렇네. 당신 말이 맞아!”“...”도준이 방에 다시 들어왔을 때, 시윤은 이미 옷을 정리한 상태였다. 물론 얼굴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그 모습에 도준은 아쉬운 듯 다가가 시윤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무슨 옷을 그렇게 빨리 입어?”방금 도준에게 홀려 진태섭 정은숙 부부가 아니었다면 흐지부지한 상태로 도준과 관계를 가질 뻔했다는 생각에 시윤은 화가 나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준은 두 손을 들며 말했다.“내가 잘못했다.이윽고 시윤이 화를 내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만지더니 허리를 숙여 시윤을 응시했다.“내가 너무 급했어. 기분 나빴다면 자기도 나 마음대로 만져.”“누가 만지겠대요?”시윤은 도준의 손을 뿌리쳤다.도준은 싱긋 웃을 뿐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고 시윤의 손을 꼭 잡고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난 이만 가볼게. 결정 내리면 찾아와.”그 말에 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요.”전에 시윤은 줄곧 당시의 진실을 알아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도윤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데다 본인의 상태도 좋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그런데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그 이혼 합의서에 사인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하고....돌잔치가 끝난 지 사흘째 되던
수인은 꼬았던 다리를 이내 가지런히 모았다.“엥? 그때 겪은 일이라니요? 그때가 어느 때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아니면 우리 국민이 일어난 그해?”시윤은 농담하는 수인을 빤히 바라봤다.“수인 씨도 제가 어느 때를 말하는지 알잖아요.”시치미를 떼던 수인은 그제야 다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의자에 기대 차를 마셨다.“나한테 묻기보다는 한민혁한테 묻는 게 나을 텐데요.”시윤은 창 밖을 내다봤다. ‘지난번에 수인 씨한테 도준 씨에 대해 물을 때도 이맘때였는데.’속으로 생각하던 시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수인 씨와 도준 씨는 모두 연기했잖아요. 저와 민혁 씨는 그 관중이고.”수인은 피식 웃었다.“음, 총명하네요. 그래요. 이왕 들켰으니 더 이상 아닌 척하지 않을게요. 저 확실히 도준을 도와 연기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만 보면 안 돼요.”수인은 낡은 코담배병을 위로 뿌리며 말했다.“제가 그때 말한 거 다 사실이에요. 그때 미리 경고했었죠. 만약 정말 마음 돌릴 생각이 있다면 사실대로 말해주겠다고. 그 말에 윤이 씨도 넘어왔고. 만약 그때 윤이 씨가 더 단호했다면 윤이 씨한테 도준이 치료받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해원으로 데려다줬겠죠.”그날 수인이 했던 경고가 그저 본인에게 고민할 선택권을 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고 시윤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때 수인이 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상대가 그 연기에 빠져야 하잖아요.”‘그러니까 내가 함정에 스스로 빠졌다는 거네?’시윤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그럼 도준 씨가 정말 아팠던 거 맞아요?”수인은 턱을 받치며 시윤을 바라봤다.“이것 봐요, 질문도 어쩜 민감한 것만 골라 해요? 좀 더 부드러우면 좀 좋아요? 뭐, 윤이 씨가 이렇게 거친 걸 좋아한다면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수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도준이 아픈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에요. 그저 그 병이 오히려 본인한테 더 유리하단 뿐이었지. 도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수인을 빤히 바라봤다.그러자 수인은 제 눈을 가렸다.“이러지 마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미인한테 약하단 말이에요.”“하, 그래요, 알았어요. 제가 졌어요.”수인은 그제야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꺼냈다.“사실 시윤 씨가 경성에 공연하러 왔을 때부터 함정에 빠진 거예요.”시윤은 어리둥절했다.“네?”“윤이 씨가 강의하러 갔던 학교가 왜 마침 한수진네 학교였겠어요? 그것도 사실 도준 그 여우놈이 계획한 거예요. 자기가 계속 몰아붙이면 윤이 씨가 멀리 도망갈 걸 아니까, 일부러 이미 변심한 듯 경계를 풀게 만들고 천천히 함정으로 유혹한 거라고요. 그날 윤이 씨가 도준의 치료 과정을 보게 된 것도, 모두 도준이 계획 중 일부분이었어요.”진작 짐작하긴 했어도 직접 들으니 시윤은 등골이 오싹했다.“이게 모두 나석훈 쌤이 계획한 거예요?”“음, 그건 아니에요. 나석훈 쌤은 적어도 도덕은 있거든요. 이런 계획을 꾸민 건 당연히 도준이죠. 나 쌤은 윤이 씨에 대해 한마디만 했을 뿐이에요.”수인은 곧이어 석훈의 말투를 따라 했다.“심리 상담사로써 저는 제 일을 걸고 그렇게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한마디만 해주자면, 시윤 씨는 아직 민 사장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시윤 씨의 마음을 돌리려면 계속 밀어붙이기보다는 스스로 접근하도록 유인하세요.”양심은 있지만 그렇게 많지 않은 건 분명했다.시윤은 그 말에 오히려 살짝 안도했다. 사실 시윤은 가장 안 좋은 상황까지 생각했었다. 도준이 처음부터 진심은 조금도 없이 낯선 사람의 계획대로만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 하지만 나석훈은 그저 밀어붙이지 말라고 제안했다는 말에 시윤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수인은 그런 시윤의 반응을 관찰하더니 물었다.“화 안 나요?”“별로요.”그 말에 수인은 놀란 듯 대꾸했다.“와, 대박. 윤이 씨 인내심 진짜 많네요.”시윤은 덤덤하게 웃었다.“그러니까 그 폭발 사고도 도준 씨가 계획한 거라는 거죠?”가장 중요한 포인트
시윤은 수인의 말에 멍해졌다.“그러니까 제가 고마워할 길 바라서 일부러 폭발을 계획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너무 어처구니없는 추측에 수인은 웃음을 터뜨렸다.“아이고, 윤이 씨, 도준 성격 몰라서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누가 윤이 씨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면 걔는 그 사람 바로 죽일 거예요. 연료를 미리 바꿔치기한 것도 원혜정의 속을 하도 알 수 없어 계획대로 하지 않을까 봐 손 써둔 거고요. 만약 원혜정이 윤이 씨를 그쪽으로 데려가지 않고 죽이고 시체를 유기라도 하면 어떡해요.”‘그러니까 도준 씨가 일부러 원혜정한테 협조해 주겠다고 딜을 하고 본인을 함정으로 밀어 넣을 기회까지 줬다는 거네?’그때 수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도준이 윤이 씨 속인 건 그 일로 의식을 잃고 난 뒤예요. 그 자식이 사실 금방 깨어났거든요. 그런데 윤이 씨 마음 돌리려고 의사랑 짜고 연기한 거고요. 뭐, 그 덕에 윤이 씨를 손에 넣긴 했지만.”도준이 의식을 잃은 줄 알고 애간장이 무너졌던 때와 도준이 깨어났다고 생각해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시윤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그러니까 도준 씨가 날 속인 건 사실이네? 오빠 추측이 맞았어. 그런데 난 도준 씨한테 눈이 멀어 오빠한테 그런 심한 말까지 하고.’그때를 떠올리자 시윤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하지만 시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수인은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도준 그 자식의 원래 계획은 두석달 정도 누워 있으며 윤이 씨한테 겁도 주고 애 지울 수 없게 시간 끌려는 거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생각을 바꿨더라고요.”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제가 아빠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 연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나 보죠.”“아,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윤이 씨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간 거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윤이 씨는 평생 그 자식한테서 못 벗어나요.”한참 동안 말하던 수인은 들리지 않는 대답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
그 말에 수인은 멍하니 시윤을 바라봤다.시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도준 씨가 저한테 잘해주는 건 맞아요. 저를 사랑해 주기도 하고. 귀찮은 것도 마다하고 기분도 풀어주고 달래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거 알아요? 도준 씨가 저 달랠 때는 매번 제가 고통스러워할 일을 저지르고 난 뒤예요. 그러고는 자세를 낮추고 제 기분을 맞춰주는 것처럼 굴어요. 이번 일도 그렇고, 공은채 일도 마찬가지고, 비행기 사고 때도, 그 뒤 모든 일이 그랬어요...”“수인 씨, 저는 그저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갖고 싶은 것뿐이에요. 도준 씨가 벌인 일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알겠어요?”“...”수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멀리 떠나가는 가냘픈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쉴 뿐.이윽고 수인은 뒤돌아 베란다 문을 열더니 밖을 보며 말했다.“너도 들었지?”찬 바람 속, 늘 거만하기만 하던 남자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그늘져 있었다.밖에 너무 오래 서 있은 탓에, 안으로 들어윤 도준의 주위에 한기가 맴돌아 수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이윽고 문을 닫고 얼른 도준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난 할 말 다 했어. 그런데 윤이 씨 많이 변한 것 같더라. 전에는 헤어지겠다고 말해도 여전히 너한테 미련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나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도준은 뜬금없이 피식 웃었다.“그러게. 많이 성장했어.”그 미소를 본 수인은 소름 돋는 듯 몸을 떨었다.“너 웃음이 나와?”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던 도준은 그 말에 눈을 들며 수인을 바라봤다.“네가 그렇게 울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그 순간 ‘쿵’하는 수리와 함께 수인이 평소 가장 아끼던 코담배병이 바닥에 떨어졌다.“아아아! 우리 아가!”완전히 무너진 수인과 달리 도준은 여전히 느긋하게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내 마누라랑 원나잇하고 스릴감 느끼고 싶다며? 지금 어때? 스릴 넘치지? 짜릿하지?”수인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