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하나.
둘.
셋.
여러 명이었다. 해린이 낮게 말했다.
“경찰?” 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요?” “경찰이면 이렇게 조용하지 않아.” 그가 녹음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해린의 손목을 잡았다. “가요.” “어디로?”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나 혼자 도망치면…” “혼자 안 둡니다.” 태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이번엔 내가 데리고 나가요.” 문밖에서 누군가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태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해린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잠깐.”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 순간 태준은 이미 반대편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었다.“뛰어요.” 둘은 계단을 내려갔다. 해린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강태준, 당신 진짜…” “칭찬은 나중에.” “누가 칭찬한다고..” “네, 알아요.” 태준이 웃었다. “그래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정말 재수 없네.” “그 말 들으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해린이 피식 웃었다. 그때 위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찾았다!” 태준이 해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빨리.” 지하 주차장. 두 사람은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해린의 숨이 가빠졌다. 태준은 그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조용히.” “알아요.” “숨소리도 줄여요.” “그게 마음대로 돼요?”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게요.” 그의 손이 해린의 허리에 닿았다. “내 앞에서는 자꾸 마음대로 안 되네요.” 해린이 눈을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 잠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태준의 손이 허리에서 천천히 내려가려다 멈췄다. 그는 스스로 거리를 조금 벌렸다. “……미안.”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왜요?” “지금은 당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인데.” 그가 낮게 말했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 해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도 그런데.” 태준이 멈췄다. “뭐라고요?” 해린이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못 들었어요?” “다시.” “싫어요.” “해린.” 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읊었다. 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그렇게 불러요.” “이름 부르면 안 됩니까?” “그렇게 부르면.”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상하게 들려요.” “어떻게?”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말해봐요.” “싫어요.” “왜.” “당신한테 알려주기 싫으니까.” “그럼 내가 알아낼게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해린도 피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 멀리서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태준이 작게 욕설을 삼켰다. “이거 정말 타이밍이…….” 해린이 웃었다. “아쉽죠?” “엄청.” “변호사답지 않네요.” “당신 앞에서는 원래 그렇습니다.” 태준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차 쪽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순간. 해린이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태준이 말했다. “한 가지 약속해요.” “뭔데요?” “내가 뭐라고 하든 오늘은 내 옆에 있어요.” “명령이에요?” “부탁.”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태준은 평소와 달랐다. 장난기가 없었다. “당신이 잡혀가면 내가 변호인으로 들어갈 겁니다.” “알아요.” “그런데 체포되기 전에 우리가 찾아야 할 게 있어요.” “1703호?” “아니.”
태준이 녹음기를 들어 보였다. “이걸 설치한 사람.” 해린이 잠시 생각했다. “호텔 직원?” “아마 아닐 겁니다.” “왜?” “녹음기 설치 위치를 봐요.” 그가 장치를 뒤집었다. 뒷면에 작은 각인이 있었다. 해린의 눈이 커졌다. “이거…….” “알겠죠?” “윤상혁 재단 로고.”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죽은 윤상혁. 그의 재단. 그리고 1703호. 해린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윤상혁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은 모릅니다.” “그런데?” “확인하러 가야죠.” “어디로?” 태준이 시동을 걸었다. “윤상혁의 묘.”
***
새벽 4시 12분. 차가 공동묘지 입구에 멈췄다. 해린이 창밖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왜 온 거예요?” “사망 기록부터 확인하려고요.” “무덤을?” “정확히는 묘비.” 태준이 차에서 내렸다. 해린도 따라 내렸다. 두 사람이 어두운 길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상혁의 묘가 나타났다. 태준이 손전등을 비췄다. 그리고 멈췄다. 묘비 아래쪽에 작은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해린이 몸을 숙였다.“이거…….” 금속판에는 숫자 네 개가 새겨져 있었다. 1703. 해린이 태준을 바라봤다. “이게 왜 여기 있어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묘비 옆 흙을 살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 최근에 열었어요.” “뭐를?”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묘.”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 태준이 흙을 손으로 조금 걷어냈다.그 아래. 작은 검은 상자가 나왔다.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사진 한 장과 USB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진을 본 순간.해린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사진 속에는.
2012년의 어린 해린.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윤상혁. 그런데 사진의 뒷면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밤, 강태준도 함께 있었다.’
해린의 손끝이 굳었다.
“……말도 안 돼.” 태준이 사진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리고 뒷면을 확인했다. 그 순간. 해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당신들이 묘에 도착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 [그리고 강태준이 아직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해린이 천천히 태준을 바라봤다. 태준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2012년, 차해린을 처음 윤상혁에게 데려간 사람은 강태준의 아버지였습니다.] 정적. 태준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굳었다. 해린이 아주 천천히 물었다.
“……당신 아버지?”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낮게 말했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야.” 그 순간. 묘지 뒤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강태준.” 낯익은 목소리였다. 최도윤이었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야 기억나나 보군.”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뭘.” 최도윤이 해린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왜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렸는지.” 잠시 침묵. 그리고.
“그건 우연이 아니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최도윤이 USB를 가리켰다.
“그 안에 당신들이 처음 만난 날의 원본 영상이 들어 있습니다.” 태준의 손이 USB를 움켜쥐었다. 최도윤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영상에는…….”
그가 태준을 바라봤다. “당신 아버지가 나옵니다.”
오후 세 시 십 분.해린은 도하가 보내 준 주소 앞에 도착했다.소속사 건물도, 경찰서도 아니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공유 오피스였다. 출입문 옆 안내판에는 여러 회사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지만, 도하가 만나자고 한 곳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해린이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변호사님.”고개를 들자 검은 모자를 눌러쓴 도하가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평소 촬영장에서 보던 화려한 모습과는 달랐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조금 수척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해린은 그를 가만히 살폈다.“잠은 좀 주무셨어요?”“네. 뭐… 조금요.”“조금이라는 게 몇 시간인데요?”도하가 웃었다.“변호사님은 꼭 그런 걸 물어보시더라.”“잠을 제대로 못 자면 판단력이 떨어지니까요.”“그럼 오늘은 판단력 좋은 사람을 데려왔어야 했는데.”“이도하 씨.”“네. 잘 잤습니다.”그제야 해린이 작게 웃었다. 도하는 그 웃음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젯밤, 자신을 안아 주던 사람. 오늘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안부를 물어 주는 사람.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당연히 변호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도하는 그 다정함 앞에서 자꾸만 기대를 품으려 했다.그는 시선을 돌렸다.“안으로 들어가시죠.”작은 회의실에는 노트북과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도하는 문을 닫은 뒤 해린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오늘 전무님을 만나고 왔습니다.”“윤정식 전무님이요?”“네. 제 일정 관리 시스템을 변경한 건 전무님이 승인한 일이더군요.”해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변경 이유는요?”“해외 제작사와 협업하기 위해 일정 공유 범위를 넓혔다고 합니다.”도하는 화면을 해린 쪽으로 돌렸다.“그런데 여기 보시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해린은 화면을 자세히 살폈다. 일정 공유 요청서. 승인 기록. 외부 협력사 담당자 목록.서류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요청서에 기재된 담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해린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태준 씨?”“일어났어요?”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태준은 이미 깨어 있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됐어요.”“왜 안 깨웠어요?”“자는 얼굴이 예뻐서.”해린이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아침부터 그런 말 하지 마요.”“왜요. 사실인데.”태준이 웃으며 이불 위로 드러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해린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오늘 출근해야 하잖아요.”“알아요.”“그럼 일어나요.”“5분만 더요.”“어제도 그런 말 했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태준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해린은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평범한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일이 좋았다.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특별한 사건 없이도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태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오늘 저녁에도 같이 먹어요.”“약속 있어요?”“없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는 거죠.”“제가 늦으면요?”“기다릴게요.”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해린은 그 말이 좋으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어제 도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태준은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보다 먼저 안아 주었고, 힘들었겠다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자신은 그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태준 씨.”“네.”“고마워요.”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갑자기요?”“그냥요.”“그럼 저도 고마워요.”“뭐가요?”“제 옆에 있어 줘서.”그는 해린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그러니까 오늘도 무사히 다녀와요. 저녁에 봐요.”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해린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향을 맡았다. 태준이 쓰는 우디 계열의 향수. 그리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왔어요?”소파에 앉아 있던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노트북을 보고 있던 그는 해린을 발견하자마자 화면을 덮었다.“아직 안 잤어요?”“해린 씨 기다렸는데요.”“늦는다고 연락했잖아요.”“알아요.”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기다리고 싶었어요.”별것 아닌 말인데도 해린의 마음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오늘 하루, 도하의 무너진 얼굴을 마주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일까. 자신을 향해 아무런 의심 없이 웃어 주는 태준을 보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해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태준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요.”“왜요?”“안아 주려고요.”해린은 작게 웃었다.“그런 걸 꼭 말해야 알아요?”“말 안 하면 안 와 줄 것 같아서요.”그 말에 해린이 먼저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태준의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체온이 온몸을 감쌌다. 해린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늘 힘들었어요?”그 질문에 해린은 눈을 감았다.“조금요.”“조금 아닌 것 같은데.”“…많이요.”솔직하게 대답하자 태준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그럼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저녁도 안 먹었는데요.”“제가 해 줄게요.”“태준 씨가요?”“왜요. 저 요리 못 할 것 같아요?”“솔직히 조금요.”태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사람을 뭘로 보고.”“유능한 변호사?”“그건 맞는데.”그가 웃으며 해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오늘은 유능한 남자친구도 좀 해 봅시다.”해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를 들은 태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루 종일 그녀가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웃게 해 주고 싶었다.그는 해린의 뺨을
“제가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도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해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누구를 만나러 가시는데요?”“…오래 알고 지낸 사람입니다.”“혹시 공범인가요?”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방금 도착한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민석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심지어 테이블 위에 놓인 손까지 선명했다.차이점이 있다면 단 하나. 그 남자는 도하가 지금껏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이도하 씨.”해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혼자 가시면 안 돼요.”“괜찮습니다.”“괜찮은 사람 목소리가 아닌데요.”그 말에 도하는 눈을 감았다. 해린은 늘 그랬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넘어갈 법도 한데,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그의 빈틈을 찾아냈다.그런 그녀에게조차 지금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변호사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말씀하세요.”“제가 확인할 때까지 오늘 받은 사진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 하나 할게요.”“네.”“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세요.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요.”도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약속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서늘해졌다.서강현. 도하가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곁을 지켜 온 매니저. 처음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부터 함께했고, 아무도 도하의 가능성을 믿어 주지 않던 때에도 끝까지 그의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데뷔가 무산될 뻔했을 때도.악성 루머에 시달렸을 때도.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때도.강현은 늘 같은 말을 했다.‘도하야. 네가 연기만 할 수 있게 내가 옆에서 다 정리할게.’도하는 그 말을 믿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일정과 연락처, 촬영장 위치, 이동 경로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해린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여기서 말씀하세요.”남자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경계가 심하시네요. 이도하 씨와 가까운 사이라서 그런 겁니까?”“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여기서 못 할 이유도 없겠죠.”“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오래 이야기할 생각은 없거든요.”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단정한 셔츠에 검은 코트,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하지만 해린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마주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도하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부터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최민석입니다. 이도하 씨 소속사에서 전략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해린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소속사 전략기획팀. 배우의 외부 일정과 광고 계약, 촬영 관련 자료를 관리하는 부서라면 내부 일정에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김도윤 씨를 아십니까?”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으니까요.”“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셨나요?”“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습니다.”“어떻게요?”“회사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도하 씨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이야기까지요.”해린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그런데 변호사님.”최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김도윤이 혼자 움직였다고 생각하십니까?”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을 확인한 남자가 작게 웃었다.“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팀장님은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죠?”“진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회사에 제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겠죠.”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하지만 이도하 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 곁에
월요일 아침.해린은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쌓인 서류부터 정리했다. 주말 동안 잠시 미뤄 두었던 사건 기록을 다시 펼치자,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의문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김도윤. 그가 납치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해린은 여전히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도하의 일정과 이동 경로, 촬영이 끝난 뒤의 동선까지. 우연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더구나 김도윤은 회사 내부에 공범이 있느냐는 질문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혼자 저지른 일이라면 왜 그렇게까지 숨기려고 하는 걸까. 해린은 펜 끝으로 서류의 한 부분을 짚었다.도하의 회사에서 제공받은 촬영 일정표였다. 외부에 공개된 일정과 내부 직원들만 확인할 수 있는 일정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납치범이 알고 있던 정보는 대부분 후자에 속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회사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거나, 내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해린은 휴대전화를 들어 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도하 씨, 오늘 회사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변호사님, 아침부터 저를 찾으시다니. 혹시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해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중요한 일 때문에 여쭤보는 겁니다.][아쉽네요. 저는 중요한 일보다 변호사님이 보고 싶으신 줄 알았는데.][장난 그만하시고요.][오전에는 회사에 있습니다. 오후에는 외부 미팅 하나 있고요. 무슨 일이십니까?]해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회사 내부 자료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말씀드릴게요.]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화면을 내려다보던 해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몇 초 뒤, 전화가 걸려 왔다.“변호사님.”평소보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회사 자료를 확인하시겠다고요?”“네. 김도윤 씨가 알고 있던 정보가 어디에서 유출됐는지 확인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