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15년을 알고 지낸 소꿉친구가 내게 일 년만 사귀자고 했다.** "시우야, 나한테 일 년만 빌려주라." 어릴 때부터 내 곁에 있던 이지윤. 제멋대로에, 웃음이 많고, 언제나 당당했던 그 애가 어느 날 내게 고백했다. "나 내년에 심장 수술받아." "……뭐?" "성공할 확률이 30퍼센트래." 그 애가 원한 것은 단 일 년의 연애였다. 영화를 보고, 바다에 가고, 손을 잡고 걷는 것. 누구에게나 평범한 일들을 나와 함께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애의 마지막 부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몰랐다. 끝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던 일 년의 연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다.
Ver más“시우야, 나랑 일 년만 사귀자.”
십오 년 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가 갑자기 고백했다.
그것도 연애 기간을 정해 놓고.
나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봤다.
이지윤.
스물두 살.
문예창작과 재학 중.
취미는 영화 보기와 나 괴롭히기.
좋아하는 음식은 치즈 떡볶이.
좋아하는 음료는 딸기라테.
그리고 내가 일곱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여자.
그런 애가 지금 나한테 사귀자고 했다.
“……뭐?”
“일 년.”
지윤이가 검지손가락을 펼쳤다.
“딱 일 년만.”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아니.”
“술 마셨어?”
“오후 세 시거든?”
“그럼 몰래카메라야?”
지윤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우.”
“왜.”
“나 진지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웃음을 터뜨렸을 애였다.
자기가 던진 농담에 내가 당황하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웃는 여자.
그게 이지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애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하필 일 년인데?”
내 질문에 지윤이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딸기라테.
분홍빛 음료에는 아직 빨대조차 꽂혀 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지윤이 딸기라테를 앞에 두고 삼십 분 넘게 마시지 않는다는 건, 어지간히 심각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냥.”
지윤이가 대답했다.
“일 년이면 충분할 것 같아서.”
“뭐가 충분한데?”
“연애.”
“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연애가 무슨 기간제 계약이냐?”
“그렇게 생각해도 돼.”
“뭐?”
“계약 연애.”
지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다.”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지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그것도 일 년 동안 사귀고 싶을 만큼?
우리는 십오 년 지기 소꿉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서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연락을 끊은 적이 없었다.
그 애는 내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여자였다.
하지만 연애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지윤.”
“응.”
“솔직하게 말해.”
“뭘?”
“무슨 사고 쳤어?”
그 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너희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하셨어?”
“아니거든?”
“그럼 누구한테 쫓겨?”
“한시우!”
지윤이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설명을 해 봐.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그 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윤이는 늘 시끄러웠다.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말했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말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다.
그런 애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윤아?”
내가 다시 부르자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나 내년에 수술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수술?”
“응.”
“무슨 수술?”
지윤이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심장.”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가 전부 사라졌다.
이지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정확히는 심장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일곱 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도 그랬다.
우리 집 근처 놀이터.
나는 모래밭에 쪼그려 앉아 작은 성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섰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였다.
머리에는 분홍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그 애는 내가 만든 모래성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더니 물었다.
“이거 뭐야?”
“성.”
“누가 살아?”
“왕.”
“공주는?”
“없어.”
그 애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내가 공주 할래.”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애를 바라봤다.
“왜?”
“공주가 없잖아.”
“그렇긴 한데.”
“그럼 됐네.”
그 애는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모래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게 이지윤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윤이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살았다.
대문부터 우리 집 거실만큼 넓어 보이는 집.
집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정원에는 작은 분수대까지 있었다.
처음 그 집에 놀러 갔을 때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너희 집은 왜 이렇게 커?”
지윤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우리 집이니까.”
그때부터 알았다.
이지윤은 돈이 많았다.
정확히는 부모님이 엄청나게 부자였다.
하지만 그 애는 이상할 정도로 평범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좋아했고, 동네 분식집에서 먹는 떡볶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주장했다.
비싼 장난감보다 내가 만든 종이비행기를 더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있는 걸 싫어했다.
“시우야.”
“왜.”
“내일도 놀러 와.”
“내일 학원 가야 돼.”
“그럼 학원 끝나고.”
“숙제해야 돼.”
“우리 집에서 하면 되잖아.”
“너희 집 멀어.”
“차 보내 달라고 할게.”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부모님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줄 세우느라 바빴다.
나는 달리기 시합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운동장 구석에 앉아 있는 지윤이를 발견했다.
“야, 이지윤!”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왜?”
“너는 왜 안 뛰어?”
“못 뛰어.”
“왜?”
“심장이 안 좋아서.”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당시의 나는 심장이 안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오래 뛰면 힘들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걷는 건?”
지윤이가 눈을 깜빡였다.
“뭐?”
“걷는 건 할 수 있어?”
“응.”
“그럼 걷자.”
나는 손을 내밀었다.
지윤이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어디를?”
“운동장.”
“왜?”
“너도 운동회 왔잖아.”
그 애는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환하게 웃었다.
“좋아!”
우리는 운동장 가장자리를 천천히 걸었다.
다른 아이들은 달렸다.
누군가는 일등을 했고, 누군가는 넘어졌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고 걸었다.
그때 지윤이가 물었다.
“시우야.”
“왜.”
“나중에도 같이 걸어 줄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
“나중에 커서도.”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진짜?”
“응.”
“약속?”
지윤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그때는 몰랐다.
그 애가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그저 지윤이가 심장이 약한 아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 애는 내 앞에서 수술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많이 안 좋아?”
내가 물었다.
지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제부터?”
“원래부터.”
“그런데 왜 이제 말해?”
“확실해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수술은 언제인데?”
“내년.”
“정확히 언제?”
“아직 최종 날짜는 안 잡혔어.”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험한 수술이야?”
지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평소에도 지윤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숨길 때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나는 그 버릇을 알고 있었다.
“이지윤.”
“응.”
“위험하냐고.”
그 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얼마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에서는 커피 머신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웃었다.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울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그런데 내 앞에 앉은 여자애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성공할 확률이…….”
지윤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30퍼센트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
“수술 성공 확률.”
그 애는 다시 말했다.
“30퍼센트.”
숫자는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의미하는 현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이지윤.”
“응.”
“그런 걸로 장난치는 거 아니야.”
지윤이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알아.”
그 웃음이 싫었다.
평소와 똑같은 웃음이어서.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어서.
“다른 병원은?”
“가 봤어.”
“큰 병원은?”
“거기도.”
“외국은?”
“아빠가 알아봤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윤이의 아버지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업의 회장이었다.
어머니는 예술 재단을 운영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대부분 해결할 수 있는 집이었다.
그런데도 성공 확률이 30퍼센트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그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조금 이해했다.
“그럼…….”
목이 막혔다.
“수술 잘못되면?”
지윤이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못 깨어날 수도 있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윤이는 다시 웃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무슨 표정.”
“세상 무너진 것 같은 표정.”
“…….”
“아직 수술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어.”
나는 지윤이를 바라봤다.
“그게 지금 할 말이냐?”
“그럼 뭐라고 해?”
“무섭다고 하든가.”
말이 튀어나왔다.
지윤이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걱정된다고 하든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든가.”
“…….”
“왜 자꾸 웃어?”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항상 그래.”
“뭐가?”
“힘든 일 있어도 웃잖아.”
지윤이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럼…….”
그 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가 울면 뭐가 달라져?”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윤이는 손가락으로 컵을 문질렀다.
“울어도 수술은 해야 하고.”
“…….”
“무서워해도 확률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 애는 다시 웃었다.
“그러니까 그냥 웃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던 이지윤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말인데.”
한참 뒤 지윤이가 입을 열었다.
“나랑 일 년만 사귀어 주라.”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지금 그 이야기가 나와?”
“응.”
“이지윤.”
“진짜 딱 일 년.”
그 애는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나 좋아해 달라는 거 아니야.”
“뭐?”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같이 해 주고, 놀러도 가고, 가끔 데이트도 하고.”
“…….”
“그렇게 일 년만.”
나는 지윤이를 바라봤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
“알아.”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자는 거야?”
지윤이의 손이 멈췄다.
정말 잠깐이었다.
그 애는 곧 다시 웃었다.
“그게 왜?”
“뭐?”
“너도 나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지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 애가 아프면 걱정됐고, 울면 마음이 불편했다.
지윤이가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애는 내게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다.
가족처럼.
아니, 어쩌면 가족보다 더 오래 함께한 사람처럼.
“그러니까.”
지윤이가 말했다.
“그냥 일 년 동안만 연인인 척해 주면 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인인 척?”
“응.”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지윤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나한테는 있어.”
그 애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분명했다.
“너한테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지윤이는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지윤이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외모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돈이 없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지윤이는 어디에 가든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우리 반 남자애들이 종종 나를 찾아왔다.
“야, 한시우.”
“왜.”
“너 이지윤이랑 친하지?”
“응.”
“걔 남자친구 있어?”
“없는데.”
“진짜?”
“응.”
“그럼 소개 좀 시켜 줘.”
나는 그런 부탁을 여러 번 받았다.
그때마다 지윤이에게 물었다.
“야, 너 소개팅할래?”
그러면 지윤이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싫어.”
“왜?”
“귀찮아.”
“너 좋다는 애인데?”
“그래서?”
“한 번 만나 보지.”
“싫다니까.”
그렇게 고등학교 삼 년이 지났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비슷했다.
지윤이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 일에 익숙했지만, 정작 연애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생각했다.
이지윤은 연애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애는 내게 연애를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왜 하필 나야?”
내가 물었다.
그 말을 하자 지윤이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곧 다시 평소처럼 웃었다.
“너밖에 없잖아.”
“뭐?”
“나랑 제일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지윤이는 딸기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너 지금 여자친구도 없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윤이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긴장하고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물었다.
“뭐?”
“너 좋다는 사람 많잖아.”
“알아.”
“그럼 그중에 한 명 만나면 되잖아.”
지윤이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다른 사람은 싫으니까.”
“…….”
“너랑 하고 싶어.”
그 애는 조금 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예를 들면?”
지윤이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남자친구랑 영화 보기.”
하나.
“손잡고 바다 보러 가기.”
둘.
“놀이공원에서 사진 찍기.”
셋.
“크리스마스에 같이 있기.”
넷.
“생일에 케이크 같이 먹기.”
다섯.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다야?”
지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건 지금도 할 수 있잖아.”
“알아.”
“그런데 왜 굳이 사귀어야 하는데?”
지윤이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시우야.”
“왜.”
“친구랑 영화 보는 거랑 남자친구랑 영화 보는 거랑 같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윤이는 웃었다.
“다르잖아.”
“…….”
“나는 그 다른 걸 해 보고 싶은 거야.”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지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애는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나한테는.”
나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사귀자는 부탁.
일 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수술.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지윤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애가 내 앞에서 이렇게 부탁하고 있었다.
“지윤아.”
“응.”
“나 너한테 솔직하게 말할게.”
지윤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응.”
“나는 아직 너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런데 그게 연애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어.”
지윤이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랑 사귀면…….”
“괜찮아.”
그 애가 내 말을 끊었다.
나는 지윤이를 바라봤다.
“뭐?”
“괜찮다고.”
지윤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부터 날 좋아해 달라는 거 아니야.”
“…….”
“그냥.”
그 애는 손을 뻗어 내 앞에 놓인 컵을 살짝 밀었다.
“일 년만 내 남자친구 해 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나랑 같이 놀아 주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지윤이는 웃었다.
“그렇게 지내면 돼.”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그럼 일 년 뒤에는?”
지윤이의 손이 멈췄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일 년 뒤에 수술 끝나면?”
그 애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때는…….”
말끝이 흐려졌다.
“네가 정해.”
“뭐?”
“계속 사귈지.”
그 애는 애써 웃었다.
“그만둘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지윤이는 시선을 내렸다.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그 순간 이상하게 화가 났다.
그 애가 나를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일 년 뒤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그때 자신이 내 옆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처럼 말해서.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지윤이가 고개를 들었다.
“……뭐?”
“사귀자고.”
그 애는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응.”
“진짜로?”
“몇 번을 물어.”
지윤이는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었다.
“야, 한시우!”
“왜.”
“너 진짜 착하다!”
“시끄러워.”
지윤이는 한참을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애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조건 있어.”
지윤이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뭔데?”
“아픈 거 숨기지 마.”
“……응.”
“그리고 무리하지 말고.”
“알았어.”
“병원 가야 하면 가고.”
“알았다니까.”
“약도 잘 챙겨 먹고.”
지윤이가 웃었다.
“너 이제 내 남자친구야, 보호자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둘 다 하면 안 돼?”
그 애가 멈췄다.
“……뭐?”
“네가 아프면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
지윤이는 나를 바라봤다.
이상할 만큼 오래.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뭐.”
“좋아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아까부터 계속 그 말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지윤이는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약속.”
나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새끼손가락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해 온 약속.
시험 잘 보면 떡볶이 사 주기.
생일에 놀러 가기.
다음 날에도 같이 놀기.
그런 사소한 약속을 할 때마다 지윤이는 항상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가 몇 살인데.”
“빨리.”
“알았어.”
나는 그 애의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지윤이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사귀는 거다?”
“응.”
“진짜 남자친구?”
“응.”
“내 남자친구?”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남자친구.”
그 애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그 애가 원하는 일 년을 함께 보내 주는 것.
그동안 지윤이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이지윤이 왜 하필 나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애가 내게 숨긴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 맞다.”
카페를 나서려던 지윤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우리 첫 데이트는 언제 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벌써?”
“벌써라니?”
지윤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사귀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그럼 데이트해야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번 주 금요일?”
지윤이의 눈이 커졌다.
“금요일?”
“응.”
“진짜?”
“응.”
“뭐 할 건데?”
“영화 볼까?”
그 애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영화?”
“응.”
“너랑?”
“그럼 누구랑 보게?”
지윤이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야, 왜 그래?”
“잠깐만.”
“뭐가.”
“나 지금 너무 좋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걸 다 좋아하네.”
“너는 몰라.”
지윤이가 손가락 사이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나는 웃었다.
“영화 한 편 보는 게?”
“응.”
그 애는 손을 내렸다.
“엄청.”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지윤이와 수없이 영화를 봤다.
초등학교 때는 애니메이션을 봤고, 중학교 때는 공포 영화를 봤다.
고등학교 때는 시험이 끝날 때마다 영화관에 갔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가끔 함께 영화를 봤다.
그런데 지윤이는 마치 처음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연애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었다.
“금요일에 시간 비워 둬.”
내가 말했다.
지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늦지 말고.”
“내가 언제 늦었다고.”
“지난번에 삼십 분 늦었잖아.”
“그건 준비하느라 그런 거고.”
“그게 늦은 거야.”
지윤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알았어. 이번에는 안 늦을게.”
나는 웃었다.
“그래.”
그 애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시우야.”
“왜.”
“금요일에 예쁘게 하고 갈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
“데이트잖아.”
지윤이는 웃었다.
“남자친구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었다.
이지윤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옷을 대충 입고 나와서 내게 물었을 것이다.
야, 나 오늘 어때?
그러면 나는 대충 대답했을 것이다.
평소랑 똑같은데.
그러면 지윤이는 화를 냈을 것이다.
그게 우리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애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남자친구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다고.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알았어.”
“너도 멋있게 하고 와.”
“뭘 얼마나 멋있게.”
“데이트니까!”
나는 웃었다.
“그래, 알았어.”
지윤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먼저 카페 문을 열었다.
문 위에 달린 종이 맑게 울렸다.
나는 그 애의 뒤를 따라 나갔다.
카페 밖은 아직 밝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건물 사이로 길게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인도를 걸었다.
지윤이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나는 그 애를 힐끗 바라봤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그냥.”
“그냥?”
“응.”
그 애는 웃었다.
“좋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 말만 하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지윤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뭐?”
“손.”
“왜?”
“잡아 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손을 많이 잡았다.
놀이터에서.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많은 축제에서.
그때마다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같은 손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나는 지윤이를 바라봤다.
그 애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애의 손을 잡았다.
지윤이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아니.”
그 애는 우리 손을 내려다봤다.
“진짜 잡아 줄 줄 몰랐어.”
나는 웃었다.
“네가 잡아 달랬잖아.”
“그렇긴 한데.”
지윤이는 내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췄다.
지윤이의 걸음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 애는 오래 걸으면 쉽게 지쳤다.
그래서 나는 항상 조금 천천히 걸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됐다.
“시우야.”
지윤이가 나를 불렀다.
“왜.”
“나 오늘 진짜 행복해.”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알아.”
“아니, 진짜로.”
그 애는 고개를 들었다.
“너는 모를 거야.”
나는 웃었다.
“뭘 모르는데.”
지윤이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 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작고 따뜻했다.
십오 년 동안 수도 없이 잡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손을 놓아야 할 순간이 언제인지.
얼마나 오래 잡고 있어도 되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그때 지윤이가 갑자기 웃었다.
“시우야.”
“왜.”
“너 지금 무슨 생각 해?”
“아무것도.”
“거짓말.”
“진짜야.”
“나랑 손잡는 거 신경 쓰이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
지윤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네!”
“아니거든.”
“맞잖아!”
“시끄러워.”
그 애는 웃었다.
그리고 내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괜찮아.”
“뭐가.”
“천천히 익숙해지면 되지.”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지윤이는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우리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잖아.”
그 애는 웃었다.
“시간 많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시간.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일 년.
정확히는 수술까지 남은 시간.
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
지윤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그래.”
작게 대답했다.
“천천히 하자.”
지윤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커다란 대문 앞에 도착하자 그 애가 걸음을 멈췄다.
“다 왔다.”
“그러네.”
지윤이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나는 웃었다.
“네 집이잖아.”
“알아.”
“그럼 들어가.”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눈썹을 올렸다.
“이지윤.”
“응.”
“손.”
“왜?”
“안 놓을 거야?”
지윤이는 내 손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었다.
“조금만 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살이냐.”
“스물두 살.”
“알긴 아네.”
그 애는 웃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을 놓았다.
손끝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 허전했다.
나는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들어가.”
“응.”
지윤이는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봤다.
“시우야!”
“왜!”
그 애는 환하게 웃었다.
“나 이제 네 여자친구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알아!”
“진짜 잊으면 안 돼!”
“안 잊어!”
“금요일도!”
“알았다니까!”
지윤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대문이 닫혔다.
그제야 나는 몸을 돌렸다.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이지윤이었다.
남자친구.
나는 피식 웃었다.
왜.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냥 불러 봤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 일 없냐.
있어.
뭔데.
잠시 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남자친구 생각하기.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미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나는 답장을 적었다.
그럼 금요일에 봐.
잠시 뒤 지윤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응!
잘 가, 시우야.
오늘 고마웠어.
나는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답장했다.
나도.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두 글자가 지윤이에게 얼마나 오래 남을지.
집에 돌아온 뒤에도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이지윤.
내 여자친구.
나는 그 두 단어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십오 년 동안 친구였던 여자애가 하루아침에 여자친구가 됐다.
그것도 일 년이라는 조건이 붙은 채.
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윤이와 나눈 메시지를 확인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말투.
쓸데없는 농담.
별 의미 없는 대화.
그런데 마지막에 남아 있는 문장이 달랐다.
남자친구 생각하기.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진짜 이상하네.”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건 지윤이가 아니었다.
나였다.
나는 그 애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성공 확률이 30퍼센트라는 사실까지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 애와 손을 잡았던 순간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려, 한시우.”
그 애는 아픈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애가 원하는 일 년을 함께 보내 주기로 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같은 시각.
이지윤은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방 한쪽에는 책장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소설책이 쌓여 있었다.
지윤이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화면에는 한시우와 나눈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나도.
그 애는 그 두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아…….”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잠시 뒤.
지윤이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짜?”
혼잣말이었다.
“진짜 사귀는 거야?”
그 애는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럼 금요일에 봐.
나도.
몇 번을 읽어도 똑같았다.
한시우가 자신과 사귀기로 했다.
십오 년 동안 친구였던 남자애가.
팔 년 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드디어 자신의 남자친구가 됐다.
지윤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다.”
그리고 웃었다.
한참 동안.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윤이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분홍색 수첩이 있었다.
표지에는 작은 토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지윤이는 수첩을 꺼냈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여러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술 전 하고 싶은 일.
첫 번째.
한시우랑 사귀기.
두 번째.
시우랑 손잡고 영화 보기.
세 번째.
시우랑 바다 보러 가기.
네 번째.
놀이공원에서 커플 사진 찍기.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에 같이 있기.
여섯 번째.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으로 고백하기.
지윤이는 첫 번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펜을 들었다.
한시우랑 사귀기.
그 문장 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동그라미가 점점 진해졌다.
지윤이는 웃었다.
“……드디어.”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오래 걸렸다.”
그 애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수첩을 바라봤다.
중학교 2학년.
그때부터였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아이가 어느 순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처음에는 몰랐다.
그저 시우가 다른 여자애와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빴다.
시우가 자신보다 다른 친구와 먼저 약속을 잡으면 서운했다.
시우가 아프면 걱정됐고, 시우가 웃으면 자신도 웃었다.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무서웠으니까.
한시우는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오래 뛰지 못한다는 것도.
가끔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다는 것도.
그 애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백했다가 그 관계마저 잃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지윤이는 기다렸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수능이 끝났을 때도.
대학교에 들어왔을 때도.
언젠가는 시우가 자신을 다르게 바라봐 주기를.
친구가 아니라.
소꿉친구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술 이야기를 들었다.
일 년 뒤.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고.
지윤이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계속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 걸까.
그동안은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스물두 살이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일 년.
그 시간 안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윤이는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적었다.
그중 가장 먼저 적은 것이 있었다.
한시우랑 사귀기.
지윤이는 그 문장을 바라봤다.
“……이뤘다.”
작게 중얼거렸다.
그 애는 웃었다.
하지만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진짜 이뤘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지윤이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지윤아, 다음 주 병원 일정 확인했니?
지윤이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응, 엄마.
알고 있어.
잠시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일찍 쉬어.
지윤이는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윤이는 수첩을 바라봤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첫 번째 문장.
아직 비어 있는 나머지 문장들.
그 애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지윤이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글씨를 적었다.
한시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펜끝이 멈췄다.
그 애는 그 문장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이것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지윤이는 눈을 감았다.
“정말 행복할 것 같아.”
잠시 뒤.
그 애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한시우와의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시우야.
나 사실 너 좋아해.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멈췄다.
지윤이는 화면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그러다가 천천히 글자를 지웠다.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 고백하면 시우는 분명 당황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 애가 바라는 건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동정도.
책임감도.
십오 년 동안 함께한 친구에 대한 의리도.
아니었다.
지윤이는 단 한 번이라도.
한시우가 자신을 정말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그 애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우야.”
“나 사실…….”
말끝이 흐려졌다.
지윤이는 천장을 바라봤다.
“너 좋아한 지 벌써 팔 년이나 됐는데.”
그 애는 작게 웃었다.
“너는 아직도 모르지?”
당연했다.
한시우는 몰랐다.
이지윤이 자신을 얼마나 오래 좋아했는지.
그 애가 오늘 고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는지.
그리고 일 년이라는 시간을 부탁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웃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지윤이는 눈을 감았다.
오늘 시우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횡단보도 앞에서.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하지만 끝내 손을 놓지 않았던 그 순간.
그 애는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니까.”
그날 밤.
한시우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어색해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이지윤은.
팔 년 동안 좋아했던 남자의 여자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잠들었다.
두 사람은 같은 관계를 시작했지만.
그 관계에 담은 마음의 무게는 전혀 달랐다.
한 사람에게는 이제 막 시작된 일 년짜리 연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팔 년을 기다려 얻어 낸 사랑.
한시우는 자신이 이지윤에게 일 년을 빌려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지윤은 달랐다.
그 애는 자신의 일 년을 한시우에게 주고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바다를 보고.
함께 계절을 지나고.
가능하다면.
그다음 계절까지.
그렇게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한시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도.
이지윤이 원한 것은 일 년짜리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그 애는 팔 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 애가 내게 숨긴.
가장 오래된 비밀이었다.
“시우야.”“응?”“우리 헤어질까?”나는 웃고 있었다.정확히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웃고 있었다.우리는 학교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다.어제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오늘은 처음으로 연인이 된 기분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그런데 이지윤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다.“……뭐?”지윤이는 내 눈을 피했다.“그냥.”“뭐가 그냥인데.”“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나는 한참 동안 그 애를 바라봤다.그리고 물었다.“왜?”지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이지윤.”“……응.”“어제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그 애의 손이 멈췄다.“……응.”“나도 너 사랑한다고 했고.”“알아.”“그런데 하루 만에 헤어지자고?”지윤이는 고개를 숙였다.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네가 나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 봐.”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윤이는 웃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어제와 달랐다.“그게 무서워졌어.”어젯밤.이지윤의 아버지는 한참 동안 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방 안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지윤이는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응. 나도 사랑해.”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손을 멈췄다.잠시 뒤.방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알았어. 내일 봐.”전화가 끊겼다.아버지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그리고 복도로 돌아섰다.서재에 들어간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진료 서류를 바라봤다.수술 일정 재검토.추가 검사 결과.그리고 담당 의료진의 소견.그는 의자에 앉았다.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조금 전 통화했던 담당 의사의 번호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교수님.”잠시 침묵이 흘렀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의사의 대답이 이어졌다.아버지는 눈을 감았다.“……알겠습니다.”그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애가 이제 겨우 스물둘입니다.”전화기 너머
“이지윤.”“응?”“나 너 사랑해.”십오 년이었다.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수없이 많은 말을 주고받았고,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이 말만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사랑해.고작 세 글자.그 세 글자를 말하기까지 십오 년이나 걸렸다.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지윤은.울었다.“……시우야.”그 애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울어.”지윤이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울고 있잖아.”“그냥.”그 애는 웃으려 했다.하지만 눈물이 계속 흘렀다.“너무 오래 기다려서.”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애는 나를 바라봤다.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있잖아.”“응.”“그 말 듣는 게 소원이었어.”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뭐?”지윤이는 천천히 웃었다.“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거.”그 순간.나는 깨달았다.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세 글자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 기다려 온 소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그날 아침.나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지윤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끝나고 시간 돼?답장은 금방 도착했다.응!왜?나는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글자를 적었다.할 말 있어.곧바로 답장이 왔다.무슨 말?나는 웃었다.만나서.잠시 뒤.지윤이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시우야.설마.나는 화면을 바라봤다.그리고 천천히 답장을 적었다.응.네가 기다리던 말.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리고 생각했다.……드디어 말하는구나.솔직히 말하면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어쩌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그 애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어린 시절부터.학교에 다닐 때도.힘든 일이 있을 때도.그리고 지금도.나는 그 애가 없는 일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최근 들어 깨달았다.그것이 단순히 익숙함 때문만은
“이지윤.”“응?”“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그 애의 손이 멈췄다.우리는 학교 앞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지윤이는 언제나처럼 딸기라테를 주문했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평범한 오후였다.적어도 내가 그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갑자기?”지윤이가 웃었다.나는 그 애를 바라봤다.“병원.”그 애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병원이 왜?”“추가 검사받았잖아.”“응.”“결과는?”지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빨대를 만지작거렸다.나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이지윤.”“……응.”“괜찮다는 말 말고.”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나는 천천히 말했다.“진짜로 어떻게 됐는지 알려 줘.”지윤이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그리고 웃었다.“시우야.”“응.”“너 나 많이 좋아하게 됐나 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애는 다시 웃었다.“걱정도 많이 하고.”“…….”“먼저 연락도 하고.”나는 컵을 내려놓았다.“말 돌리지 마.”그 순간.이지윤의 웃음이 사라졌다.며칠 전부터 이상했다.지윤이는 여전히 잘 웃었다.아침마다 연락했고, 수업이 끝나면 내게 전화를 걸었다.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예전에는 지윤이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교수님이 과제를 얼마나 많이 내줬는지.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점심으로 뭘 먹었는지.정말 사소한 것까지.그런데 최근에는 병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검사를 받으러 간다는 말도, 결과를 들었다는 말도.내가 물어봐야 겨우 대답했다.그마저도 항상 같았다.괜찮아.별일 없어.걱정하지 마.처음에는 믿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했다.그 애는 나와 함께할 미래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함께 살 집.출간할 소설.겨울 바다.그리고 결혼.그런데 정작 그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르는 병원 이야기는 피했다.나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그래서 오늘.결국 물어본 것이었다.“시우야.”지윤이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한시우.”“왜.”“나랑 결혼할래?”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이지윤은 맞은편에서 딸기라테를 마시고 있었다.그리고 방금.아무렇지도 않게 청혼했다.“……뭐?”“결혼.”“누구랑?”지윤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너랑.”“야,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그럼 오래 사귀면 해 줄 거야?”나는 입을 다물었다.그 애는 웃었다.“왜 대답 안 해?”“아니, 그건…….”“싫어?”“그런 뜻이 아니라.”지윤이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그럼 됐어.”나는 눈썹을 찌푸렸다.“뭐가 됐는데.”그 애는 나를 바라봤다.그리고 환하게 웃었다.“싫은 건 아니라는 거잖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너 진짜.”지윤이는 웃었다.“알아.”그 애는 컵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알아.”“뭘.”“너 아직 나랑 결혼할 생각까지는 없다는 거.”나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애는 다시 웃었다.“그래도 상상하는 건 자유잖아.”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그래. 상상은 자유지.”지윤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의 나는 몰랐다.그 애가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망설였는지.그리고.그 애가 그토록 평범한 미래를 꿈꾸는 이유를.토요일 오전.나는 지윤이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사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어제까지 과제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오늘은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그래서 먼저 연락했다.오늘 뭐 해?지윤이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너 생각.나는 피식 웃었다.진짜 뭐 하냐고.진짜 너 생각하는데.밥 먹을래?응!그리고 잠시 뒤.시우야.너 요즘 나한테 먼저 연락 많이 한다?나는 화면을 바라봤다.그러고 보니 그랬다.예전에는 지윤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이 많았다.밥 먹자고.영화 보자고.학교 끝나면 만나자고.나는 대부분 그 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이었다.하지만 요즘은 달랐다.수업이 끝나면 지윤이가 뭐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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