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최도윤의 별장을 나온 뒤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차 안에 말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해린의 얼굴을 짧게 스쳤다.
태준은 운전대를 잡은 채 앞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계속 의식하고 있다는 걸.
“강태준 씨.” “네.” “아까 문자.” “봤습니다.” “정말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접근했다고 생각해요?” 태준의 손가락이 운전대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그렇게 보였다면 지금 여기 같이 안 있겠죠.” “그럼?” 태준이 신호에 걸려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해린을 바라봤다. “의심합니다.” “…….” “그런데 믿고 싶기도 하고.” 해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둘 중 하나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원래라면.” 태준이 몸을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당신한테는 자꾸 원칙이 안 통하네요.” 순간 차 안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해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변호사로서 위험한 말이라는 건 알아요?” “압니다.” “그런데도 해요?” “네.” 태준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입술로 아주 잠깐 내려갔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해린은 놓치지 않았다. “……강태준 씨.” “왜요.” “지금 나 의심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닌데.”
태준이 피식 웃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뭐가요?” “나 의심한다면서.” 그가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계속 내 입술 보고 있잖아.” 해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착각이 심하네요.” “그럼 확인해볼까요?” “뭘.” 태준이 천천히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해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숨이 닿을 듯한 거리.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착각하는 건지.” 해린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확인하고 싶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그 말에 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준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조금 거리를 뒀다. 어쩐지 그게 더 위험했다. 해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겁하네요.” “왜요?” “이럴 때는 안 물러날 줄 알았는데.”
태준이 웃었다. “그럼 다시 갈까요?” “…….” 해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태준이 다시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해린도 눈을 감지 않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 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둘 다 멈췄다. 태준이 짜증스럽게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해린이 말했다.
“받아요.” 태준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시죠?”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신 몇 초 뒤.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시까지 차해린 변호사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태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너 누구야.” “강태준 씨.” “말해.” “당신이 차해린을 믿는 순간, 두 사람은 같이 끝납니다.” 통화가 끊겼다. 차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해린이 낮게 말했다. “……이번엔 나한테도 들려주려고 전화했네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해린을 바라봤다. “호텔로 갑시다.” “왜요?” “증거 찾으러.” “당신 혼자 가요.” “아니.” 태준이 시동을 걸었다. “같이.”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내가 범인일 수도 있는데?” 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니까 같이 가야죠.” “왜?”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접근했다면…….” 잠시 멈춘 뒤. “내가 직접 확인해야 겠으니까.”***
새벽 3시 06분. 두 사람은 다시 호텔에 도착했다. 문제는 1703호였다. 경찰이 오기 전에 그 방에 남아 있는 기록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객실은 이미 봉인돼 있었다. 해린이 봉인 테이프를 바라봤다.
“이거 누가 한 거죠?” 태준이 테이프 끝부분을 확인했다. “공식 봉인은 아니네요.” “뭐?” “접착제가 다릅니다.” 그가 장갑을 끼고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1703호.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해린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네.” “내가 여기에 있었죠.” 태준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찰칵. 그 작은 소리에 해린이 돌아봤다. “왜 문을 잠가요?”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밖에서 누가 들어오면 곤란하니까.” “…….”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도망갈까 봐.” 해린이 피식 웃었다. “아직도 그 얘기예요?” “아직도 기억나니까.” 태준이 바로 앞에 섰다. “아침에 눈 떴는데 당신이 없었어요.” “그땐 그래야 했어요.” “알아요.” “그런데 왜 계속 얘기해요?” 태준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이번엔 안 보내려고.” 해린의 숨이 아주 조금 멎었다. “강태준.” “왜.” “우린 지금 수사받을 수도 있어요.” “알아요.” “내일 아침이면 내 이름으로 영장이 청구될 수도 있고.” “알아요.” “그런데 왜…….” 태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강하게가 아니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래서 더 싫습니다.” “뭐가요?” “이런 상황에서 당신한테 마음이 가는 게.” 해린의 눈이 흔들렸다. 태준은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변호사로서 보면 최악이죠.” “…….” “그런데 남자로 보면.” 그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이미 늦었고.” 해린이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뭘 해야 할 것 같아요?” 태준이 낮게 웃었다. “당신답게 하면 되죠.” “내가 뭘 할 줄 알고?” “모르죠.” 그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기다리는 겁니다.” 해린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녀가 먼저 다가갔다. 이번에는 태준도 물러서지 않았다. 입술이 짧게 맞닿았다.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떨어진 뒤에도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해린이 낮게 말했다.
“이건 실수예요.” 태준이 웃었다. “두 번째부터는 실수가 아닌데.” “누가 두 번째래요?” “방금 했잖아요.” “그건 한 번인데.” “그럼 다시 세면 되겠네.” 해린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신. 정말 재수 없네요.” “그 말, 처음 만났을 때도 했죠.” “그땐 더 재수 없었고.” “그럼, 지금은?” 해린이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리고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지금도.” 태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순간. 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벽 쪽으로 향했다. 태준이 해린 앞을 막아섰다.“뒤로.” “왜?” “소리 났어요.” 그가 벽면의 액자를 들어 올렸다. 뒤쪽에 작은 장치가 붙어 있었다. 녹음기. 태준이 그것을 떼어냈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잠시 잡음. 그리고.
“차해린이 강태준을 믿게 만들어.” 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지는 목소리. “그리고 강태준이 차해린을 보호하게 만들어.” 해린이 숨을 멈췄다.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둘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죽이게 될 거야.” 태준과 해린은 서로를 바라봤다. 녹음은 계속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 더 쉽겠지.” 정적. 해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준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이제 확실히 알겠네요.” “뭘요?” 그가 녹음기를 손에 쥔 채 웃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끌리는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는 거.” 잠시 후. 태준이 해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하나는 계산을 못 했네요.” “뭔데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당신을 지키고 싶어질 줄은.” 그리고 그 순간. 호텔 복도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10시까지 남은 시간 7시간.
영장보다 먼저 누군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 세 시 십 분.해린은 도하가 보내 준 주소 앞에 도착했다.소속사 건물도, 경찰서도 아니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공유 오피스였다. 출입문 옆 안내판에는 여러 회사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지만, 도하가 만나자고 한 곳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해린이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변호사님.”고개를 들자 검은 모자를 눌러쓴 도하가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평소 촬영장에서 보던 화려한 모습과는 달랐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조금 수척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해린은 그를 가만히 살폈다.“잠은 좀 주무셨어요?”“네. 뭐… 조금요.”“조금이라는 게 몇 시간인데요?”도하가 웃었다.“변호사님은 꼭 그런 걸 물어보시더라.”“잠을 제대로 못 자면 판단력이 떨어지니까요.”“그럼 오늘은 판단력 좋은 사람을 데려왔어야 했는데.”“이도하 씨.”“네. 잘 잤습니다.”그제야 해린이 작게 웃었다. 도하는 그 웃음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젯밤, 자신을 안아 주던 사람. 오늘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안부를 물어 주는 사람.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당연히 변호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도하는 그 다정함 앞에서 자꾸만 기대를 품으려 했다.그는 시선을 돌렸다.“안으로 들어가시죠.”작은 회의실에는 노트북과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도하는 문을 닫은 뒤 해린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오늘 전무님을 만나고 왔습니다.”“윤정식 전무님이요?”“네. 제 일정 관리 시스템을 변경한 건 전무님이 승인한 일이더군요.”해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변경 이유는요?”“해외 제작사와 협업하기 위해 일정 공유 범위를 넓혔다고 합니다.”도하는 화면을 해린 쪽으로 돌렸다.“그런데 여기 보시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해린은 화면을 자세히 살폈다. 일정 공유 요청서. 승인 기록. 외부 협력사 담당자 목록.서류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요청서에 기재된 담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해린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태준 씨?”“일어났어요?”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태준은 이미 깨어 있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됐어요.”“왜 안 깨웠어요?”“자는 얼굴이 예뻐서.”해린이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아침부터 그런 말 하지 마요.”“왜요. 사실인데.”태준이 웃으며 이불 위로 드러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해린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오늘 출근해야 하잖아요.”“알아요.”“그럼 일어나요.”“5분만 더요.”“어제도 그런 말 했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태준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해린은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평범한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일이 좋았다.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특별한 사건 없이도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태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오늘 저녁에도 같이 먹어요.”“약속 있어요?”“없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는 거죠.”“제가 늦으면요?”“기다릴게요.”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해린은 그 말이 좋으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어제 도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태준은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보다 먼저 안아 주었고, 힘들었겠다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자신은 그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태준 씨.”“네.”“고마워요.”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갑자기요?”“그냥요.”“그럼 저도 고마워요.”“뭐가요?”“제 옆에 있어 줘서.”그는 해린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그러니까 오늘도 무사히 다녀와요. 저녁에 봐요.”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해린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향을 맡았다. 태준이 쓰는 우디 계열의 향수. 그리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왔어요?”소파에 앉아 있던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노트북을 보고 있던 그는 해린을 발견하자마자 화면을 덮었다.“아직 안 잤어요?”“해린 씨 기다렸는데요.”“늦는다고 연락했잖아요.”“알아요.”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기다리고 싶었어요.”별것 아닌 말인데도 해린의 마음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오늘 하루, 도하의 무너진 얼굴을 마주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일까. 자신을 향해 아무런 의심 없이 웃어 주는 태준을 보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해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태준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요.”“왜요?”“안아 주려고요.”해린은 작게 웃었다.“그런 걸 꼭 말해야 알아요?”“말 안 하면 안 와 줄 것 같아서요.”그 말에 해린이 먼저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태준의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체온이 온몸을 감쌌다. 해린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늘 힘들었어요?”그 질문에 해린은 눈을 감았다.“조금요.”“조금 아닌 것 같은데.”“…많이요.”솔직하게 대답하자 태준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그럼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저녁도 안 먹었는데요.”“제가 해 줄게요.”“태준 씨가요?”“왜요. 저 요리 못 할 것 같아요?”“솔직히 조금요.”태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사람을 뭘로 보고.”“유능한 변호사?”“그건 맞는데.”그가 웃으며 해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오늘은 유능한 남자친구도 좀 해 봅시다.”해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를 들은 태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루 종일 그녀가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웃게 해 주고 싶었다.그는 해린의 뺨을
“제가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도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해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누구를 만나러 가시는데요?”“…오래 알고 지낸 사람입니다.”“혹시 공범인가요?”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방금 도착한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민석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심지어 테이블 위에 놓인 손까지 선명했다.차이점이 있다면 단 하나. 그 남자는 도하가 지금껏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이도하 씨.”해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혼자 가시면 안 돼요.”“괜찮습니다.”“괜찮은 사람 목소리가 아닌데요.”그 말에 도하는 눈을 감았다. 해린은 늘 그랬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넘어갈 법도 한데,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그의 빈틈을 찾아냈다.그런 그녀에게조차 지금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변호사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말씀하세요.”“제가 확인할 때까지 오늘 받은 사진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 하나 할게요.”“네.”“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세요.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요.”도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약속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서늘해졌다.서강현. 도하가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곁을 지켜 온 매니저. 처음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부터 함께했고, 아무도 도하의 가능성을 믿어 주지 않던 때에도 끝까지 그의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데뷔가 무산될 뻔했을 때도.악성 루머에 시달렸을 때도.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때도.강현은 늘 같은 말을 했다.‘도하야. 네가 연기만 할 수 있게 내가 옆에서 다 정리할게.’도하는 그 말을 믿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일정과 연락처, 촬영장 위치, 이동 경로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해린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여기서 말씀하세요.”남자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경계가 심하시네요. 이도하 씨와 가까운 사이라서 그런 겁니까?”“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여기서 못 할 이유도 없겠죠.”“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오래 이야기할 생각은 없거든요.”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단정한 셔츠에 검은 코트,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하지만 해린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마주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도하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부터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최민석입니다. 이도하 씨 소속사에서 전략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해린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소속사 전략기획팀. 배우의 외부 일정과 광고 계약, 촬영 관련 자료를 관리하는 부서라면 내부 일정에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김도윤 씨를 아십니까?”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으니까요.”“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셨나요?”“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습니다.”“어떻게요?”“회사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도하 씨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이야기까지요.”해린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그런데 변호사님.”최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김도윤이 혼자 움직였다고 생각하십니까?”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을 확인한 남자가 작게 웃었다.“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팀장님은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죠?”“진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회사에 제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겠죠.”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하지만 이도하 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 곁에
월요일 아침.해린은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쌓인 서류부터 정리했다. 주말 동안 잠시 미뤄 두었던 사건 기록을 다시 펼치자,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의문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김도윤. 그가 납치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해린은 여전히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도하의 일정과 이동 경로, 촬영이 끝난 뒤의 동선까지. 우연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더구나 김도윤은 회사 내부에 공범이 있느냐는 질문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혼자 저지른 일이라면 왜 그렇게까지 숨기려고 하는 걸까. 해린은 펜 끝으로 서류의 한 부분을 짚었다.도하의 회사에서 제공받은 촬영 일정표였다. 외부에 공개된 일정과 내부 직원들만 확인할 수 있는 일정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납치범이 알고 있던 정보는 대부분 후자에 속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회사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거나, 내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해린은 휴대전화를 들어 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도하 씨, 오늘 회사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변호사님, 아침부터 저를 찾으시다니. 혹시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해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중요한 일 때문에 여쭤보는 겁니다.][아쉽네요. 저는 중요한 일보다 변호사님이 보고 싶으신 줄 알았는데.][장난 그만하시고요.][오전에는 회사에 있습니다. 오후에는 외부 미팅 하나 있고요. 무슨 일이십니까?]해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회사 내부 자료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말씀드릴게요.]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화면을 내려다보던 해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몇 초 뒤, 전화가 걸려 왔다.“변호사님.”평소보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회사 자료를 확인하시겠다고요?”“네. 김도윤 씨가 알고 있던 정보가 어디에서 유출됐는지 확인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