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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당신이 몰랐던 그날 밤

Author: 노에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16:47:37

밤 10시. 서울의 한 호텔 라운지. 강태준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9시 58분. 차해린이 들어왔다. 오늘도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태준을 발견하자 곧장 걸어왔다.

“기다렸어요?”

“두 시간쯤.”

 

해린이 시계를 바라봤다.

“제가 10시에 오라고 했는데요.”

“알아요.”

“그럼 왜 두 시간이나 일찍 왔어요?”

태준이 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안 올까 봐.”

해린이 웃었다.

“의외네요.”

“뭐가요?”

“강태준 변호사님도 불안할 때가 있구나.”

“당신 때문에 생겼습니다.”

해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의자에 앉았다.

“뭐 마실래요?”

“아무거나.”

태준이 직원에게 주문한 뒤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말해요.”

“뭘요?”

“왜 사라졌는지.”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날 밤 기억나죠?”

“잊을 리가 없죠.”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요.”

태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왜?”

“당신을 기억하면 안 됐으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그날 밤 만나기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뭐?”

“강태준.”

처음으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날 밤 처음 본 남자가 아니었어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린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곳에 온 이유도 알고 있었고.”

“…….”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도 알고 있었어요.”

태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설명해.”

“그날 당신이 맡고 있던 사건.”

해린이 말했다.

“내가 맡고 있던 사건이기도 했어요.”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럼 처음부터 나한테 접근한 겁니까?”

“아니요.”

“그럼?”

“우연이었어요.”

“그걸 믿으라고?”

“믿든 말든.”

해린은 태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날 밤 당신이 누군지 알게 된 순간에도 나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왜?”

해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당신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 나랑 잤죠.”

해린의 시선이 잠시 내려갔다.

“그래서 다음 날 사라진 거예요.”

“…….”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태준이 비웃듯 웃었다.

“그럼 왜 그날 밤에는 그렇게까지 했는데?”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해린.”

“…….”

“나를 유혹한 것도 계획이었습니까?”

그 질문에 해린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아주 잠깐. 그러나 태준은 봤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그건 계획 아니었어요.”

태준의 숨이 멎었다. 해린은 시선을 피했다.

“그날 밤만큼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도 아무 생각 안 하고 싶었어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린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나한테서?”

“아니요.”

그녀가 그를 바라봤다.

“나 자신한테서.”

정적이 흘렀다. 태준은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그럼 지금은?”

“뭐가요?”

“지금은 도망치고 싶습니까?”

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요.”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섰다.

“그럼 나한테서 도망가지 마.”

해린이 그를 올려다봤다.

“왜요?”

“이번에는 내가 쫓아갈 거니까.”

“…….”

“어디까지 가든.”

태준이 낮게 말했다.

“끝까지.”

해린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웃었다.

“강태준.”

“네.”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녀가 웃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고.”

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누가 더 위험한지는 아직 모르죠.”

“그럼 확인해볼래요?”

“어떻게?”

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준의 바로 앞에 섰다.

“내일.”

“내일?”

“법정에서.”

 

그녀가 낮게 말했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건.”

태준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해린이 웃었다.

“내일 제가 그 사건을 뒤집을 겁니다.”

“차해린.”

“왜요?”

“그건 선전포고입니까?”

“네.”

그녀가 돌아섰다. 그러다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강 변호사님.”

“…….”

“그날 밤 내가 사라진 이유.”

해린이 뒤돌아봤다.

“아직 다 말한 거 아니에요.”

태준의 눈빛이 굳었다.

“뭐가 더 있는데?”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일 알려줄게요.”

문이 닫혔다. 태준은 홀로 남았다.

그날 밤. 처음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던 여자. 그리고 아직 말하지 않은 이유. 그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해린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한 가지.]

잠시 후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그날 밤, 당신을 선택한 건 나였어요.]

태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당신이 선택해요.]

태준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자신이 게임을 시작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준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봤다.

 

[그날 밤, 당신을 선택한 건 나였어요.]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조금 빨랐다. 그는 이런 감정을 싫어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먼저 판을 읽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 차해린과 있으면 계속 그랬다. 한 발 앞서고, 한 발 물러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그의 다음 수를 읽었다. 태준은 피식 웃었다.

 

“재수 없게 잘하네.”

그때였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해린이었다. 태준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아직 안 갔죠?”

“당신이 나가고 5분밖에 안 됐습니다.”

“그럼 잘됐네요.”

“뭐가요?”

 

잠시 침묵. 그리고 해린이 말했다.

“내일 재판 자료, 지금 확인해보세요.”

태준의 눈빛이 변했다.

“왜?”

“강태준 씨라면 지금쯤 궁금해하고 있을 것 같아서.”

“……차해린.”

“네.”

“지금 나 놀리는 겁니까?”

해린이 작게 웃었다.

“조금.”

“후회할 텐데.”

“그럴까요?”

“내일 법정에서 봅시다.”

“네.”

“그리고.”

태준이 낮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졌다고 생각할게요.”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대신 내일은 아닐 겁니다.”

해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대할게요.”

뚝. 전화가 끊겼다. 태준은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해린이 말한 자료를 확인했다. 처음 몇 장은 별것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 태준의 손이 멈췄다.

그가 그동안 찾지 못했던 자료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료의 작성일. 홍콩에서 차해린과 만났던 바로 그날.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설마.”

그는 즉시 자신의 사건 파일을 다시 열었다. 두 자료를 번갈아 확인했다. 연결된다. 분명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날 밤.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었던 이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사라진 이유.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날 밤, 자신과 차해린을 일부러 같은 장소에 있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

다음 날. 법정. 

태준은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해린은 이미 와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아닙니다.”

“왜요?”

태준이 그녀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설명해.”

해린은 서류를 보지도 않았다.

“뭘요?”

“그날 있었던 일.”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

“알고 있었죠.”

“뭘요?”

“그날 밤 우리가 만난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

해린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제 알아냈네요.”

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전부는 아니에요.”

“그럼 어디까지?”

“당신이 홍콩에 간 이유.”

“그건 알고 있었고.”

“네.”

“내 의뢰인이 누구인지도?”

“네.”

“그런데 나한테 접근한 게 아니라고?”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당신에게 접근한 건 아니에요.”

“그럼?”

“당신이 나한테 접근했죠.”

태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뇨.”

해린이 한 걸음 다가섰다.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하나만 묻죠.”

“뭔데요?”

“그날 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말 아무 감정도 없었습니까?”

해린의 표정이 흔들렸다. 태준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한 걸음 가까이.

“당신이 나를 보던 눈.”

또 한 걸음.

“내가 가까이 갔을 때 피하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려고 했을 때 나를 붙잡았던 것도.”

해린의 숨이 순간 멎었다. 태준이 낮게 웃었다.

“그것까지 전부 작전이었습니까?”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법정 안에서 재판부가 들어왔다.

“모두 착석하십시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오늘도 서로의 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태준은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중심에 차해린이 있다는 것도.

재판이 시작됐다. 해린이 먼저 일어섰다.

“재판장님.”

차분한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저희 측에서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해린이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자료는 피고 측이 지난 3년간 은폐해온 내부 기록입니다.”

법정이 술렁였다. 태준은 서류를 받아들었다. 첫 페이지를 확인한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문서 마지막에 찍힌 서명. 강태준의 의뢰인과 차해린의 의뢰인이 함께 진행했던 비밀 계약.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아주 작게 웃었다. 마치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태준도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차갑고 집요한 미소였다.

좋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비밀을 전부 파헤친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그녀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은 건, 변호사로서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차해린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이, 생각보다 싫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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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린 씨.”“네?”“저 안 보고 싶었어요?”해린은 눈앞의 남자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오늘 아침에도 봤잖아요.”“아침에 본 거랑 지금 보는 건 다르죠.”“뭐가 다른데요?”“아침에는 출근하는 해린 씨를 봤고, 지금은 저랑 데이트하는 해린 씨를 보잖아요.”태준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해린의 앞에 놓인 물잔을 채워 주었다.“그러니까 지금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해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태준 씨는 정말 못 당하겠어요.”“그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칭찬 아니에요.”“그래도 듣고 싶은 대로 듣을게요.”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사건 기록을 검토하던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태준은 오늘 하루 종일 바빴다. 오전에 처리해야 할 사건이 있었고, 오후에는 의뢰인과의 면담까지 잡혀 있었다. 해린 역시 김도윤의 심문과 회사 내부 공범에 관한 확인 작업으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그런데도 태준은 저녁 약속을 미루지 않았다. 오히려 해린이 도하의 상담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느라 늦는다고 했을 때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미안했던 해린이 먼저 물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아니요.”“정말요?”“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해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거짓말.”“…티 났어요?”“태준 씨는 거짓말할 때 왼쪽 눈썹이 조금 올라가요.”태준이 순간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웃었다.“그런 것까지 알고 계셨어요?”“당연하죠. 제가 태준 씨를 얼마나 오래 봤는데요.”그 말에 태준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러네요.”그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해린의 손끝에 자신의 손끝을 가볍게 맞댄 뒤,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저도 해린 씨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그런데요?”“아직도 새롭게 알게 되는 게 많네요.”태준이 그녀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그래서 계속 보고 싶나 봅니다.”해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태준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

  •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40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믿으시겠어요?”김도윤이 웃으며 물었다. 해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침묵도, 변호사를 부르는 태도도, 지금의 여유로운 미소까지. 전부 계산된 행동처럼 보였다.“믿고 싶지 않은데요.”해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김도윤 씨가 혼자였다는 말을요.”도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그럼 제가 누구랑 같이했다고 생각하십니까?”“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죠.”해린은 테이블 위의 서류를 앞으로 밀었다.“촬영장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알았습니까?”“인터넷에도 정보는 많잖아요.”“공개되지 않은 정보였습니다.”“그럼 내부자가 유출했겠네요.”“그 내부자가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제가 어떻게 압니까?”“김도윤 씨.”해린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지금 저랑 말장난하자는 건 아니겠죠?”“제가 아는 게 없어서요.”“정말 아무도 모릅니까?”“네.”도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저 혼자 했습니다.”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해린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고른다. 그런데 김도윤은 마치 정해진 문장을 반복하듯 같은 대답만 내놓고 있었다.누군가에게 미리 준비된 답변을 받은 사람처럼. 해린은 서류를 다시 정리하며 물었다.“그럼 하나만 더 확인하겠습니다.”“말씀하세요.”“당신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까?”도윤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나 해린은 보았다.“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모르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해린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대신 기억해 두세요. 혼자 책임지겠다는 선택이 다른 사람을 지켜 주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에서 일하고 있겠죠.”김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해린은 그제야 확신했다. 자신이 짚은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회사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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