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첫사랑이자 사실혼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던 날, 하여울은 그 남자의 아이를 잃었다. 5년 뒤 재벌가의 사위가 되어 돌아온 석진은 말한다. “여울아, 내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적이 있던가?” 여울이 태강그룹 후계자 강건의 직속 비서가 되자, 석진은 그녀를 ‘재벌가 후계자를 꼬신 꽃뱀’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을 잃은 여울에게 강건이 내민 것은 1년짜리 혼인계약서. 그렇게 여울은 전무님의 아내가 되고, 첫사랑은 자신의 시매부가 된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결혼은 점점 진짜가 되어가고, 여울을 되찾으려는 첫사랑의 집착은 더 잔인해진다. 나를 버린 첫사랑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그의 처남과 결혼했다.
View More타닥, 타닥타닥.
사무실은 조용했다.
오전 내내 복도를 기어 다니던 웅성거림은 여울이 자리에 앉자 거짓말처럼 끊겼다. 남은 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더 세게 치는 것처럼 또렷했다.
여울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따갑기보다 끈적했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황급히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모니터 옆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태강 후계자 노린 H대리, 초고속 발탁 뒤엔 심야 밀회?]
굵은 제목 아래 강건의 차에서 나오는 자신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전략기획실에서 하루아침에 전무 직속으로 옮겨 간 여자.
밤늦게 전무가 집까지 데려다 준 여자.하여울.
누가 출력해 두고 갔는지는 알 필요 없었다.
누구든 될 수 있었으니까.전략기획실에서 버틴 5년이 사진 몇 장 아래 한 줄로 정리돼 있었다. 실적도, 야근도, 다음 달로 예정된 과장 승진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무에게 붙어 올라간 여자.
그날 석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거기 계속 있으면 네 5년이 물거품 될 수도 있어. 결국 기사 한 장이 그 말을 현실로 만들어 놓았다.지이잉-.
휴대전화가 울렸다.
변석진.
부재중 통화 7건.
[여울아. 전화 받아.]
[내가 말했잖아. 강건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지금이라도 내가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게.] [끝까지 안 받으면 내가 찾아간다.]여울은 화면을 내려다보다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탁.
손끝이 떨렸다. 무릎 아래로 손을 숨기고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사흘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기사보다 그 이름이 먼저 따라 들어왔다.
“하 대리님.”
옆자리 김현실 주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괜찮으세요?”
괜찮냐는 말은 어느새 안부보다 구경값에 가까웠다.
여울은 입꼬리만 올렸다.
“괜찮아.”
견디는 건 할 수 있었다. 그건 오래전부터 잘했다.
다만 이번에는 더 견디고 싶지 않았다.여울은 기사 출력물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새 문서를 띄웠다.
하얀 화면 위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한참을 바라보다 제목을 입력했다.
사직서.
이번에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 똑똑.전무실 앞에서 여울이 숨을 골랐다.
“들어오세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드러워서 더 서늘했다.
철컥.
문을 열자 통유리 너머로 오후의 서울이 내려다보였다. 강건은 대리석 책상 너머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흰 셔츠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린 채였다.
여울이 들어서자 펜 끝이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여울은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수리해 주세요.”
강건의 시선이 봉투로 내려갔다.
“뭡니까.”
“사직서요.”
이번에는 펜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제가 사라지는 게 제일 깔끔할 것 같아서요.”
“누구한테.”
여울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모두한테요.”
강건의 손가락이 봉투 가장자리를 느릿하게 눌렀다.
“앉아요.”
“전무님.”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여울이 자리를 옮기자 강건도 맞은편에 앉았다. 사직서는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서류 한 부를 여울 앞으로 밀었다.
“읽어보고 사인해요.”
겉장의 글자를 본 여울의 시선이 멈췄다.
[혼인계약서]
“……이게 뭐예요, 전무님.”
“제목 그대로입니다.”
강건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와 결혼합시다.”
여울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랑요?”
“여기 우리 둘뿐인데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헛웃음이 새었다.
“미치셨어요?”
강건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부터 미쳐볼까 합니다.”
웃음이 멎었다. 그의 얼굴에는 농담의 흔적이 없었다.
“일단 읽어보세요.”
- 계약기간 1년.
- 혼인신고 필수. - 계약 종료 후 합의이혼.그리고 마지막 줄.
[계약 종료 시 이혼합의금 10억 원.]
여울의 시선이 숫자에서 멈췄다.
10억.
누군가에게는 계약서 한 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몇 년을 죽어라 일해도 손에 쥘 수 없는 돈이었다.
“1년 동안 전무님 아내로 살면서 지금 하던 일을 계속하면 10억을 준다고요?”
“그렇습니다.”
“저 지금 사직하겠다고 들어왔어요.”
“알고 있습니다.”
강건은 책상 위에 남겨둔 사직서를 한번 바라봤다.
“그래서 이걸 내민 겁니다.”
여울의 눈썹이 움직였다.
“무슨 뜻이에요.”
“하 대리가 사라지면 아주 깔끔하게 끝나니까.”
“…….”
“우리가 보던 것도.”
48억.
여울의 눈빛이 달라졌다.
강건이 등을 소파에 기대었다.“사진이 터지고, 하 대리가 그만두고, 나와 떨어집니다.”
그가 짧게 덧붙였다.
“누군가에게는 꽤 마음에 드는 결말이겠죠.”
“그렇다고 결혼을 해요?”
“반대로 가보려고요.”
“뭘요.”
강건이 계약서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이 정도까지 했으면.”
그의 시선이 여울에게 올라왔다.
“아예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여울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게 결혼이고요?”
“가장 확실하죠.”
“저 말고도 전무님을 도울 사람은 많습니다.”
“이번 일은 아닙니다.”
강건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48억을 처음 이상하다고 본 것도 하 대리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하 대리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나가겠다고 하잖습니까.”
“이 상태로 계속 있으라고요?”
“그럴 생각입니다.”
강건은 여울 앞에 놓인 계약서를 다시 한번 밀었다.
“그리고.”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진이 우연히 찍힌 게 아니라는 것까진 확인했습니다.”
여울의 호흡이 멎었다.
“……누가요?”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럼 제가 나가는 게 더 낫잖아요.”
“아니요.”
대답은 빨랐다.
강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하 대리가 나가면 저쪽이 원하는 대로 됩니다.”
“그렇다고 결혼한다고 사람들이 입을 다물 것 같아요?”
“다물게 해야죠.”
“어떻게요.”
강건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내 아내를 꽃뱀이라고 부르는 건 태강을 건드리는 일이 됩니다.”
여울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됐다.
“그 정도 값은 치르게 해야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여울은 문득 생각했다. 이 남자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도 협박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심됐다. 자신을 짓밟은 사람들보다 훨씬 큰 힘이 이번에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전무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무슨 뜻입니까.”
여울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계약을 하려면 말해야 했다.
“변석진 상무랑 저.”
잠깐 숨을 골랐다.
“오랫동안 사실혼 관계였습니다.”
강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변석진 상무가요?”
“네.”
“내 매제 말입니까.”
“네.”
짧은 대답 뒤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울이 먼저 말을 이었다.“5년 전에 아무 말 없이 결혼했고, 이번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강건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여울은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 저한테 계속 관여하고 있어요.”
“…….”
“그러니까 저랑 결혼하면 전무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여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전무님 여동생도 다치게 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강건의 손끝이 멈췄다.
째깍.
벽시계 초침이 두 사람 사이를 잘랐다. 강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여울도 기다렸다. 이건 그가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강건이 계약서를 다시 그녀 앞으로 밀었다.“합니다.”
여울의 눈썹이 움직였다.
“……정말요?”
“내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제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시면서요.”
“그 정도는 압니다.”
“뭘요.”
“도망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강건의 시선이 책상 위 사직서로 내려갔다.
“오늘만 빼면.”
여울의 입술이 굳었다.
“이건 도망이 아니에요.”
“그럼 증명해 보세요.”
정확히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었다. 여울은 한동안 강건을 바라봤다. 그리고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좋아요.”
강건의 눈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해보죠.”
“이 결혼.”
여울이 빈 서명란을 손끝으로 쓸었다.
“전무님만 이용하시는 거 아니에요.”
강건의 눈매가 좁아졌다.
“나도 이용하겠다?”
“네.”
“어디에.”
변석진의 얼굴이 스쳤다. 여울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치정이라고 해두죠.”
“구체적으로.”
“거기까지는 제 일입니다.”
여울이 펜을 들었다.
“방해하지 않으시면 사인할게요.”
강건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날 이용해요.”
여울의 손이 멈췄다.
“대신 내 눈 밖에서는 하지 마십시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계약 얘기였다.
분명 그럴 텐데.
말은 이상하게 다른 데까지 닿았다.여울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사각.
하여울.
검은 글씨가 빈칸을 채웠다.
도망치려고 사직서를 들고 들어온 방에서, 이번에는 제 발로 다른 이름을 골랐다.강건이 계약서를 가져갔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강건.
탁.
펜이 놓였다.
“됐군요.”
강건이 일어나 재킷을 집었다.
“혼인신고 하러 갑시다.”
여울의 눈이 커졌다.
“……지금요?”
“사인했잖습니까.”
“니가 좀 바빠져야겠다.”강태환이 책상 위의 서류를 석진 쪽으로 밀었다.석진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회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검찰 놈들이 움직인다카데.”그제야 석진의 눈빛이 달라졌다.“어느 쪽입니까.”“반부패.”석진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정식 보고서도, 공문도 아니었다. 몇 개의 법인명과 계좌번호, 담당 검사 이름이 간략하게 정리된 메모에 가까웠다.태강홀딩스.태강증권.태강문화재단.석진의 시선이 차례로 이름들을 훑었다.“내사 단계입니까?”“그건 아이다.”강태환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국세청 개놈들도 냄새 맡은 것 같드라.”석진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어디까지 알고 있답니까.”강태환이 피식 웃었다.“그걸 알았으면 내가 니를 왜 불렀겠노.”“…….”“검찰 쪽에서 귀띔만 해준 기다. 요 며칠 움직임이 심상찮다고.”석진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강태환에게 이런 이야기를 흘려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검찰도, 정계도, 정부 부처도. 태강을 반세기 가까이 끌고 온 남자가 가진 건 돈과 회사만이 아니었다.사람이었다.“압수수색까지 예상하십니까.”“뭐라도 뜯어먹을라꼬 그 시커먼 놈들이 안 들이닥치겄나?”강태환의 대답은 태연했다.“들이닥치고 나서 준비할라꼬?”석진이 입을 다물었다.강태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장부든 계약서든 돈이든, 어디서 뭘 들고 가도 앞뒤는 맞아야 된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석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별도 프로젝트팀 꾸리겠습니다.”“단디해.”“재무전략본부를 중심으로 법무, 회계, 전략 쪽 인력을 차출하겠습니다. 최근 5년 주요 계약과 자금 집행부터 전부 다시 보겠습니다.”“티 안 나구로.”“전략 리스크관리 프로젝트로 올리겠습니다.”강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좋네.”석진은 잠시 망설이다 들고 온 다른 파일을 꺼냈다.“그리고 하나 더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강태환의
강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곧바로 하상만의 팔을 놓았고, 하상만은 손목을 움켜쥔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아이고, 사람 손목을 아주 부러뜨릴 작정이었네.”강건은 잠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조금 전과는 목소리부터 달라져 있었다.하상만은 손목을 문지르며 투덜거리다가 그제야 강건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봤다. 키부터 압도적이었다. 몸에 맞춘 검은 정장과 반듯한 셔츠, 잘 닦인 구두까지,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사람이 음식물 냄새가 나는 골목 한복판에 서 있었다.하상만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잠깐만.”여울을 한번 보고 다시 강건을 봤다.“혹시…….”강건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건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하상만의 눈이 커졌다. 입이 조금 벌어지더니 다시 한번 강건을 위아래로 훑었다.“아…… 진짜 사위네.”여울이 미간을 짚었다.“아빠.”하상만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눈앞에서 재벌을 본 사람처럼 강건의 얼굴부터 옷, 시계까지 연신 훑더니 감탄을 흘렸다.“이야…… 재벌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만.”강건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다시 고개를 숙였다.“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제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여울이 그를 돌아봤다.조금 전까지 하상만의 팔을 꺾고 있던 남자가 정말 사위가 된 사람처럼 깍듯했다.“아니, 뭐……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하상만도 급히 낡은 점퍼 앞섶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강건에게 욕을 퍼붓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고, 태도마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여울은 그게 더 불안했다.“아빠, 이제 가.”“잠깐 있어 봐.”“뭘 또.”하상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강건을 몇 번 힐끗거리던 시선에 아쉬움이 묻어났다.“사위가 재벌인데 좀 섭하네.”여울의 눈썹이 꿈틀했다.“아빠.”“장인 처음 봤으면 용돈이라도 좀 쥐여줄 줄 알았더니.”여울의 얼굴이 굳었다.
주변의 고개가 하나둘 더 돌아왔다.여울의 얼굴이 굳었다.“아빠.”“야, 사위는 어디 있어? 강 전무가 진짜 내 사위 맞….”여울이 하상만의 팔을 낚아챘다.“나와.”“야, 야. 왜 이래.”“나오라고.”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로비를 빠져나가 건물 옆길을 돌고, 다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태강 본사의 반듯한 외벽이 사라지자 풍경이 단숨에 바뀌었다.식당 뒤편으로 검은 음식물쓰레기통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젖은 종이박스와 빈 술 상자가 벽을 따라 높게 쌓여 있었다. 환풍구에서는 뜨거운 연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으며, 오래된 기름 냄새와 오물 냄새가 축축한 골목 안에 뒤섞여 있었다.여울은 사람 없는 곳까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걸었다.그제야 하상만의 팔을 놓았다.“여긴 왜 왔어.”“뭐?”“회사에 왜 왔냐고.”하상만이 오히려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너 결혼한 걸 아빠한테 왜 말 안 했어?”“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내가 어디서 나오는 길인 줄 알아?”여울의 표정이 멈췄다.“……어디서.”하상만이 괜히 어깨를 한번 폈다.“니네 회장 만나고 오는 길이야.”여울의 입술이 벌어졌다.“뭐?”“어제 연락 왔더라. 아침 일찍 보자고.”“하…….”여울이 이마를 짚었다가 곧바로 손을 내렸다.“아빠 미쳤어?”“뭐가.”“거길 어디라고 가!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말할 새가 없었다니까? 어제 연락 왔는데 뭘 어떻게 해.”여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아무튼.”억지로 목소리를 낮췄다.“무슨 얘기했는데?”하상만은 기다렸다는 듯 소매를 걷었다.“이거 주더라.”여울의 시선이 손목에 꽂혔다.처음 보는 시계였다.“……그게 뭐야.”“뭐긴, 시계지.”“누가 줬냐고.”“니 시아버지.”여울의 얼굴이 굳었다.“그걸 왜 받아?”“준다는데 왜 안 받아.”하상만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이거 천만 원도 넘는다더라.”“…….”“야, 내가 로또도 이런 로또를 맞네.”여울의 눈빛이 확 변했
다음 날 아침.검은 세단이 태강홀딩스 정문 앞에 멈췄다.여울은 안전벨트를 풀다가 창밖을 한번 내다봤다. 출근 시간이 한창이라 정문을 오가는 직원들이 많았다.“여기서 먼저 내릴게요.”강건이 시선을 돌렸다.“왜요.”“같이 들어가면 또 말 나오잖아요.”“어제 결혼했습니다.”“알아요.”“회사 사람들도 곧 알게 될 거고.”여울이 가방을 챙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러니까 더 싫은 거예요.”강건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이미 늦은 것 같은데.”“전무님은 남의 일이라고 참 편하시네요.”“내 결혼인데 왜 남의 일입니까.”여울이 그를 쳐다봤다.강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먼저 차에서 내렸다.결국 여울도 따라 내렸다.두 사람이 나란히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어제와 같은 로비였고, 같은 출근 시간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어제는 노골적이었다.전무에게 붙어 올라간 여자.꽃뱀.사진 몇 장으로 5년을 설명할 수 있는 여자.오늘도 시선은 따라붙었다. 수군거림도 있었다. 다만 여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먼저 고개가 숙여졌다.“안녕하십니까, 전무님.”강건에게 향한 인사였지만 여울에게도 함께 허리가 굽혀졌다.어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을 위아래로 훑었던 직원도 있었다. 오늘은 눈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여울은 말없이 걸었다.어제와 오늘 사이 자신이 달라진 건 없었다.밤사이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잘못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다만 이름 뒤에 하나가 붙었다.강건의 아내.그것만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씁쓸했다.“왜 그렇게 봅니까.”강건이 옆에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거짓말 같은데.”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번에는 아무도 먼저 타지 않았다.강건이 들어간 뒤 여울이 뒤따르자 그제야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여울은 숫자가 올라가는 것만 바라봤다.어제는 자신을 피하지 않던 눈들이 오늘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