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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0 14:13:54

"이야, 늦어서 미안하다. 귀찮은 놈들 좀 정리하고 오느라. 회장님 되실 분이 부르는데 내가 빠질 수 있나."

박성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양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의 합류로 10년 전 진우를 괴롭혔던 악마들의 핵심 멤버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한 힘을 가진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냐?"

이유준이 분위기를 띄우려 물었다.

"재미있는 거? 글쎄… 아,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회 나갔는데, 애들이 그러더라. 옛날에 우리한테 맨날 쳐맞고 살던 김진우 새끼 기억나냐고."

박성호가 무심하게 던진 이름에, 강태민과 이유준의 얼굴에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아, 그 찐따 새끼? 걔 어떻게 됐는데?"

"다리에서 뛰어내렸잖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뒤로 학교에서 사라졌잖아. 갑자기 걔 생각이 왜 나냐?"

강태민이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그의 기억 속 김진우는 그저 잠시 가지고 놀았던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니, 그냥. 우리가 너무 심했나 싶기도 하고. 푸하하!"

박성호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준도 따라 웃었다.

"심하긴 뭐가 심해. 약한 게 죄지. 지금쯤 어디 공사판에서 막노동이나 하고 있겠지. 주제 파악하고 그렇게 사는 게 그놈한테는 행복일 수도 있어."

이유준이 잔인한 말을 미소와 함께 내뱉었다. 그들에게 김진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과거의 얼룩.

그들은 자신들이 짓밟았던 한 소년의 영혼이, 복수의 칼날이 되어 자신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또다시 오만한 웃음소리와 함께 술잔을 부딪쳤다.

---

다음 날 새벽, 인천 국제공항.

VIP 전용 게이트가 조용히 열리고, 검은색 코트 차림의 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란한 환영 인파도, 플래시 세례도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는 10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출국장 밖에는 단 한 대의 검은색 마이바흐 세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옆에 선 중년의 남자가 진우를 발견하고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이석호입니다."

이석호. 한때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의도를 호령했던 천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세월의 풍파와 패배의 상처가 그의 얼굴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진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만은 존경과 충성심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구원해준 은인, '유령'의 실체를 마주한 경외감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 실장."

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석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자신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나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차에 오르자, 이석호가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

"본사로 바로 모실까요? 강남에 대표님께서 지내실 사무실과 거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진우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벽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득한 곳을 향했다.

"아니. 한강으로 가줘."

"…네? 한강 말입니까?"

"내가 뛰어내렸던 다리로."

이석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말없이 차를 몰았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마이바흐는 서울의 심장부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거대한 다리 위에서 멈춰 섰다. 진우는 차에서 내려 난간으로 걸어갔다. 10년 전, 모든 것을 포기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새벽 강바람이 칼날처럼 그의 뺨을 스쳤다. 그는 난간 아래로 검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10년 전, 연약했던 소년 김진우는 이 물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 다니엘 킴이 태어났다.

그때의 절망과 공포가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듯했지만, 이내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휩쓸려 사라졌다.

"보고 있나? 강태민, 이유준, 박성호… 그리고 너희들 모두."

그는 강물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그들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너희들이 죽여버린 김진우가, 지옥에서 돌아왔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그는, 이내 차가운 결심을 굳힌 얼굴로 몸을 돌렸다. 차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이석호에게 다가간 그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냉혹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석호 실장."

"네, 대표님. 말씀만 하십시오."

"태산 바이오의 주가를 인위적으로 부양시켜. 우리가 가진 자금력을 이용해 시장에 '엄청난 호재가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거야. 개미 투자자들과 기관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게 만들어. 탐욕의 축제를 벌이는 거지."

이석호의 눈이 커졌다. 적대적 M&A나 공매도를 예상했던 그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지시였다.

"주가를… 올리라고요?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습니까?"

진우의 입가에 사냥꾼의 미소가 걸렸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줘야, 떨어졌을 때 더 아픈 법이거든. 우리는 그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거대한 절망을 선물할 거야. 축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우리가 준비한 '진실'이라는 폭탄을 터트린다."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태산 바이오를 단순한 상장폐지가 아니라, 대한민국 주식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만들어. 강태민이 자신의 경력과 그룹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하는 것. 그게 이번 사냥의 첫 번째 목표다."

이석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 사냥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복수극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거대한 복수극의 가장 중요한 배우가 된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석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우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의 시선은 이제 강물이 아닌, 서울의 마천루들이 즐비한 강남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그의 사냥감들이 있었다.

"출발하지. 우리의 사냥터로."

포식자가 돌아왔다. 이제 이 도시는 거대한 사냥터가 될 것이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던 자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하나씩, 하나씩 끌어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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