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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다시 봄, 같은 길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05:26:30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열여섯이 된 햇살은 교문 앞 벚나무 아래에서 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보다 조금 길어진 교복 치맛자락 아래로 운동화 끝이 까딱거렸다.

멀리서 우식이 걸어오자 햇살이 손을 흔들었다.

“소우식!”

우식은 뛰지 않았다.

평소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왜 먼저 왔어.”

“오늘 미술실 일찍 가려고.”

햇살은 가방 지퍼를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필통 옆에는 나무 들꽃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우식의 시선이 멈췄다.

“아직 가지고 다녀?”

“응.”

“왜.”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네가 줬잖아.”

그게 이유의 전부라는 얼굴이었다.

우식은 더 묻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춘식과 노향이 창문 쪽에서 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춘식은 새로 자른 머리를 자랑했고, 노향은 군밤장수 같다고 놀렸다.

햇살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너희는 한 살 더 먹어도 똑같다.”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 둘도 그렇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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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40화. 강 건너 불빛

    초여름 저녁, 시내 강변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학교가 끝나자 네 사람은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정류장에 내리기도 전부터 음악 소리가 들렸고, 강변 길에는 어묵과 호떡, 솜사탕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춘식은 가장 먼저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야, 저거 먹자!” 노향이 한숨을 쉬었다. “버스 타기 전에 핫도그 먹었잖아.” “그건 간식이고.” “저것도 간식이야.” 햇살은 웃으며 둘 사이를 지나갔다. 우식은 늘 그렇듯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강변 난간에는 색색의 전구가 길게 매달려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햇살은 난간에 팔을 올리고 강 건너를 바라봤다. “예쁘다.” 우식이 옆에 섰다. “응.” “서울에도 이런 건 많은데.” “응.” “근데 여기가 더 좋아.” 우식이 햇살을 봤다. “왜.” “조용하잖아.” 햇살이 웃었다. “너처럼.” 그때 강 건너에서 폭죽 하나가 올라갔다. 펑. 햇살이 놀라 우식 쪽으로 한 걸음 붙었다. 팔이 닿았다. 우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 놀랐어?” “응.” “나는 조금 놀랐는데.” “알아.” “어떻게 알아?” “봤어.” 햇살이 피식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향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식이 햇살을 보는 눈은 늘 조금 달랐다. 말은 똑같이 짧았고 표정도 거의 없었지만, 햇살이 움직이면 시선이 따라갔다. 햇살이 웃으면 아주 잠깐 입술 끝이 풀렸다. 예전부터 보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가슴이 조금 아팠다. “야.” 춘식이 옆에서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어묵 국물.” “네가 웬일로 남 걸 챙겨.” “두 개 받았어.” 노향은 컵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 가까이 올라왔다. “고마워.” 춘식이 괜히 앞만 봤다. “별걸 가지고.” 한참 뒤 네 사람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난간에는 자물쇠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햇살이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왜 달아놨어?” 춘식이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39화. 한쪽으로 기운 우산

    봄비는 예고 없이 내렸다.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운동장 흙이 검게 젖었고, 처마 끝에서는 빗물이 줄처럼 떨어졌다. 춘식이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산 없는데.” 노향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마트 앞까지만 같이 써.” 춘식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진노향밖에—” “붙지 마. 좁아.” 둘이 먼저 복도로 나갔다. 햇살도 가방에서 노란 꽃무늬 우산을 꺼냈다. 몇 년 전 우식이 건네줬던 우산이었다. 맨 뒷자리 우식은 빈손이었다. 햇살이 물었다. “우산은?” “안 가져왔어.” “같이 가.” 우식은 작은 우산을 한번 봤다. “좁아.” “내가 작은데 뭐.” “내가 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비 맞고 가든가.” 우식은 잠깐 생각하더니 우산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 둘이 현관 밖으로 나가자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식이 우산을 들면 햇살 쪽은 넉넉했지만 그의 오른쪽 어깨가 그대로 비에 젖었다. 햇살이 손잡이를 밀었다. “너 젖어.” 우식은 다시 햇살 쪽으로 기울였다. “괜찮아.” “안 괜찮아.” “난 괜찮아.” “나는 안 괜찮다고.” 햇살이 우식 쪽으로 바짝 붙었다.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우식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빗소리가 우산 위로 촘촘히 떨어졌다. 햇살도 뒤늦게 가까워진 거리를 알아챘다. 고개를 들자 우식의 턱선이 바로 옆에 보였다. 괜히 앞만 봤다. “우식아.” “응.” “너 여자애랑 우산 같이 써본 적 있어?” “없어.” “내가 처음이네?” “응.” 햇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나도.” “뭐가.” “남자애랑 같이 쓰는 거.” 우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논길에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생겨 있었다. 햇살이 큰 웅덩이를 피해 우식 쪽으로 붙을 때마다 팔이 스쳤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거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마을 갈림길에 다다르자 햇살의 집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38화. 다시 봄, 같은 길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열여섯이 된 햇살은 교문 앞 벚나무 아래에서 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보다 조금 길어진 교복 치맛자락 아래로 운동화 끝이 까딱거렸다. 멀리서 우식이 걸어오자 햇살이 손을 흔들었다. “소우식!” 우식은 뛰지 않았다. 평소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왜 먼저 왔어.” “오늘 미술실 일찍 가려고.” 햇살은 가방 지퍼를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필통 옆에는 나무 들꽃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우식의 시선이 멈췄다. “아직 가지고 다녀?” “응.” “왜.”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네가 줬잖아.” 그게 이유의 전부라는 얼굴이었다. 우식은 더 묻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춘식과 노향이 창문 쪽에서 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춘식은 새로 자른 머리를 자랑했고, 노향은 군밤장수 같다고 놀렸다. 햇살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너희는 한 살 더 먹어도 똑같다.”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 둘도 그렇거든.” “우린 왜?” 햇살이 묻자 노향은 대답 대신 우식 쪽을 한번 봤다. 우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책을 꺼내고 있었다. 방과 후 네 사람은 지난해와 같은 논길을 걸었다. 돌담 아래에는 노란 들꽃이 다시 피어 있었다.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얘네 또 왔다.” 쪼그려 앉아 한참 들여다보던 손이 꽃대로 향했다가 멈췄다. 우식이 물었다. “안 꺾어?” “응.” “왜.” “두고 볼래.” 햇살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꺾으면 금방 시들잖아.” 우식의 시선이 가방으로 내려갔다. 안에는 시들지 않는 꽃이 있었다. 햇살도 그걸 알아챘는지 웃었다. “나는 이미 하나 있잖아.” 춘식이 앞에서 소리쳤다. “빨리 와! 배고파 죽겄어!” 노향이 바로 받아쳤다. “넌 하루 종일 배고프냐?” 네 사람은 우식네 농장으로 향했다. 예주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딸기를 씻어 내왔다. “올해 첫 딸기여. 먹어봐.” 햇살은 제일 작은 것을 집었다. 우식이 큰 딸기 하나를 햇살 접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37화. 첫눈이 내린 운동장

    겨울이 시작되던 아침, 운동장 위로 첫눈이 내렸다. 수업 종이 울리기 전부터 아이들은 창가에 붙어 있었다. 춘식이 가장 먼저 창문을 열었다. “야! 진짜 온다!” 노향이 바로 창문을 닫았다. “추워. 닫아.” 햇살은 창밖을 보며 손바닥을 유리창에 댔다. 하얀 눈이 흙빛 운동장 위에 하나씩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았다. “우식아.” 맨 뒷자리에서 책을 펴던 우식이 고개를 들었다. “응.” “눈 쌓이면 눈사람 만들자.” “응.” “진짜?” “응.” 춘식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나는 눈싸움.”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는 맨날 싸울 생각뿐이냐.” 점심 무렵부터 눈발이 굵어졌다. 수업이 끝났을 때 운동장 한쪽에는 얇게 흰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네 사람은 가방을 교실에 던져두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춘식은 시작부터 눈을 뭉쳐 노향에게 던졌다. “야!” 노향이 곧장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쫓아갔다. 햇살은 웃으며 눈을 모았다. “우식아, 이거 굴려.” 작은 눈덩이를 건네자 우식은 말없이 운동장 바닥을 굴렸다. 몇 번 지나지 않아 햇살 허리만 한 눈덩이가 됐다. “너무 큰데?” “네가 하랬잖아.” 햇살이 배를 잡고 웃었다. 둘은 한참을 낑낑대 눈사람을 세웠다. 햇살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팔을 만들고, 작은 돌멩이로 눈과 입을 붙였다. 마지막에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 목에 둘렀다. 우식이 봤다. “추워.” “얘가 더 추워 보여.” “눈인데.” “그래도.” 우식은 잠시 햇살을 바라보다 자기 목도리를 풀어 햇살 목에 둘렀다. 햇살의 입이 멈췄다. “너는?” “안 추워.” “거짓말.” “괜찮아.” 검은 목도리에서는 볏짚과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햇살은 괜히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돌려줄게.” “응.”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태만이었다. 이번 주에 내려오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햇살은 수화기를 빛나에게 건네받았다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36화. 고구마 연기 사이로

    가을이 깊어지자 농장 뒤 밭의 고구마 줄기가 누렇게 말라갔다. 주말 오후, 춘덕은 아이들에게 낡은 장갑을 하나씩 나눠줬다. “놀러 왔으면 밥값은 혀야제.” 춘식이 장갑을 받아 들고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저씨, 저 손님인데요?” “그라믄 밥 먹지 말고 가든가.” “어디부터 캐면 돼요?” 대답이 너무 빨라 노향이 웃음을 터뜨렸다. 햇살은 장갑을 끼고 밭고랑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거 그냥 당기면 돼?” 우식이 옆에서 호미를 들었다. “안 돼.” “왜?” “끊어져.” 우식은 흙을 조금씩 걷어내며 고구마가 있는 자리를 보여줬다. 햇살도 따라 호미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보다 큰 고구마 하나가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햇살이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우식아, 이거 봐. 엄청 커.” “응.” “내가 캤어.” “응.” “좀 감탄해봐.” 우식이 고구마를 한번 봤다. “크네.” 햇살은 만족한 듯 웃었다. 춘식은 욕심을 부리다 고구마 줄기를 통째로 끊어먹었고, 노향에게 한참 잔소리를 들었다. 해가 기울 무렵 춘덕은 밭 한쪽에 마른 장작을 모았다. 작은 불이 붙자 아이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예주가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불 속에 넣었다. “조금 기다려야 혀.” “얼마나요?” 춘식이 묻자 예주가 혀를 찼다. “넌 먹을 때만 참을성이 없냐.” 연기가 바람을 타고 논 쪽으로 흘렀다. 햇살은 평상에 앉아 손바닥의 흙을 털었다. 우식이 젖은 수건을 하나 내밀었다. “닦아.” “너는?” “씻었어.” 햇살은 손가락 사이까지 닦다가 문득 집 쪽을 바라봤다. 오늘 아침 빛나는 그림을 그리러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술은 한동안 입에도 대지 않았다. 태만은 지난주에 전화했고, 다음 달쯤 내려오겠다고 했다. 햇살은 날짜를 묻지 않았다. 기다리다 실망하는 법보다, 오면 반가워하는 법을 먼저 배우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우식의 목소리에 햇살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35화. 복숭아 향이 번지는 오후

    늦여름 볕이 평상 끝까지 길게 들어왔다. 예주는 이웃집에서 받아온 복숭아를 큰 광주리에 담아 마당으로 내왔다. 붉게 익은 과일에서는 달큰한 향이 진하게 퍼졌다. “너희들 다 먹어. 너무 익어서 오래 못 둔다.” 춘식이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제가 책임질게요.” 노향이 손등을 탁 쳤다. “씻지도 않고 먹게?” “껍질 벗기면 되지.” “손이 더럽잖아.” 둘이 티격거리는 사이 햇살은 광주리 안을 한참 뒤적였다. 가장 붉고 말랑해 보이는 하나를 골라 우식에게 내밀었다. “이거 네 거.” 우식이 복숭아를 봤다. “왜.” “제일 맛있어 보여서.” “네가 먹어.” “싫어. 너 줬잖아.” 우식은 잠깐 햇살을 보다 복숭아를 받았다. 춘식이 입을 삐죽였다. “나는 저 쪼그만 거 주더니.” 햇살이 작은 복숭아 하나를 집어 던졌다. “너는 이거.” “차별 아니냐?” “맞아.” 노향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식은 복숭아를 반으로 갈랐다. 잘 익은 과즙이 굵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한쪽을 햇살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 “너 먹으라고 준 건데.” “많아.” 햇살은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달큰한 과즙이 입술 끝에 묻었다. “진짜 맛있다.” 우식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햇살 앞으로 내밀었다. “묻었어.” “어디?” 우식이 자기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햇살이 대충 닦았다. “됐어?” “응.” 춘식이 그 광경을 보다가 혀를 찼다. “아따, 둘이 아주 알아서 잘들 한다.” “뭘.” 햇살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노향은 잠깐 우식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때 춘덕이 축사에서 나왔다. “우식아, 뒤쪽 물통 또 샌다.” 우식은 먹던 복숭아를 내려놓고 바로 일어났다. 햇살도 따라 내려왔다. “나도 갈래.” “더워.” “괜찮아.” 우식은 막지 않았다. 축사 뒤 수도관 옆에는 물이 조금씩 흘러 진흙이 생겨 있었다. 우식이 쪼그려 앉아 연결 부위를 조이는 동안 햇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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