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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논길에 번진 웃음

Autor: 서담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18 16:16:44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아침, 마을은 온통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논두렁 풀잎마다 빗방울이 매달렸고, 학교 운동장 끝 웅덩이에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햇살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안에는 어제 엄마가 구운 쿠키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햇살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맨 뒷자리를 돌아봤다.

우식은 책상에 엎드려 팔을 베고 있었다.

“우식아.”

눈만 들렸다.

햇살이 쿠키를 하나 꺼내 흔들었다.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건데?”

“응.”

“근데 왜 나한테 줘?”

“먹어.”

햇살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

“너 진짜 이상해.”

우식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춘식이 교실로 들어오다 봉투를 발견했다.

“뭐여? 쿠키 남았어?”

손이 뻗는 순간 햇살이 봉투를 품에 끌어안았다.

“안 돼. 내 거야.”

“니네 엄마가 만든 거잖여!”

“그래도 내 거.”

노향이 뒤에서 혀를 찼다.

“아침부터 먹을 걸로 싸우냐, 둘이.”

햇살은 쿠키를 반으로 쪼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바삭한 소리와 함께 버터 향이 퍼졌다.

나머지 절반은 잠깐 들여다보다가 우식 책상 위에 툭 올려놨다.

“같이 먹어.”

우식이 눈을 떴다.

햇살은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 무렵부터 햇빛이 완전히 들었다.

젖어 있던 운동장 흙은 군데군데 색이 옅어졌고, 아이들은 체육 시간이 끝나자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며 교실로 돌아왔다.

햇살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신발 밑창을 털다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어?”

몸이 뒤로 기울기 전에 팔목이 잡혔다.

우식이었다.

햇살은 한쪽 발을 들고 휘청거리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와, 큰일 날 뻔했다.”

우식은 햇살이 제대로 선 걸 확인한 뒤 손을 놓았다.

“조심해.”

햇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방금 두 글자 넘게 말했다.”

우식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멀찍이 있던 춘식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야! 오늘 경사 났다! 소우식이 문장으로 말했다!”

“시끄러워.”

이번에는 세 글자였다.

햇살과 노향까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방과 후에는 네 사람이 우식의 집으로 향했다.

예주가 아침부터 반찬통을 잔뜩 싸놓았기 때문이다.

“빛나 씨 혼자 애 키우믄 이것저것 챙기기 힘들제. 장조림도 좀 했고, 멸치도 볶았응께 갖다 줘라.”

예주는 큰 보자기 매듭을 단단히 묶어 우식에게 건넸다.

햇살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게요.”

우식이 보자기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무거워.”

“나 힘 세거든?”

“알아.”

햇살이 입을 다물었다.

춘식이 옆에서 킥 웃었다.

“오메, 소우식이 오늘 말문 터졌네.”

노향이 춘식의 등을 밀었다.

“너나 앞에 가.”

넷은 젖은 논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빗물이 고인 자리를 피해 한 줄로 걷다가 햇살이 일부러 큰 웅덩이를 밟았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야! 오햇살!”

춘식이 소리를 질렀다.

햇살은 깔깔거리며 앞으로 뛰었다.

노향도 지지 않고 흙물을 튀겼고, 순식간에 둘이 춘식을 가운데 두고 장난을 시작했다.

우식은 보자기를 든 채 뒤에서 걸었다.

햇살이 몇 걸음 앞서가다 뒤를 돌아봤다.

“우식아! 빨리 와!”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햇살의 집에 도착하자 빛나는 보자기를 풀어보고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반찬통마다 가지런히 붙은 작은 종이에는 예주의 글씨로 ‘장조림’, ‘멸치’, ‘깻잎’이 적혀 있었다.

“이걸 이렇게 많이…”

햇살은 장조림 통을 열어 냄새부터 맡았다.

“엄마, 맛있겠다.”

빛나가 조용히 웃었다.

“그러게.”

그날 저녁, 빛나는 빈 통을 씻어 햇살에게 건넸다.

“내일 예주 아주머니께 꼭 고맙다고 말씀드려.”

“응.”

햇살은 통을 품에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에서는 빗물을 머금은 풀잎들이 저녁바람에 조용히 흔들렸다. 멀리 축사 쪽에서 소 우는 소리도 낮게 들려왔다.

낯선 마을이 조금씩 낯설지 않아지고 있었다.

집과 집 사이를 오가는 반찬통처럼, 사람 마음도 어느새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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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안에는 독한 양주 냄새와 짙은 향수가 뒤섞여 있었다. 햇살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랐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처음부터 술보다 햇살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오늘도 예쁘네.” “오늘만요?” 햇살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잔을 받았다. “말도 잘해.” “그래야 돈 벌죠.”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햇살이 고개를 조금 돌리는 순간 길게 늘어진 흰 머리카락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남자의 시선이 목덜미에 멈췄다. 옅게 남은 붉은 자국.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뭐야.” 햇살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뭐가요.”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가리켰다. “남자친구?” 햇살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아님 다른 손님?”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아주 조금 굳었다. 남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몸을 기대왔다. “오늘 내가 덮어줘야겠네.” 햇살은 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경쟁심 있어요?” “남자가 원래 그렇지.” “피곤하게 사시네.” 말은 능글맞았지만 햇살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끌어당겨 목을 가렸다. 남자는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문밖 복도. 진성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자리였다. 햇살이 들어간 방문. 장미가 전화를 끊으며 진성을 흘겨봤다. “또.” 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뭘요.” “눈.” “일하는 중입니다.” “문 뚫리겠다.”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 가게에서는 선 지키라고.” “알아요.” “아는 놈 표정이 왜 저래.” 진성이 턱을 한번 문질렀다. 그때 닫힌 문 안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곧 남자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잠시 뒤, 침대가 움직이는 둔탁한 소리가 벽 너머로 희미하게 이어졌다. 진성의 턱이 굳었다. 장미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방 안에서는 햇살의 짧게 끊긴 숨소리와 남자의 거친 호흡이 간간이 새어나왔다. 진성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천천히 주먹으로 말렸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77화. 늦은 출근길 끝에서

    앨리의 네온사인이 막 켜질 무렵이었다. 검은 승용차가 건물 앞에 멈추고 햇살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평소보다 급하게 묶은 흰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는 대충 덧바른 붉은 립이 남아 있었다. 뒤이어 진성이 차에서 내렸다. 둘이 나란히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카운터에 서 있던 장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니들 빨리빨리 안 다녀?”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장미의 시선이 햇살을 한번 훑고 곧바로 진성에게 꽂혔다. “햇살은 그렇다 치고, 계진성!” 진성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장미가 팔짱을 꼈다. “가드가 손님보다 늦게 출근해서 어쩌자는 거야?” 햇살이 슬쩍 손을 들었다. “언니, 그게—” “넌 입 다물어.” “왜 나만.” “너는 원래 제멋대로고.” “너무하시네.” 장미가 다시 진성을 노려봤다. “얘가 늦으면 니가 끌고라도 왔어야지.” 진성의 시선이 아주 잠깐 햇살에게 갔다. “못 끌고 왔습니다.” 분장실 앞에 모여 있던 미정과 수지가 동시에 입을 가렸다. 햇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성을 쳐다봤다. “야.” 장미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못 끌고 왔는데.” 진성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미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둘이 같이 사는 사람들 맞네.” 수지가 옆구리를 찔렀지만 이미 늦었다. 장미가 천천히 햇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왜 그렇게 봐요.” “너 목.” 햇살의 손이 반사적으로 목덜미에 올라갔다. 진성이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 내가 미쳐.” 햇살이 얼른 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출근은 했잖아요.” “한 시간 늦게!” “정확히는 오십이 분.” “오햇살.” “네.” 장미가 손가락으로 분장실을 가리켰다. “십 분 안에 준비해.” “네, 마담님.” 햇살은 냉큼 안으로 도망갔다. 문이 닫히자 직원들 웃음소리가 터졌다.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76화. 새벽 연기 사이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늦은 오후 볕이 흐트러진 이불 위에 길게 번졌다.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다시 침대로 끌려온 햇살의 흰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빠, 하… 우리 출근….” 숨에 섞인 목소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진성은 햇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이마를 맞댔다. “알아.” “알면 좀….” “지금은 말고.” 짧게 떨어진 말에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려다 다시 숨을 삼켰다. 두 팔이 진성의 목을 더 깊게 감쌌다. 양다리도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진성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출근하자는 애가.” “누가 먼저 그랬는데.” “너.” “미쳤어?” 햇살이 그의 어깨를 툭 쳤지만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진성은 대답 대신 햇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어진 입맞춤은 길었고, 서로의 숨이 가까이 섞였다. 방 안에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뒤. 흐트러졌던 숨이 겨우 잦아들었다. 햇살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진성의 품 안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린 채 그의 팔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진성이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찰칵. 라이터 불꽃이 잠깐 켜졌다. 햇살은 진성이 한 모금 빨기도 전에 담배를 뺏어 자기 입에 물었다. “야.” “한 모금만.” “네 거 있잖아.” “오빠 거가 맛있어.” 진성이 기가 막힌 듯 바라봤다. 햇살은 태연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왜.” “내놔.” “싫어.” 진성이 손을 뻗자 햇살은 담배를 든 손을 반대쪽으로 쭉 뻗으며 몸을 피했다. “못 뺏지?” “오햇살.”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햇살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담배를 돌려주려다 다시 한 모금 빨았다. 진성이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진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은 그 침묵이 마음에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75화. 빈집 담장 아래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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