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여민국의 비보가 황궁에 내리꽂힌 그날 오후.유진은 황세자 렌의 손을 잡고 지체 없이 조국 여민국으로 향하는 행차 채비를 서둘러 꾸리기 시작했다.언제나 변함없이, 그녀의 그림자인 부사령관 타카오가 묵묵히 동행에 나섰다.타카오는 창백한 표정의 유진의 곁으로 다가가 나직하게 고개를 숙였다.“괜찮으십니까, 마마. 삼가 고인(故人)의 명복을 비나이다.”“전…… 선왕 폐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고, 배은망덕한 불효자입니다.”유진은 핏기 가신 입술로 서글픈 탄식을 뱉어내었다.지난 팔 년.사츠마의 왕권을 지키고 자식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매달리느라, 바다 너머 홀로 병들어 가던 아바마마께 안부 편지 한 장 전하지 못했다.그 세월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짓이겨왔다.“이리도 빨리 허망하게 돌아가실 줄은 정녕 꿈에도 알지 못해, 그동안 자식으로서 안부조차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 임종(臨終)마저 제 손으로 지켜내지 못했네요.”“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가장 빠른 도선을 징발하여 최대한 빨리 여민국으로 모시겠나이다. 국장 의례에는 절대 늦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할 터이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소서.”언제나처럼 그는 시린 연민과 걱정 가득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따뜻하고 헌신적인 위로가 유진의 멍든 가슴 깊숙한 곳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순간, 유진의 커다란 눈망울에 참아왔던 눈물이 처연하게 맺혀 흘러내렸다.그 아름다운 눈에 지독한 슬픔이 서려 들자, 오히려 도드라지게 피어났다.그의 아름다운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홀로 이 잔인한 이국의 황궁을 견뎌온 그녀.그 가녀리고 외로운 어깨를 당장이라도 품에 안아 숨겨주고 싶었다.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제 몫이 아니었다.그녀가 자신을 원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목구멍으로 치솟는 뜨거운 정념을 힘겹게 삼켜냈다. 그리고 조용히 중궁전으로 빠져나왔다.지금 그녀를 위로하고 마땅히 품에 안아주어야 할 사내.그녀에게 조국을 등지게 만들고 가혹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이 다시금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그 계절의 길목에서.바다 너머 여민국으로부터 비보(悲報) 한 자락이 전해졌다.“……여민국의 선왕(先王) 폐하께서 끝내 붕어(崩御)하셨다고 하옵니다.”조정 대신의 입술을 뚫고 나온 그 소식을 접한 순간.천황의 심장이 사정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사내의 뇌리 위로 오직 단 한 사람, 유진의 모습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국장을 가고 싶겠지. 조국을 그토록 사랑하는 공주였으니, 필시 아바마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바다를 건너고 싶어 미칠 터이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잔인한 삼 년의 침묵을 깨고 내게 찾아와 나와의 동행(同行)을 원치 않을까.]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쇼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내가 직접 천황의 권세를 이끌고 그녀와 함께 여민국 땅을 밟아 조의를 성대하게 행한다면, 그것은 이 사츠마에 화친의 대가로 팔려온 유진에게는 가장 큰 체면치레가 될 것이요, 먼저 간 선왕에게 마지막으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이자 예우가 될 터이니.]마침내 대전의 문턱을 밟고 자신을 찾아올 유진과의 재회를 생각하며, 그는 정무를 보면서도 안절부절 할만큼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설레어 버렸다.그토록 갈구했던 연인을 향한 원초적인 정념이 다시금 가쁘게 끓어올랐다.한편, 궁 밖 히닌고야(혜민서)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중 선왕의 타계 소식을 접한 유진은 곧바로 황궁의 대전으로 향했다.그리고 삼 년 만에.유진은 처음으로 절대 군주이자 자신의 지아비인 천황을 정식으로 알현했다.마침내 두 사람의 시선이 대전의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부딪쳤다.유진은 사내의 핏발 선 안광을 마주하며 가늘게 떨리는 음성을 간신히 내뱉었다.“여민국 선왕 혜조왕의 국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 주세요, 폐하.”사내의 넓은 흉판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삼 년 만에 마침내 눈앞에 앉아있는 유진의 자태.미치도록 기대했던 모습과는 달리.사츠마의 최고 지존인 황후의 차림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혜선의 도 넘은 질투와 방자한 언사는 억지로 가라앉혀 두었던 천황의 침소 공기를 사정없이 흐트러뜨려 놓고 말았다.오직 유진만을 향했던 그의 갈증이 다시 지옥불처럼 들끓기 시작했다.그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결국 무거운 도포 자락을 걸치고 깊은 밤의 대전을 나섰다.가을 안개가 으스스하게 내려앉은 천궁의 회랑은 시리도록 고요했다.이성을 내려놓은 사내는 몽유병 환자처럼 무거우면서도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그의 발길이 이미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은밀한 금단의 영역, 중궁전 앞에 닿아 있었다.스산한 달빛 아래 굳게 닫힌 유진의 처소.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차가운 창.천황은 차마 그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이밀지도 못한 채.중궁전의 앞뜰을 가로막은 거대한 대문 앞에 멈춰 섰다.3년 동안 자신의 여인을 안아보지 못한 사내의 가슴 한복판으로 지독하게 아픈 서운함과 피끓는 증오가 해일처럼 밀려왔다.[네가 단 한 번만이라도 날 찾아와 주기를 바랐다. 내 처소로 찾아와 내게 불같이 화를 내도 좋으니. 다른 여인들을 안는 나를 향해 경멸을 쏟아내도 좋으니. 너의 그 고결한 발걸음이 나에게 닿기를 매일 밤 미치도록 바랬단 말이다.]그의 핏발 선 시선이 까맣게 꺼진 창문에 박힌 채 처절하게 부서져 내렸다.[한데…… 3년이다. 3년이라는 그 가혹한 시간 동안 넌 내 안부조차도, 내가 어떤지 단 한자락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찌 내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쇼는 대문의 걸쇠를 손가락의 뼈마디가 하얗게 바래도록 움켜쥐었다.[날…… 정말로 사내로 사랑하지 않는 거이냐. 내가 널 포기했던 그 영주의 태산에서 넌 날 버린 것이였나. 널 처음 안았던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 서늘한 증오가 진심이었느냐.]비참했다. 거대한 상실감이 사내의 전신을 옥죄어 왔다.[이 거대한 제국을 다 거머쥐고도, 나는 널 영영 내 생에서 잃어버린 채 이리 껍데기만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거란 말이냐.]세상을 불태우고 황제가 되어 온 천하를 제 발밑에 꿇렸음에도.정작 가장
천황이 더 이상 중궁전의 주인인 황후를 찾지 않는다는 소문은 이미 황궁을 넘어 도성 밖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새로운 여민국의 연인과 후궁들의 치맛자락에 가려진 황후는 단숨에 황궁 귀족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봉인당했다.그러나 유진은 무너지지 않았다.그녀는 닫혀버린 차가운 중궁전 궁궐 대신.여전히 이국의 백성들을 보살피는 대민 봉사와 황세자 렌의 교육에 모든 정성과 시간을 쏟으며 묵묵히 삶을 버텨냈다.그 지독하리만치 고독한 정적 속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천황을 두 눈에 담지 못했다.서로를 지독하게 연모했던 두 남녀의 역사를 비웃듯 외롭고 처절한 세월은 야속하게도 계속 흘러갔다.그렇게 여섯달. 일 년. 기어이 삼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그 사이.최고 상궁인 혜선은 한 명의 황자를 그리고 후궁들은 역시 각각 한명의 옹주를 낳아 황실의 세력을 펼쳤다.혜선은 황후가 비운 자리를 틈타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를 누렸다.하지만 쇼는 지밀궁녀에서 최고 상궁으로 지위만 바꾸어주었을 뿐이었다.끝내 그녀를 후궁의 최고 정점인 빈(嬪)의 자리에 책봉하는 정식 교지를 내리지 않았다.그것은 유진을 향한 붉은 원망 속에서도.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정통성, 첫째 황세자인 렌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 어떤 미세한 위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천황의 의지였다.삼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중궁전 문턱 너머로 그의 시선이 향했다.차갑게 식어버린 유진을 한번만 눈에 담고 싶어서.한번만 더 자신을 향해 돌아봐 주기를 바라며.그는 여전히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다.그때 대전의 짙게 깔린 어둠 사이로, 짙은 여인의 향내가 스며들었다.영원할 것 같던 천황의 총애도 세월 앞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요즘 들어 제 침소로 향하는 천황의 발길이 눈에 띄게 뜸해지자.초조함에 눈이 뒤집힌 혜선은 감히 천황을 먼저 찾아 온 것이었다.순간, 창 밖을 향했던 천황의 안광에 서슬 퍼런 핏발이 섰다.“이 으슥한 늦은 시간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어 감히 대전을 들린 것이냐
겨우 최고 상궁의 내당임에도 불구하고.황후의 방보다 화려한 색상의 비단과 진한 향료로 뒤덮여 있었다.칠흑 같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가 서늘하게 흔들렸다.최고 상궁 혜선은 천황의 총애를 독점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그녀는 쇼의 곁에 누워 속삭이듯 독을 퍼트리기 시작했다.“폐하, 부사령관 타카오 상의 행보가 요근래 참으로 이상하옵니다. 황후 마마의 내실 주변을 밤낮없이 기웃거리며, 렌 황세자 마마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사사로이 중궁전을 드나들고 있사옵니다. 심지어 바칸의 사찰까지 황후 마마 곁을 밤낮으로 지킨다 하더이다.”혜선의 사악하고 영악한 언사.쇼의 검은 눈동자가 핏빛으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혹여…… 폐하의 눈을 피해 딴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지 소녀 두렵사옵니다. 그래서 폐하의 쇼군 시절, 그 난잡했던 죽은 천황의 여식처럼, 폐하를 향해 어떤 험한 생각이나 계획을 도모하는 것은 아닌지……”“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구나. 넌 나와의 잠자리만 신경쓰면 된다. 쓸데 없는 관심은 독이 되는 법. 알겠느냐.”천황은 자신의 성정을 흔들려는 혜선의 주도면밀한 속셈을 단칼에 일축했다.황세자 렌이 자신의 곁에 있는 한.유진은 절대로 허튼짓을 하지 않을 터였다.순간 그의 마음은 지독하게 아려왔다.자신과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었던 자식이 그녀를 옭아매는 볼모가 되었다.그 사실이 그를 미치도록 비참하게 만들었다.마음이 잔인하게 흔들렸다.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그토록 사정했음에도.자신을 가차없이 버리고 떠난 여인을 미치도록 증오했다.그럼에도 그는 유진이 그리웠다. 죽을 만큼.제발 황궁으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소식 한 자락 전하지 않았다.그녀에게 다가갈 어떤 명분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타카오와 유진, 그 두 사람의 다정했던 모습이 자꾸 그의 머릿속을 흩트려 놓았다.이튿날, 그는 타카오를 불렀다.대전 밀실의 육중한 옻칠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타카오가 걸어 들어왔다.쇼는 흑색 장검의 날을 하얀
바칸의 절벽에 위치한 작은 불교 사찰.차가운 바닷 바람이 세차게 밀려 들어오는 작은 법당 마당에 붉은 향이 피어올랐다.다소곳이 절을 올리는 황후의 단아한 모습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그녀의 가녀린 그림자를 시선에 담자, 그의 시선이 위태롭게 떨려왔다.그때 저벅저벅 들리는 발소리.지평선을 가르는 새벽녘의 어스름한 하늘.그 위로 커다란 사내의 그림자가 마당 안으로 들이닥쳤다.거센 바람에 작은 촛불의 은빛 줄기가 흔들렸다.그 불안한 빛이 서서히 다가오는 사내의 윤곽을 선명히 비추었다.차가운 새벽 기운을 머금은 하얗고 수려한 용모의 사내.이내 타카오가 소박한 사찰의 낮은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마마, 어찌 이리 무모하십니까.”그는 정식 예법도 차리지 않고 유진을 매섭게 탓했다.유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포시 올라갔다.“지금 이 상황이 웃을 상황이십니까.”“그럼, 울까요.”유진은 은밀한 농을 건네며 그의 무거운 근심을 걷어주려 했다.그는 그녀의 그 청아한 얼굴을 가슴이 아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최소한 저에게 언지라도 주셨으면 경비를 강화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지금 시국이 어떤데…… 상궁 둘만 데리고 움직이신단 말입니까.”“행차를 움직이면, 폐하의 전교가 필요하니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호젓하게 오니, 가볍고 좋았습니다. 백성들 내밀한 사정도 볼 수 있고.”“폐하께서 많이 언짢아 하시고 계십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그러실 테지요. 이해합니다. 제가 감히 독단으로 오만하게 굴었으니.”“언제 돌아가실 예정이시옵니까.”“글쎄요. 폐하의 분노가 사그라들면요. 지금 입궁하면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지도 모르니.”“그걸 아시는 분이……”“혹시 말입니다.”“네, 마마. 뭐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유진은 한동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뜸을 들였다.스산한 바닷바람에 황금빛 눈동자의 초점이 번졌다.“……저는 괜찮습니다. 대신, 우리 렌을…… 혹시라도.”“마마, 황세자 마마는 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