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잃어버린 후, 송시아는 미래에 돈을 많이 벌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18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숨 쉴 틈 없이 달려왔지만, 단 한순간도 동생을 찾는 걸 포기한 적이 없었다.정말이지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었다.병실 안.소민아가 침대에 누워 힘없이 입을 열었다.“문 닫아줘요. 저 사람들 안 보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나가서 돌려보낼게요. 민아 씨는 푹 쉬다가 이따가 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어요.”소민아가 머무는 곳은 거실과 주방까지 구비된 VIP 병실이었다. 경호원이 가져온 물건들을 식탁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았다.신이랑이 문밖에 서 있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민아 씨를 다치게 한 사람이 당신인 줄은 몰랐네요!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민아 씨는 종래로 다른 사람 앞에서 당신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 적 없다고요!”송시아가 손을 휘젓자 경호원들은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민아 많이 좋아해요?”신이랑이 말했다.“부대표님, 저한테도 손을 쓰시려고요?”그 순간, 신이랑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보아하니 당신들 눈에 난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악마네요.”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순간 마주한 새빨간 실핏줄에 신이랑은 화들짝 놀랐다.“솔직하게 말할게요. 최근 알아낸 게 하나 있는데요. 민아는 제가 어렸을 적 잃어버렸던 여동생이었어요.”신이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그래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요? 부대표님, 만약 민아 씨가 부대표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민아 씨를 걱정하지 않았겠죠?”송시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당신 뒷조사도 해봤어요. 시장 비서실장의 외아들이더군요. 어린 시절 큰 병에 걸렸을 때 수술비랑 병원비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요?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처가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돈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요? 당신에겐 퇴로가
“후환을 없애겠다고요? 송 부대표님에게 사람 목숨이란 대체 뭔가요? 지금은 엄연히 법치국가예요. 그 한마디가 부대표님에게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거예요?”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신이랑 씨 아버지는 깨끗한 것 같아요? 사회에서 권력과 재물의 맛을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봐요.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을 거예요. 신이랑 씨... 우리 머리 꼭대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고 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오가고 있다고요.”송시아 역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기성은과 전연우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에요. 지은 죄가 셀 수도 없이 많죠. 물론...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당신 아버지 자리에 직접 앉아봐야만 알 수 있을 거예요.”송시아는 마지막으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고는 말했다.“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민아 잘 부탁해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때, 소민아가 벌컥 문을 열고는 힘없이 걸어 나왔다.“민아 씨...”신이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바로 몸을 피했다.소민아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송시아에게로 향했다.“처음부터 대표님과 기성은을 끌어내리고 회사를 삼킬 작정이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기성은을 죽이려고까지 하다니요!”“똑똑히 말해줄게요. 나한텐 어릴 적 기억이 전혀 없고 내 기억의 시작은 소씨 집안이에요. 난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잃어버렸다는 그 동생은 더더욱 아니고요.”소민아는 병실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신이랑의 정체는 짐작한 대로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그 순간 소민아의 머릿속엔 도망이라는 두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심지어 이곳에서 단 1초도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 어디에 가려고요?”신이랑이 쫓아갔다.“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소민아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이랑 씨, 미안해요. 나... 집에 가서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신이랑은 그녀의 몸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녀가 또다시 위험에 처할까
그때 송시아는 맹세했었다. 쉬지 않고 큰돈을 벌어 동생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 거라고.지금 송시아는 풍족한 재물을 손에 넣었다. 때문에 소민아도 소씨 집안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그녀는 동생이 뭘 원하든 모두 해줄 수 있었다.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동생의 것이다.송시아는 정신을 잃은 소민아를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소민아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등에 나 있는 상처를 보니 뼈에 사무치는 후회의 감정이 솟구쳐올랐다.“천천히 가요.”“네, 부대표님.”송시아의 집은 서울시 가장 호화로운 별장이었다. 매매가는 1600억에 달하고 최고의 집사와 열 명의 도우미를 쓰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마당 안 정원에는 아직 채 피지 않은 도라지 꽃이 심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그네, 정자, 분수... 없는 것이 없었다.송시아는 이미 소민아의 취향대로 2층 방을 꾸며 놓았다. 만화 인물 형상의 장난감, 공주풍의 3미터 대형 사이즈 침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송시아는 소민아를 침대에 눕힌 뒤 도우미를 시켜 개인 주치의를 불렀다.30분 뒤, 의사가 도착해 소민아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이 아가씨는 내장 출혈이 심각합니다. 몸 곳곳에 멍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듯합니다.”“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제일 좋은 약을 처방해 하루빨리 회복하게 해요.”송시아가 차갑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개인 주치의는 한약 몇 첩과 3일이면 효과를 보는 멍 자국에 바르는 연고를 처방했다.소민아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도우미가 영양죽을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송시아는 어린 시절 동생을 돌봤을 때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호박죽을 그녀 입에 넣어주었다. 다행히 소민아는 조금씩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송시아는 죽이 흘러나오면 휴지로 그녀 입가를 닦아주었다.“민아야, 며칠이면 괜찮아질 거야
할 말을 마친 뒤 신이랑은 전화를 끊었다.창밖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민아 씨, 난 민아 씨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에요....다음 날 아침, 소민아가 깨어났다. 그녀는 이제 몸이 많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며 낯선 환경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공주풍의 물건들, 선녀의 옷깃처럼 나부끼는 커튼,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장난감들로 채워져 있었다.소민아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절대 고모 집은 아니다.소민아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진실된 감촉을 느끼고 나서야 꿈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여긴 어디지?몇 분 뒤, 방문이 열리고 송시아가 죽을 들고 문 앞에 나타났다.“깼어? 너 며칠 동안 밥 못 먹었으니까 일단 이 호박죽부터 먹어. 아까 이랑 씨가 너 보러 온다고 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송시아가 소민아의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지만 소민아는 팔을 휘둘러 죽을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이탈리아 산 값비싼 카펫이 죽으로 더럽혀졌다.송시아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손을 뻗어 헝클어진 소민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도우미가 다른 것도 많이 만들었어.”“누가 날 여기로 데려오라고 했어요?”소민아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송시아는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 언니랑 같이 여기에서 살자.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언니가 다 사줄게.”“그리고 이 카드 안에 언니가 지금까지 번 돈이 모두 들어있어. 너한테 줄게. 네가 사고 싶은 거 마음대로 사. 부족하면 또 언니한테 달라고 하고.”“이제부터 넌 언니랑 함께 사는 거야.”구구절절 내뱉는 송시아의 말을 소민아는 단칼에 거절해버렸다.“난 당신과 함께 살지 않을 거예요. 난 소민아예요. 내 성은 소씨이지 송씨가 아니에요, 당신 동생은 더더욱 아니고요. 난 절대 당신 같은
송시아가 나간 뒤, 소민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충격에 얼이 빠진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럴 리가 없어. 이게 다 진짜일 리가 없어.”15분 정도 지난 뒤,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둘째 아가씨, 신이랑이라는 손님이 찾아오셨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들고 발갛게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도우미는 이미 방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신이랑은 소민아를 보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민아 씨, 괜찮아요?”신이랑은 그녀를 품에 안고 최대한 다독였다.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소민아의 마음속 끈이 순간 끊어져 버렸다. 그녀는 신이랑의 팔목을 꽉 잡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이랑 씨, 제발 말해줘요. 이거... 다 진짜 아니죠? 그렇죠?”“나랑 송시아는 자매가 아니에요. 난 송시아의 동생이 아니라고요.”“제발 꿈이라고 말해줘요.”신이랑은 마음이 저려왔다. 괴로워하는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그 또한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민아 씨... 민아 씨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사람 없어요. 민아 씨는 여전히 원래의 민아 씨고, 부모님은 여전히 그분들이에요.”“내가 이미 그분들에게 이쪽으로 오시라고 연락드렸어요. 그분들은 절대 민아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소민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정말이에요? 엄마아빠가 정말 절 버리지 않을까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신이랑은 천천히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앉히고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민아 씨, 모든 건 바뀌지 않았어요. 민아 씨가 원래대로 유지되길 바란다면... 민아 씨는 여전히 내 비서예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아요.”“안 좋은 일은 잊어버려요. 네?”소민아는 그의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나 여기에서 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아요. 나 데리고 나가줄 수 있어요?”“고모 집에 가고 싶어요.”“그래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요. 나랑 같이 밥 먹고 집에 들어가요.”소민아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신이랑이 그녀를 데리고 나가려
“민아야.”너무나도 오랜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그녀는 바로 앞으로 뛰어가 눈앞의 중년 여자를 꽉 끌어안았다.“엄마...”소희연은 몇 년 만에 딸을 안으니 가슴이 먹먹해져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엄마가 이렇게 돌아왔잖아. 우리 딸 얼굴 좀 보자.”소민아는 울먹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소희연이 말했다.“오랜만에 보니까 우리 민아 더 예뻐졌네?”소민수도 소민아의 앞으로 걸어갔다.“엄마 부를 줄밖에 몰라? 이 아빠는 잊어버렸어?”소민아는 울면서 입꼬리를 올리며 소민수를 불렀다.“아빠, 그런 말 하시는 거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매번 문자를 보내도 답장 안 하셨잖아요.”소민수는 연구실의 핵심 연구원이라 그가 없으면 많은 실험들이 진행되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딸을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는 가슴 쪽 호주머니에서 우주선 재료로 만든 팔찌를 꺼냈다.“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포장은 못 했어. 그래도 쓸 만은 할 거야.”소민아는 약간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팔찌를 받아들었다.“이런다고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다음엔 열 개 받을 거예요.”소민수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좋아! 얼마든지 줄게! 이건 진귀하기 그지없어서 아무나 가질 수 없어.”소민아는 눈물을 닦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엄마아빠가 오셨다고 왜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희연도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이랑이는 너한테 서프라이즈를 안겨주고 싶었겠지.”“이놈아,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왔다더니 계속 이랑이 귀찮게 한 거 아니야? 바쁜 이랑이가 너랑 놀아줄 시간이 어디에 있다고.”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다쳐 입원했던 사실을 모르시는 모양이다.한동안 치료받고 나니 몸이 적잖게 회복되었다.소희연이 말했다.“됐어. 네가 어렸을 때부터 제일 좋아하던 음식 만들었어. 가져올게.”신이랑은 집으로 가려 했으나 사람들이 붙잡는 바람에 강제로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그렇게 두 집안이
소희연이 소민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번에 돌아온 건 너한테 알려줄 게 있어서야.”소민아가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엄마, 저 너무 졸려서 자야겠어요. 그 얘기 저 깨어난 다음에 하시면 안 돼요?”“민아야, 엄마아빠 모두 그 일 때문에 온 거야. 얼마 전 누군가 정보 시스템을 해킹해 나와 네 아빠의 정보를 빼내 갔어. 분명 최종 목적은 너일 거야. 이제 너한테 알려줄 때가 온 것 같아.”소민아는 순간적으로 새빨개진 눈으로 미친 듯이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저 안 들을래요. 안 들을래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완강히 거부하는 딸의 모습에도 소희연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민아야,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죽을 때까지 너한테 숨기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 엄마는 오늘 너한테 반드시 알려줘야 해. 비록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우린 널 입양하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친딸이라고 생각해왔어.”“민아야... 입양 서류는 우리한테 그저 종이 한 장일 뿐이야. 그래도 그건 있어야 정식으로 널 입양할 수 있었으니까.”“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넌 끝까지 내 딸이야.”“엄마랑 아빠는 널 위해 불임 수술까지 받았어. 네가 자라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질까 봐.”소민아는 서서히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저 버리려는 거 아니죠?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가족인 거 맞죠?”소희연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우리한테 자식이라곤 너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어!”소민아는 순간 마음이 놓였는지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두 분까지 절 버리면 전 엄마아빠도 없는 고아예요. 앞으로 두 분 말 잘 들게요.”“그래. 이랑이와도 잘 지내. 너희 둘이 친하게 지내는 거 보니까 엄마아빠는 마음이 놓이더구나.”소민아가 소희연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그럼 약속하신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답장을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 사무실에 가기는 싫었다. 또한 송시아의 비서로 일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송시아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은 그 자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고 싶었다.소민아가 집에서 쉬는 며칠 동안 회사에서도 그녀에게 출근하라고 독촉하지 않았다.엄마아빠는 함께 머무르며 딸의 마음을 풀어준 다음 또다시 그녀 혼자만 남겨놓고 그들의 연구소로 떠나버렸다.아침 일곱 시 반.소민아는 엄마아빠를 공항까지 모셔다드린 뒤 회사로 복귀했다.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편집부 직원들이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민아 씨, 좋은 아침.”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아침이에요.”평소 가장 먼저 회사에 나오던 신이랑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듯했다. 소민아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들고 그에게 문자를 보내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아직 자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오랜만에 지각해도 되는 여유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편집부 내부 서류는 소민아에게 자동으로 메일로 보내진다. 때로는 신이랑이 혼자 처리하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소민아의 자리는 신이랑과 그리 멀지 않은 바로 옆이었다.오전 마케팅팀에선 영화사와 저작권 계약서를 작성했다.송시아가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왔을 땐 열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체결하려 했던 성세 그룹 내부 모든 프로젝트가 전연우의 사인이 없다는 이유로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녀에겐 강제로 집행시킬 권리가 없었다.송시아가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병신 같은 것들. 전부 전연우 편만 들고 내 말은 듣지도 않아!”대표 사무실 비서실장이 된 소피아가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송 대표님, 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낼 필요 없으십니다. 다들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송시아가 이마를 찌푸리고 소피아에게 시선을 돌렸다.“구르미 시리즈의 소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