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소민아는 정말로 임신했다.게다가... 임신한 지 7주나 되었다고 한다.그때 면북에서 소민아는 확실히 기성은과 관계를 가졌었다.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차가운 병원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창문 밖에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와 그녀의 몸을 감쌌지만, 소민아의 손발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그녀는 정말로 임신했다.그렇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그녀만큼 이 아이의 탄생을 바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바뀌어 있다. 지금 이 아이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그녀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복도에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다른 한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확실히 질긴 인연이긴 한가 보다. 보고 싶을 때는 꿈속에서조차 인색하게 굴더니, 이젠 어디에 가든 그 사람이 나타난다.기성은은 주가은을 부축하며 진료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주가은은 두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기성은의 품에 기대어 가녀린 몸을 떨고 있었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기성은이 그녀를 안아주는 모습까지...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소민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 병원 복도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반대편에서, 주가은이 그녀를 발견했다.주가은이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민아 씨가 왜 여기 있지? 기성은 씨... 우리 가볼까요?”“민아 씨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그때, 주가은의 눈에 소민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신이랑이 들어왔다. 거리가 너무 멀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다.한눈에 봐도 소민아의 기분이 매우 침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기성은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돌아가요.”소민아가 신이랑을 바라보았다. “여우림 씨가 당신더러 여기 오라고 했어요? 또 뭘 가르쳐주던가요?” 신이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소민아는 차갑게 뿌리
신이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췌한 모습으로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아 씨...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좋아해 줄 거예요?”소민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더욱 속도를 높여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곧장 본가로 돌아갔다.소민아가 돌아왔을 때, 모두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민아야,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이랑이는? 왜 같이 안 온 거야?”소민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충 얼버무려 변명했다. “별일 없어요. 그냥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소민아의 부모님은 결혼식을 마친 그날 밤 바로 연구소로 돌아갔고, 소정국은 업무를 보러 회사에 출근했다.소민아가 방으로 돌아간 후, 명세진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따라 올라갔다. 소민아는 방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명세진을 보고는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고모, 왜 오셨어요?”“네가 걱정돼서 와봤지. 민아야, 무슨 일 있는 거야? 혹시 이랑이랑 싸웠니? 결혼한 지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왜 혼자 집에 돌아온 거야?”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이랑 씨와의 일은 저희 둘이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혹시 이랑이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한 거니? 그 여우림이라는 사람이 너한테 문자 보냈다며?”소민아는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모, 그걸 어떻게 아세요?”명세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가 돌아오기 전에 이랑이가 나한테 전화했어.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네가 정말로 돌아올 줄은 몰랐어!”“사실 고모는 네가 진심으로 여기를 네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뻐. 난 네가 바깥에서 힘든 일을 겪고도 친정에 돌아와 하소연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민아야... 너는 이제 결혼한 몸이야. 이전과는 달라. 이랑이한테만 양보를 요구해선 안 돼.”“여우림에게 너희 사이의 일을 모두 이야기한 건 이랑이가 그만큼 너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야. 그렇지
10층 구르미 시리즈는 송시아가 가장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다.하지만 오늘 그녀는 예외를 만들었다.막 다른 웹사이트 회사와 저작권 계약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여우림의 눈에 사무실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그리고 활짝 열린 자신의 사무실 문도 눈에 들어왔다.여우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뜻밖의 불청객이 기다리고 있었다.여우림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았다. “부대표님,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송시아의 등 뒤엔 소피아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제히 여우림을 향하고 있었다.송시아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사실 10층에 있는 이 구르미 시리즈는 내가 가장 오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에요. 여 편집장이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걸 좋아한다는 걸 몰랐다면...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애초에 날 만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거든요.”여우림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경계심이 감돌았다. 송시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열려있는 사무실 문을 통해, 송시아가 한 말들이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귀에 흘러들어왔지만, 직원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각자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송시아가 싸늘한 눈으로 여우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 편집장,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이제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할게요. 내가 구르미 시리즈에 신경 쓰지 않으니까, 권력을 남용해 불법적으로 돈을 벌어들였더라고요, 그것도 100억이나 되는 거금을요. 수 편의 드라마 제작 계약금도 당신 주머니 안에 들어간 거 맞죠?”“여 편집장, 성세 그룹의 이름을 이용해 사적으로 이익을 챙기는 기분 꽤 흐뭇했겠어요?”“뭐 물론 나에게는 액세서리 한 세트 가격에 불과하긴 해요.”“부사장님, 저는 모든 일을 절차에 따라 진행했어요. 협력 업체도 제
“괜찮아요. 두 사람에게 한 주의 시간을 주죠. 원래 항공편으로 예약하고, 모든 일정 다시 잡아요. 처음으로 가는 신혼여행인데 행복하게 지내다가 오게 도와줘야죠.”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송시아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우림의 부하직원 세 명이 사무실로 들어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편집장님, 어떡하죠? 부사장님이 다 알아버렸어요. 법무팀에서 조사하면 우리 다 감옥 가는 거 아니에요?” 여우림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말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하던 일이나 계속해요.”“하지만 저희는 편집장님 덕분에 회사에 들어온 거잖아요. 일이 잘못돼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떡해요!” 여우림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 역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걱정 말아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나가봐요.” 이렇게나 빨리 일이 터질 줄은 몰랐다. 송시아는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설마 줄곧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 여우림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신이랑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아 전화를 걸어보니 그녀의 번호는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여우림은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민아 씨? 이랑 씨는요? 이랑 씨 바꿔줘요.” 소민아가 말했다.“이랑 씨, 전화 받아요.”“잠시만 기다려요. 이랑 씨 지금 화장실에 있어요.” 신이랑은 집에 가는 길에 소나기가 너무 많이 쏟아져 하마터면 교통사고가 날 뻔했다. 소민아는 그의 전화를 받고 걱정되는 마음에 소씨 저택으로 오라고 말했었다. 이 비가 언제쯤 그칠지는 알 수 없다. 신이랑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민아를 본 신이랑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여우림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나 좀 도와줘요...” 신이랑이 말했다. “우림 씨,
잠깐 사이에 비에 흠뻑 젖은 남자를 보며 소민아가 말했다. “이랑 씨 미쳤어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신이랑은 시선을 내리깔고 힘없이 말했다. “난 괜찮아요. 이건 민아 씨 꽃이잖아요. 민아 씨가 비 맞는 거 싫어요.”풀이 죽은 그의 모습에 굳게 닫혔던 소민아의 마음이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제야 날 한 번이라도 봐주네요. 민아 씨...난 정말 민아 씨를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요. 온 힘을 다해서 겨우 내 아내로 만들었는데, 민아 씨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요.”소민아는 무거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도 여우림 씨가 가르쳐준 거예요?” 손으로는 그의 머리카락에 맺힌 빗방울을 닦아주고 있었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우미가 담요와 우산을 들고 달려가려 했지만, 명세진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도우미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다시 뒤로 물러섰다.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에 맺혔던 빗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여우림 씨한테 도움을 청한 건 세 번뿐이에요.”“첫 번째는 우리가 처음 만남을 가졌던 날이에요. 소개팅 상대가 민아 씨라는 걸 알고 엄청 긴장했거든요. 그때 우림 씨가 민아 씨가 좋아할 거라면서 입고 나갈 옷을 골라줬어요.”“두 번째는 민아 씨가 경찰서에 갇혀있을 때였어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우림 씨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라고 말해줬어요. 내가 돌아가 그분의 자리를 물려받겠다고 약속만 하면 분명 민아 씨를 꺼내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민아 씨... 난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곳에는 내 가족이 없으니까, 그 사람들은 다 날 버렸으니까. 그날 민아 씨가 안에서 혼자 견디게 놔두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눈을 맞더라도 바깥에서 민아 씨를 기다리고 싶었어요. 그건 순전히 내 의지였어요.”“세 번째는 민아 씨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였어요. 난 정말 개의치 않았지만, 혹시라도 민아 씨가 아이 때문에
“기 비서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대신하고 있거든요.”송시아 옆에 서 있던 소피아는 기성은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기성은이 풍기는 분위기는 송시아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얼굴만 아니었다면, 전연우가 살아 돌아와 그녀 앞에 서 있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기성은의 뒤에는 성세 그룹 법무팀 총책임자이자, 국제 법조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변호사, 엄기준이 서 있었다.엄기준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송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저에게 남겨두었던 성세 그룹 대표 직무 대행 계약서입니다. 이제 이 서류의 효력이 발동되는 시간이 되었네요.”“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지금부터 기성은 씨는 성세 그룹의 임시 대표입니다. 또한 회사 경영에 관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습니다.”“말도 안 돼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은 아직 혼수상태인데 어떻게 사인을 할 수가 있어요?”기성은이 말했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처음부터 오늘을 예상하신 겁니다. 이 계약서는 이미 반년 전에 작성된 겁니다.”“이제 송시아 부대표님은 당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송시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황당한 상황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소피아는 서류를 살펴보다가 맨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는 사인을 본 순간 경악했다.“이... 이건 대표님의 친필 사인이 확실합니다.”송시아는 냉소하며 엄기준을 바라보았다. “당신까지 전연우의 편에 선 거예요?”“아니, 애초부터 전연우의 사람이었죠?”“어쩐지 전연우가 거액을 들여 법무팀을 키우더라니... 그중에 당신까지 포함되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송시아는 그 서류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진실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송시아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기성은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무언가는 잃게 되는 법이에요. 당신은 기꺼이 전연우의 개가 되었지만, 소민
“네. 최대한 빨리 사모님의 행방을 찾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기성은은 휴대폰 속 두 번째 연락처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없는 번호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지금 상황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닌가?기성은은 바로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소민아 연락처 보내줘.]상대방은 3분도 채 되지 않아 전화번호를 보내왔다.소민아는 짐을 챙기며 신이랑과 함께 신혼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공항으로 가는 길, 소민아는 모르는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어디예요?”소민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왜 끊었어요?”소민아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스팸 전화였어요.”신이랑이 소민아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자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됐어요. 운전에나 집중해요.”이번엔 백혜진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소민아는 망설임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녀의 새 번호는 가족 외에 백혜진에게만 알려주었었다.성세 그룹.백혜진은 연결되기도 전에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전화가 끊겼습니다.”“신혼여행 간다고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아마 비행기를 탔을 거예요. 지금 가봤자 아무 소용없을 겁니다.”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백혜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용기 내어 그를 불렀다. “기 비서님, 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기 비서님 마음속에 아직 민아 씨가 남아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민아 씨는 얼마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기 비서님도 곧 약혼하시잖아요. 이제 와 민아 씨의 삶에 끼어든다면...”“민아 씨는 분명 기 비서님을 원망할 거예요!”“겨우 기 비서님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민아 씨를 부디 흔들지 말아 주세요.”“기성은 씨, 지금 싸우는 거예요?”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한 여자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말했다.양옆에 보디가드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난 주가은은
“...” 기성은은 들고 있던 도시락을 내려놓고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가씨, 그동안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주씨 집안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아버지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기성은이 말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여지가 전혀 없는 칼 같은 말이었다.주가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어렸다.“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밥 꼭 챙겨 먹어요.”기성은은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고 백혜진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순간 비서실 직원들 모두 일제히 똑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혜진은 너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인사부에선 이미 기성은이 성세 그룹의 대리 대표가 되었다는 공고를 발표했다.기성은은 사무실로 돌아와 휴대폰을 확인했다.[소민아 씨의 전부 일정입니다. 이건 두 사람이 묵을 호텔 이름과 주소입니다.]기성은은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백혜진은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행운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대리 대표님의 비서가 된 것이다.백혜진은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 비서님, 아니 대표님, 정말 저더러 대표님 비서로 일하라는 거예요? 하지만... 아시겠지만, 제 업무 능력은 소민아 씨랑 비슷해요. 분명 대표님에게 폐를 끼칠 텐데...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기성은은 손에 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머리 쓸 필요 없어요. 말만 할 줄 알면 돼요.”“최근 몇 개월 사이 모든 재무 보고서를 출력해 가져다줘요. 그리고 오후 2시 30분 임원진들 회의 소집하고요.”백혜진이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반산 별장.송시아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남자가 상반신을 벗고 탄탄한 몸과 매끄러운 근육 라인을 드러내며 두 손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