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자가 여긴 왜 왔지?“이 선물 전해주려고 왔어.” 박원근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월아... 좋은 날인데 같이 앉아서 축하주 좀 마시고 가지 그래? 오늘 특별한 날이잖아. 곧 공연도 시작될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용이었다. 예전 그 오만하고 자유분방했던 소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제법 성숙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태도와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장소월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강용 때문이기도 했다. 강용의 도움으로 강영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종잡을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저 사람은...” 박원근은 강용을 알지 못했다. 장소월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사직서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게요.” 그녀는 혼례복을 입은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있어.”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겼다. 처음부터 그녀는 강영수의 무사함만 확인하면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유화가 그녀를 붙잡았다. “송 선생님, 가지 마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장소월이 가르쳤던 아이들 모두 그녀에게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용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쓴 채 기둥에 기대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앞머리가 가늘고 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강용이 장소월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 장소월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송 선생님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선생님 성함은 장소월 맞죠? 그림에 쓰여 있는 이름이 진짜 선생님의 이름이죠?” “장 선생님, 유화는 선생님이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화는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장소월은 유화 뒤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천진한 눈망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 너도 나 머리 나쁜 거 알잖아. 옛날에 나 과외해줄 때, 네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잊었어?” “그건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가르쳐 줬는데도 넌 그저 놀기만 했어.” 다행히 강용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강용을 망가뜨리지 않았고, 강영수 또한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떠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어?” 강용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뭘 후회한다는 거야?” 강용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나는 거 후회하지 않냐고. 강영수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면 두 사람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장소월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그럴 자격 없어. 그리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일 뿐이야. 영수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강용, 넌 어때? 아직도 강영수가 미워?” 강용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전히 예전처럼 거칠고 반항적인 소년이었지만, 정말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딱히 미워할 것도 없어. 따지고 보면 강영수 잘못도 아니야. 내가 그 사람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빼앗아 간 건 사실이잖아. 내 어머니 때문에 형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로 인해 형은 가정의 화목함을 잃어버렸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겪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가장 힘든 건 형이었을 거야. 네가 떠난 후 많이 힘들어했거든. 줄곧 너를 찾아 헤맸고...” “게다가... 예전의 강 씨 집안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잖아.” “그래! 강 씨 집안은 사라졌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떠나
강씨 집안이 없었더라도, 전연우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을 해치려 했을 것이다.한 프랑스풍 저택, 강용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안방까지 옮겨다 주고 있었다. 장소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가 산 집이야?” “따지고 보면 강씨 집안 소유야. 예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때 그 사람이 나한테 준 집이거든.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강용이 말하는 ‘그 사람’은 강영수의 아버지이자 강용의 아버지였다. 예전 인정아는 강용의 어머니를 끝까지 괴롭히며 쫓아내려 했다. 결국 어머니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그녀를 따라갔다. 지금은 강용만이 홀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 “이 방은 내가 도우미를 구해 청소해 놨어. 그 누구도 머무른 적 없는 방이야. 당분간 이 방 쓰면 돼. 근처에 꽤 괜찮은 꽃밭도 있으니까 나중에 한번 가 봐.”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신세 좀 질게. 나 지금... 좀 특별한 상황이라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강용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편하게 지내. 아무도 널 쫓아내지 않아. 하지만 밤에는 조심해야 할 거야...” “뭘 조심해야 하는데?” 강용은 돌연 가까이 다가갔다. 장소월은 빛나는 안광을 내뿜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 강용이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몽유병이 좀 있거든. 혹시라도 밤에 실수로 네 방에 들어가면, 네가 나한테 반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 나 책임져야 할 거야.” 장소월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됐어, 그만해.” 그녀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나와 전연우는 법적으로 아직 부부관계야. 이제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쏟는 일은 없을 거야.” 너무 지쳤다! 매번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다치
“파가 없네.” 장소월이 입맛이 없는지 미동도 하지 않자, 강용은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말했다.“먹기 싫어도 조금은 먹어줘. 두 시간이나 들여서 만든 거야. 한 입만 먹어 봐, 응?”강용이 숟가락을 내밀자 장소월은 마지못해 만두를 살짝 맛보았다. “맛있네. 정말 그 골목길에서 먹었던 만두랑 똑같아. 언제부터 배우기 시작한 거야?” 강용은 의자를 끌어와 그녀 앞에 자리 잡고는 만두가 담긴 그릇을 들고 그녀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5년 전 내가 떠났을 때 말이야, 선물 받았었어?” 기억이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강용이 쫓겨나던 날, 장소월은 갑자기 그 가게 만두가 먹고 싶어져 걸음 했었다. 그날 사장님은 강용이 남겨둔 선물이라며 그녀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빨간색 장갑 한 켤레였다.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받았어. 내가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강용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지. 네가 그랬잖아! 우린 어디에 있든, 때가 되면 분명 다시 만날 거라고.”장소월은 그가 그렇게까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네가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 장소월, 고등학교 때 일부러 시험을 망쳤던 건 그저 네 관심을 끌고 싶어서였어. 너한테 솔직하게 말하기도 전에 떠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당시 강용이 떠난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막상 과거를 돌이켜보니, 희미하게만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히 머릿속에 펼쳐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5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몇 년만 지나면 30대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장소월은 그릇에 담긴 만두를 전부 비웠다. 하지만 그리고 싶은 그림에 대한 영감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한 해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다며 장소월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이건 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그녀의 스승님이 어렵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상대방이 언제까지 완성해야
장소월은 오전 내내 보디가드 노릇을 한 강용에게 고마운 마음에 완성된 그림 한 점을 건넸다. “선물이야. 보수라고 생각해.” 강용의 시선이 그림으로 옮겨졌다. 그림 속 인물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그림을 소중히 받으며 말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오늘 저녁 나랑 같이 밥 먹을 기회를 줄 테니까, 눈치껏 승낙하는 게 좋을 거야. 거절하고 내 심기를 건드린다면, 앞으로 아예 기회조차 없을지도 몰라.” 장소월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저녁은 내가 살게.” “네가 그린 이 그림 말이야, 실물보단 많이 떨어지지만 뭐 봐줄 만은 해.” “오늘 더 이상은 못 그리겠네. 그만 돌아가자.” 눈 앞에 펼쳐진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도 그녀의 영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을 그릴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했지만, 무엇이 비어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그림이 안 그려져? 내일 다른 곳에 데려다줄게.”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생각해보자.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됐네, 돌아가자.” 이곳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공원이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수기라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장소월에게 이곳은 처음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 장소월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너 어딜 가든 항상 사진이나 영상 찍어서 나한테 보내줬었잖아. 그런데 왜 그 뒤엔 보내주지 않았던 거야?” “메일 계정이 해킹당했었어. 나중에 일이 터지고 나서 계정을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고.”“누가 그랬는지 알아?” “안다고 한들 뭐 어쩌겠어. 메일 계정 해킹하는 것 정도는 너무 쉬운 일이잖아. 아가씨... 말 돌리지 말고 저녁밥 사는 거나 준비해.” 강용은 걸음이 빨랐기에 장소월은 혼자 뒤처졌다. 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겨우 세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던 중, 어리숙해 보이
장소월은 그 작은 소동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녀는 별장으로 돌아가 편안한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입고는 겉에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밤이 되면 러시아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두 사람은 한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장소월은 여전히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양식보다는 한식이 더 좋았다. 억지로 몇 입 먹은 뒤 장소월이 물었다. “영수 말이야, 비행기 사고 이후 심각하게 다쳤을 텐데 어떻게 살아남았던 거야?” 강용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누군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형의 위치를 알려줬어. 내가 데리고 나왔을 때, 형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어. 낙일 마을에 있는 신의라고 불리는 분이 살려주셨어.”“혹시, 그 할아버지 말이야?”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람. 그 노인은 과거에 궁궐에서 일했던 의원의 후손이라고 했어. 마을 사람들도 병이 생기면 다들 그 사람을 찾아간대. 그런데 그 노인 성격이 좀 괴팍해서 이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대. 감기나 열 때문에 찾아온 환자들은 바로 맞은편 진료소로 쫓아내는 사람이야.” “그랬구나. 그럼 나 전에...” “그때 형이 도와줬어. 네 상태가 너무 심각했거든. 예전에 앓았던 병까지 겹쳐서... 살아난 게 기적이지. 네가 최근에 마셨던 한약들 모두 그 노인이 직접 처방한 거야.”장소월은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하고는 말했다. “내일 다시 그곳에 가보고 싶어. 그분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같이 가줄게.” 강용은 집에 돌아간 뒤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은 장소월에게 만두를 만들어주었다. 장소월이 몇 입 먹은 뒤, 늘 그랬듯 강용이 설거지를 했다. 별장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장소월은 잠이 오지 않아 테라스에 앉아 창밖의 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강용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자?” 장소월은 뒤를 돌
“아버지를 위해 죽은...” 강용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네가 서울을 떠난 게 전연우 때문이었어?”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서철용으로부터 전연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또다시 그 새장 안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전연우한테 원망이 남아있을까? 그를 향한 증오는 시간이라는 강물에 모두 휩쓸려 떠내려간 듯했다. 사랑? 그녀와 전연우 사이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 감정이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단지 다시는 그 숨 막히는 새장 속으로 들어가는 게 싫을 뿐이야. 인생엔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잖아. 그냥 알지 못한 채 살아가지 뭐.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나아.” 송시아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지난 생에서 송시아는 모든 것을 차지했었다. 그녀의 손에서 전연우를 앗아갔었다. 이제 그녀가 떠났으니, 송시아는 더 이상 그를 빼앗으려 발버둥 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물러선 것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다 가져가라지.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아. 강용, 이제 네 이야기를 해줘. 그동안 뭘 하며 지냈던 거야?” “네 화첩 속에 담긴 곳들을 전부 찾아다녔어. 황량한 사막에서 저무는 해도 보았고, 눈 덮인 산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해돋이를 보기도 했어. 또 망망대해에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칠 때 폭우가 쏟아지던 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어...” “첫해에는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어. 두 번째 해에는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한동안 숨어 지냈지...” “누가 널 쫓았던 거야? 혹시 누구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었어?” “전연우... 그 사람이야?” 강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대체 그 사람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네 오빠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 난 서울을 떠날 때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랐어! 전연우가 아니라 다른 패거리였어.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훈
강용은 친부를 찾으러 서울로 가다가 길을 잃어 한 마을에 흘러 들어갔었다. 열 살밖에 안 되었던 그는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외딴 골목에서 심한 매질을 당하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거의 숨이 멎기 직전이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예쁜 공주풍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막대사탕을 든 채로 말이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짓이에요. 내가 우리 아빠한테 당신들 혼내주라고 할 거예요. 우리 아빠는 장해진이에요.”그때 서울 지하 조직 수장이 장해진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아무도 감히 그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장소월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의 경호원이 있었고, 아홉 살밖에 안 된 장소월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했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구석에 웅크린 강용을 쳐다보았다.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안심해, 내가 다 쫓아냈으니까.” “내 이름은 장소월인데, 너는 이름이 뭐야? 왜 저 사람들한테 괴롭힘당한 거야?”“너 말 못 해? 벙어리인가 보네.” “에잇, 불쌍하니까 앞으로는 나랑 같이 다니도록 해. 내 애완견처럼 말이야! 너 우리 아빠 알아? 우리 아빠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 아무도 함부로 못 해. 아빠가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너 말 탈 줄 알아? 나 말처럼 너 타고 갈래. 돌아가면 맛있는 거 줄게.” 그렇게 아홉 살의 장소월은 강용의 등에 올라타 골목길을 나섰다... “됐어, 이제 차에 타면 돼. 내 말을 잘 들었으니 상을 줄게. 멍멍아, 나랑 같이 가자.” “우리 집에는 나 혼자밖에 없어서 같이 놀 사람이 없거든. 앞으로 너는 내가 기르는 강아지인 거야.” “이제 저 사람들처럼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야 해.” “아, 깜빡했네. 우리 꾀죄죄한 멍멍이 벙어리였지.”아홉 살의 장소월은 주변 사람들에게 개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하여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따라 했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