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강영수를 선택한 것인가?정확히 말하면 강영수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강영수가 사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장소월은 전생의 비극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 잠시 망설였었다.떠나는 것과 남는 것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했다.하지만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주겠다는 강영수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했었다.그의 자상함과 세심함은 조금씩 그녀가 세운 방어막을 허물고 있었다.그녀는 종래로 이런 사랑받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강영수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그녀가 어떤 잘못을 하든 강영수는 늘 옆을 지키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해결해줄 것 같았다.그가 그녀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한 번 기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오부연이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강영수는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강영수가 차 사고를 당하자마자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해외에 가버렸다.그 후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도 없다.강씨 저택에 오기 전, 오부연은 그녀에게 강영수를 도와 당시의 트라우마 속에서 걸어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강씨 저택에 온 건 오로지 숨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아직 자신에 대한 강영수의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전 여자친구의 대체품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뭐든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시간을 계산해보니 전연우도 곧 장해진에게 손을 쓸 것이다.그녀는 아무나 칼질을 해댈 수 있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살길은 도망치는 것 외엔 강영수의 곁에 머무르는 것밖에 없었다.장소월은 수술대에 오른 그 순간 이미 결심을 내렸어야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려고 마음먹었다.장소월은 집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에도 학업을 놓지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장소월은 당당히 강영수와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었다. 신문에 강한 그룹과 장씨 집안이 손을 잡고 중요한 몇 개의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실렸다.장해진이 딸 덕분에 강씨 집안이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이제 장소월의 앞에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인시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올림피아드 팀 쪽엔 여전히 한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시험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소월은 남는 시간이면 과외 선생님의 건의에 따라 영어로 된 소설책을 펼쳤다. 처음엔 한 권을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젠 책의 내용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점심시간, 장소월이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을 때 백윤서가 책을 안고 걸어왔다.“소월아... 그동안 잘 지냈어? 저번에 연우 오빠와 함께 병원에 갔었는데 넌 이미 퇴원했더라고. 그 후 널 보러 강씨 저택에도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책을 펼치며 말했다.“난 잘 지내고 있어. 너도 오빠도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백윤서는 영문자가 가득 찍혀있는 장소월의 책을 보고는 물었다.“너 무슨 책을 보는 거야?”“war and peace. 전쟁과 평화.”백윤서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아직은 이런 책을 볼 때가 아닌 것 같아.”“너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했잖아. 내가 다 필기했으니까 가져가서 봐.”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 난...”“그럼 여기에 놓고 갈게. 난 올림피아드 팀 수업에 가야 해.”백윤서가 필기장을 책상에 둔 채 교실을 나갔다.장소월의 말은 채 끝나지 않았다. 실은 그녀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그녀는 이번 특별반 시험에서 반드시 1등의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그 후 올림피아드 시합에서도 1등을 한다면 서울대에 직행할 수 있다.그녀는 강씨 집안에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야,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그들이 함께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니!장소월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정상 아니야? 밥 먹고 쇼핑하고, 전에... 너희도 윤서랑 하던 거 아니야?”과외를 해준 일은... 해변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강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 그녀는 거절했다.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강용이 그녀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등학교 2년 동안 강용은 항상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괴롭혔다. 그래서 6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녀와 멀어지고 따돌리게 했다.이것이 그녀의 성격이 괴팍해진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다른 사람과 왕래하지 않고 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그녀와 강용의 사이는 확실히 전보다 완화되었다.남들 눈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이지만, 2년 동안 강용이 그녀에게 한 나쁜 짓을 두 사람은 잊고 있었다.왜 백윤서를 해치려고 하냐며 그녀의 목을 조르던 강용...장소월은 그때 백윤서를 향한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만약 그때 윤서를 해치려 한다고 인정했다면, 남자는 자신을 진짜 목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방금 방서연의 말은 강용이 날 좋아한다고 오해한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강용을 좋아한다는 뜻인가?’어떤 오해를 했든 간에, 모두 황당한 일이었다.강용과 백윤서는 단둘이 도원촌의 해변에 가서 한 지붕 아래에 묵었었다.백윤서가 막 전학 왔을 때, 두 사람에 대한 스캔들이 난무했고, 전교생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장소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스러운 표정으로 방서연을 보았다.“강용은 계속 윤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랑 뭔 상관이야? 네가 방금 말한 일들은 모두 나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 강용에게도 진작 말한 부분이고.”장소월은 방서연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하!”강용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방서연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강용은 딱딱한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갈라진 벽 틈에 옅은 핏자국
여학생은 마침 문 앞에서 지나가는 장소월과 마주쳤다.장소월은 입구에서 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쓰러진 의자를 보고 장소월은 다가가 일으켜 세웠고, 방서연과 허철의 시선이 그녀에게 떨어졌다.방서연은 속으로 아직도 여기 올 낯이 있냐고 나무랐다.장소월은 그들을 보고, 또 온몸에 포악한 기운이 가득한 강용을 보았다. 손가락을 따라 내려온 피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폭발하는 강용의 모습을 그녀는 6반에 있을 때 이미 본적이 있었다.‘이 자식은 분명 조울증일 거야!’장소월은 더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이건 윤서가 나한테 준 노트야. 다 베껴쓰면 돌려줘. 그리고 의무실에 꼭 가봐.”말을 마친 그녀는 교실을 떠났다.옆에 있던 두 사람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강용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으니, 지금 입을 열면 죽은 목숨이었다.강용은 핑크색 노트를 집어 들고 펼쳐보니, 확실히 장소월의 필체가 아니었다. 첫 페이지에 백윤서의 이름이 쓰여있었다.그는 가차 없이 노트를 반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학교가 끝날 때까지 장소월은 노트가 찢어진 사실을 몰랐지만, 옆 반에서 백윤서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장소월은 복도 옆의 창턱에 앉아 화장실에 가는 2반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오늘 누가 쓰레기통에서 백윤서 노트를 봤대. 그것도 반으로 찢어진 채로!”“그 두 사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휴, 우리는 시험이나 걱정하자! 강용이 왔으니 나도 이젠 꼴찌를 면하겠네.”강용이 백윤서의 노트를 찢었다?망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뒷줄에 앉아 있는 백윤서를 보고 망설였다.마지막 교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소월은 2반으로 갈 생각이었다.청소하는 아주머니는 매일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와서 청소하곤 했다.학생들이 거의 교실을 떠나고 백윤서는 두 손을 뒤로하고 장소월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오늘 네 것까지 챙겨왔어. 수업도 끝났는데 왜 아
고건우의 교무실에 가서 자료를 받고 특수반으로 향했다.특수반이라기보다는 변태반에 가까웠다.원래 3시간 수업으로 9시에 하교할 수 있었지만 기어코 10시까지 질질 끌었다.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돋보기를 낀 60~70대 노인이었다.남은 시간 1시간 30분으로 시험지를 풀어야 했고, 다 풀지 못하면 떠날 수 없었다.시험지를 빨리 푼다고 해도 먼저 갈 수 없었고, 끝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장소월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며 문밖의 사람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소월 아가씨 고생이 많으시네요. 매일 아침 7시에 등교해서 저녁 10시에 하교하고, 집에 돌아가 또 숙제를 12시까지 하시다니.”강영수는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며 검은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했다.“단지 이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소월이는 늘 훌륭했어. 안 그래?”진봉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공부에 재능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천부적인 재능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야만 한다.이때 누군가 문밖의 사람을 발견했고,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저 사람 누구야?”“설마 강영수 아니야?”“그럴 리가. 강한 그룹 대표가 왜 여기 와?”특수반에는 다른 학교 학생 말고도 지방 학교의 학생들도 있었다.강한 그룹의 대표는 10대 영향력 있는 표지 잡지에 실린 인물로 외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모른다.평소에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장소월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잠시 잠이 들었다. 교실 안의 소리를 듣고 궁금해서 문밖을 내다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을 보고 장소월은 흠칫 놀랐다.‘언제 돌아왔지?’교단에 앉아 돋보기를 끼고 있는 선생님은 눈을 치켜뜨고 기침을 몇 번 했다.이러면 학생들이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누군가 먼저 뛰쳐나갔다.“대박!”하나둘씩 뛰쳐나가기 시작했다.장소월의 책상이 하마터면 밀려서
“왜 학교에 왔어?”장소월은 가슴을 감싸고 숨을 헐떡였다.“오 집사한테 전화하니까 네가 아직 집에 안 돌아갔다고 하더라고. 또 학교에 있겠구나 싶어서 걱정돼서 와 봤지.”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 학생들이 이렇게 열정적일 줄은 몰랐어.”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장소월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진봉을 걱정했다.“네가 어디 보통 사람이야? 다음부터는 그냥 나한테 전화해.”“전화가 안 통하는 걸 어떡해?”장소월은 ‘아’하고 그제서야 생각났다.“시험 보느라 전화를 꺼놨어. 미안! 앞으로 나 기다리지 않아도 돼. 회사 일도 바쁠 텐데.”“널 혼자 두고 내가 어떻게 마음이 놓여?”장소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은 없었다.“진봉이 차를 학교 앞에 세웠어. 좀 걸어야 하는데, 내가 업어줄까?”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 나 안 힘들어. 그냥 좀 졸려. 우리 가자.”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영수는 몸을 구부려 그녀의 두 다리를 잡고 가로로 안았다. 장소월은 놀라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아직 수업 안 끝났어. 다른 애들이 봐.”“보면 어때? 내 여자친구를 안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장소월은 아직 완쾌되지 않은 그의 다리가 걱정되었다.“힘들면 그냥 내려줘.”“아니, 안 힘들어.”한적한 오솔길, 길가에 불빛이 비치고 광선이 마치 하얀 눈송이처럼 떨어졌다.강영수는 천천히 걸으며 이 길을 최대한 오래 걷고 싶었다...함박눈이 어깨에 떨어졌고, 그는 고개를 젖혔다.“소월아, 눈 와.”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여자를 보니,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까마귀 깃털처럼 긴 속눈썹에 하얀 눈이 떨어지고, 피부는 마치 눈송이처럼 하얗고 부드러웠다. 동화 속에 나오는 잠자는 미녀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학교를 나서니, 진봉은 이미 차를 몰고 다가왔다.반대편 멀지 않은 곳, 검은색 승용차가 한 대 서있었다.“저거 설마 소월이예요? 이 시간에 왜 아직도 학교에 있죠? 오빠..
그렇다, 감기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다음날 하인이 열이 40도까지 오른 걸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의사를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때 이후로, 장소월은 풍습을 앓게 되었고 매일 많은 보약을 마셔야 했다. 약은 모두 독성을 가진 데다 오랜 지병을 앓고 있었기에 장소월의 몸은 점차 망가졌다.알고 보니... 사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관심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다음날, 장소월은 역시나 늦게 깨어났다.아침 자습에 계속 참여하지 않으면 한 선생님이 그녀를 찾아와 담화를 나눌지도 모른다.그러니 내일은 절대 지각을 해서는 안 된다.“아가씨, 도련님이랑 같이 내려오지 않으셨어요?”장소월은 약에 꿀을 넣어 마셨더니, 그다지 쓰지 않았다.“아직 안 깨어나셨어요? 도련님이 내려오는 걸 못 봤어요.”“제가 올라가 볼게요.”위층에 올라간 장소월은 문이 닫히지 않은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두드리자 문이 휙 열렸다.웃옷을 입지 않은 그의 건장한 몸에는 근육이 가득했고, 손등부터 목까지 문신이 새겨졌다. 처음으로 완전한 문신 모양을 본 장소월은 모양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어떤 짐승의 무늬는 아닌 듯 보였다.장소월은 이내 시선을 돌렸고, 강영수도 그제야 그녀가 뒤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침대 위의 회색 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웠다.“학교 지각하는 거 아니야?”“오늘은 너도 왜 늦게 일어났어?”“해성에 일주일 동안 출장 갈 거야. 내가 없는 동안 오 집사가 너 약 잘 챙겨 먹는지 감독할 거니까 절대 거르지 마.”“그럼... 내가 출장 가서 입을 옷 좀 챙겨줄까?”강영수가 그녀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 그녀도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당연히 좋지.”이미 지각했으니, 몇 분 더 늦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출장 짐을 싸는 건 장소월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트렁크 지퍼를 잠그고 일어서는데, 강영수가 갑자기 허리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왜... 왜 그래?”“네가 빨리 컸으면 좋겠다.”그는 여
백윤서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장소월의 노트를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소월아. 노트는 너한테 빌려준 건데 왜 강용에게 줬어? 지금 학교에서 다들 내가...”이것 때문이었구나!장소월은 재빨리 말했다.“미안해요. 언니 노트를 강용에게 주는 게 아니었어요. 베끼어 쓰라고 줬는데 찢을 줄 몰랐어요.”“소월아,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아. 다만 연우 오빠가 오해할까 봐 두려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어렵게 사귀게 되었는데 이런 오해로 오빠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아.”“알아요, 만약 오빠가 오해하면, 제가 설명할게요.”백윤서는 그녀 책상 위에 있는 문제집을 보고는 물었다.“이 문제집 네가 샀어?”“고 선생님이 줬어요.”“그래? 올해 새로 나온 문제집인 것 같은데?”“그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언니 필요하면 제가 복사해 놓을게요. 올림피아드 팀에서 풀던 문제보다 조금 더 어려울 거예요. 이제 겨우 절반밖에 못 풀었어요.”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장소월은 이 문제집을 먼저 그녀에게 빌려주고 오후에 돌려달라고 했다. 오전 마지막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자유 활동 휴강이었다.오늘은 1, 2, 3반에 주어졌다. 장소월은 여전히 교실에 앉아 패션 잡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잡지들은 모두 교실 뒤의 책장에서 아무거나 가져온 것이다.“장소월?”소리를 들은 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완자 머리를 묶고 얼굴이 약간 통통한 여학생이었는데, 좀 낯익은 얼굴이었다.“너?”“나 기억해? 옆 반 소현아야. 너 괜찮아?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다시 안 돌아오는 줄 알았어. 너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 됐어!”그녀의 눈은 크고 동그랗고, 단순하고 무해한 것이 마치 사슴 같았고, 웃을 때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구부러져 더욱 귀여웠다.“저번엔 고마웠어!”“아니야. 참. 너 왜 아직도 교실에 있어? 농구 경기가 있는데, 잘생긴 오빠들 엄청 많대!”장소월은 빙긋 웃었다.“난 아
한참 고민하던 소현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효연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럼 아가씨도 강지훈 씨의 아기를 가져요. 그럼 자꾸 나한테 와서 자지 않을 거잖아요!”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은빛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주변 도우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바보가 이토록 충격적인 말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주인님과 효연 아가씨의 잠자리 빈도를 생각하면, 주인님이 허락만 하셨다면 그들의 아이는 이미 몇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바보는 입만 열면 효연 아가씨의 급소를 찌르곤 한다! 규영과 미진도 소현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천효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자 규영이 황급히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 “효연 아가씨, 저희 현아 아가씨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이라 이런 걸 잘 모르십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현아는 긴장감에 옷자락을 꽉 말아 쥐며 말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좀 멍청해서 그래요. 혹시 제 말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말해주세요. 사과할게요.” 그녀는 자신이 조금 떨어지는 지능 때문에 자주 말실수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이것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었다. 한때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린 엄마가 말해주셨다. 마음속에 말을 담아두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니 그냥 용감하게 말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릇된 말을 했을 땐 제대로 사과해서 용서를 빌면 된다고도 하셨다. “맛있는 거 줄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네?” 한참을 기다려도 천효연이 대답하지 않자, 소현아는 탁자 위의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천효연의 불쾌한 향수 냄새가 또다시 코를 찔렀다.소현아는 즉시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또다시 천효연을 화나게 할까 봐 최선을 다해 참아냈다. 천효연은 자신 앞에 내밀
잔뜩 일그러지는 소현아의 얼굴을 본 천효연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 바보가 먼저 선수를 친다고? 천효연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소현아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만지려 했다. “현아 씨, 아기 태어나려면 몇 달 남았어요? 나도 아이 정말 좋아해요. 전에 현아 씨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강지훈 씨가 그랬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나더러 맡아 키우라고요.” 농담하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소현아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엔 독사 같은 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현아는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고 생각한 천효연은 득의양양하게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현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눈동자를 사방으로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안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현아 아가씨!” 규영과 미진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애처롭게 서 있는 소현아를 본 그들은 급히 달려왔다. 소현아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규영은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화장실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소현아를 1층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안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효연 아가씨, 죄송합니다. 요즘 현아 아가씨의 입덧이 좀 심해요. 임산부라 요즘 많이 예민하십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현아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주인님 성격 아시죠?” 미진은 느긋하게 가져온 음식을 펼쳐놓으며 경고를 담아 공손하게 말했다. 천효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고작 도우미 주제에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미진은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천효연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멈췄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