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의 존재가 강영수에게 구원이라면, 소현아는 장소월에게 치유 같은 존재였다.그녀는 소현아의 성적을 본 적이 있다. 2반에서 가장 마지막 등수였고 심지어 6반에서도 꼴등일 것이다.장소월은 성적이 가장 낮은 학생이 강용인 줄로 알았으나 알고 보니 소현아였다.소현아는 몸이 아파 저번 기말고사를 보지 못했다. 하여 공표란에 그녀의 성적이 없었던 것이다.이런 성적이라면 2반이 아니라 6반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 원인에 대해 장소월은 묻지 않았다.점심밥을 먹고 난 뒤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도서관에 갔다. 예전 그녀는 매일 강용에게 과외를 해주었지만 이젠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만 하기로 했다. 사실 지금 그의 성적으로도 충분히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다. 그는 저번 시험에서 2반 10등 안쪽에 진입하기도 했다.최근 며칠간 강용은 계속 여자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왔고 장소월은 마치 방해꾼과도 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었다.오늘 장소월은 먼저 도서관에 도착해 강용이 오기 전까지 소현아를 가르쳤다.소현아는 정말...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소현아는 펜을 잡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소월아, 나 진짜 멍청하지? 아무리 가르쳐줘도 모르잖아.”“나 여러 차례 반을 바꿨었어. 그때마다 친구들이 다 날 바보라고 놀리더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머리가 나빴던 건 아니었어. 예전엔 진짜 총명했거든. 하지만 어렸을 적 고열을 앓았을 때, 가정형편이 너무 가난해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했어. 그 바람에 뇌를 다쳤고 기억력이 퇴화한 거야. 소월아, 걱정하지 마. 난 꼭 너처럼 노력할 거야. 저번에 네가 가르쳐준 문제는 이제 풀 수 있어.”장소월이 물었다.“반을 바꿨다고?”소현아는 한껏 고개를 떨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친구들이 날 바보라고 놀리고 괴롭혀서 연속 반을 바꿨어. 2반에 오니까 별로 괴롭히지 않더라고. 선생님께서 다시 반을 바꾸면 퇴학시키겠다고 하셨어.”그런 거였구나.“걱정하지 마. 이젠 아무도 널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강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꽤 높은 성적을 받았으니 이제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그때 여학생 몇 명이 책을 안고 장소월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너 아까 봤어? 강용의 3점 슛 진짜 멋있었어!”“봤어. 정말 멋있더라!”“같이 있던 여학생은 2반 설채윤이지?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일 오래 사귄 여자친구지? 예전 만났던 퀸카들은 다 일주일도 넘기지 못했잖아.”장소월의 존재를 눈치챈 그중 한 명의 여학생이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친구는 깜짝 놀라며 입을 닫았다.장소월은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루고 집중적으로 소현아를 가르쳤다.한 번으로 알아듣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알아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반복했다. 가끔씩 화가 날 때에도 그녀의 순진한 눈빛을 보면 이내 사르르 녹아내렸다.소현아를 가르치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시간 동안 한 페이지의 연습 문제 중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소월아, 나 너무 멍청하지?”소현아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장소월을 쳐다보았다.“아니야. 넌 총명해. 그저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네 성적은 예전의 강용보다 훨씬 더 높아. 당시 강용의 성적은 몇 개 과목을 합쳐도 몇십 점밖에 되지 않았어.”“정말이야?”장소월의 말에 위안을 받은 소현아가 물었다.“응. 강용이 해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어. 오늘 내가 가르쳐줬던 것들 집에 가서 다시 한번 풀어봐. 먼저 풀이 방법을 구상한 다음 펜을 들어.”“앞으로 또 나랑 도서관에 와줄 수 있어?”장소월은 소현아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그래.”전생에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성장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소현아처럼 귀여운 모습이겠지.만약 이런 딸이 있다면 장소월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쥐여줄 것이다.30분 뒤면 다음 수업이 시작된다.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도서관에서 나왔다. 1미
“야, 장소월, 네가 뭔데 우리 2반 일에 참견이야?”허경아가 책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친구들의 편에 서서 장소월을 비난했다. 장소월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설채윤과 함께 몰려다니는 패거리였다.“그러니까! 우린 소현아에게 심부름을 시킨 거지 너한테 시킨 게 아니야! 당장 너희 반으로 꺼져.”소현아는 덜컥 겁이 나 장소월의 앞을 막아섰다.“소월이는 괴롭히지 마. 내가 지금 가서 사 올게.”그녀는 이어 조심스레 장소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소월아, 난 괜찮으니까 돌아가. 이미 너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 나 때문에 너한테 피해를 줄 순 없어.”그들과 맞서던 3, 5명의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장소월의 노트를 펼쳐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같은 바보가 이해할 수 있겠어?”“만지지 마. 그건 장소월의 노트야.”소현아가 빼앗으려고 손을 뻗자 그들은 원숭이를 놀리는 것처럼 노트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녀를 농락했다.“네가 만지지 말라고 하면 만지지 말아야 해? 난 찢기까지 할 건데?”소현아가다급히 말했다.“안 돼.”다른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상대가 도발적인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노트 위쪽을 살짝 찢었다.장소월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찢기 전에 첫 장을 펼쳐봐. 누구 이름이 쓰여 있을까?”“잘난 척하기는. 고작 누더기 노트일 뿐이면서.”첫 장을 펼쳐 본 허정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뭐 대단한 거라고.”허정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다시 노트를 내려놓고 돌아섰다.장소월이 말했다.“거기 서!”“너... 또 뭘 하려는 건데?”“현아한테 사과해.”“내가 왜 사과까지 해야 하는데?”“누구의 이름이 쓰여있는지 봤잖아.”장소월이 단호히 말했다.허정아는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소현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소현아.”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마음속으론 장소월을 인정하지 않았다. 몸을 팔며 남자에게 꼬리친 주제에 뭐가
장소월이 강용에게 문 앞까지 끌려갔을 때, 선생님이 교실에 도착했다.“강용, 영어 수업 곧 시작하는데 교실에 안 들어올 거야?”“쓸데없는 일에 상관하지 말고 꺼지세요.”강용이 거칠게 쏘아붙였다.선생님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표출해내지 못하고 곧바로 교실에 들어갔다.강용은 학교에서 소문난 망나니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전보단 많이 나아지긴 했다.장소월이 말했다.“할 말 있으면 수업 끝나고 해. 나 수업 들어야 해.”강용의 힘에 짓눌린 장소월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장소월을 벽에 밀쳐넣고는 다른 한 손으로 벽을 집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아까 그 멍청이한테 한 말 무슨 뜻이야?”장소월이 예쁜 눈썹을 찌푸렸다.“걔한테도 이름이 있어. 존중해줘.”강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소현아!”그의 눈빛에 짜증스러움이 잔뜩 피어올랐다.“왜 걔한테 과외를 해주겠다는 거야!”장소월은 그와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도 이미 교실에 들어가셨고 지금 그들의 자세는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그녀는 그를 힘껏 밀어내고는 차갑게 말했다.“소현아는 내... 친구야.”장소월의 머릿속에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불러주던 소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난 네가 연애하는 거 반대하지 않아. 앞으로 난 매일 도서관에서 현아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거야. 넌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해. 지금의 네 성적으로도 충분히 서울대에 갈 수 있으니까. 설채윤을 데려오는 것도 반대 안 해. 하지만 난 너만 가르칠 거야. 내겐 설채윤까지 가르칠 의무는 없으니까. 차라리 네가 직접 가르쳐. 또한 난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난 그저 네가 서울대에 진학하는 걸 돕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야... 다른 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강용은 진지하고도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 본래 희미하게 빛나던 등불이 돌연 불어온 바람에 휙 꺼져버
장소월은 15분이 지난 다음에야 학교에서 나가 강씨 집안에서 보낸 차에 탔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강영수로부터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그녀가 답장을 하려는 순간, 돌연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아버지.”장해진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그녀에게 직접 걸어온 것이었다.“연우한테 들었는데 인씨 가문에서 파티에 너도 초대했다며?”핸드폰 너머의 그 사람은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네.”“강 대표는 아직 해성에서 돌아오지 않아 참석하지 못할 거야. 오늘 집에 돌아와 준비하고 내일 나랑 같이 가자. 너한테 소개시켜줄 사람들도 있어.”“하지만...”모기처럼 기어들어가는 세 글자를 내뱉은 뒤, 장소월은 이내 말을 바꾸었다.“네. 아버지. 알겠어요.”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이유로든,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다.장소월은 운전 기사에게 말해 방향을 돌려 장씨 가문 남원 별장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운전기사를 돌려보냈다.인씨 집안의 인맥이라면 아마 서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을 초대했을 것이다.장해진의 목적은 서울 상업계에 자신의 딸과 강영수의 관계를 공표하는 것이다.예전 강영수 또한 그녀와 함께 여러 차례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모두 그녀에게 거절당했다. 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강영수는 종래로 그녀에게 내키지 않은 일을 강제로 시킨 적이 없다.하지만 장해진은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강한 압박 속에서 자라온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남원 별장에 들어가자 장소월의 눈에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그녀를 기다리는 듯했다.전연우, 백윤서, 강만옥도 자리하고 있었다. 장해진이 그녀에게 말했다.“손 씻고 와서 밥 먹어.”“네. 아버지.”장소월이 책가방을 벗자 은경애가 받아안았다.강만옥이 일어나 그릇에 국을 담고는 장소월의 자리에 놓아주었다.“강씨 저택에서 잘 지냈어? 안
그 대답에 장해진의 찌푸렸던 이마가 스르르 풀렸다.“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야. 남녀 간의 일은 만옥 이모가 너한테 가르쳐줄 거야. 될수록 3년 안에 아이를 가져.”아, 아이...장소월은 때때로 자신이 정말 가여웠다.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그녀는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전생에도 없었고, 이번 생에도 없을 것이다. 두 번 모두...장소월에게 남은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강만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이다.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있을 때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그녀는 악마라도 만난 듯 잔뜩 경계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소월아, 자?”강만옥의 목소리에 장소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강만옥이 박스 하나를 안고 안으로 들어왔다.“이모, 무슨 일 있으세요?”“네 아버지가 이걸 가져다주라고 해서 왔어.”강만옥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장소월이 문을 닫고 상자를 열어보니 CD 하나가 들어있었다.“오늘 밤 이걸 봐.”CD에 붙어있는 그림을 본 순간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위엔 알아볼 수 없는 일본어와 섹시한 차림의 여자들이 야릇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장소월은 황당함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강만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자로서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야. 미리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여자에겐 얼굴뿐만 아니라 침대 위에서의 스킬도 중요해. 소월아, 넌 이미 예쁜 얼굴을 타고났어. 절대 그 미모를 낭비하면 안 돼.”그녀의 말엔 다른 의미도 담겨 있는 듯했으나 장소월은 모르는 척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강만옥은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섰다.아버지는 그녀를 강만옥과 같은 여자로 만들려는 건가? 얼굴과 몸만으로 남자를 유혹
“어제 일찍 잤거든. 영수야... 주말에 계속 집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오늘 저녁 아버지가 나를 인씨네 파티에 데려가려고 해.”“넌 가고 싶어? 만약 싫다면 이따가 오 집사한테 너 데리러 가라고 할게. 아니면... 네가 해성에 와도 되고. 모레 마침 월요일이니까 같이 서울에 돌아가자.”인씨와 강씨 가문의 관계를 장소월은 잘 알고 있었다. 인하 그룹의 대표는 강영수의 어머니였다. 강씨 가문을 떠나고 인씨 가문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강영수와 어머니는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그룹 사이에 그 어떤 협력관계도 없었다.외부인들이 보기에 강씨 가문은 인씨 가문과 협력할 가치가 없었다.예전에 강영수가 자신을 남원 별장에 가두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자주 그를 보러 갔었다. 인시윤 못지않게 강영수를 사랑하는 어머니였다.장소월은 강영수가 계속 자신의 어머니를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 일을 거론하는 건 강영수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버지가 화내실 거야.”“내가 나선다면 아버지도 감히 뭐라 못할 거야. 만약 너에게 뭐라고 하면 당장 나한테 일러바쳐. 내가 당장 화풀이해 줄 테니까.”“좋아. 그럼 지금 당장 일어나서 너 보러 갈게.”“음, 준비 마치고 메시지 보내.”“알겠어.”진봉은 차를 몰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그럼 오늘 밤 저희 돌아갈 필요 있나요?”원래 일주일이던 스케줄을 3일 앞당겨 완성한 이유를 진봉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바로 장소월이 강영수를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틀 밤을 새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역시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안 돌아가. 점심에 식당 예약해 놔. 현지 특색이 있는 음식으로.”“네, 대표님.”서울은 해성과 그리 멀지 않았고 오는데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다. 해성은 바다와 가깝고 밤에는 야시장도 많아서 그녀와 함께 구경하고 싶었다.장소월은 검은 모직 코트를 입었는데, 지난번에 강영수가 빌려준 코트였다. 해성이 추울
강영수의 사람이 직접 데리러 오고, 장소월이 가고 싶어 하니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아버지와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 강영수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나았다.장해진은 강씨 가문을 두려워하니, 감히 강영수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오전 10시에 출발해 점심 11시 30분쯤 해성에 도착했다.운전기사는 그녀를 고급 식당 앞에 데려다주었다.“아가씨,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큰 도련님께서 바래다주실 겁니다.”“네, 귀찮게 해드렸네요.”“아가씨 별말씀을요!”진봉은 익숙한 차량을 보고 다가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고 장소월은 체인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 옷을 꼭 여몄다.“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전 이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들어가기 전 장소월이 물었다.“일은 다 마치셨나요?”진봉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으니 대표님이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합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와서 강영수에게 폐를 끼칠까 봐 걱정했다. 만약 그가 바쁘다면 혼자 해성을 구경할 생각도 했었다.식당으로 들어서자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장소월은 다가가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기다리고 있는 분이 아직 안 오셨나요? 왜 아직도 음식을 주문하지 않으셨죠?”강영수는 소리를 듣고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마침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왔네요. 전 다른 건 몰라도 돈이 좀 많거든요.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주문하세요.”몇 명의 종업원이 디저트를 가져왔고, 또 메뉴판을 가져왔다.“이 디저트는 뭐야?”“일단 배부터 채우라고 내가 주문했어.”장소월은 많이 먹지도 못하니 조금만 주문했다.하지만 이 디저트들은 포장해야 할 것 같았다. 강영수가 너무 많이 시켰기 때문이다.강영수는 짙은 눈으로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먹고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일종의 즐거움이었다.“이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