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어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이는 별로 많지 않은 아가씨 같았어요.”장소월은 워낙 혼자 다니기를 좋아하고 인간관계에 신경 쓰는 데에 능하지 않으니, 은경애는 그녀가 참석할 거라는 말 대신 그저 알려주겠다고 대답했었다.장소월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아래 적혀있는 이름을 보지 않아도, 위에 글씨만으로도 소현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몇 년이 지났어도, 그녀의 글씨는 여전했다.생일 파티?전연우가 밖에서 들어오며 물었다.“가고 싶어? 내가 같이 갈게.”“그때 가서 생각해.”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금빛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날짜를 보니 일주일 뒤였다.아마 허이준이 돌아와 알려줬을 것이다. 허이준을 제외하면 그녀의 귀국 소식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장소월은 방에 돌아와 입고 있던 검은색 원피스를 갈아입었다.아이를 은경애에게 맡겨놓으니, 마음이 놓였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침대에 잠시 누워 휴식을 취했다.전연우가 언제 침대에 올라왔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하늘에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먼저 깨어난 전연우는 아직 꿈나라에 빠져있는 여자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복도에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대표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전연우가 잠옷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잠시만요.”장소월은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의자에 묶인 채 큰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사납게 번지는 불길은 조금씩 그녀의 피부를 삼켜버렸다. 한편 전연우는 문 어구에 서서 아이를 안고 있는 송시아와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외면하고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꽃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꿈속에서의 그녀는 건강한 몸 상태였다...돌연 심장에서 전해져오는 강렬한 통증에 눈을 번쩍 떴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희미한 조명 아래, 전연우가 앉아있었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어떤 일을... 오빠가 너한테 알려주지 않는 건, 네 세계가 더러운 흙탕물에 오염되지 않길 원해서야.”“장해진도 깨끗하지 않고, 나 역시...”장소월은 얼룩 한 점 없이 깨끗이 살아가야 한다.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장해진은 줄곧 나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었다...장소월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괴롭힘을 견뎌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장해진의 딸이었으니까...그녀가 이런 일로 장해진에게 도움을 청할 때면 장해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견디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때문에... 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장소월이 천천히 힘을 풀었다. 입술이 빨간 핏빛으로 물들었고, 어두운색 줄무늬 잠옷에도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났다.“그래. 아버지는 벌을 받고 돌아가셨어. 그럼 넌? 넌 왜 안 죽는 거야?”“너도 수많은 사람을 해쳤잖아. 넌 왜 안 죽는 거냐고!”“아버지가 죽어야 마땅하다면, 너도 죽어야지!”감정이 머리끝까지 북받쳐 올랐다. 또르륵... 긴 속눈썹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전연우는 피로 물들어 더욱 유혹적으로 변한 그녀의 입술을 지긋이 쳐다보았다.그는 손가락으로 피를 닦아주고는 다른 한 손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고 품 안에 끌어당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난 죽지 않아. 소월이는... 오빠와 함께 잘 살아가야 해.”“난 너랑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죽을 때까지.”“언젠간 너도 알게 될 거야.”“난 알고 싶지 않아. 대체 왜 나야? 왜... 내가 모든 피해를 안아야 하는데? 분명 난 잘못한 거 없잖아.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을 감내하라고 하는 건데!”전연우는 장해진에 대한 모든 원한을 그녀에게 풀었다. 서철용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오 아주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다들 그녀를 지옥 불구덩이에 몰아넣는 것에 혈안이 되어 그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
품에서 달콤하게 잠든 아이가 깰세라, 번개가 치자 장소월은 곧바로 아이의 귀를 막았다.전연우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은 컵을 집어 들자 장소월이 그를 멈춰 세웠다.“별이가 먹는 약을 탄 물이야.”전연우는 멈칫하다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아이한테 약 많이 먹이지 마. 부작용이 있어서 몸에 안 좋아.”“목소리 낮춰. 금방 잠들었어.”오늘 밤엔 전연우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아 장소월은 모처럼 편히 잠들었다. 새벽, 장소월은 돌연 들려온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전연우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무슨 얘기를 하는지 장소월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통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고, 장소월은 이내 다시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꿀꿀했다.그녀는 점심 12시까지 자고서야 깨어났다. 옆자리를 만져보니 차갑게 식어있었다. 깨어난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장소월이 깨자 별이도 연달아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히 씻은 뒤 아이를 안고 내려가 밥을 먹었다. 집안 어디에도 전연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아이를 눕혀놓은 뒤 기저귀를 갈았고, 은경애는 분유를 따뜻하게 데워 가져왔다.장소월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나갔어요?”“누구요?”은경애는 곧바로 장소월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렸다.“아, 대표님이요? 아침 일찍 나가신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비서도 온 걸 보니 회사에 일이 있어 나가신 것 같아요.”장소월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은경애가 한 마디 덧붙였다.“곽씨 아주머니가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며칠 휴가를 내고 싶다고 제게 말했어요.”“네.”장소월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렇게 떠난 전연우는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안부 전화만 걸어왔다.그가 없으니, 장소월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점심시간, 별이는 찬 바람을 맞아 감기에 걸렸는지 연속 며칠 동안 약을 먹여도 호전될 기
기성은은 검은색 우산을 들고 전연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연우는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외투를 걸친 채,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장소월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의사가 현관으로 들어왔다.기성은이 우산을 접고, 도우미가 전연우가 벗어 놓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기성은으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들은 도우미는 계단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장소월은 그가 오늘 돌아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차갑게 굳어버린 얼굴로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핸드폰을 은경애에게 돌려주고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별이는 열이 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서철용은 청진기로 아이의 상태를 점검했다. 어젯밤 별이를 데리고 정원 산책을 했던 탓일까.그저 일반적인 기침이라 생각했으나, 이틀이 지나도 전혀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장소월은 그제야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서철용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전연우를 쳐다보다가 장소월에게 말했다.“아이는 괜찮아요. 보통 감기예요. 열이 내리는 주사를 하나 맞으면 돼요.”서철용은 가는 주삿바늘을 아이의 손등에 꽂아 넣었다.장소월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보통 감기라면 약만 먹이면 되지, 왜 주사까지 맞아요?”서철용은 정신을 고도로 집중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전연우가 장소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철용인 틀리지 않아.”그때 서철용이 말했다.“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병원에 가도 돼요.”“마침 소월 씨 건강 검진 결과도 3일 뒤면 나오니, 그때 별이도 데려오면 되겠네요.”전연우가 말했다.“짐 챙겨. 병원 가자.”장소월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 그녀에게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서철용과 전연우 두 사람이 입을 맞춘다면 그 간악함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장소월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한테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한 건 너야. 그런데 이제 와 또 짐을
“움직이지 마.”돌연 전연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 책임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를 제외하고도... 회의실 안 모든 사람들은 겁을 먹고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전연우는 직원들에게 엄격하고 냉정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단 한마디 말로 회사에서 쫓아낼 수도 있는 사람이다별이는 얌전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작은 손으로 전연우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평소엔 웃음기조차 보이지 않던 냉혈한이 조그만 아이에게 잡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고, 어쩌다 한 번 그 광경을 본 사람도 감히 웃지 못했다.단번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 회의실에서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계속해!”별이는 젼연우의 목소리에 버튼이 눌렸는지,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전연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바로 기성은에게 건넸다.기성은 역시 종래로 아이를 달래본 적이 없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성은에게 안겨 문을 나선 순간, 아이는 급기야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비서 휴게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기성은의 귀에 들어왔다.“대표님이 데리고 온 아이는 누구 아이일까요? 설마... 그 꽃뱀 여자가 낳은 건 아니겠죠? 인씨 집안 아가씨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벌써 아이를 낳았을 리는 없잖아요.”“누가 알겠어요. 재벌 집에야 어지러운 일투성이죠. 돈 많은 사람 중에 바람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일한 지 꽤 되었는데도 대표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신 건 정말 처음 보네요.”“아이를 안고 있는 대표님 모습 참 보기 좋던데요? 대표님처럼 차가운 사람에게 그런 부드러운 면도 있는지 몰랐어요.”“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그중 긴 파마머리의 여자가 바쁘게 커피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민아 씨,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커피 몇 잔 타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소민아가 급히 말했다.“다 됐어요. 지금 나가
그렇게 한두 명씩 모두 도망쳐버렸다.소민아는 마주 오는 사람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기 비서님, 저들이 했던 말은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전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기성은은 오랜 시간 동안 전연우와 함께 있었던지라 전연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와 흡사한 서늘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기에 회사 사람들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아이 볼 줄 알아요?”“네?”순간 당황한 소민아가 되물었다.기성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아이 볼 줄 아냐고요. 못 알아들어요?”소민아가 곧바로 대답했다.“압니다. 압니다. 갓 태어난 아이부터 80세 노인까지, 보살피는 건 잘합니다.”그때 기성은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별이는 너무 울어 목소리까지 변해버린 뒤에야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소민아가 아이를 받아 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성은은 급히 자리를 떴다.낯선 냄새를 맡고, 낯선 이의 얼굴을 본 별이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젠장, 그녀가 알긴 뭘 안단 말인가. 그저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 말일 뿐인 것을.한 시간 뒤, 전연우는 회의를 끝마쳤다.12시 정각이었다.회의 시간은 본래 두 시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아이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단축했다.하지만 전연우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유일하게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장소월이 낮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을 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고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아가씨, 대표님이 아가씨와 통화가 되지 않아 집 전화로 연락해 왔어요.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요.”“무슨 일 있으면 잠시 뒤에 전화하라고 해요. 전 지금 쉬어야 해요.”“하지만...”도우미가 난처한 얼굴로 아직 연결되어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장소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주세요.”“또 무슨 일이야?”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전연우가 대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오늘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분유를 못 가져
검은 구름이 걷히고 차도 양옆 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이 내리쬐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아이로 협박해 목적을 이루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안 오면 굶길 거야.”도우미가 곧이곧대로 그녀에게 전한 전연우의 말이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이 아이도 전연우가 장소월을 다루는 무기가 되어버렸다.그녀는 옷방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아이 물건을 챙겨 넣고는 들고 나왔다.분유를 잊어버린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저귀까지 가져가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이쯤 되니 그가 일부러 놓고 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흐렸던 날씨는 점차 맑게 개어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장소월은 성세 그룹에 도착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문 앞에 서서 성세 그룹을 올려다보니, 전생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녀는 도저히 회사에 오고 싶지 않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로즈 가든에 가져다 놓겠다고 했지만, 전연우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프런트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예전 남천 그룹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그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아가씨? 귀국하신 거예요?”장소월은 예의 있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아가씨, 대표님 만나러 오신 거죠?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도착하시면 모시고 올라오라고 분부하셨어요.”“괜찮아요. 저 혼자 올라가면 돼요. 몇 층이에요?”“99층입니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프런트 직원은 장소월에게 99층 대표실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엘리베이터가 곧 내려올 겁니다.”“네.”프런트 직원이 자리에 돌아가자 다른 직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갔다.“아가씨요? 난 왜 한 번도 본 적 없죠?”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사람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장씨 집안의 따님이에요. 대표님의 여동생이 되기도 하죠. 그러니까 앞으로 저 사람을 보면 조심해야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장소월은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위로 얹어 가늘고 긴 목을 드러내고는 귀 옆으로 잔머리를 늘어뜨렸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드럽고도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었다.그녀가 전연우에게 가져다주는 느낌은 바깥 그 어떤 여자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그녀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연우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세심하게 가시를 바른 뒤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밥 먹을 땐 좀 이러지 않으면 안 돼?”장소월이 그를 노려보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슴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전연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꽤 커졌네.”평소엔 빈틈 하나 없는 고고한 신사인 척하더니, 그녀 앞에선 악랄한 본성을 드러낸다.포장하고 있던 인두겁을 떼어내고 나니, 그저 망둥이처럼 날뛰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전연우, 좀 무겁게 행동하면 안 돼?”전연우가 몸을 가까이 가져가 그녀의 향긋한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었다.“너 침대에선 무거운 거 좋아하던데.”“전연우!”장소월은 혐오가 가득 섞인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꼭 그렇게 역겹게 말을 해야겠어?”장소월은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그녀는 전연우의 손을 뿌리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차갑게 말했다.“난 이미 분유 가져왔어. 먹이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난 집에 갈 거야.”전연우가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듯해 보였지만 얼굴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장소월의 모습에 전연우는 느릿하게 단추 두 개를 풀고는 서랍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물고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장소월은 방에서 나가려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올라 몸을 홱 돌리고는 그를 쳐다보았다.“또 뭘 하려는 거야?”전연우가 퉁명스럽게 몇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