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직접 그녀의 무명지에 끼워주었던 반지가 또다시 그녀로 인해 손가락에서 빠져나와 그의 베개 아래에 놓였다. 평소 그는 미세한 움직임에도 경계하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최근 성세 그룹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쳐야 했다.심지어 전연우까지도 매일 한 시간 전에 출근해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퇴근해 병원에 오고 했다.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 일을 처리하는 데에 사용했다. 병실에서의 그는 단 두 가지 모습이었다. 회의를 하고 있거나, 서류를 보고 있거나.장소월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바쁘면 회사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되지 않은가.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고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가 보다.새벽 여섯 시 반, 아직 밝아오지 않은 어둑한 하늘이었다.기성은이 서류를 가지고 병원에 도착하자 전연우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피곤한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걸어오던 그는 텅 빈 거실을 보고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갔어?”기성은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대표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전연우는 불안한 마음에 방으로 다시 돌아가 신분증 등 중요한 문서들이 들어있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기성은은 대표님이 이토록 화난 걸 보니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다.그는 몇 초 뒤에야 대표님이 찾는 사람이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설명하려던 순간 전연우는 옆에 있던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그때, 밖에서 걸어들어온 장소월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왜 또 정신병 발작이야?”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검사 결과 보고서를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이 돌아오자 기성은은 말없이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물을 한 컵 따랐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끓어 올랐던 남자의 분노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녀
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익숙한 반지를 꺼냈다. 장소월은 공포스러운 물건을 보기라도 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전연우의 강력한 힘이 그녀를 마음대로 하게 놔두지 않았다.“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다시는 빼지 마. 아니면... 그 대가 치러야 할 거야!”“넌 날 협박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뭐야?”전연우는 그녀에게 반지를 깨워준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내가 요즘 급한 일을 끝내는 동안 얌전히 있어 줘. 그리고 회사 연말 파티에 성세 그룹 미래의 안주인으로서 나와 함께 참석하자.”그의 말을 듣는 그 몇 초의 시간에 장소월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졌다.“너... 너 미쳤어! 송시아랑 같이 가자고 해. 나 부르지 말고!”장소월은 언론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장씨 집안이 건재할 때에도 장해진은 기자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단단히 차단했다.장소월은 학생 때 클럽에 들어갔던 사진이 파파라치에 의해 몰래 찍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장해진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그런 그녀가 하필 전연우의 와이프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면...그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전생에선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엔 왜...“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 옆에만 있으면 아무도 너한테 어떻게 하지 못해. 기자회견도 없을 거야.”“난 안 가겠다고 했어.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장소월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공포에 질려 힘껏 손을 빼내려 한 순간 전연우는 손바닥에서 찌릿함을 느꼈다. 손을 들어보니 장소월의 손톱에 긁혀 피가 조금 나오고 있었다.그가 주먹을 말아쥐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파티는 빠르게 끝날 거야. 넌 그냥 얼굴만 보여주면 돼.”“난 안 가.”장소월의 말투는 더없이 단호했다.하지만 그때가 되면 전연우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데려가고 말 것이다.그녀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남원 별장에 들
대표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술팀 직원이 말을 이어갔다.“만약 만진 사람이 없다면, 다른 한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전기 코드를 빼 전원이 끊긴 겁니다. 비정상적으로 꺼지면 시스템이 고장 날 수 있습니다. 다시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시스템을 재설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전연우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해보았다.“지금 바로 새 컴퓨터를 가져다 놔. 그리고 임원들에게 연락해 올해 모든 중요한 자료들을 내 메일로 보내라고 해.”기성은은 전연우의 얼굴에서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자 아마 어젯밤 화상회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기성은도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 화면이 갑자기 꺼져버렸었다. 장소월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컴퓨터 안엔 수백억이 오가는 계약서들이 들어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몇 번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님이 저토록 개의치 않아 하는 걸 보니 장소월의 걸작이 틀림없다.그도 그럴 것이 장소월을 제외하고는 대표님의 컴퓨터를 함부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컴퓨터 안 자료들은 만에 하나 잃어버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기술팀 직원이 나간 뒤, 전연우는 몇 번을 다시 시도해봐도 켜지지 않자 기성은에게 던져버렸다.“가져가서 폐기해.”“네.”기성은이 물었다.“오늘 아침 회의 뒤로 미룰까요?”전연우가 대답했다.“아니.”기성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남원 별장, 장소월이 은경애가 만든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아가씨, 손이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일하지 말고 푹 쉬세요. 이 삼계탕부터 모두 드시고요.”장소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일단 거기 놔요. 나중에 마저 먹을게요.”“그건... 그건 안 돼요. 대표님께서 매일 아가씨에게 삼계탕을 만들어주고 다 드실 때까지 꼭 지켜보라고 하셨어요. 아니면 저한테 보너스 안 주시겠다고...”“아가
은경애는 서툰 손길로 핸드폰 버튼을 눌러 장소월이 삼계탕을 먹고 있는 모습을 찍어 전연우에게 보내주었다.“아이고, 아가씨, 정말 너무 예쁘세요. 카메라도 잘 받네요”“다 먹었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이 갖고 싶다면 협조해 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절대 날 배신하면 안 돼요.”은경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릇을 정리하며 손을 휘저었다.“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 아가씨 편이에요.”“그냥... 대표님의 돈이 좋을 뿐이에요.”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전연우는 어렵지 않게 은경애를 매수했다. 장소월은 어차피 이 세상엔 한 명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알겠어요. 믿어요. 이만 나가보세요.”장소월은 얼른 그녀를 내보내고 싶었다.“그럼 전 갈게요.”은경애가 나간 뒤.성세 그룹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전연우는 진동 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켰다. 장소월의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기업팀 매니저는 앞에서 발표하다가 상석에 앉은 대표님의 얼굴을 몰래 살펴보았다. 흔치 않은 그의 밝은 얼굴에 사람들은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들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대표님은 이 시퍼런 대낮에 핸드폰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전연우는 카카오톡 친구 추가 화면을 눌러보았다. 아직 상대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지 않은 상태였다.전연우가 준 핑크색 핸드폰은 여전히 장소월의 침대 옆 서랍 안 진동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고 친구 추가 메시지가 또다시 도착했다.회의가 끝난 뒤.전연우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핸드폰 속 새로 개발한 대화 어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임원들의 시선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기술팀 직원에게로 향했다.“왜 아직도 반응이 없어요?”전연우의 덤덤한 한마디에 사람들은 모두 심장을 부여잡았다.기술팀 임원이 쭈뼛쭈뼛 걸어가 말했다.“대표님, 그건 아직 출시되지 않은 테스트 중인 어플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수정하겠습
남원 별장.장소월은 은경애 한 명만 남겨놓고 모든 도우미들을 내보냈다.은경애가 물 한 컵을 따라 명세진의 앞에 놓아주었다.장소월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현아... 언제부터 없어진 거예요?”명세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2주가량 지났어요. 그날 밤 현아는 약을 먹고 잠들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 현아를 납치해가고 남긴 쪽지를 도우미가 가져왔더라고요. 그때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에선 최선을 다해 찾는다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우린 현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요.”“그 후 돈을 들여 사람을 찾아 알아보니... 우리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강씨 집안... 북경 감옥을 맡고 있는 강지훈이라는 사람이래요. 우리 현아는 어리숙해서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하면 당했지 누군가의 원한을 살 아이는 아니에요.”“대체 현아가 어떻게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아가씨... 저희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요. 현아를 구할 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절대 아가씨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이렇게 빌게요. 소월 씨, 예전 함께 학교에 다녔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현아를 살려주세요...”“더 지체하다간 현아가 견디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을까 봐 너무 겁나요. 우리한텐 정말 현아밖에 없어요...”“현아만 찾아주면 앞으로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노예가 되어서라도 목숨을 구해준 은혜 반드시 갚을게요.”장소월이 말했다.“제가 해볼게요. 현아는 제 친구예요. 절대 모른 척하지 않아요.”그 말에 명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월 씨 같은 친구를 둔 건 현아의 더없는 행운이에요.”“현아도 예전 절 구해준 적 있어요. 그러니 당연한 일이에요.”장소월이 명세진을 배웅해 보낸 뒤 은경애가 말했다.“아가씨, 정말 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거예요? 아가씨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 이번 일은... 전 대표님이 나서야 할 것 같아요.”그렇다.명세진이 강씨 집안을 입에 올렸을 때, 장소월은 이미
장소월은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그러고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미안해요. 잘못 보냈어요.]핸드폰도 배터리가 없어 전원이 꺼졌다.그녀는 충전기를 찾았으나 망가졌는지 핸드폰에 전원을 꽂아도 반응이 없었다.그때 서랍에서 진동이 울렸고 장소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랍을 열었다.전연우가 준 핑크색 핸드폰이었다.장소월은 바로 전원을 꺼버리고 자신의 낡은 핸드폰을 들고 방에서 걸어 나가고는 도우미에게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저녁 6시.전연우는 마지막 회의를 끝마치고 회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핸드폰을 본 순간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핸드폰엔 스팸 메시지와 쓸데없는 부재중 전화 말고는 아무것도 와있지 않았다.“하루 종일 별장에서 뭐 했대?”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기성은의 귀에 못마땅한 듯한 대표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연우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회의 서류를 책상에 던져버렸다.기성은이 보고했다.“아가씨는 계속 남원 별장에 계셨습니다. 새 핸드폰은 줄곧 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도우미가 말하기를 아가씨께서 원래 쓰던 핸드폰을 수리 보냈다고 합니다.”그가 선물한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고, 5년을 입어온 낡은 옷만 걸치고 있는 그녀다.그 돈...전연우는 그녀가 자신과 조금의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전연우는 그녀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고집할지 궁금하기까지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수리 가게에서 장소월에게 연락했다. 그녀의 핸드폰은 이미 시장에서 도태되어 부품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그 대답을 들었어도 장소월은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했다.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기에 핸드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여섯 시 반,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차렸다.장소월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늘 같은 시간에 남원 별장에 돌아오던 사람이 오늘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장소월이 말했다.“기다릴 필요 없어요. 밥 먹어요.”은경애가 말했다
이번 생에서도 전연우는 송시아와 함께 있다.그녀에게 있어선 의외도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장면이다.송시아의 등장은 그녀로 하여금 또다시 선명히 되새기게 만들었다. 말끝마다 자신과 결혼하겠다던 남자는 두 번의 생이 지나도록 변한 것 하나 없다.송시아는 그가 살려내고 성장시킨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장소월은 여전히 잘 아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송시아의 그 도발 섞인 오만한 눈동자와 득의양양한 얼굴은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장소월, 넌 퇴물이야. 전연우는 두 번의 인생에서 모두 나를 선택했어!’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장소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당장 전연우가 송시아와 결혼한다고 해도 전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곧바로 별장을 떠나 그녀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그녀는 장해진의 딸이 아니다. 때문에 남원 별장도, 남천 그룹도 모두 그녀의 소유가 아니다.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남는 건 엄마의 사진뿐이었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장소월은 옆쪽 아기방에 들어가 조명을 켰다. 별이는 언제 일어났는지 눈을 뜨고 깜빡이고 있었다. 여태껏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무던히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전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 같지가 않았다.그녀는 줄곧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별이는 신기하게도 벌써 철이 든 것 같았다.장소월은 아이를 품 안에 안았다. 별이는 나른히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비비적거렸다.그녀는 살며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후 아이가 잠이 들자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서재 안, 전연우는 이제 술이 어느 정도 깨어 있었다.정계 인사들과의 술자리라 거부할 수 없어 조금 술을 마셨는데 또다시 위병이 도졌다.송시아는 다급히 그에게 물을 따라준 뒤, 익숙한 손길로 방 안에 있는 약상자를 찾아오고는 안에서 위장약을 꺼냈다.전연우의 깊은 눈동자가
“연우 씨... 권력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잊지 말아요. 당신이 자선가로서 기부했던 그 거금들을 누가 다시 벌어왔는지요.”여자는 사람을 홀리는 요괴처럼 그를 유혹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목석처럼 덤덤하기만 했다. 전연우가 장소월에 대해 밝히기 전, 모든 사람들은 송시아가 전연우의 부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만약 파파라치가 백화점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장소월을 찍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먼저 오른 건 단연 송시아였을 것이다.한참을 침묵하던 전연우가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 단언한다고?”“당연하죠. 전생의 당신이든, 현생의 당신이든 야망을 갖고 있다는 건 똑같잖아요. 당신은 이익을 위해 장소월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번 생도 마찬가지예요. 그저 제가 조금 더 길게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것뿐이죠. 하지만 괜찮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 장소월과 결혼하든 말든 나한테 큰 영향은 없어요.”쓸모없는 인간의 결말은 단연코 버려지는 것, 단 하나밖에 없다.두 번의 삶을 살았어도 장소월은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아침 여섯 시 반 날이 채 밝지 않은 시간, 안방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후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다시 조용해지고 나서야 그녀는 흐릿한 정신으로 잠이 들었다. 15분 뒤, 문고리가 움직이더니 미세한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고 몇 번 돌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장소월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품 안 아이는 시끄러움에 잠이 깨어 한참 끙끙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다른 열쇠가 열쇠 구멍을 막고 있었기에 전연우는 문을 열 수가 없었다.장소월은 문밖에서 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다시 깊게 잠들었다.그렇게 잠든 그녀는 점심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은경애가 들어왔을 때, 장소월은 잠옷을 입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었다.“아이고, 아가씨, 어디 불편하세요?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