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강이한과 이유영이 이혼을 했다. 이제 한지음의 이용 가치는 없어졌다.강서희는 차갑게 조소를 날리며 한지음에게 거침없이 말했다.“하, 왜 이래?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분명 네 입으로 우리 오빠랑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뒤에선 더러운 수단을 써서 우리 엄마의 신임을 얻어?”이렇게 된 이상 한지음의 신분은 조만간 노부인의 귀까지 들어갈 터였다. 만약 노부인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지음은 강씨 집안에서의 위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강서희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있던 혹 떼려다가 더 큰 혹을 붙인 격이었다. 한지음은 이유영보다 다루기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유영은 강씨 집안에 있을 때 더러운 술수를 쓰지 않았으나, 한지음은 달랐다. 한지음은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한지음이 강씨 집안의 일원이 된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강서희는 반드시 한지음을 막아야 했다!“한지음, 내가 말했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강서희는 단호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런 강서희의 태도에 한지음을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한지음은 자신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강서희는 물론 이유영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그녀는 왕 주치의를 해고한 강서희의 대한 분노를 삭였다.“쯧!”전화를 끊은 한지음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은 간호사에게 향하지 않고 남겨둔 의료용 트레이에 머물렀다.한편 강이한의 사무실에서는….그는 드물게 주도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이유영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비록 이혼했을지라도 이유영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이유영은 자신이 가져온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강이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무엇이 담겨 있는지 물었다.“열어 봐, 놀라거야.”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이한은 자기도 모
아주 망설임 없이 돌아온 이유영의 답에 강이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냉소를 머금은 강이한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리고 이유영이 동영상 시작 버튼을 누르려던 동시에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너머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이한 씨,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한지음 환자가….”“무슨 일인데요?”강이한은 한지음의 이름이 들리자 초조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거의 이유영과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큰 키 때문에 이유영은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목을 한참 꺾어야 했다. 비록 통화 내용이 정확히 들리진 않았으나,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바로 가겠다고 답을 한 뒤, 이유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외투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잠깐!”이유영이 소리쳤다.“지금은 안 돼, 오늘 일은 다음에 다시 시간 될 때 얘기해.”강이한은 지금 이유영이 찾아온 이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그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잠깐, 아주 잠깐이면 돼…!”그녀가 말했다.“그냥 고개만 잠깐 돌려서 모니터를 보면 되는 일이야. 한지음의 진짜 모습 좀 보라고!”그러나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유영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강이한은 항상 한지음이 최우선이었다. 그녀는 회귀 전에 그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강이한이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이유영이 갑자기 뛰어오더니 그를 붙잡았다. 강이한의 싸늘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마치 떼를 쓰는 철부지 아이를 보듯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강이한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이거 놔!”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이런 그의 태도는 처음이 아니었다. 강이한은 심지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에게 손찌검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오늘 그는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닌 거의 살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영은 곧바로 조민정에게 USB를 건네며 단호히 말했다.“다 공개해 버리세요!”“그럼 강 대표님도….”조민정이 놀라 물었다.이걸 전부 공개해버리면 강이한에게도 큰 영향이 갈 게 뻔했다. 원래 그녀는 조용히 강이한한테만 한지음의 정체를 까발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태도를 본 이유영은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유영은 다시 한번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흥, 이젠 신경 안 써요.”이유영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너무나 바보 같았던 자기 자신이었다.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남자. 아무리 십 년이라는 세월이 쌓였다고는 하지만, 더 이상의 배려는 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 그 남자야말로 십 년의 세월이 무성하게도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가 이 일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던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조민정은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그럼 어서 가보세요!”“네.”USB를 챙겨 사무실로 나가려던 조민정이 다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정말 괜찮아요? 후회 안 하겠어요?”이유영은 마치 작정하고 강이한을 망가뜨리려는 사람 같았다.조민정의 물음에 이유영은 질끈 눈을 감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요!”그녀의 답을 들은 조민정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조민정은 이 자료를 기자가 아닌 직접 터트리기로 했다. 그녀는 요즘 가장 핫한 소셜 앱에 계정을 만들어 영상을 업로드 하였고 한지음과 의사간의 금전거래가 담긴 사진 기록도 첨부했다.한지음은 최근 이유영과 강이한, 이 두 사람과 함께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들이 올라가자 모두 앞다투어 소식을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거의 몇 분 만에 실시간 검색어가 이 이슈로 도배되었고 청하시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한편, 달리는 차 안.“강 대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동안 강이한이 진실이라 믿고 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한지음의 모습뿐이었다. 눈에는 붕대를, 다리엔 깁스를… 모든 것이 이유영이 저지른 짓이라고 끊임없이 되뇌게 하는 모습!이유영이 고용한 납치범으로 인해 한지음은 두 눈이 멀고 다리도 부러졌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으며 실명까지했다!한지음의 인생은 이유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진실이었다. 그런데 이 영상은 뭔가?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눈이 멀쩡할 수 있지? 왜 두 다리로 걷고 있는 거지? 무수히 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하…!”차가운 조소가 그의 입을 비집고 나왔다.그런데 바로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연락이었다.“여보세요.”“강 대푠님, 지금 한지음 씨가 위독합니다! 보호자가 빨리 오셔서 서명해 주셔야 해요!”하지만 다급했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강이한이 뿜어대고 있는 위압감이 전화 너머까지 전해진 까닭이었다.“가, 강 대표님…. 그 한지음 씨…”“알아서 하세요!”그 말과 함께 강이한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지금 당장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지금 간다면 그는 한지음을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이유영과의 이혼도 모두 누구 때문이었는가! 그는 과거를 되짚으며 수많은 의문점이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다.‘어떻게 이럴 수가!’강이한은 핸드폰을 열어 다시 영상과 그 아래에 첨부된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사진엔 한지음과 의사의 금전거래가 있었음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다. “조 비서!”분노한 강이한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차 안엔 숨 막히는 기운이 가득 돌았다. 조 비서는 좌불안석,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네!”조형욱은 자기도 모르게 가득 힘을 주어 답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강서희도 지지 않겠다는 듯 냉담하게 답했다.“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 벌써 날 제거하려고 움직였더라?”강서희를 향한 한지음의 의심은 점점 짙어졌다. 처음엔 주치의 그리고서 영상에 사진까지, 이제 그녀는 의심을 넘어 확신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배후가 강서희라는 것을! 강서희도 물론 한지음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뜻밖에 아군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나도 너 같은 가식덩어리 빨리 없애고 싶지,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한 거 아니야!”강서희도 알고 있었다, 한지음이 지금 꾀병 부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녀에겐 아직 충분히 이 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이한이 말려드는 이런 방식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일은 저질렀는데 인정은 못 하시겠다?”“내가 한 짓이었으면 했다고 하지, 왜 부정해! 내가 너 같은 줄 알아?”강서희가 경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강이한은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부단히도 그의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유영이 그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달랐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싫으면 싫다, 대놓고 앞에서 티를 내고 다녔다. 전화 너머, 한지음은 다시 팽팽하게 눈을 하얀 천으로 감쌌다. 더 이상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흥, 너 두고 봐!”한지음은 절대로 강서희를 믿지 않았다. 강서희가 강이한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지음이 멀쩡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 강서희,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 누가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을까? 강서희밖에 없었다!“그래 어디 한번 해봐! 누가 무서워하나!”강서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한참 전화로 씩씩거리던 한지음은 결국 분에 못 이겨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요함 속에 오로지 한지음만
더 이상 청하시에서 이유영이 미련을 둘만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수년간 이곳에서 자리 잡고 지낸 세월 때문인지 쉽게 외국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끈 풀린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전화 너머 정국진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넌 여기 돌아와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지!”“무슨 역할이요?”이유영이 반사적으로 물었다.“어제 얘기를 좀 진지하게 나눠봤는데, 유라가 우리 로열 글로벌 그룹에 전혀 뜻이 없는 것 같아. 유영아, 그러니 네가 앞으로 로열 글로벌 그룹을 이끌어야 해. 한동안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대신 움직여줄 테니.”‘로열 글로벌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니? 그 큰 그룹을?’정국진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영은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요!”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그토록 큰 기업을 운영하라니, 그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로열 글로벌 그룹은 어디 동네 가계가 아니었다.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큰 기업이었다. 그런 회사를 그녀가 무슨 수로 총괄하겠는가?“내가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 급할 거 없다.”“아니….”이게 교육의 문제인가? 로열 글로벌 그룹과 연관된 나라며 기업이며 상상을 초월하는데 겨우 입사한지 삼 개월밖에 안 된 그녀에게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기다니! 유영은 이제 겨우 수박 겉핥기도 못 했는데, 무슨 수로? 유영은 문득 정유라의 심정이 이해됐다. 상상만 해도 벅차고 힘겹게 느껴졌다.“삼촌, 전 우선 오로라 스튜디오나 잘 관리하고 싶어요. 그거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너무 큰 것부터 말고요.”전에는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으나, 정국진한테 이 소리를 들으니까 조금 있던 마음도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제는 아예 두렵기까지 했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 뭐든 작은 것부터 배우는 게 맞긴 하지만!”유영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이었다.그녀가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 할 때, 정국진
정국진은 이유영이 하루라도 빨리 파리로 돌아오길 바랬다. 그녀를 위해 이미 많은 것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지금 당장은 그가 대신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결국 이 자리는 이유영이 물려받아야 할 자리! 하루라도 빨리 직접 이 자리에서 일해봐야 더 많은 것을 볼 시야와 능력이 생길 터였다.정국진과의 통화를 마친 이유영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가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이유영은 정유라와 일단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통화음이 계속 울렸으나 정유라는 무슨 일로 바쁜지 한참이 지나서야 연락을 받았다.전화 너머 정유라다운 당당하고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소식 들었어, 언니라면 아주 잘할 거야!”이유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이 작은 몸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정유라는 이유영과 반대로 짧은 단발에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있으면 자매가 아니라 남매로 오해받기도 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여기서 이 비유가 적절한진 모르겠지만, 언니는 잘할 거야! 자신을 믿어!”정유라는 이유영의 작은 체구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 이유영은 그녀만의 장점들이 많았으니까!반면 이유영은 절망했다.‘아, 내 청춘, 내 여행, 내 그림들…!’한편 강이한 쪽에선….강이한은 원래 병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 이슈로 인해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이유영이 이미 떠난 사무실만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이유영, 그는 좀 전에 그녀가 들고 왔던 USB를 떠올리며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이때 그의 핸드폰에 이유영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울렸다. 안 그래도 나빴던 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결국 그는 전화를 받았다.“강이한!”전화 너머 이유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네 짓이야?”“맞아!”“하…
폭풍우가 몰아치듯 강이한의 세계는 이번 일로 완전이 쑥대밭이 되었다.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한지음, 그녀의 납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와 이유영의 관계가 금이 가다 못해 와장창 깨져버렸었다.물론 전에도 이유영과 사소한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지음의 납치 사건이 있은 후로 강이한은 과도하게 그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이유영이 질투에 눈멀어 더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 시작한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뒤에서 이런 사실이 숨어 있을 줄!그의 머릿속에 한지음과 왕 주치의 사이에 오간 송금 명세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지음이 여유롭게, 아주 멀쩡한 몸으로 병원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에 강이한은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저녁이 되었다. 이유영은 퇴근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그녀의 회사는 바로 강이한의 옆 건물에 있었다. 두 건물은 지하 주차장을 공용으로 쓰고 있었으므로 둘은 쉽게 이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또각또각-이유영은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곳엔 미리 온 불청객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강이한이 등을 이유영 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아 꽤 긴 시간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자는 상당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강이한의 잘생김 때문에 퇴폐미만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하이힐 소리를 들은 강이한이 고개를 돌려 이유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피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 꺼버렸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이유영도 자리에 멈춰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이 지속되었다.하지만 결국 참다못한 이유영이 먼저 말했다.“거기 내 찬데, 좀 비켜줄래?”“나랑 얘기 좀 해.”“이혼까지 한 마당에, 얘기는 무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