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질끈 감으니,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이유영뿐이었다.그는 지금 이유영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프고 숨이 막혔다. 한편 이유영과 박연준은 식사 후, 순정동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함께 레스토랑을 나가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혀 빠르게 인터넷에 뿌려졌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둘이 연인이나 그런 관계가 아닌 어딘가 먼 친척관계이겠거니 추측했다.왜냐면 박연준은 이성을 고르는 기준이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이유영은 그의 옆에 서면 연인보다는 어린 동생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그러나 강이한은 달랐다. 이 소식을 접한 강이한은 매우 신경이 쓰였다.“내일 데리러 올게요.”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을 보며 박연준이 말했다.둘은 지금 자신들의 만남이 크게 이슈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안 그래도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터라 집이 먼 조민정보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것보단 효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이유영이 돌아서려던 순간, 뒤에서 박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요!”“무슨 일이에요?”이유영이 멈칫하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강이한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박연준이 살짝 망설임이 느껴지는 태도로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왜 그러세요?”이유영이 재차 물었다.망설이다니, 박연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는 평소에 보지 못한 매우 깊으면서도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은 그런 그의 표정에 살짝 당황했다.“박 대표님?”“정 대표님와… 무슨 사이인가요?”박연준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엔 물었다.이유영은 협력 관계가 된 이상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 예상은 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아무리 업무를 같이 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평소의 박연준이었다면 이런 사생활까지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한테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
강이한의 본가.본가에 도착한 강이한, 그곳엔 이미 큰 할아버지와 둘째는 물론 강성과 강산도 있었다. 그나마 셋째 할아버지 집안사람들만 외국에 있던 탓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가 도착하기 전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노부인과 진영숙은 이미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옆에 있던 강서희도 물론 얼굴이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제야 납시셨군!”둘째 할아버지가 멸시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의 조카손자인 강이한에게 말을 걸었다.강이한은 그런 그의 태도에 눈길만 줄 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왜들 모이셨어요?”이런 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강씨 가문에 좋지 않은 일, 하지만 그들에겐 득이 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은 득달같이 찾아왔었다.둘째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 그의 옆에 있던 강성이 냉소가 담긴 말투로 답했다.“몰라서 물어? 집안 돌아가는 꼴을 봐라! 해외에 있어도 소문이 들려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즘 강이한의 사생활로 청하시가 떠들썩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소문이 해외까지 퍼질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이건 강씨 가문 내부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해외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 아니라 강성이 청하시를, 더 정확히는 강이한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소식이었다.강이한이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강성을 바라봤다. 이때 진영숙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게 무슨 대수라고, 이 정도는 재벌이라면 가끔 있는 일이잖아! 이게 뭐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만약 영향을 미쳤다면? 그럼 어떻게 하려고 했어!”큰 할아버지가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생각을 못 하다니, 한심하군.’그러고는 노부인을 바라보며 질책하듯 말했다.“막내야, 넌 도대체 며느리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이익…!”강이한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누가 봐도 나이들이 지긋한 늙은이들이었지만, 강이한은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죽어 관에 들어갈
강이한의 할아버지는 자기 직계가족 외에 그 어떤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강이한이 강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경호원 불러!”그의 말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을 쫓아낼 기세였다.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의 눈이 서로 맞닿았다.“너희들 그만해. 말 가려서 못 해? 가족끼리 이게 무슨 짓이야!!”큰 할아버지가 강성과 강산에게 눈치 주며 말했다.삼 년을 못 봤을 뿐인데, 강이한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소란을 피울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큰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이번 프로젝트는 물 건너갔으니, 가능한 한 빨리 새 프로젝트에 도입해야 해. 동교 옆에도 좋은 땅 있으니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할 수 있을 거야.”동교 신도시 옆에 있는 땅, 강이한도 그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노리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이번엔 놓치면 안 돼. 회사가 얼마나 큰 손실을 볼지… 아무리 강씨 가문의 재산 규모라도 감당할 수 없을 거야!”“알았으니까, 가세요! 강서희, 손님 나가신다!”강이한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반면 지시를 강서희는 매우 난감했다.“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강서희가 매우 조심스레 말했다. 강이한이 자신들을 무시해 버리자,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은 분풀이하듯 강서희에게 태클을 걸었다. “아주 잘 키웠어, 정말 친자식이랑 다를 바가 없네!”이 말은 진영숙을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진영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노부인이 그녀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면 집안의 어르신이고 뭐고 그대로 들이받을 뻔했다.‘늙은이들이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과거 그녀가 다쳐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비웃었던가! 어떤 이들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까지 했었다!사실 진영숙은 강서
강이한의 서재.진영숙은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진한 담배 냄새를 맡았다.“그 여자랑은 어떻게 됐어?”진영숙의 말한 ‘여자’는 다름 아닌 이유영이었다.오늘 친척들이 들이닥치며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그녀는 이유영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진작에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강씨 집안에 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지, 이건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안 좋으면 재주라도 부려야 하는 거 아닌가?“그 여자? 무슨 소리예요?”진영숙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강이한이 되물었다.“그 여자 말이다, 그 여자! 이유영!”“저희 이혼했어요. 이제 만족하세요?”그의 답을 들은 진영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잘했어. 너랑 어울리지 않은 여자였어. 그 여자랑 결혼한 후로 되는 일이 없었잖아.”“….”“이혼하기 전에도 회사에 입힌 손해만 봐.”말하면 할수록 진영숙은 참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영은 절대로 며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강이한의 눈이 차가워졌다.그는 더 이상 이유영에 대해 진영숙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유경원 쪽에서도 저번 잔칫상 사건 뒤로 자꾸만 약혼을 미루고 있고! 흥, 누가 아쉬워한다고!”저번 생일 잔치 이후로 유경원 쪽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진영숙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자기 아들, 강이한한테 어울리기엔 좀 부족한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유영과 이혼까지 한 마당에 강이한은 더 이상 꿀릴 것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최고의 신랑감이었으니까 얼마든지 더 좋은 신붓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참, 요즘 회사 일에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동교 신도시 부지 옆에 있는 땅, 이번이야말로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돼!”강이한이 본가로 돌아오기 전, 친척들에게 받은 수모를 떠올린 진영숙은 아주 진절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또 실수하게 된다면 그들을 하이에나처럼 회사를 삼키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다음 날, 강이한은 본가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뒤
김연우는 서재욱의 요구사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유영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이유영이 디자인을 이 기초를 바탕으로 진행하길 원했다. 반면 이유영은 이런 요구 사항들이 차라리 달가웠다. 고객이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 이유영이 작업 틀을 잡는 데 편했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저희 회사에도 실력 있는 디자인 팀이 있어요. 그럼에도 이 일을 이유영 씨에게 맡기는 이유, 그건 저희 대표님과 박연준 대표님의 인연 때문이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꽤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말투. 과거의 이유영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조민정 씨, 배웅 부탁드릴게요.”“네!”조민정은 서둘러 김연우를 따라나섰다.김연우가 떠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회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인맥을 통해 일을 맡기는 것이리라. 박연준과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와의 인연도 삼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번엔 박연준의 도움으로 받은 의뢰였다. 이유영은 두 번 같은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그 누구한테도 무시당하지 않고 인증받으려면 확실한 실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우우웅-전화가 진동했다. 문 비서한테서 온 전화였다.“안녕하세요, 문 비서님.”“서원그룹 쪽 사람은 떠났어요?”“네, 좀 전에 갔어요. 박 대표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사실 이유영은 이런 식으로 일을 맡고 싶지 않았지만, 박연준의 소개였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거절할 수 없었다!“대표님이 함께 식사하고 싶으시다는데, 시간 괜찮으세요?”“어제도 함께 식사했는데, 무슨 일로….”사실 오늘 아침도 박연준의 차를 타고 출근한 거였다. 하지만 곧이어 서원그룹과 시작한 새 프로젝트를 떠올리며 다시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혹시 오늘 그 프로젝트 건으로….”“네, 서원그룹 프
”좀 전에 서원그룹 대표 보좌관 김여우와 미팅하셨답니다!”서원그룹에서 직접 이유영을 찾아온 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동교 신도시 옆 부지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청하시의 부동산 개발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동교 옆 부지 개발이 어쩌면 그 마지막 주자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땅을 원하고 있었다. 서원그룹이 강성그룹과 협력하고 있는 이유영을 찾아간 것도 이 프로젝트 입찰에 더 확실한 힘을 실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번 동교 신도시 프로젝트로 인해 많은 기업이 이유영의 실력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조형욱도 이유영의 역량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점심에 사모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을까요?”조형욱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은 겉으론 무심한 듯 보였지만, 그 속까지 괜찮을 거라 보장할 수는 없었다.안 그래도 지난번 입찰에 이유영의 디자인 때문에 패배의 쓴맛을 맞보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혼까지 한 상태였다.이유영은 분명 전보다 더 냉정히 그를 대할 것이다.“이유영과 식사를 하라고?”강이한이 비웃듯 말했다.조형욱이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유영이 얼마나 그를 증오하고 있을지 예상이 가는 강이한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이유영이 그토록 그를 미워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 그 증오가 가득한 눈빛을 받을 상상 해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강이한은 눈을 감으며 깊이 생각에 빠졌다. 그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으나, 그 속은 지금 수많은 고민들로 쑥대밭이었다. “사모님의 능력이 그 정도일 줄은 누가 예상을 했겠어요. 그 어렵다는 입찰 건을 단번에 통과시키다니.”경험이 많은 디자이너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수많은 선별과 비교를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영의 디자인은 거의 당일 통과 결과가 나왔다.“나가.”강이한은 지금 이유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조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
사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의사가 말했다.“한지음 씨는 요즘 계속 우울해하셨습니다. 아마 우울증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보호자가 옆에 많이 있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우울증?한지음이?그 증거들을 확인한 후로 강이한은 한지음을 속이 시커먼 여자로 단정지었다.아무나 다 우울증에 걸릴 수 있지만 그런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 우울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한지음이 실려 나왔다. 간호사는 그녀를 끌고 병실로 돌아갔다. 강이한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병실.한지음의 두 눈은 여전히 흰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이한이 보기에 전혀 안쓰럽지 않고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굳이 이렇게 해야 했어?”한참이 지난 뒤, 강이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병상에 앉은 한지음은 더듬거리며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한지음이 길게 심호흡한 뒤에 말했다.“이렇게 하면 대표님이 저 보러 올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이렇게 했을 거예요.”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롭고 아팠다.강이한이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너 참 교활한 사람이었구나.”예전에는 절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전에 유영에게 했던 모든 잔인한 말들을 한지음에게 돌려주고 싶었다.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여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뭐?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한지음,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내가 널 돌봐줬던 건 네가 지석이 여동생이었기 때문이었어.”“그런데 왜 굳이 이런 일을 벌여서 그 여자가 나랑 이혼하게 만들었니?”유영과 이혼할 때를 생각하면 강이한은 지금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팠다.그녀와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유영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왜 해외에 가서 정국진을 만나고 국내로
점심식사가 끝난 뒤, 박연준은 유영을 사무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유영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조민정을 보았다. 조민정이 그녀의 사무실이 있는 방향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유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그 인간 또 왔어요?”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동교 신도시 개발에서 패배의 쓴맛을 보았으니 그 주변 상권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경쟁 회사들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오전에 서원그룹 김연우를 만났는데 점심 시간이 지나 바로 찾아왔다는 게 그 증거였다.유영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에 사무실로 들어갔다.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강이한의 앞에 놓인 일회용 컵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마 그녀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듯했다.소리를 들은 강이한은 고개를 들고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슬픔을 확인한 순간 유영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덤덤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지나쳐 자신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강이한은 그녀가 입고 있는 정장 오피스룩을 빤히 바라봤다.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한정판 제품들이었다.그의 눈빛에 서렸던 아픔이 갑자기 이글거리는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오기 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죄책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두 사람은 형형한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유영은 말없이 그를 보기만 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도 온도가 없었다.“당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왜? 난 꼭 집에서 밥이나 하고 시댁 어르신들 비위나 맞춰야 어울려?”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좋게 말해서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며느리이자 아내였지만 강이한의 가족들 눈에 유영은 실컷 부릴 수 있는 노예와도 같았다.오히려 본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그녀보다 더 존중을 받았다.“유영아.”강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아픔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