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숙은 제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나있었다.......진영숙이 혼자 생각에 잠겼다.강서희를 며느리로 삼다니, 그녀는 줄곧 서희를 딸로 생각해왔다.주변 사람들은 다 강서희가 입양 딸인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입양 딸이 며느리가 되는 건... 게다가 전에 이유영 일도 있었고...왕숙의 말대로 했다가는 강 씨 집안 체면이 더 보기가 좋지 않을 것이다.백 번 양보해서 정말로 왕숙 말대로 된다 해도 진영숙 자신이 제일 먼저 나서서 말릴 것이다. 강서희는 그저 입양 딸일 뿐이고, 차라리 이유영 쪽이 낫다.......강이한이 본가에서 나와 차에 탔다. 그러고는 애꿎은 담배만 한대 또 한대 태웠다.차 문이 열리더니 강서희가 순진하게 웃으며 올라탔다. “오빠, 무슨 일로 급하게 불렀어?”강이한은 눈앞에 있는 강서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진지한 표정과 차가운 시선에 강서희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강서희는 말하면서 얼굴을 만졌다.그녀는 아주 영리하다.강이한이 이토록 급하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일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오면서 짐작은 했었다.이렇게 급하게 부른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강이한은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지고 물었다.“네가 보기엔 이유영 어떤 것 같아?”강이한이 말을 꺼내자 강서희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몸까지도 잠깐 멈칫 했으나 금방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깍듯하게 말했다.“좋아. 좋은 사람이지.”“좋다고?”“응, 좋아!”“어디가 좋은데?”강이한은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물었다.강이한의 진지한 모습에 강서희는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왜 그래?”“내가 묻잖아, 어디가 좋냐고?”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자 강이한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이때, 강서희의 얼굴은 창백해져가고 있었다.마음속은 모든 것들이 한데 뒤엉켜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특히 이 순간 강이한은 뭔가 알아챈 것 같은 눈치다.
강서희는 얼마나 강한 심장이어야 강이한의 예리한 질문에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른다.반나절이 지났다.강이한이 또 뭘 물을까 조마조마해 하고 있는 찰나, 강이한이 마침내 그녀를 놔줬다.“나가 봐.”이 말 한마디에 강서희에게는 사면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이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다.이전에는 강이한을 대할 때 항상 그의 옆에 붙어있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싸늘한 기운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강서희는 차에서 내려서 갔다.차 안에 홀로 남은 강이한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진영숙과 강서희 둘 다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유영이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크리스탈 가든.방금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온 이유영이 정국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정국진이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너랑 강이한 다시 합치기로 했냐?”“외삼촌!”“그 자식이 널 위협하던?”“......”이유영은 깨질듯한 머리를 짚었다.“그런 적 없어요!”이 안의 이해관계를 알고 있기에 이유영은 더욱 말을 조심히 했다.일부 상황은 그녀도 원치 않았다.“유영아!”전화기 상대편에서 어금니를 물고 말했다.이유영은 눈을 감았다 떴다.“정말이에요...”“지현우랑 조민정이 말한 거랑 네 말이 전혀 다르구나. 내가 순정동에도 전화해 봤다. 네가 돌아가지 않았다더구나!”“……”“조민정이 너 홍문동에 있다고, 너 데리러 간다고 했어!”아, 조민정!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조민정과 지현우를 탓할 것 없다. 네 곁을 지키라고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내가 물으면 숨김없이 말할 수밖에 없지.”“……”그래, 좋아.외삼촌의 사람들이다.정국진도 똑똑한 사람이다. 조민정과 지현우의 대화에서 이미 강이한이 지금 이유영의 삶에 뛰어들어 어떻게 헤집고 다니는지 눈치챘다.“그 자식 참 대단해, 감히 우리 크리스탈 가든에 가서 난리를 피우다니. ”“외삼촌.”“내가 바로 가마.”“아니, 여긴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네가 어떻게 처리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그건 루이스의 팔다리가 잘리게 할 뿐이다.……강이한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이시욱이 따라들어왔다.“도련님.”“네.”“통신사에 가서 걔 통화내역 좀 뽑아와.”걔는 이유영을 가리킨다.“언제 것이 필요합니까?”“지음이 납치되기 전후로.”“이게...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조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이시욱이 대충 가늠해 보니 몇 달은 지났다.“한번 해봐!”“네. 알겠습니다.”이시욱이 머리를 끄덕였다.강이한이 앞에 놓인 컵을 들고 물 한 모금 마셨다. 까만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그는 불현듯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형욱이 들어왔어?”“밤에 도착한답니다.”“내일 좀 보자고 해.”“네. 알겠습니다.”이시욱이 나갔다.사무실에는 혼자 남은 강이한이 미간을 찡그렸다.이유영이 그 사건 전후로 변화가 생겼다. 의심해 볼 만도 하다.분명히 그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도대체 뭘까...그는 눈을 감아 섬뜩한 눈빛을 가렸다.어쩐지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더라니... 예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가 그녀의 유일한 의지가 되어주었다.하지만 그 이후에는...홍문동에서의 난리 법석을 생각해 보면 그때 그는 한지음의 일에 매달려 주위를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이유영이 혼자 감당한 일들... 그가 아는 것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그가 모르는 건 또 얼마나 있었을까.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알 것 같았다. 그가 없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절망스러운 상황들을 감당했었을 것이다.핸드폰을 뒤지다 사진 두 장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사진속의 이유영은 맹수처럼 그를 물어뜯으려 하고있다.특히 눈동자에 비친 한이 눈에 띄었다.그 한은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한이다.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보냈다.……오늘 오후는 평범하지 않다.이유영은 워낙 회의 중이었으나 전화 한 통에 중단되었다. 지현우가 핸드폰을 들고 다가
가슴이 조여왔다.‘강이한은 정말 별의별 짓을 다 하는구나!’기사에는 두 장의 사진이 첨부되었고 모두 그녀가 그를 물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눈빛을 포토샵한 사진이었다!댓글이 가관이었다.[강 대표님은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된다!][강 대표님 재결합 의심!]쾅...!이유영은 화가 나서 회의 테이블 위의 컴퓨터를 바닥으로 힘껏 밀어버렸다.누가 알 수 있겠는가!강이한과 이런 언론에 엮이는 것을 그녀가 얼마나 꺼려 하는지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앞으로 유명 인사보다도 그녀와 강이한의 관계가 더 오랫동안 이슈가 될 것이다.생각할수록 화가 난 그녀는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이유영은 곧장 회의실을 뛰쳐나갔다.바로 밖에 있던 지현우는 분노에 찬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무슨 일이세요?”“회의를 먼저 맡아줘요,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네!”지현우는 아직 기사를 보지 못했기에 눈치채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근무 시간이기에 모두 바빴고 기사를 볼 시간이 없었다.강이한도 바로 이 점을 이용해 그녀에게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30분 후, 이유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홍원 그룹에 도착했다.이시욱은 그녀를 보고 공손하게 맞이했다.“아...”순간 이시욱은 이유영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호칭을 황급히 바꿨다.“유영 씨!”이유영은 키는 비록 작지만 카리스마는 절대 지지 않는다.“강이한 어디 있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가 차있었다.비서실의 모든 사람들은 이유영을 보자 고개를 숙여 일하기 시작했다.그동안 그녀를 지켜보면서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몇몇 사람은 한지음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이 역력했다.이유영은 그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고 물론 그들을 보지도 못했다.이시욱이 안내했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십니다!”이유영은 화난 채 싸늘한 태도로 사무실로 다가갔다.수많은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강이한 사
이제야 이유영은 이해했다.그는 박연준이 돌아오기 전에 그녀와의 관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이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탈출구를 주지 않고 도망칠 곳도 없게 하였다!이유영은 이렇게 생각하자 분노가 끌어 올랐다.“강이한, 너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사람이야!”“그건 모르는 일이지.”이유영은 기세등등하게 다가와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서 튕겨났다.이제 마음속의 분노는 쌓일 대로 쌓였다.“내가 말해주는데, 정국진이 지금 처한 상황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해, 그가 파리를 뜨는 순간 많은 것들이 확실해질 거야!”“그때 로열 글로벌에서...”“그만 닥쳐!”이유영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협박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막 할퀴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역력했다.강이한의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국진이 한동안 전례 없이 바빴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정말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생각할수록 분노에 못 이겨 결국 발만 동동 구르며 뒤돌아 나갔다.씩씩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강이한은 미소를 지었다... 애정이 담긴 미소였다!밖에 있던 이시욱은 나오는 이유영을 보며 말을 건네고 싶었다.하지만 이유영은 바람처럼 쏜살같이 엘리베이터로 향해 지나가버렸고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이유영은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면서 엘리베이터까지 탔는데 정국진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났다.“이유영 씨”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유영은 전화를 끊고 뒤돌아보았다.낯설고 이쁜 여성이었다.“누구세요?”“저녁에 잘 때 악몽 안 꾸세요?”여자는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대놓고 물었다.이유영은 안 좋았던 안색이 더욱 굳어졌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날카롭게 그녀를 계속 쳐다만 보았다.여자는 이유영에게 손을 내밀었다.“정윤아에요, 한지음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어요, 정확하게는 서로 의지하면서 끈끈하게 같이 자란 사이에요.”‘어쩐지 눈빛에
한지음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이유영은 태도가 좋을 수가 없었다.특히 자신을 한지음과 엮는 것을 싫어했다. 엮이는 순간 자신의 신분이 추락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사실 이유영과 강이한의 사이가 소문나면 제일 조급한 사람은 강서희였다.강서희는 절대 한지음의 일이 끝난 후 이유영과 강이한이 다시 어울리고 심지어 순식간에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강서희는 바로 강주로 출발했고 아파트에 도착했다.강씨네는 한지음을 잘 대해주었다. 하인이 두 명이고 월급도 충분히 높아 그녀는 보살핌을 잘 받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녀의 세계는 이미 온통 암흑밖에 남지 않았는데!강서희가 도착했을 때 한지음은 과일을 먹고 있었다.“지금 아주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네?”강서희의 소리를 듣고 한지음은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녀쪽을 향해 입꼬리 올리며 말했다.“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왔네?”강서희는 한지음 옆에 다가가 그녀를 하찮게 내려보며 말했다.“너 똑똑하잖아, 지금의 상황을 맞춰봐”“유경원, 너 어머니한테서 철저히 가치를 잃었지?”‘흥, 똑똑하긴 하네’“하지만 이유영은 달라, 강이한에게 그녀가 얼마나 중요하냐면......”한지음은 강서희의 살기를 느끼고 웃으면서 뜸 들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그들은 10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지냈어, 이유영이 많은 누명을 썼고 강이한도 실망했겠지, 심지어 화도 나고!”“하지만, 화가 난 후에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강이한은 그대로 받아들일 거야.”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누군가에게 그 사람은 예전 그대로일 것이다.강이한은 이 두 사람이 저질렀던 사실들을 아무것도 모른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모른다고 해도 강이한은 여전히 이유영과의 연락을 끊지 않고 있다.왜냐면 이유영이 어떤 사람이든 강이한은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이것이야말로 강서희를 가장 화나게 만드는 이유다.“네가 그렇게 똑똑하면, 이 모든 것을
반드시 해낼 거라는 눈빛과 함께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크리스탈 가든.이유영은 드디어 정국진과 연락이 닿았고 전화기에서 정국진의 분노를 억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영아, 너 지금 당장 파리로 와!”청하에 오지 못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이유영은 실망하며 눈을 감고 답했다.“삼촌......”“너도 못 나오는 거니?”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국진은 알아차렸다.정국진이 청하에 오는 것을 막았으니 당연히 이유영이 나가는 것도 강이한이 막았을 것이다.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하고 있었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제가 여기서 잘 처리하고 있을게요!”“정말 못 나오는 거야?”정국진은 확신이 들었다.이유영은 강이한과 엮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러니 이건 강이한의 협박일 것이다.“어떻게 협박했어?”“삼촌, 많은 일들을 조사해 봐야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뭐가 명확하지 않아서 조사를 하려고 해?”“그동안 여론들이 저에게 미친 영향들을 따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그럼...”“유영아, 어떤 일들은 파면 팔수록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 그런데도 정말 조사할 거니?”정국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한지음 같은 경우도 그렇다.한지음이 자신을 왜 미워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자신의 동생인 것도 몰랐을 것이고 지금처럼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가족으로부터 오는 충격도 없었을 것이다.“너 지금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라는 걸 잊지 마! 사랑이니 복수니 그런 것들에 빠지지 말고 시야를 넓게 가져! 네가 개의치 않을수록 상대방은 그만큼 더 불안해할 거야!”하지만 문제는 상대방들이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그러면 뒤에서 마음껏 조종하게 내버려둬요?”“너한테 미치는 영향이 있어?”“아직까지는 없어요!”강이한과의 사이를 이간질한 영향 외에는 없었다.특히 여론들도 이미 이유영 편을 들기 시작했고 정국진이 보기에는 내버려둬도 괜찮았다. 이유영이 항상 오너
정국진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알고 보니 조민정이 찾아줬던 탐정사무소였다.“유영 씨, 원하시던 물건을 찾았습니다!”“이메일로 보내주세요.”“알겠습니다.”찾았다는 말을 듣고 이유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전화를 끊고 이메일을 클릭하여 내용을 확인했다.전화가 다시 울렸고 같은 번호였다.“사진 한 장뿐인가요?”“한지음 씨를 납치한 사람들 중의 한 명입니다.”‘그중 한 명? 한지음은 다 죽었다고 했는데?’“이 사람, 살아있어요?”“네.”“지금 어디에 있어요?”“빙천해역에 있습니다!”사진을 보면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고 기후가 안 좋은 빙천지역이 맞았다.하지만 분명히 CCTV에서 캡처해낸 사진 한 장이었다.이 사람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이유영이 말이 없자 상대방이 계속 물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이 사람과 한지음 씨 또는 강서희 씨가 접촉한 사진을 한 번 구해보세요.”“알겠습니다, 그러면 가격이...”“걱정 마세요, 물건만 찾아내면 가격은 얼마든지 드릴게요!”삼촌이 개의치 말라고 하셨다.한지음 조사를 부탁했던 것도 시간낭비라했었다. 그는 진실이 어떻든 조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정국진의 세계에는 이런 것들을 조사하는 것, 그 사람들의 수단에 대응하는 것도 모두 시간 낭비이다. 그들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반격은 최고의 자리에서 그들의 피에로 같은 추태를 지켜보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피에로들을 하찮게 여겨 대응하지 않아도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유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그들은 어두운 구석에서 끊임없이 즐기고 있다는 것을!그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들을 무참히 짓밟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한지음은 이유영을 짓밟고 싶어 하지만 이유영은 그녀의 존재조차 개의치 않는다.퇴근하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픽업하고 같이 홍문동에 왔다.저녁 식사가 이미 준비되었고 여전히 이유영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훨씬 간소해졌다.그녀가 낭비를 싫어한
이유영이 백산 별장에 돌아왔을 때, 정국진은 이미 나가고 임소미만이 집에 남아 있었다.이른 아침만 해도 괜찮았던 그녀의 표정은 지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엄마, 무슨 일 있어요?”임소미의 얼굴을 보고 이유영은 다급히 다가갔다.임소미는 딸의 눈앞에서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이내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숨을 몇 번이나 고르며 마음속의 울분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무슨 일인데요, 엄마?”임소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유영은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유영이 소파에 앉자마자 임소미는 이유영을 끌어안았고 묵직한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전해졌다.‘늘 이성적이던 엄마가 이토록 감정을 드러낼 정도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이유영은 임소미의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잠시 후, 임소미가 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진영숙의 변호사가 왔어.”“...”그 말에 이유영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변호사라니?’“무슨 일로?”질문은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이미 답이 있었다.진영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어젯밤, 이유영은 진영숙이 다음엔 어떤 방식으로 들이닥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강이한이 줬던 상처를 견디기 위해 여태 했던 노력을 생각하면 화가 나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강이한이 저질렀던 짓들로 하여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진영숙은 그런 그녀를 통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뿐만 아니라 이유영도 강이한이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어제 진영숙이 남긴 말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르려는 찰나 임소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 여자가... 월이를 데려가려고 해.”역시 예상대로였다.진영숙이 정씨 가문에 변호사를 보낸 이유는 그녀에겐 지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이한조차 사라진 상황에서 진영숙은 결국 남아있는 유일한 핏줄에 기대고 싶었던 것이다.아무리 이유영을 미워해도 월이만큼은 그녀의
이유영의 말은 박연준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이유영이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국진이었다.그렇다. 아버지로서 이유영이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그는 이유영이 이혼하고 가장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하지만 정씨 가문의 딸이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딸과 함께 가장 조용하고 가장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그러나 그것은 정씨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박연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강이한이 떠나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용성시에서 돌아온 후, 아니, 우천시에서 돌아온 그날 이후로 이유영은 단 한 번도 강이한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서주에서 큰일이 있었을 때조차 강이한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미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박연준 역시 그녀 앞에서 강이한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그들의 사랑이 철저히 부서져 가는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기에 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깊이 미워하게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그것이 박연준이 바라왔던 결말이었다.하지만 정작 그 끝을 마주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특히 요즘의 이유영은 마치 타락해 버린 사람처럼 때때로 낯설만큼 달라졌다.“...”이유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나기 전 가장 두려워했던 건, 정씨 가문과 엔데스 가문의 악연이 너한테까지 얽히는 거였어. 그래서…”“그래서, 너더러 나랑 결혼하라고 한 거지?”이유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날카롭고 차가운 말에 박연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렇다고 그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어? 겉으론 싸우는 척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까지 가까운 줄 난 몰랐네.”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친분을 넘어섰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본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어딘가
이유영이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하자 순간 손목에 닿는 남자의 힘이 느껴졌다.더는 박연준과 어떤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쯤 되었으면 둘 사이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유영아.”박연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차가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박연준의 가슴엔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래, 이 모든 건 나 때문이야.’그가 한지음을 강이한 곁에 보내지만 않았더라면 연서의 대역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고 이유영과 강이한은 지금쯤 행복했을 것이다.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영과 강이한의 인생 전반 부분을 철저히 망쳐 놓은 건 바로 박윤준이었다.그래서 이유여도 이렇게 변해버린 것이다.박연준의 가슴에 거센 통증이 밀려왔다.“지금 우리 사이에 더 말할 게 있다고 생각해?”“걱정되지도 않아? 엔데스 가문 쪽에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연준은 입을 다물었다.자기 모습이 너무 비겁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 여자를 붙잡기 위해 이런 말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는 언제나 예민한 화두였다. 특히 최근 이유영과 강이한이 이혼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의 여섯째 도련님, 이제는 셋째 도련님까지 나서서 정씨 가문을 노리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파리에서 정씨 가문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마어마했다.흩어진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다시 권력을 갈망했고 그들에게 정씨 가문은 꼭 붙잡아야 할 대상이었다.그리고 그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이유영이었다.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유영에게 접근하고 있었다.“박연준, 너도 알고 있지? 너 참 비참해 보여.”그녀는 박연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그는 누구와 함께 있든 결국 불행하기만 했다. 그게 연서든 이유영이든.“네가 강이한을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는 예전에 연서도 강이한을 사랑했기 때문이지?”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그의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엄격해졌다.“무슨 말 할지 알아. 하지만 너도 내 대답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시간 낭비하지 마.”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우리 이혼하자.”그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단호하게 돌아섰다.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그 차가운 태도엔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박연준에게도 강이한에게도 냉정하기만 했다.강이한이 우려했던 일이 결국 발생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는 이이유영 서주에 가는 걸 반대했다.이유영이 연서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이 숨겨온 모든 음모가 들통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강이한도 박연준도 이유영의 인생에서 다시는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과거에 아무리 찬란한 기억이라 해도 연서라는 이름 하나로 이유영의 마음은 완전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과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오며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래서 이유영이 연서를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이해와 애절도 모두 단절될 거라는 걸 더욱 확신했다.그녀가 이혼을 선언하자 박연준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박연준은 쉰 목소리로 이유영에게 물었다.“내가 그렇게 미워?”그의 목소리엔 복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이유영의 최근 행동은 박연준에게 마치 조롱처럼 느껴졌다.밖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그는 마치 아내의 외도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대낮에 서재욱과 함께 있더니 엔데스 신우와의 관계도 애매하게 얽혀 있었다.결국 그것들은 이유영이 결혼 생활을 견디며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였다.만약 지금 이혼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추측해 온 모든 소문이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미워하는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이유영은 그저 박연준과 아무 관계도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손목을 빼려 했지만 박연준은 오히려 더 강하게
진영숙에 관해서 정국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품위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었다.악인은 악하게 다스려야 했다. 진영숙에게야말로 딱 맞는 말이었다.“그러니까 박연준과 이혼해.”정국진은 이 한마디만을 반복했다.지금 정씨 가문 입장에서 보면 이유영과 박연준의 결혼이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하지만 그는 이유영이 두 남자에 관해 이미 증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눈을 잃은 이유를 아무도 선뜻 이유영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설령 강이한이 자신을 위해 그토록 희생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존재였다.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박연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진은 아버지로서 이유영이 복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이유영만이 아니라 정국진조차도 박연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알았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쉬어.”“응.”큰 소동이 지나갔으니 이유영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진영숙은 여전히 파리에 있다. 이미 시작된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앞으로 어떤 소란을 일으킬지 아무도 몰랐다.그러니 이유영은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야 했다.임소미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을 알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이유영은 샤워를 마친 뒤, 월이를 품에 안았다.강이한을 빼다 박은 옆모습을 보며 이유영의 가슴에는 잔잔한 아픔이 스며들었다.결국, 그녀는 잘못 생각했다.자기 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아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너무나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문제였다.월이를 낳을 때만 해도 그녀는 아이의 삶에 진영숙 같은 인물들이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이유영은 밤새 잠들지 못했
특히 과거와 얽힌 일이었기에 누구도 함부로 나서기 어려웠다.“유영아.”“네?”“월이는 여기에서 아무도 데려갈 수 없어.”그 말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뜨겁게 끓어올랐다.진영숙 앞에서 아무리 강해 보였던 그녀도 정국진의 이 짧은 한마디에 모든 긴장이 풀려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네.”가족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만약 지금 혼자였다면 진영숙의 횡포를 어떻게 감당했을지 이유영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랬다면 어땠을까?’그녀는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했다.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진영숙이 다시 예전처럼 그녀를 억누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다른 일은 네 마음대로 처리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이런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짧은 말 한마디가 이유영에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였다.부서지고 흔들리던 세상 속에서 그녀는 드디어 위안과 버팀목을 얻었다.“고마워요, 아빠.”“박연준과는 이혼해.”“...”그 말에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물론 그녀도 박연준과의 이혼을 원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너무나 복잡했다.엔데스 가문이 얽혀 있었기에 이유영은 자신의 이혼이 정씨 가문에 피해가 갈까 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정국진은 담담히 말했다.“증오보다 중요한 건, 가족이야.”정국진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아왔다.그때마다 그에게 복수로 응수했다면 지금의 정씨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가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아버지...”정국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그 사람을 증오하는 건 알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이라면 네 마음속에서 이미 중요하지 않은 존재야. 그런데 왜 그런 사람 때문에 아직도 마음 쓰는 거야?”증오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 증오가 마음을 잠식한다면 그건 결국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었다.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이유영은 강이한과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