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를 나온 유영은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앞장서서 걸었다. 소은지가 다가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유영아.”“나 괜찮아.”괜찮다고는 하지만 속은 이미 뒤집어진 상태였다.강이한이 합의를? 왜?예전이었다면 상대가 누구든 유영에게 해를 가하고자 한 사람에게 그는 자비를 베푼 적 없었다.하지만 집에 매일같이 죽은 고양이와 저주의 말을 써서 보낸 사람들을 그는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었다.“강이한 왜 그랬을까?”“그 사람들 아마 강서희와 한지음 돈을 받은 사람들일 거야.”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지도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걸 강이한이 왜!”이유는 유영도 알지 못했다.그녀가 사라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3개월 정도 피신해 있으면 지난 생에 벌어진 일들이 사라질 줄 알았다.그녀의 도피로 인해 지난 생처럼 잔인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녀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았다.“이혼소송 무조건 이겨야겠어. 그런 인간 쓰레기랑은 멀찌감치 떨어져야 해. 정도가 심하면 네 안전에까지 위해를 가할 사람들이었어. 그런 사람들과 합의해 주다니!”소은지가 부르르 떨며 씩씩거렸다.유영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 상황에서 더 할얘기도 없었다.그들의 10년이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있을까?유영은 무슨 정신에 소은지의 오피스텔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소은지는 출근하며 점심에 집으로 배달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나 유영은 스스로 할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멍멍!발끝에서 통통한 강아지가 다가와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녀석은 그녀가 홍문동 저택에서 데리고 나온 그녀의 반려견이었다. 출국하면서 걱정했는데 살이 뒤룩뒤룩 찐 걸 보니 아줌마가 먹이를 잘 먹인 모양이었다.유영은 다가가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배고프지? 앞으로는 넓은 저택에서 못 살고 나랑 거리를 방황해야 할지도 몰라.”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대기업 사모님이 가정 불화로 가출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룹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다.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고 아마 내일쯤 기사가 올라올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녀가 떠나고 몇 달 사이, 세강은 항상 여론의 중심에 있었다.비록 최종적으로 좋게 해결했지만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 매체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유영도 그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었다.“이제 와서 이미지 챙긴다고? 한지음이랑 둘이 붙어다닐 때는 왜 그룹 이미지 신경 안 썼어?”“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강이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당신이랑 그 여자가 내 머리에 똥물을 끼얹었는데 나한테서 좋은 말까지 듣고 싶어?”3개월이나 이어진 여론의 질타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강이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좋게 달래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여론 얘기가 나오자 유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오늘 경찰서를 다녀왔는데 당신 그 악플러들 합의해 줬더라?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게 할 짓이야?”악플러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말 안 했으면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그건 당신이 나한테 해명해야 하지 않아? 왜 이렇게 적반하장이야?”“내가 무슨 해명? 당신 미쳤어?”유영 입장에서는 화가 나서 펄쩍 뛸 일이었다.강이한의 얼굴도 분노로 물들어 갔다.“그 사람들 계좌에 당신 명의로 입금된 기록이 있었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좀 알 수 있을까?”유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의 명의로 된 입금 내역. 전에 강이한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간 카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 본인조차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강이한은 이를 주도한 당사자가 유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그럼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당신이 나서준 덕에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었으니까?”적을 너무 방심한 유영의 잘못이었다.하지만 그랬기에 폭력
한편, 오피스텔로 돌아간 유영은 외삼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당분가는 여기 있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그래도 놀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전공을 살려 작업실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정국진은 당연하게 그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강이한과 함께할 때는 일이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대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전직주부 생활을 했다.매일 시댁과의 갈등을 겪고 집안의 사소한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이 되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유영 본인은 아니었다.재벌가의 며느리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아마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평범한 가정주부는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정국진의 든든한 지원까지 있으니 앞으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다.퇴근하고 돌아온 소은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열심히 스케치를 그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강이한과 틀어지고 엄청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실연했다고 다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유영은 시큰둥하게 대처했다.강이한과 결혼하고 유영이 스스로 백수가 되길 원한 게 아니라 그가 원했기 때문에 양보한 것이었다.그 동안 세강 식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림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지내서 널 다시 보게 됐어.”소은지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밥 했어. 반찬만 데우면 돼.”“와. 이제 밥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그 말을 들은 유영이 움찔했다.“그 집에서 내가 손 놓고 놀기만 한 건 아니야.”시어머니랑 같이 안 지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하지만 매번 본가로 가면 차라리 주방에 갇혀 일을 하는 게 편할 정도로 시달렸다.소은지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돈도 인맥도 내가 다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펜을 잡은 유영의
하지만 진영숙은 아니었다.이번 일로 화가 나는데 풀 곳이 없어서 너무 갑갑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는 25일 날 경원이 귀국할 거야. 이유영 그 계집애랑은 빨리 이혼하고 쟤도 빠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이 싫어도 지금 시점에서 시력까지 잃은 한지음을 며느리로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물론 최근 이유영이 보인 행보가 괘씸해서 단칼에 내쳐버릴 생각이었다.유경원의 귀국 소식을 들은 강이한과 강서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예전이었다면 신랄하게 반박했겠지만 그래도 진영숙의 건강을 고려해서 그는 담담히 말했다.“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좀 쉬세요.”“이한아!”말을 마치고 뒤돌아서는데 뒤에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유영 걔도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여자 만나고 싶었으면 적어도 이유영보다 더 나은 애를 만났어야지. 넌 어째 여자 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냐!”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에 성격까지 좋은 이유영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한지음을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진영숙은 아들의 철없는 행동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걸음을 멈춘 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병실을 나갔다.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달래주었다.“엄마, 의사가 화를 내면 안 좋다고 했잖아.”“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쟤 하는 꼬라지 좀 봐!”“엄마도 그만해. 이유영 때문에 그 소란이 났는데 오빠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유영 얘기가 나오자 진영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아비 뻘 되는 남자랑 바람이 난 년을 뭐가 아쉬워서 잡고 있는 거야?”진영숙이 가장 화가 난 부분은 이혼 얘기를 이유영이 먼저 꺼냈다는 점이었다.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도 정작 이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점점 아들도 미워지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놔주지 않으면서 더 보잘것없는 한지음까지 챙기니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비록 이유영이 세강의 안주인으로서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들의 이런 행보도 그녀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
한지음은 고개를 숙이며 표독스러운 표정을 감췄다. 대신 입에서는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도 대표님 어머님이시잖아요. 문안을 가는 건 후배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불편하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해요.”“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강이한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매번 한지음이 약해진 모습을 보일 때면 마음이 흔들렸다.과거 유영도 이렇듯 약하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이유인지 지금은 여기저기 공격 당하는 상황에서도 한 번도 그에게 굽히고 들지 않았다.경찰에 도움을 요청할지언정 그에게 지켜달라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한지음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머님이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런 모습이 된 건 제가 원한 게 아니잖아요. 저도 피해자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요.”갑자기 한지음이 말끝을 흐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강이한은 그녀에게 증거 관련해서 추궁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전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걱정 마. 다시 앞을 보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내가 만들 거야.”단호한 그의 결심이 담긴 한마디였다.한지음은 그럼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제가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죠. 의사가 그랬어요. 지금 당장 적합한 망막을 이식 받지 못하면 평생 앞을 못 보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요.”강이한은 숨이 막혀왔다.의사한테 이미 들은 내용이었고 그래서 최근 열심히 적합한 기증자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시망막 이식 수술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쉽지 않았다. 살아 있는 기증자는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었고 뇌사 환자들을 찾아봤는데도 쉽지 않았다.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그분이 부러워요.”강이한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지음이 애통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현재 모든
그 모습을 본 유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다급히 소은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친구의 손에서 칼을 빼앗은 뒤, 강아지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말했다.“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어.”“하지만 유영아….”“내가 응대할 게.”강이한이 왜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영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소은지와 그의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소은지는 씩씩거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듣고 강아지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손으로 안 되니 발로 걷어차는 소리까지 들려왔다.문밖에서 남자의 성난 고함도 같이 들려왔다.“이유영, 나와!”밤잠을 방해받은 이웃들이 문을 열고 욕설을 퍼부었다.“뭘 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워!”“요즘 젊은 것들이란….”하지만 곧 그 소리는 잠잠해졌고 다급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섬뜩한 눈빛에 겁을 먹은 탓이었다.유영은 안 보고도 돌아가는 상황이 뻔히 보였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서 현관문을 열었다.남자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눈빛과는 결이 다른 눈빛이었다.마치 자식에게 실망한 부모마냥, 마음은 아프지만 어떻게든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보였다.유영도 기죽지 않고 따졌다.“미친 거 아니야? 병원 예약해 줘?”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목에서 강한 힘이 전해지더니 그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다친 팔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끌려가다 보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대로 무릎을 시멘트 바닥에 박아버렸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남자는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는 그녀를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유영은 거꾸로 매달린 채,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이거 놔, 이 미친 놈아!”하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주차장까지 간 남자는 유영을 차에 억지로 밀어넣었다.그 과정에서 유영이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덜미를 단단히 잡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얌전히 있어,
고개가 돌아가고 얼굴에서 얼얼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차량 내부에는 삭막한 정적이 잠시 감돌았다.강이한도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한참이 지난 뒤, 고개를 돌린 유영은 남자를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지금 그 여자 때문에 나를 친 거야?”머리가 웅웅거리고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강이한이 불륜녀를 위해 자신에게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다.예전에 그에게 실망하고 슬펐던 마음뿐이었다면 이 순간에는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져 버렸다.내려놓는 건 한순간이라고 했던가.마음이 완전히 돌아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더 이상 강이한이라는 남자에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강이한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뻘겋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유영아.”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나한테 손대지 마!”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차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그녀는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열어!”“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우리 사이에 더 얘기할 게 남았어?”이성을 상실한 유영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세강 대표로서의 품위는 지켜. 앞으로 무슨 일이든 변호사 통해서 얘기해. 내가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경찰에 신고해. 내가 도와줘?”말을 마친 유영은 핸드폰을 꺼내 112 신고버튼을 눌렀다.강이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당신 미쳤어?”그가 울부짖었다.이 여자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유영은 그런 남자를 비웃듯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떳떳하다는데 당신은 뭐가 두려운 거야?”그랬다. 왜 두려운 거지?증거를 받았을 때 강이한은 경찰에 바로 제출하는 대신, 증거를 들이밀며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협박했다.무슨 상황이 와도 가장 먼저 떠오른 반응은 절대 이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반면 유영은 어땠을까?증거 앞에서도
그는 손을 뻗어 그 가녀린 목을 움켜잡았다.이대로 숨통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컥….”유영이 고통에 신음했다.“죽고 싶어?”분노한 강이한이 으르렁거렸다.둘이 함께한 세월 동안 유영은 항상 그의 그늘 아래 살았다. 적어도 강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자신이 오랜 세월 지켜준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세강 일가는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다는 얘기, 내가 안 했었나?”유영이 말이 없자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명백한 경고였다.“나도 말했잖아. 당신이 그 시작이 되거나 나가서 죽어버리라고. 지금 나한테 당신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협소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럼 내가 살아 있단 걸 느끼게 해줘야겠군.”“꺼져!”남자의 손이 옷섶을 비집고 들어오자 유영은 뺨을 날려버릴 기세로 손을 번쩍 들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남자가 가녀린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전에는 항상 부드럽게 그녀를 대하던 강이한이었다.갑자기 왜 이렇게 파렴치하고 우악스럽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영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내 몸에 손대지 마!”“우린 아직 공식적으로 부부야.”“부부라는 자각이 있기나 해?”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면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부라고 주장하고 있었다.“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당신 같은 남편을 뒀는지 모르겠네! 가장 힘들 때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도움이나 받고 말이야.”그 말은 참고 있던 강이한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게 만들었다.분노한 두 사람은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한편, 청하병원.한지음은 두 눈을 가리던 붕대를 풀어 헤쳤다. 유경원이 입국한다는 소식에 안 그래도 기분이 상했던 강서희는 그 모습을 보고 부루퉁한 말투로 말했다.“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병원 관계자는 내가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