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엔데스 명우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근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해!”“...”“내일 당신을 데리고 이유영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후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알겠어?”‘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앗싸, 좋아! 너무 좋아!’소은지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른다.하지만 소은지는 이런 상황에서 이 답을 들기를 절대 바라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유영이를 놓아줄 거야?”“그 여자는 내 미래의 왕비야. 놓아주고 말 것도 없어. 그녀는 파리에서 지고 지상의 여자가 될 거야...!”“걘 그런 거 원하지 않아!”소은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엔데스 명우는 자기가 이유영에게 제일 좋은 것을 준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이유영이 어떤 사람인지 소은지가 모를 리가 없었다.제일 웃긴 건 이 남자는 심지어 이런 방식으로 소은지와 이유영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다.“보아하니 당신은 이유영과의 사이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소은지는 말이 없었다.엔데스 명우 같은 사람이 어떻게 우정을 이해하겠는가?“당신 같은 사람은 아마 평생토록 진정한 친구가 없을 거야.”“그럼, 어디 두고 봐. 이유영이 당신을 미워하는 날이면 어떨지?”“...”엔데스 명우 눈 밑의 미소에는 그토록 강인한 자신감이 붙어있었다.마치 그가 말한 일이 바로 내일에 일어날 것처럼!하지만 소은지는 줄곧 자기와 이유영 사이의 감정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한테서 이유영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소은지는 그래도 저도 모르게 숨이 턱턱 막혔다.“걱정하지 마. 절대로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비록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소은지는 이 순간까지도 굳게 믿고 있었다.엔데스 명우 눈 밑의 풍자함은 더욱 짙어졌으며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소은지는 호흡이 조금 가빠져서 엔데스 명우에게 눈을 떼고는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와인잔이 대리석 테이블이
‘공항? 손을 잡았다고?’‘이런, 엔데스 명우가 고의로 이런 일을 벌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 정말 비겁한 사람이네!’이유영은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잡으면서 말했다.“외숙모 이 일은...”“파리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야?”전화 반대편 임소미의 말투는 순간 엄숙해졌다.아무래도 외삼촌이랑 같이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한 여인인지라 외숙모도 정말 세심하고 민감하기 그지없었다.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했다.“일이 좀 생기긴 했는데 외숙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이쪽에서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유영이 너 어떻게 처리할 거야?”‘어떻게 처리하냐고? 외삼촌이랑 상의 했던 대로만 하면...!’당연히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뭘 하든 다 하기 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이 매체에 까밝혀진 이상, 이건 이유영을 제일 앞으로 미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지금 후퇴를 한다고 해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이 엔데스 명우라는 자는 단지 소문으로만 듣던 마음이 독하고 성질이 더러운 남자만은 아니었다. 지금 보니, 그는 세심하고 치밀하기까지 했다.일단 그에게 빌미를 잡히기만 하면 그의 손에 꼭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네 외삼촌이 돌아간 것도 이 일 때문이야?”이유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임소미가 계속해서 되물었다.이유영은 눈을 감았다!‘외삼촌도 참 가엽네.’“유영아!”“외숙모, 외삼촌은 외숙모가 걱정할까 봐 걱정돼서...”필경 파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엔데스 가문의 도련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다행히 이 도련님들은 단결하지 못했다. 만약 이들이 서로 단결해서 다 같이 대외적으로 맞선다면 다른 사람들은 기회조차 없었다.그러면 아마 파리는 온통 엔데스 가문의 것일지도 모른다.“너희들 정말 갈수록 말이 안 되잖아.”뚝. 뚝. 뚝.임소미는 호통을 친 후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나 이유영은 전화가 끊긴 소리를 들으면서 제자리에 멍해서 전혀 반응을 잃었다!‘이게 무슨 일이야?’‘이건...’이유영은 가족들이 자
이유영은 어제까지만 해도 다 자기의 생각대로 이뤄질 것만 같이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일이 전부 다 탄로되어 온 파리 사람들이 다 알게 된 이상, 예상 밖의 상황이라도 생기면 다 같이 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이었다.이유영은 몹시 화가 났지만 그래도 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정국진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일은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진행해야 해.”“네?”“이렇게 된 이상, 누가 더 체면을 중시하는지 볼 수밖에 없어.”“…”‘무슨 뜻이지?’이유영은 외삼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설마 이 시점에서 누가 더 뻔뻔하게 나오는지 보려는 건 아니겠지?’“유영아.”“네.”“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넌 지금 계속해서 엔데스 명우랑 관계를 이어 나가서는 안 돼.”정국진은 아주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유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네.”이 점에 대해, 이유영은 섬에서 나갈 때부터 알아차렸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가 자기를, 이 지경까지 밀어 넣을 줄 이유영도 몰랐을 뿐이었다.지금 그녀는 몹시 골치가 아팠다.하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 제일 중요한 건 소은지의 사건에 대해 결판을 짓는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일단 뒤로 미루고 봐야 했다!…다른 한편, 풍산의 서재에서…!현 시각 공기 속에는 끊임없이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쳤다. 손에 아이패드를 든 박연준의 눈에서는 예전의 그런 부드러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지금의 박연준은 매섭고 위험해 보였다.문기원도 옆에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한참 지나서야 박연준은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풍기면서 입을 열었다.“현재 정국진 쪽 태도는 어때?”조건 전 박연준이 본 건 기사에 실린 이유영과 엔데스 명우가 공항에서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분명했다.마치 이런 강렬한 방식으로 정씨 가문의 후계자가 엔데스 명우랑 만난다는 것을 온 파리에 명백히 알리는 것만 같았다.“정씨 가문에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문기원이 대답했다.이건 예상했던 그림이었다.박연준의 눈 밑에는 씁쓸
한편 시테섬에서, 소은지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오그린 채 누워있었다. 엔데스 명우는 이미 옷차림을 단정히 하여, 다시 품위 있고 우아한 모습을 되찾았다.정말이지 엔데스 명우를 만났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그에 대한 편애를 감탄할 것이었다.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에게 편애를 받는 남자는 밤이 되면... 아주 끔찍하고 악랄했다.진흙처럼 휘늘어진 소은지를 보는 엔데스 명우의 눈에는 온통 경멸이었다.“당신 이제 가도 돼.”엔데스 명우는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가도 된다고?’드디어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2년이 되었다. 꼬박 2년 동안, 소은지는 줄곧 이곳에서 지냈다. 외부랑 연결을 하지도, 외계 소식을 접하지도 못했다.소은지는 거의 이곳에 묻힐 때까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길 나 갈 수 있는 날이 올지 생각지도 못했다!근데 이런 방식으로 나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소은지는 가슴 한쪽이 끊임없이 떨렸다.엔데스 명우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문고리에 올린 순간,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소은지에게 말했다.“난 당신이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나에게 빌기를 기대하고 있어.”‘빈다고?’이유영의 눈 밑에는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소은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엔데스 명우가 입을 열고 마저 말했다.“내기 하나 할래? 당신은... 반드시 제 발로 기꺼이 여길 다시 찾아올 거야.”“헛된 생각하지 마!”소은지는 분노하며 외쳤다.“허!”엔데스 명우는 냉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소은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빈다고?’엔데스 명우가 이 단어를 내뱉을 때 소은지는 사실 이미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놔 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엔데스 명우는 그저 소은지에게 두 개의 선택 항을 주는 것이었다. 떠나거나 남거나, 소은지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진짜 이곳에서 떠나야만 했다. 아니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분명 평생토록 보기 싫은 악몽 같은 장면일 것이었다....백산 별장에서, 엔데스
이유영의 믿을 수 없는 눈초리는 지금 놀람으로 가득 찼다. 소은지가 이런 말을 내뱉을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은지 지금 나랑 절교하자는 건가!?’‘엔데스 명우 때문에?’“은지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이유영은 살짝 울컥하면서 말했다.“너랑 강이한이 이혼할 때 난 찬성했어. 그리고 네가 박연준이랑 만나든 아니면 서재욱이랑 만나든 난 다 찬성이야. 근데 유영아...”여기까지 말한 소은지는 갑자기 멈칫거렸다!이유영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사업상의 정상에 오른 슈퍼우먼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소은지의 날카로움은 절대로 자신을 겨냥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눈초리를 보며 이유영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은지의 날카로운 눈빛과 이유영의 억울한 눈빛은 아주 선명한 대비가 되었다.두 사람은 그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이유영은 갑자기 코를 훌쩍이면서 소은지를 확 잡아당겼다.그리고 입을 열면서 물었다.“은지야, 너 왜 그래?”“유영아, 그 사람한테서 떨어져. 그 사람과의 혼인 계약을 취소해. 나랑 그 사람, 네가 멋대로 생각한 그런 사이가 아니야...”여기까지 말한 소은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소은지의 눈빛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그럼 어떤 사이인데?’‘내가 멋대로 생각했다고?’‘정말 은지말대로 내가 멋대로 생각한 거라면 왜 모든 사람들은 다 알면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지금 은지가 나보고 멋대로 생각한다고 하다니.’이유영의 억울한 표정을 보며 소은지의 마음속도.... 뒤죽박죽 흔들렸다. 그리고 소은지의 눈빛은 더욱 엄숙하게 변했다.소은지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난 그 사람을 사랑해!”소은지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 감정이 없이 아주 차갑게 내뱉었다.하지만, 이 세글자가 소은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영은 살며시 조심스럽게 소은지를 자기의 품속에 안았다.“내가 다 안배해 뒀어. 오늘이면 바로 파리를 뜰 수 있어.”“이유영.”“됐어. 제발 그런 사나운 말투로 날 대하지 마.”이유영은 억울하다는 듯이 웅얼거렸다.소은지가 어떤 사람인지 이유영이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미 엔데스 명우를 건드린 이상 지금 아무리 나서서 해명을 해봐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유영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지금 상황이 이렇게 난장판이 된 이상, 이유영은 자기가 손해를 볼 수 없었다. 이때 누가 뭐라고 해도 이유영은 소은지를 파리에서 떠나게 해야 했다.소은지는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숨이 막혔다.그녀의 모든 위장과 강인함은 이유영의 억울한 말투 때문에 무장 해제되었다.“유영아.”소은지의 뻣뻣한 몸은 순간 이유영의 아담한 몸에 휘늘어졌다.이유영의 몸에 기대자마자 소은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아무리 소은지 같은 강인한 여자라고 해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쁜 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좋은 곳을 찾아 의지하고 싶어진다.“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졌어.”이유영은 작은 손으로 소은지의 여윈 등을 살살 토닥이었다.소은지는 소리조차 떨리면서 말했다.“그 남자는 아주 무서워.”“응. 나도 알아.”“유영아, 너 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너 입 다물어!”이유영은 화를 냈다.“하지만 난 진짜...”“내가 다 안배 시켜놨어. 루이스가 널 안전한 곳을 모실 거야. 이후의 일은 다 내게 맡겨줘. 응?”이유영의 말투 속에는 강렬한 달래는 느낌이 있었다.“...”정말이지 소은지도 엄청나게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가 아침에 자기한테 한 말들을 생각하면 그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나 미워하는데 정말 자시를 놓아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소은지는 떠나면 안 되었다.만약 소은지가 정말로 떠난다면 그녀는 정씨 가문과 이유영까지 연루시키게 되는 것이었다.“유영아, 날 믿어줘. 내가 더 정리할 수 있어.”“난 설신비라는 여자가
이미 강이한 때문에 암흑의 세상에서 오랫동안 갇혀 지낸 이유영을 자기 때문에 또다시 악마 같은 사람이랑 혼인을 맺게 하려니, 소은지는 도무지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아니야. 너 무슨 그런 말을 하냐?”“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당연하지.”“...”“됐고 얼른 차에 타기나 해.”소은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유영은 바로 소은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소은지는 차에 탄 후 바로 창문을 열고 걱정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눈시울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나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랬다!”“네, 네, 네. 얼른 가.”이유영은 아주 편안한 척 연기를 했다.하지만 이런 이유영의 모습을 보고도 소은지는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금 아무리 이유영의 배후에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해도 소은지는 그저 걱정되었다. 엔데스 명우는...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다.마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서로 맞바꿀 수 없는 그런 무서움이어서 소은지는 진심 이유영이 정말 그 남자 때문에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소은지가 탄 차가 시야에서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드디어 다 끝났네.’엔데스 명우랑 소은지 사이가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이유영은 생각했다....별장으로 돌아오니 정국진이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이유영 얼굴에 생긴 빨간 손자국을 보며 정국진이 물었다.“누가 때렸어?”그의 말투에는 위험한 기운이 몇 푼 들어있었다!정국진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거의 까먹을 뻔했다. 그녀는 자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내심 소은지의 손이 정말 맵다고 생각했다.“참으로 드센 계집애야!”이유영은 한마디 중얼거렸다.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정국진의 눈빛은 조금 어두워졌다.필경 이유영이 정국진의 곁에 돌아온 이후, 정국진은 다른 사람이 이유영을 해치게 놔두지 않았다.그리고 이번 일이 아무리 배후에 그렇게 중요한 이익 관계가 있다고 해도 정국진은
정국진은 이유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여섯째 도련님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이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정국진을 바라보았다.분명한 건 정국진도 사실 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이 보기엔 엔데스 명우는 정말 하루 이틀 나쁜 그런 악질적인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외삼촌이 그 사람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하니, 이유영도 조금 호기심이 났다.“그럼, 예전의 여섯째 도련님은 어떤 사람이었는데요?”“침착하고 내성적이며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주변의 인간관계도 깨끗했어!”‘깨끗?’이유영은 마지막 단어랑 그 남자를 전혀 연상시킬 수 없었다. 74번... 이게 무슨 수자를 의미하는지 이유영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알았다.지금까지도 이유영은 엔데스 명우를 떠올리기만 하면 그 사람이 소은지한테 했던 치욕적인 일들이 생각나서 치가 떨리곤 하였다.“그 사람이 바뀌게 된 시작점이 바로 청하시의 그 여자 때문이었어.”“설신비?”“응.”이유영의 가슴은 조금 무거워졌다.이렇게 보니 엔데스 명우랑 소은지 사이에 도대체 왜 그런 원한이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엔데스 명우의 입장에서 보면 설신비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소은지가 양심에 어기는 재판을 해서 그 재판에서 졌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진실은 과연 그런 것일까?“예전에 너한테 말하지 않았던 건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과 그 애 사이의 원한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지금 일시적으로 그 애를 도울 수는 있어도 평생 도울 수는 없어!”“...”안색이 안 좋던 이유영은 외삼촌의 말을 듣고 마음이 더욱 말이 아니었다.‘그런 거 보면 엔데스 명우랑 은지 사이는 그러면 한 쪽이 죽지 않는 한 끝이 나지 않는 건가!?’여기까지 생각한 이유영은 골치가 아파 나는 것 같았다.“마음속으로 제대로 미워하는 게 아니면 어떻게 엔데스 가문의 사람인 여섯째 도련님이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소은지를 찾아왔겠어?”“전...”이 순간,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