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551 - Chapter 1560

1725 Chapters

제1551화

조기봉의 죽음 같은 침묵이 바늘처럼 강서원의 가슴을 찔렀다.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은 말할 수 없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그 순간, 강서원은 분명히 깨달았다.자신과 조기봉은...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지훈은 공기 속에 스민 불길한 낌새를 읽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아버지, 제 임무는 끝났습니다. 어머니도 무사히 집으로 모셔 왔어요. 이제부터는 아버지께 맡깁니다. 잘 돌봐 주세요.”말을 마치자마자 지훈은 재빠르게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넓은 거실엔 부부 둘만 남았다.눈이 마주쳤으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그냥... 이렇게 살아야지.’조기봉은 그렇게 생각했다....재석은 집에 돌아와 키를 꺼내, 곧장 옆집 문을 열었다.정은이 한때 살았던 공간, 지금은 재석의 집이 되어 있었다.실내의 가구와 소품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하지만 재석이 사랑했던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그럼에도 재석은 빈 껍데기인 이 집을 고집스럽게 지켰다.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재석은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었다.우회 접속으로 해외 SNS에 들어가 ‘멜버른’, ‘호주’, ‘맥스 군도’ 관련 소식을 검색하고 계속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역시나...그러던 중, 재석의 손가락이 멈췄다.호주인 한 명의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닉네임은 ‘올리버’.몇 달 전 올린 글의 위치가 ‘맥스 군도’로 찍혀 있었다.재석은 곧장 그 계정으로 들어가, 올리버가 올린 게시물들을 전부 훑어봤다.그는 ‘맥스 군도’ 원주민이었다.재석의 시선은 한 장의 사진에 멈췄다.사진의 중심에 작은 예쁜 집이 있었다.올리버는 ‘할아버지의 선물’이라 적어두었지만, 재석은 단번에 그 집 뒤쪽을 보았다.숲으로 향하는 몇 명의 뒷모습.그중 한 사람... 너무나 익숙했다.무수한 밤마다, 재석이 꿈속에서 찾아 헤매던 그 모습.그 사람이었다.‘정은..
Read more

제1552화

아침이 되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바람과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햇살은 구름 뒤에 숨어 비치지 않았다.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창가로 다가가 비가 그쳤는지 살피기 위해 밖을 내다보았다.그러나 결과는 모두 같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한숨이 터져 나왔다.“이 비가 도대체 언제까지 내리려나...”“쉿! 목소리 좀 낮추시오!”전해산이 저쪽을 가리켰다.정은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었다.주광빈은 얼른 입을 막고 거의 숨으로만 속삭였다.“이 아이 참 대단해. 뭐든 앞장서서 나서고, 힘든 일도 기꺼이 다 맡고... 늘 침착하게 지휘하는 걸 보니, 그만 정은의 나이를 잊게 되지.”‘그래, 아직 학생인데. 나이도 거의 자식뻘인데...’주광빈은 곧장 다른 이들에게도 손짓해 조용히 하라고 했다.모두가 눈빛을 주고받으며 발소리조차 죽여 움직였다.구석에 앉아 있던 이조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서서히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잠시 후, 정은이 눈을 떴다. 모두 일어나 있는 걸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잠을 잤네요!”전해산이 손을 내저었다.“괜찮네, 괜찮아. 오늘은 어차피 일도 없으니, 좀 더 자도 돼.”주광빈도 거들었다.“맞아, 어제 무척 힘들었잖아. 푹 쉬어야지.”정은은 더 미안해져서 얼른 일어나 씻으러 갔다.잠시 뒤, 정은이 나오자 아침상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만춘미가 손짓했다.“정은아, 와서 내가 오늘 끓인 야채죽 좀 맛봐. 어제보다 나아졌는지 알려줘.”“네, 교수님.”만춘미는 40년 넘게 부엌일과 담을 쌓고 살던 고학력 여성답게, 처음엔 모든 게 힘들기만 했다.칼질도 어렵고, 볶는 것도 어렵고, 설거지는 더 어려웠다.하지만 자꾸 하다 보니, 조금씩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정은이 만춘미의 죽을 맛보고 말했다.“맛있습니다, 만 교수님.”“어머! 그럼 됐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정은은 비옷을 걸치고 장화를 신었다. 완전무장을 마친 모습이
Read more

제1553화

정은의 침묵은 오히려 더 크게 울려 퍼졌다.올리버가 정은을 집에 더부살이하러 온 사람으로 의심하다니.‘제발... 저는 아직 오래 살고 싶어요.’정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오해하셨어요. 저는 그런 게 아닙니다.”올리버가 말을 끊었다.“아,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믿지 않아요. 지난번에도 이 교수님이 똑같이 말씀하셨거든요.”“제가 문을 열었더니, 무례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결국 거절하긴 했지만, 저는 그런 상황이 정말 불편합니다.”정은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그런 일이 있었군.’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단호히 말했다.“잘 들어두세요. 단 한 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옆 바닷가 쪽 작은 건물이 곧 무너질 조짐이 보입니다.”“지금 올리버 씨 댁 일부가 그 범위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서쪽 방에서는 지내지 않는 게 좋습니다.”올리버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그 건물은 우리 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신 집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 섬에서 가장 뛰어난 목수셨습니다.”“평생 수많은 집을 지으셨는데, 그런 우리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집이 무너질 거라고 하다니... 믿기 어렵군요.”그는 이내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어쨌든 무엇을 말씀하시든, 저는 여러분을 제 집 안으로 들일 수 없습니다. 물건을 빌려드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정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계속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고, 괜히 더 의심만 살 뿐이었다.하지만 발길을 돌리기 전, 끝내 참고 있던 말을 남겼다.“기억하세요. 서쪽 방은 절대로 사용하지 마세요.”올리버는 씁쓸하게 웃었다.“아직도 포기하지 않는다니... 참 고집 대단하군요.”정은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바람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저녁 무렵이 되었지만, 비가 내리는 기세가 꺾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모두 함께 뒷정리를 마쳤다.하나같이
Read more

제1554화

모두가 올리버는 이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 무너진 벽체 한쪽이 갑자기 들려 올라갔다.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올리버가 기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정은이었다.“오, 다행히 말씀해 주신 대로 서쪽 방에는 가지 않았습니다!”그는 숨을 몰아쉬며 덧붙였다.“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그 순간을 떠올리자, 올리버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당시 올리버는 거실에서 2층 안방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안방은 하필 서쪽에 있었다.그런데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머릿속에 정은의 경고가 번뜩 스쳤다.‘괜찮겠지’ 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발길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그는 자신을 달래듯 ‘아직은 잠이 덜 깨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선택이 생사를 갈랐다.막 1층으로 내려와, 소파에 앉기도 전에 요란한 폭음과 함께 지붕이 뚫려버린 것이다.단 몇 초만 늦었어도 그는 붕괴한 건물의 잔해 속에 파묻혀 숨조차 쉴 수 없었을 터였다.집은 이미 쓸 수 없게 되었다.여기저기 무너지고, 부서지고, 망가져 버렸다.올리버는 결국 작은 말을 데리고 연구팀이 빌려 쓰는 숙소로 몸을 피했다.만춘미가 다가와 그의 몸을 간단히 살펴주었다.“팔꿈치랑 허벅지에 긁힌 자국이 몇 군데 있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어. 정말 큰일 날 뻔했지.”올리버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검사를 받았다.그는 만춘미가 영어를 쓰지 않는 걸 듣고, 슬쩍 정은에게 물었다.“이분은 지금 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정은이 통역해 주자, 올리버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어 만춘미를 바라봤다.모두가 이제는 감사 인사를 하겠거니 했는데...“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말도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다친 데가 있는지 걱정돼서요.”감사의 말은 했다.그러나 또한 올리버는 만춘미를 수의사처럼 부른 셈이었다.만춘미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지만, 올리버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마
Read more

제1555화

태풍이 지나간 뒤, 눈에 들어오는 건 그야말로 잿더미 같은 풍경이었다.좁은 집에 숨어 있던 섬 주민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누군가는 쓰레기를 치우고, 누군가는 집을 정리했다.그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나 충격보다는 담담하고 익숙함이 보였다.맥스 군도는 해마다 태풍을 맞는다. 많을 때는 한 해에도 여러 번.연구팀조차 이제는 제법 대처에 익숙한데, 하물며 섬의 원주민들은 어떻겠는가?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당연히 올리버였다.세 채뿐인 집 가운데 가장 새롭고 좋은 건물은 완전히 무너졌고, 그가 거주하던 집은 절반이 부서졌다.남은 건 가장 오래된 낡은 집 한 채, 그런데 이미 연구팀에 세를 준 상태였다.정은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올리버는 당장 길바닥 신세가 될 판이었다.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저... 혹시 제가 좀 더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냥은 아닙니다! 제 집 임대료를 깎아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얼마나 깎아 주실 건데요?”‘형제 사이에도 계산은 따지는데, 하물며 나랑 올리버 씨는...’‘그저 조금 아는 사이일 뿐이지.’올리버가 머뭇거리며 답했다.“1... 10%요?”정은은 대꾸하지 않았다.“그럼... 15%?”정은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척했다.올리버는 이를 악물었다.“30%! 더는 못 깎습니다. 더 깎으면 전 집도 못 짓습니다!”정은이 미소를 지었다.“좋습니다. 그렇게 하죠.”올리버는 안도하며 말했다.“단, 한 가지 조건 있습니다. 제 식사도 챙겨주셔야 합니다.”“연구팀이랑 같이, 대충 대량으로 만든 음식 드시면 돼요.”“좋습니다!”올리버는 ‘대량으로 만든 음식’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어제 먹은 저녁만 생각해도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이번 거래는 손해가 아니야.’이렇게 정은과 올리버가 합의하자, 정은은 곧장 전해산에게 계약서를 새로 작성해 달라고 했다.양측은 즉석에서 사인했다.올리버가 고개를 갸웃했다.“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전해
Read more

제1556화

차마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운 ‘치욕의 완패’였다.그런데도 올리버는 그 현장에서 흔적을 지워버리기는커녕, 아예 영상으로까지 남겨 두었다니...‘정말 뭐라 말하기도 곤란하네...’정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전해산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다음 날, 오랜만에 햇빛이 섬을 찾아왔다. 하늘은 마치 캔버스 속 그림처럼 푸르게 펼쳐지고, 하얀 구름이 떠다녔다. 얼핏 보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수리 인력들도 도착해 본격적으로 네트워크 복구에 들어갔다.모든 것이 질서를 되찾아가고 있었다.올리버만 빼고.올리버는 한숨이 점점 잦아졌고, 결국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미소를 짓지 못했다.정은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현관 계단에 올라, 올리버 옆에 나란히 앉았다.올리버는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더니 힘없이 말했다.“Hello.”정은은 미소를 띠며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요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요?”“그야, 걱정이 많으니까요! 아주아주 많아요! 그냥 죽을 만큼요!”“집 때문인가요?”“‘그냥’이라는 말은 빼야죠. 이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제 생각엔 그렇게 큰일은 아닌 것 같아요.”올리버는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집 짓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예를 들면요? 어디가 힘들다는 건데요?”“우선 자재를 살 돈이 있어야 하고, 인부를 쓸 돈도 필요해요. 마지막으로 인테리어까지 해야 하고요! 이제 이해되세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결국 돈만 있으면 되는 거네요, right?”“그럼요! 돈이 제일, 제일, 제일 중요한 거예요!”정은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올리버 씨, 우리 협력하실래요?”“네?”올리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정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제가 자금을 대서 올리버 씨 집을 짓도록 지원하겠습니다. 그 대신, 새로 지어진 집은 우리 연구팀이
Read more

제1557화

전해산 교수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이거 좋은 방법이네! 양쪽 모두 윈윈이잖아!”연구팀은 더 나은 거처를 얻게 되고, 올리버는 큰 지출을 줄이며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주광빈 교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그럼... 이제 드디어 이런 축축하고 습한 집에서 안 살아도 된다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정은은 평소 ‘일을 잘하려면 먼저 환경부터 갖춰야 한다’라고 생각해 왔다.사람이 편히 쉴 곳도 없는데 어떻게 업무 성과를 내겠는가?성과는커녕, 의욕조차 사라질 것이다.‘과거처럼 조건이 안 돼도 억지로 만들어내라는 건... 다 옛말이야.’이제는 21세기다. 연구비가 충분히 확보된 상황이라면, 왜 굳이 모두가 불편하게 지내야 한단 말인가?억지로 고생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만춘미 교수가 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난 이의 없어! 전적으로 찬성이야!”하늘만 알 것이다. 지난 1년 넘게, 만춘미가 좁고 눅눅한 방에서 어떻게 버텨왔는지를.밤중에 눈을 뜨면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많았다.‘남편과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 괜히 괜한 고집을 부렸지.’‘그때 그냥 안 간다고 했으면... 지금 이런 섬에 갇혀 있진 않았을 텐데...’그러나 아침이 되면, 전날 흘린 눈물도, 속으로 뱉은 원망도 모두 잊은 듯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언제나처럼 꼼꼼하고 성실하게.그런 만춘미에게 주어진 이번 기회는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았다. 만약 누군가 반대한다면 정신이 나갈지도 모른다.역시나... 교수들이 잇따라 의견을 냈다.“나도 이의 없어!”“딱 하나 바람이 있다면, 공사가 빨리 진행됐으면 좋겠어. 몰랐을 때는 괜찮았는데, 이제 알고 나니 하루라도 더 여기 머무는 게 고역이네.”“그러게 말이야. 전에는 그냥저냥 참았는데, 지금은 생각할수록 못 버티겠어. 새집이 하루빨리 뚝딱 세워졌으면 좋겠네, 하하...”“...”이조화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묵은 곧 동의로 간주했다.‘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싶
Read more

제1558화

정은의 일처리는 늘 빠르고 깔끔했다. 올리버가 요청한 물자는 도균성과 그 일행의 도움으로 금세 섬으로 들어왔다.정은은 도균성과 비용 정산을 마친 뒤, 배를 탄 선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도균성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주셨잖아요.”그러나 정은은 여느 때처럼 짧게 대답했다.“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잖아요.”올리버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인맥을 활용해 순식간에 인부들을 모아 시공팀을 꾸렸다. 공사 현장은 곧 활기를 띠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연구팀도 분주히 움직였다.허리케인이 지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 연구팀은 이미 정상적인 연구 활동을 재개했다.현재 연구팀의 업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었다.데이터 회수, 샘플 처리, 로봇 조정, 그리고 요리와 청소를 포함한 후방 지원.예전에는 가장 고되고 힘든 현장 채집을 연구원들이 직접 뛰어다니며 했으나, 지금은 모두 새김과 바람, 두 대의 로봇에게 맡겨졌다.‘인력이 남는다.’정은은 일정 기간 관찰 끝에 그렇게 판단했다.그날 밤, 그녀는 전체 업무량과 팀원 개개인의 능력을 대략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연구팀 책임자의 권한으로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오늘부터, 저희는 교대로 휴식을 갖겠습니다.”순간 현장은 고요해졌다.“뭐라고 했어? 휴식이라고 했나?”“나도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교대 휴식?”“설마... 우리도 쉴 수 있는 건가?”“...”섬에 들어온 이래, 날씨나 몸 상태 때문에 잠깐 멈춘 적은 있어도, 연구팀 스스로 ‘휴식’을 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는 업무차 온 겁니다. 고생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일이면 엄연히 법적 근거가 있어야죠. 《근로기준법》에 맞게, 우리도 정당한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과학자, 교수라고 해서 현장 노동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잖아요.”그 말은 곧장 모두의 가슴에 가닿았다.‘그래, 맞아. 우리가 왜 쉬면 안 된다는 건데?’‘일도 중
Read more

제1559화

그날 밤.J시의 한 아파트 단지.재석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샤워를 끝내고, 평소처럼 휴대폰을 꺼냈다.첫 번째로 확인한 건 호주의 일기예보였다.5일 전쯤,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로 피해 지역의 통신선이 차츰 복구되고 있었다.재해 구호 작업도 질서 있게 이어지고 있었다.이어 재석은 호주 현지 뉴스 포털을 열고 ‘맥스 군도’, ‘사상자’라는 단어를 검색했다.다행히 큰 뉴스는 보이지 않았다.재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무사하다니, 다행이네.”마지막으로 소셜 앱을 열어 새로고침을 했다.그 순간, 재석의 눈이 번쩍 뜨였다.며칠 전에도 보았던 올리버의 계정에 새 게시물이 올라와 있었다.업로드된 시간은 8시간 전.아홉 장으로 채운 정사각형 그리드 사진. 글귀는 단순했다.[신비한 나라의 장기, 재밌네!]앞의 여덟 장은 모두 장기판 사진.하나같이 처참하게 패배한 국면들이었다.마지막 한 장은 어쩐지 건축 현장처럼 보였다.재석은 사진을 확대했다.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예전 사진에서도 본 적 있던, 그 작은 건물.하지만 이제는 흔적조차 없었다.대신 공사 인부들과 쌓여 있는 건축 자재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이번에는 사진 속에서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재석은 조금 아쉬운 듯 화면을 닫으려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사진 화면이 한 장 앞으로 넘어갔다.그 순간, 그의 시선이 굳어졌다.장기판 위에 놓인 손...‘정은이다!’...두 달이 훌쩍 흘렀다.폐허에서 공터로, 공터에서 다시 작은 건물이 차곡차곡 세워져 갔다.날이 지날수록 올리버의 눈빛은 더 환해졌고, 연구팀 교수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늘어났다.그리고 어느 평범한 오후.점심 휴식을 마치고 모두 모였을 때, 정은이 선언했다.“이제 작은 건물이 정식으로 완공됐습니다. 사흘 뒤로 좋은 날을 잡아서 이사하겠습니다.”순간, 현장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드디어 됐구나!”“하루하루 이삿날을 손에 꼽는 게 헛되지 않았네.”“아니, 사흘이나 더 기다리라고? 난 하루
Read more

제1560화

그날 밤, 교수들은 각자 연구 구역에서의 작업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새집으로 돌아왔다.짐을 정리하고, 씻은 뒤, 옷장 속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는 하나둘 거실로 내려왔다.부엌에서는 이미 전해산 교수와 만춘미 교수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다른 교수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자연스레 합류했다.누군가는 그릇을 나르고, 누군가는 젓가락을 식탁 위에 놓았다.삼삼오오 힘을 합쳐 금세 따뜻한 집들이 음식상이 차려졌다.향긋한 냄새가 건물 안에 퍼지자, 3층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올리버가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왔다.“와, 냄새가 너무 좋은데요! 오늘 저녁은 특별한 건가요?”물론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올리버의 눈앞에는 이미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참고로 새 건물은 총 5층 규모의 주택이었다.1층과 2층은 연구팀이 사용하고, 3층 위로는 올리버의 공간이었다.이제는 말 그대로 모두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셈이었다.주광빈 교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이리 와, 작은 집주인. 오늘은 우리 집들이 날이다.”“집들이요? 그게 뭔가요?”짧게 설명을 들은 올리버는 눈을 반짝였다.“신비한 나라의 풍습은 정말 흥미롭네요!”그는 곧장 자신이 아껴둔 수제 와인을 꺼내 왔다.음식이 사라지고 술잔이 비어갈 때까지, 웃음소리는 계속됐다.“오늘은 내가 섬에 온 뒤로 가장 홀가분하고, 가장 행복한 날이야.”만춘미 교수가 소파에 기대어 잔을 들어 보였다.잔에는 아직 한 모금 남은 붉은 와인이 남아있었다.와인 브리딩이 너무 잘 되어서일까, 향은 잔을 벗어나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쯤 취한 듯했다.‘불과 석 달 전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만춘미 교수는 웃다가 슬며시 눈가를 훔쳤다.우아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손끝으로 훔친 눈물.“내 꼴 좀 봐. 괜히 취한 사람 같잖아...”올리버가 제안했다.“이렇게 기념할 만한 순간에, 다 같이 사진 한 장 찍는 게 어떨까요? 제가 찍어
Read more
PREV
1
...
154155156157158
...
17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