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571 - Chapter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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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1화

리아가 떠나기 전 남긴 말에 정은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앞으로 두 달 안에 섬에 큰일이 생긴다는 뜻이잖아...’다행히 바람 섬은 서쪽 끝에 있고, 연구팀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영향은 덜하리라 생각됐다.‘제발... 변 선생님, 너무 큰일을 벌이지는 말아야 할 텐데.’리아가 떠난 뒤, 일상은 다시 고요하게 흘러갔다.정은의 일과는 단순했다. 숙소와 연구 구역,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생활.연구팀의 총괄과 팀원들의 생활 문제를 챙기는 것 외에도, 점차 연구 과제에도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일을 배우고, 동시에 개인적인 학업도 이어갔다.정은이 늘 책을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전해산과 주광빈조차 그녀가 아직 박사과정 1년차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게다가 정은은 세 대의 로봇을 직접 조정하고 테스트해야 했다.‘발이 땅에 닿을 틈이 없다’는 말 그대로였다....10월이 넘어가자 J시의 날씨는 서서히 싸늘해졌다.가을바람이 스산히 불고, 낙엽이 흩날렸다.재석 역시 정은 못지않게 바빴다. 아니, 최근 한 달은 그 이상이었다. 먹고 자는 것조차 잊은 듯한 몰입.예전에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몰아붙이는 모습은 아니었다.마치 무언가를 끝내야 한다는 듯,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진욱은 턱을 쓰다듬으며 태민을 힐끗 바라봤다.“요즘 재석이 좀 이상하지 않냐? 또 밤새웠어.”“네? 조 교수님 어제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태민이 뒤늦게 반응했다.“입고 있는 옷 좀 봐. 어제 입던 거랑 똑같잖아. 재석이가 집에 다녀오면, 다음 날은 무조건 갈아입고 오거든. 근데 지금은...”“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근데 왜 이렇게 바쁘신 거지? 혹시 우리 프로젝트 중에 급한 거 있나요?”진욱은 고개를 저었다.“없어.”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재석을 바라보는 시선에 알 수 없는 무게가 담겼다....점심 식사 시간.“가자, 재석아. 식당으로 가자!”진욱이 의자를 벌떡 밀치고 일어섰다.“요즘 새로운 메뉴가 두 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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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2화

“정은이를 꼭 데리고 돌아와. 너희 둘, 무조건 무사히 돌아와야 해. 할 수 있지?”재석의 눈빛이 흔들렸다.“최대한 노력할게.”“쳇... 최대한이라니? 무조건이야!”“알았어.”재석은 쓴웃음을 지었다.더 이상의 설명도, 장황한 말도 필요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마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처럼.진욱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언젠가는 재석이 떠날 거라고.다만, 모든 걸 정리한 뒤에 움직이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책임이라는 두 글자를 뼛속 깊이 새기고 사는 사람이니까...’“언제 출발할 생각이야?”“조금 더 기다려야 해.”재석의 대답은 짧았다.진욱은 눈을 가늘게 떴다.‘기다리다니? 비행기표 하나 사면 되는 일 아닌가?’그런 상태가 한 달 넘게 이어졌다.태민과 미진은 날마다 불안에 휩싸였다.결국 미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변 선생님 휴가는 언제쯤 끝내신다고 말씀하셨어요?”진욱은 고개를 저었다.“몰라. 아직 돌아올 기미는 없는 것 같아.”“저 그냥 조용히 앉아 있어야겠어요.”미진이 툭 내뱉었다.“응, 그러렴.”진욱은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눈빛은 어느새 깊어졌다....재석이 더 이상 무리한 야근을 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 계절은 어느새 깊은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침.현관을 나서던 재석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여보세요?”[야, 네가 부탁했던 일.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어.]장민의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장민은 구세영과 결혼한 뒤 함께 국내에 정착했고, 현재는 서비대에서 나란히 강의를 맡고 있었다.해외 유학 경력에다 언어 능력까지 뛰어나, 반년 전에는 M국 명문대로 파견돼 2+2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됐다.덕분에 지금은 상반기는 한국, 하반기는 해외에서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재석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말해봐.”[내 외사촌 형의 고모가 멜버른 의료기관에서 근무하시거든. 꽤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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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3화

[구했어.]장민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그 순간, 재석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드디어...’하지만 이어진 말에 다시 긴장감이 맴돌았다.[근데 문제는 말이야, 샘플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야. 지금 혈액은 멜버른 병원 보관실에 있어. 꺼낼 수는 있는데, 꺼내면 24시간 안에 처리해야 해. 그 시간 넘기면 아무 소용 없어. 그러니까... 네가 직접 방법을 생각해 봐.]“지금은 건드리지 마. 내가 직접 멜버른으로 갈 거야. 최대한 빨리.”[그래, 그게 최선이지.]“그동안은 네가 좀 챙겨줘야 할지도 몰라.”[걱정 마. 내가 아는 사람이 그 보관실에서 일하거든. 이미 얘기 다 해놨어.]“고맙다.”...불필요한 변수를 막기 위해, 재석은 이틀 뒤 멜버른행 비행기표를 바로 끊었다.“진욱아, 나 다녀와야겠다.”뜻밖의 소식에 전진욱은 멍하니 굳었다.“벌써? 이렇게 빨리?”“응. 내가 기다리던 게, 이제 손에 들어왔어.”“하, 그동안은 질질 끄는 것 같아서 답답했는데... 막상 이렇게 나간다니까, 또 아쉽네.”진욱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좋아. 갔다 와. 여기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너는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부탁한다, 친구야.”재석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흥! 올해 연말에 상여금 꼭 챙겨줘라.”“당연하지.”...다음 날, 재석은 하루 동안 온전히 업무 인수인계에 썼다.그동안 밤낮없이 준비해 둔 덕분에 모든 절차는 매끄럽게 진행됐다.진욱은 혀를 찼다.“이야... 좋아, 좋아. 앞으로 3년은 과제 걱정 없겠네.”‘우리 연구원들을 그냥 돈벌이 수단으로 쓰는 거 아냐?’‘3년이라니... 단순히 한 주, 석 달이 아니라, 무려 3년이라구.’...재석은 모처럼 본가를 찾았다. 거의 반 년 가까이 걸음하지 않다 보니, 익숙했던 정원마저 낯설게 느껴졌다.현관 앞에서 집사가 반갑게 맞았다.“재석 도련님, 오셨군요!”여전히 정성스레 슬리퍼를 내밀었고, 재석은 두 손으로 받아들고 고개 숙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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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4화

모자가 마주 앉았으나,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그 침묵이야말로 지금 두 사람 사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재석은 멀찍이서 친어머니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기 시작했다.강서원이 말없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 감각은 트라우마처럼 불시에 찾아왔다.재석은 입술을 달싹였다.한참이 지나서야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불렀다.“어머니.”강서원은 비웃듯 짧게 웃었다.“그 소리, 내가 감히 들을 자격이 있나 보네.”목소리엔 날 선 냉소가 가득 배어 있었다.재석은 눈길을 떨구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조기봉이 재석을 소파 쪽으로 불러 앉히며 집사에게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그러나 강서원은 고개를 저었다.“식욕 없어. 먼저 올라갈게.”강서원은 고개를 한 치도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세운 몸을 유지한 채, 단호히 몸을 돌렸다.조기봉에게는 고개를 숙일 수 있었지만, 친아들에게만큼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부부 인연은 중도에 맺은 것이지만, 아들은 분명 자신이 낳은 핏줄이었다.그럼에도 재석이 보이는 냉담과 무심, 그리고 모른 척하는 태도는 강서원의 가슴에 응어리진 원망으로 남았다.‘여자 하나 때문에... 단지 그 여자 때문에... 친엄마인 나까지 버리겠다는 거야?’강서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재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어머니, 같이 식사하시죠. 오늘은...”재석의 목소리는 어머니를 확실히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강서원의 발걸음은 잠시 멈칫할 뿐,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2층을 향해 올라갔다.발소리가 멀어지고, 끝내 사라졌다.조금만 마음을 기울였다면 들었을 것이다.재석의 목소리에 깃든, 자존심을 접은 간절함과 체념을.마치... 오래 참아온 이별의 인사처럼.하지만 강서원은 듣지 못했다. 아니면 들었더라도 애써 외면했는지도 몰랐다.곧 집사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회장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드시면 됩니다.”조기봉은 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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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5화

다음 날 저녁, 석양이 하늘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오렌지빛 햇살이 도시 전체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J시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석양 아래 곡선을 그리며 활주로를 벗어나더니, 곧장 구름 위로 솟구쳐 오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재석은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비즈니스석은 만석이 아니어서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었고, 그만큼 조용했다.며칠째 이어진 불면으로 지쳐 있던 재석에게, 이번 잠은 거의 보름 만에 찾아온 단잠이었다. 비행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중간에 난기류로 몇 차례 크게 요동쳤음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승무원이 낮은 목소리로 옆자리 승객에게 아침 식사를 권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을 때였다. 그제야 새벽이 밝아온 것을 깨달았다.비행기의 창문 덮개를 열자,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아침 해가 보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주황빛 구체가 구름 너머로 떠올라 있었다....비행기가 멜버른에 착륙하자마자, 재석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예전에 M국 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이자 지금은 멜버른 한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책임교수로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는 뜻밖에 연락해 온 재석에 놀라면서도, 재석이 실험실 사용을 부탁하자 단번에 승낙했다.잠시 후, 재석은 병원에서 무사히 혈액 샘플을 인도받았다.그 소식은 실시간으로 장민에게도 전해졌다.[샘플은 확보했지?]“응.”[검사해 봤어?]“응. 이상 없어.”[좋아, 내가 쓸데없는 말 했네.]재석 같은 사람이면 굳이 당부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철저하고 꼼꼼했으니까.[그럼 잘 되길 빈다. 부디 하루빨리 아내 찾기 성공하길...]재석은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행운을 빌어줘서 고마워.”30분 후, 재석은 M국 연구소에서 함께했던 동료가 기다리는 대학교에 도착했다....붉은 해가 바다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리아가 섬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정은은 리아가 떠난 다음 날에 단 한 번 연락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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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6화

주광빈 교수는 ‘바람’에 내일 탐색할 채집 구역을 설정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감탄을 내뱉었다.“정은아, 동쪽 구역 조사는 이제 다 끝냈네. 오늘로 사실상 마무리야. 내일부터는 서쪽으로 넘어가면 되겠다. 가장 서쪽까지 가면, 맥스 군도 전체를 다 훑는 셈이지.”“서쪽 끝이라면...”만춘미 교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바람 섬까지 가는 거겠네요?”주광빈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바로 거기.”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정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광빈 곁으로 다가갔다.“교수님, 내일 ‘바람’이 들어갈 탐색 구역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주광빈은 황급히 화면을 조작해 내보였다.“여기, 이 구역이야.”정은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벌써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네요.”“그렇지.”주광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동쪽은 이미 다 훑었으니, 이제 갈 곳은 서쪽이지.”정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당분간은...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뭐라고?”주광빈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전해산 교수와 만춘미 교수도 동시에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전해산 교수가 물었다.“왜 멈추자는 건가?”정은은 한동안 대답을 고르다, 결국 사람들 시선을 피해 작게 말했다.“사실, 이유는 지금 말씀드리기 어려운데요. 그냥 일단 멈춰주시면 안 될까요?”전해산, 주광빈, 만춘미는 다 정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전해산 교수가 정은에게 다시 물었다.“그럼, 언제까지 멈춰야 해?”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또 이유 없는 요구구나...’ 전해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결국 세 사람은 현재 책임자인 정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겉으로는 이렇게 정리되었다.최근 로봇들이 프로그램 최적화 과정을 거쳐야 해서 잠시 운용을 중단한다는 것이 명목상의 이유였다.다행히도 그동안 수집해둔 바이러스 샘플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데이터 정리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분석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자료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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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7화

의문이 남긴 했지만, 전해산은 결국 흔들림 없이 정은의 결정을 따랐다.‘연구팀 책임자를 따라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 이미 수차례 입증된 경험이었다.연구팀은 그동안 모아둔 샘플 정리만 해도 필요한 시간은 열흘이 넘었다. 그러니 고작 나흘, 닷새쯤은 문제도 아니었다.‘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흘, 닷새로도 다 못 해치울 거야.’그 모든 원인은 새김, 바람, 이어, 이 로봇들 덕분이었다.말 그대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범 근로자였다.먹지도, 자지도 않고, 원한다면 하루 24시간을 꼬박 채워 일할 수도 있었다.정은과 전해산 같은 사람들에게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하지만 마음속에 의혹과 불안을 품은 이조화에게는 흘러가는 매 순간이 고문처럼 느껴졌다....밤이 깊었다.세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이조화는 곧장 침대에 걸터앉았다.그녀가 숙소 배정을 받을 때 단 하나 고집한 조건은 ‘조용한 곳’이었다.그래서 이 방은 복도 끝에 있었고, 옆은 잡동사니 창고, 맞은편은 발코니였다.앞뒤 좌우 모두 비어 있는, 고립된 방이었다.세면도구를 내려놓은 뒤 몇 분간 멍하니 앉아 있던 이조화는 곧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몇 바퀴를 돌고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가, 곧 다시 일어나서 다시 방을 빙빙 돌았다.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이를 악물었다.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던 여행용 가방을 꺼내 열었다.안에서 나온 것은... 아직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 노트북 한 대였다....한편, 1층 방에서는 정은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반년에 한 번씩 제출하는 문서, 마감일은 바로 내일이었다.입에서 하품이 나오더니, 곧 두 눈에 습기가 가득 차올랐다.책임자라는 자리는 분명 편리했다.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할 힘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끝도 없는 보고서, 요약, 신청서를 써내야 했다.정은은 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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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8화

지하실은 따로 인테리어가 된 것도 아니었고, 막힌 공간도 않았다. 곧장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한 번은 올리버가 정은에게 묻기도 했다.“영화 찍으실 건가요? 위기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꼭 이런 통로로 탈출하잖아요. 정말 어메이징하네요!”정은은 짧게 대꾸했다.“예술은 삶에서 나오는 거니까요.”‘언젠가 진짜로 목숨을 구할지 누가 알아.’...정은은 이조화의 위치를 확인한 뒤, 그녀가 접촉하려는 상대까지 역추적을 걸었다.10분이 흘렀다.30분이 흘렀다....윗층, 이조화의 방.“받아... 제발 받아!”이조화는 이를 악물었다.과도한 긴장 탓인지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떨려왔다.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혹시... 내가 버려진 건가? 버림받은 건가?’그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왜? 왜 안 받는 거야?”절망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즈음, 화면 속에 마침내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얼굴이라고 해도 윤곽만 희미하게 보일 뿐, 눈코입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받았다! 드디어 받았다...”이조화는 안도감에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그림자는 곧장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마치 누군가 불러낸 듯.잠시 후, 들려온 건 낯선 목소리였다.거친 욕설과 함께였다.[멍청한 년! 너 지금 추적당하고 있어!]통화는 그 말과 동시에 끊겼다.이조화의 두 눈이 커다랗게 부릅떴다.몇 초가 지나자, 방금 들은 말이 이해되었다.‘추적...? 무슨 뜻이야? 누가 나를? 설마...’‘끝장이다!’뒤늦게 정신이 든 이조화는 황급히 위성 네트워크 연결을 종료하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방문이 바깥에서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정은은 마치 유령처럼 인기척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첫 동작은 곧장 이조화의 노트북을 빼앗는 것이었다.이조화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정은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몸을 피했다.허공을 움켜쥔 이조화의 얼굴에 일순 흉한 기색이 번졌다.“너... 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분명 문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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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9화

정은은 곧장 이조화의 노트북을 탐색했다.이조화가 접촉한 ‘윗사람’은 교활했다. 추적이 시작된 순간, 바로 통신을 끊어 버렸다.하지만 배가 지나가면 물결이 남고, 기러기도 지나면 소리가 남는 법.정은은 결국 몇 가지 쓸 만한 흔적을 찾아냈다.이를테면, 이조화가 개인 노트북으로 데이터베이스의 샘플 데이터를 꾸준히 복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자료 갱신 주기는 거의 하루 단위였다.하루 전에 새로 추가된 데이터가, 당일 밤이나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그녀의 노트북에 옮겨져 있었다.또 다른 단서는 위성 신호였다.최종 좌표가 가리킨 것은, 이조화가 연락하려 했던 ‘윗사람’ 역시 섬 안에 있다는 것.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방향만큼은 분명 서쪽이었다.‘또 서쪽... 단순한 우연일까? 이건... 너무 딱 맞아떨어지잖아.’...다시 아침이 밝았다.붉은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올라, 주황빛 광채가 바다 위로 흩어졌다.바닷바람은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며, 잔물결마다 은빛이 일렁거렸다.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이 떠올라 있었다.연구원들은 언제나처럼 기상하고, 세면을 마친 뒤 1층 식당으로 모였다.보통이라면 이미 당번이 음식을 내왔을 시각, 테이블 위에는 뜨끈한 밥과 국이 김을 올리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식사 대신, 모두에게 임시 회의 소집 통보가 내려왔다.발신자는... 정은이었다.계단을 내려오던 주광빈 교수가 전해산 교수에게 슬쩍 귀띔했다.“무슨 일이죠?”전해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잘 모르겠네요. 다만... 작은 일은 아닌 것 같네요.”정은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사소한 일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을 떨 리 없었다.두 교수의 가슴속에는, ‘큰일이 터졌다’는 불길한 예감이 차올랐다.“전 교수, 혹시 짐작 가는 거 없어요?”전해산은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모르겠네요.”그때 만춘미 교수가 우아하게 하품했다. 계단을 지나가던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를 흘낏 들은 듯, 몇 초간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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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0화

정은은 한 번에 이야기를 쏟아냈다.결과적으로는 폭탄이 연이어 터지는 모양새였다.먼저, 이조화 교수가 정체 불명의 외부 세력과 접촉했다는 사실.다음으로, 연구 데이터를 몰래 빼돌려 개인 노트북에 저장했다는 정황.그리고 끝내 정은에게 덜미를 잡힌 뒤, 대사관까지 개입하는 사태로 번졌다는 결론.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벌어졌다.“어쩌다 이런 일이! 이조화 교수도 한때 우리 연구팀 책임자였는데, 어떻게 연구 데이터를 빼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연구팀 모두의 피땀 어린 노력이 담긴 결과 아닌가!”“책임자였으니 더 수월했겠지.”“만약... 정말로 외부 세력과 손잡고 기밀을 넘겼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네.”“...”스파이 혐의는 무겁게 적용되면 무기징역까지도 갈 수 있는 범죄였다.“혹시 오해일 수도 있지 않나? 이조화 교수가... 에, 능력이 평범하긴 해도 매국노까지 될 리야...”“빌어먹을! 할 짓이 없어도 그렇지, 왜 하필 스파이냐고!”“...”누군가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고, 누군가는 의심을 드러냈으며, 또 누군가는 분노를 터뜨렸다.이에 대해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모든 것은 조사 결과에 따르겠습니다.”임시 회의는 고작 10분 남짓. 그러나 내용은 충분히 파괴력이 있었고, 모두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그 여파는 오전 내내 이어졌다.식당과 연구실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정은은 개의치 않았다.‘이분들은 세월이 쌓인 분들이야.’‘시간을 조금 드리면, 분명 다시 제자리를 찾을 거니까.’예상대로였다.오후가 되자 공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교수들은 각자 맡은 연구에 몰두했고,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저녁 무렵,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보냈다.누군가는 산책을 나가고, 누군가는 바둑판을 펼쳤다.또 어떤 이는 뉴스를, 어떤 이는 드라마를 틀어놓았다.그때, 정은이 지나가다가 만춘미 교수를 불렀다.“시간 괜찮으세요, 만 교수님?”“응?”만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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