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1531 - 챕터 1540

1725 챕터

제1531화

약품이 충분히 공급되자, 팀원들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해 갔다.그럴수록 정은은 점점 더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정은은 올리버가 그려 준 손 그림지도를 꺼내 보였다.“이 지도에 표시된 구역 중, 제가 지난 기간에 3분의 2는 직접 다녀왔습니다. 표기된 지점들도 확인했고, 차이가 있는 곳은 이미 수정해 두었으니 안심하고 쓰셔도 됩니다.”“남은 3분의 1은 열대림 구역인데, 거리는 멀고 난도가 높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니, 이후에는 다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좋다.” 전해산이 힘 있게 말했다.“원래 어려운 일은 팀이 함께하는 거죠.”주광빈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감탄했다.“이건 우리가 가진 지도보다 훨씬 세밀하네. 정은아, 고맙다.”정은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전 교수님 말씀대로 우리는 팀이잖아요. 고맙다는 말은 너무 서운합니다.”“하하, 알았다. 그럼 ‘고맙다’라는 말 대신에... 앞으로도 힘내자!”“네, 힘내겠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나눴다.한쪽 구석에 서 있던 하여순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분위기가 밝아지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그는 무심코 이조화의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역시 이 교수님은 또 빠져 있네.’투표로 임시 책임교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조화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늘 같았다.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아직 병상에서 요양이 필요하다는 것.만춘미가 덧붙였다.“이조화 교수님 이번엔 워낙 크게 앓으셔서... 신체적인 것도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충격이 크셨을 겁니다. 그래서 회복이 더딘 것 같아요.”의사가 그렇게 말하니, 더 할 말은 없었다.결국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다들 기운을 차린 만큼...” 전해산이 말을 이었다,“그동안 미뤄 뒀던 일을 다시 이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아이고, 이제 좀 더 쉬나 했더니 또 일거리네.”주광빈이 농담 섞인 투정으로 분위기를 풀었다.이윽고 팀은 다시 당번제로 돌아갔다.밖으로 나가 시료를 채취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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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2화

“사실... 한 명이 떠오르긴 합니다.”주광빈이 입술을 굼뜨게 굴리며 말을 이었다.“다만 제안이라기보단... 조금 과감한 쪽에 가깝죠. 다른 분들이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전 교수님은요? 혹시 마음에 둔 후보 있으십니까?”전해산은 혀를 차듯 소리를 내고는 대답했다.“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흠, 제 쪽도 만만치 않게 대담합니다.”잠시 눈빛이 마주쳤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지목하는 이름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주광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냥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늘 똑같은 일상만으론 지루하잖아요. 가끔은 파격도 필요한 법입니다.”전해산이 씩 웃음을 흘렸다.“좋습니다. 해 보죠.”...다음 날 아침, 팀원들이 야외 작업을 준비하던 참에 전해산이 모두를 거실로 불러 모았다.“전 교수님, 무슨 일입니까?”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전해산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학교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새 책임교수 선출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주광빈은 준비해 온 핸드폰을 꺼내 받은 메일의 첨부파일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공유했다.직접 눈으로 내용을 확인하라는 듯이.“이게 무슨 뜻입니까? 말은 번지르르한데, 정작 이해하기가 어렵네요.”“전 교수님, 그냥 요점만 말씀해 주시죠. 어떻게 정하라는 겁니까?”전해산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메일 내용을 종합하면, 후보를 먼저 추천하고 나서, 전원이 투표로 최종 결정을 내리라는 겁니다. 마침 오늘 다 모였으니, 출발 전에 이 문제부터 정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책임교수 자리를 당번처럼 돌려 맡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그 말이 맞습니다! 새 책임교수는 서둘러 뽑아야지요.”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들이 끄덕여졌다.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그러지 않고서야, 이조화 교수님이 괜한 권위를 내세우다가 늪지 사건 같은 걸 만들었겠습니까.”분위기가 무르익자, 주광빈이 앞으로 나섰다.“좋습니다. 이쯤 됐으니 제가 먼저 제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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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3화

곧바로 투표가 시작됐다.그때, 하여순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조화 교수님께도 참여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전해산이 잠시 멈추더니,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아이고, 제 기억력이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깜빡했네요. 하 교수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연구팀 투표는 누구든 기권할 수 있고, 무효표도 가능했다.하지만 ‘모든 구성원에게 투표용지를 전달해야 한다’라는 절차는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그래야만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전해산이 깜빡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최근 들어 이조화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식사시간에나 겨우 모습을 드러낼 뿐, 대부분은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야외 조사에도 함께하지 않았다.하여순이 표를 들고 방으로 향했다.거실에 남은 사람들은 예정대로 투표를 이어갔다.예상과 달리, 하여순은 금세 돌아왔다.전해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문제 있습니까?”“아닙니다.”하여순이 고개를 저었다.“이조화 교수님 표입니다. 이미 작성하셨습니다.”전해산은 잠깐 놀란 눈빛을 보였다. 속으로는 무효표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수월할 줄은 몰랐다.“그럼 직접 투표함에 넣으시죠.”그는 표를 건네받지 않고, 하여순이 곧장 넣도록 했다.잠시 후, 모든 투표가 마무리되었다.개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만춘미 교수 3표.정은 10표.그리고 1표 기권.순간, 거실 안은 조용했다.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은 듯 보였지만, 정은과 만춘미의 표 차이가 생각보다 큰 데에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묻는 듯했다.‘교수님도 정은한테 넣은 거예요?’‘나만 대담하게 찍은 줄 알았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했구나...’‘...’“흠!”전해산이 헛기침을 했다.“지금부터 정은 씨가 우리 팀의 책임자가 되겠습니다. 혹시 이 결과에 대해 이의 있으십니까?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시죠. 재검표든 뭐든, 지금 하는 게 가장 확실합니다.”그는 잠시 기다렸다.하지만 30초 남짓, 누구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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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4화

그리고 곧 교수들이 놀라며 웅성거렸다.“오늘... 우리 초과 달성했네요?!”“에이, 설마요. 전 오히려 오늘 되게 편하던데요? 점심에 한 시간이나 쉬었잖아요. 그래서 목표량을 못 채울 줄 알았는데...”“혹시 잘못 센 거 아니에요? 다시 세 보자고.”한 교수가 시료 채취 통을 하나씩 다시 세어 나갔다. 곧 손가락을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틀림없어요. 초과 달성이에요. 믿기 힘들면 다른 사람이 직접 세 보든가요.”“허억...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진짜 신기하네요!”“...”전해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무언가 깨달은 듯 눈빛이 달라졌다.그 기색을 놓치지 않은 누군가가 다급히 물었다.“전 교수님, 뭐 떠오르신 겁니까? 무슨 얘기라도?”전해산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힌트를 던졌다.“오늘 우리가 걸은 동선을 잘 떠올려 보세요.”“동선이라면... 오늘은 걷는 구간이 짧았죠. 대부분 시간은 시료 채집만 했고...”“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정은이가 최단 동선을 짰던 겁니다. 동쪽 늪지를 피해 서쪽 샛길로 가기 위해 바로 숲 안쪽을 파고들었죠. 그래서 시간이 절약된 겁니다.”“맞습니다! 갈 때 어쩐지 금방 도착했다 싶었어요. 평소보다 훨씬 빠르더라니까.”주광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정은이가 섬에 들어온 지 고작 한 달 남짓 지났는데, 우리처럼 1년 넘게 있었던 사람보다 지형을 더 잘 파악하다니... 부끄럽네요.”마침 그때, 손을 씻고 들어온 정은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왜요? 오늘 분량 채웠나요?”“채운 정도가 아니라 초과했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그럼 다행이네요.”놀라는 기색 하나 없는 담담한 반응.순간, 교수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봐라, 이거 다 정은이 계산 속이었네.’‘그러니 점심에 당당히 한 시간을 쉬라고 했지.’‘...’정은은 단지 손을 씻으러 나간 사이, 책임자로서의 입지는 더 단단해졌다.효율적인 동선, 효과적인 체력 안배,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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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5화

“윽, 제대로 맞으니까 아프네.”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정은의 눈이 커졌다.“변 선생님?”변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놀랐어요? 정은 씨가 주소를 알려 줬잖아요. 내가 찾아온 게 이상할 건 없죠.”정은은 입술을 굳게 다물다가, 곧 비꼬듯 말했다.“찾아온 건 괜찮은데, 이렇게 구석에 숨어 있는 건 영 아닌 것 같네요.”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다물었다.정은은 시계를 흘끗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벌써 2분이 넘게 지났다.“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먼저 씻고 와야 해서요.”“네?”“지금은 설명할 시간 없어요! 잠깐만요.”말을 마치자마자 정은은 번개처럼 발걸음을 떼어 풀로 엮은 샤워 칸막이 쪽으로 뛰어갔다.리아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에 물방울이 그대로 맺힌 정은이 잠옷 차림으로 달려 나왔다.“됐습니다. 이제 제 방으로 가시죠.”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벌써요? 이게 다예요?”정은은 태연히 대답했다.“그럼요.”멀리 풀로 엮은 조잡한 샤워 공간을 힐끔 보고, 다시 물기를 다 닦지 못한 정은의 이마를 보는 리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여긴 정말 열악하네요.”정은은 웃으며 앞서 걸었다.“그러게요,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근데 왜 저 표정은 마치 즐기는 사람 같지?’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뒤를 따랐다.방에 도착한 정은은 물통을 내려놓고, 컵을 씻은 뒤 뜨거운 물을 따라 내밀었다.“지금은 이것뿐이에요. 불편하시더라도 드세요.”“고맙습니다.”리아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쥔 채 방 안을 둘러봤다.단출하고, 거칠고, 소박했다.“계속 여기서 지내고 있는 거예요?”“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변 선생님은 어디에 묵고 계세요? 제가 올라오고 나서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바람 섬 쪽에 작은 민박집이 있어요. 원래 바다 낚시꾼들이 자주 묵는 곳인데, 환경이 그나마 괜찮더군요.”정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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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6화

리아가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세상에 이렇게 똑똑한 호구가 어딨어요?”“이건 파편이 스친 상처네요.”정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변 선생님, 총기랑 얽히신 겁니까?”리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은의 눈썰미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국내에서 총상을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는데, 정은은 곧장 파편 상처라고 단정 지었으니 말이다.정은은 덤덤하게 말했다.“그렇게 보지 마세요.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서 그래요. 덕분에 알아봤을 뿐입니다.”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에 배에서 날 붙잡고 왜 섬에 들어오냐고 물으셨죠. 그땐 말을 아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네요.”정은의 눈빛이 번뜩였다.“말씀하기 싫으시면, 억지로 안 하셔도 됩니다.”“그럼 바로 절 내쫓으실 건가요?”“네.”“진짜로 쫓아내요?!”리아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은의 착각인지, 괜히 볼을 부풀린 것처럼 억울해하는 기색이 비쳤다.정은은 차분히 대꾸했다.“변 선생님 상처가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잖아요. 연구센터 내 다른 분들의 안전도 다 제 책임입니다.”리아는 정은을 흘깃 보고는 낮게 중얼거렸다.“부부가 어쩜 이렇게 똑같대?”“뭐라고 하셨습니까?”“크흠! 아무것도... 사실 정은 씨한테 말해도 상관없어요. 괜히 말하려면 시작부터 다 꺼내야 해서 귀찮았을 뿐이죠.”“물이라도 다시 떠드릴까요? 목이라도 축이시게.”“그럴 필요 없어요. 이 컵에도 아직 남아있으니까... 유하린 기억하시죠? 정은 씨한테 일부러 접근해서, 위험에 빠뜨릴 뻔했던 H국 교환학생.”정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기억합니다. 그쪽과 무슨 관계입니까?”“그 가짜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하지만 진짜 유하린과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동복자매죠.”정은은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변 선생님이 갑자기 귀국해서 조재석 교수님 연구실까지 들어간 게, 유하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까?”“그렇게 봐도 무방하고, 혹은... 정은 씨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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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7화

정은은 리아의 상처를 단단히 감싼 뒤, 곧장 소염제를 챙겨 건넸다.“파편은 깨끗하지 않아서요. 상처가 조밀한 상태라 감염이 쉽게 생깁니다.”“제 체력이 좀 되거든요. 설마 그렇게 운 없게 감염되겠어요?”리아가 웃어넘겼지만, 역시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날 밤, 리아는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이 정은은 만춘미 교수를 불러들였다.“친구야?”만춘미가 무심히 물었다.고개를 끄덕이려던 정은은 잠시 머뭇거렸다.“네, 동료이기도 합니다.”“동료?”만춘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이 친구도 서비대 사람이야?”정은은 단정적으로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변 선생님은 조재석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하고 계십니다.”만춘미는 더욱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물리 쪽이야?”“네.”“정은이 인맥 참 넓구나. 웬만한 분야에 다 아는 사람이 있네.”정은은 미소만 짓고는, 만춘미가 진찰을 마치자 다급히 물었다.“교수님, 어떻습니까? 상태가 많이 심한 건가요? 방금 체온이 39도까지 올랐습니다.”“이 친구 손 상처, 네가 처리한 거 맞지?”“네.”“이 거즈... 풀어볼 수 있나? 상처 상태를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정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제가 직접 소독하고 감은 겁니다. 문제가 있으면 말씀 주시면 되고요. 이미 봉합된 걸 다시 풀면 2차 감염이 생길까 걱정돼서요.”만춘미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 사실 굳이 보지 않아도 상처 감염으로 인한 발열이라는 건 짐작돼.”“그래도 의사라는 게 습관적으로 확인하려 하는 거라. 다행히 크게 문제는 없어. 수액이랑 해열제 맞히면 된다. 다만...”만춘미의 표정이 난처하게 굳었다.정은이 곧장 물었다.“교수님,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의약품은 연구팀 물자라서, 출입 기록이 다 남아. 이걸 어떻게 할지...”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필요한 약품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만춘미가 약 이름을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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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8화

리아는 순순히 약을 삼킨 뒤, 조심스레 팔을 움직여봤다.“쓰읍! 조금 아프네요.”“제가 다시 약 갈아드리겠습니다.”정은은 오늘은 바깥에 나가지 않고, 연구센터에 남아 교수 두 명과 교대로 내근을 맡았다. 덕분에 식사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리아도 돌볼 수 있었다.곧 정오가 가까워졌다.상처를 정리한 뒤, 정은은 리아를 거실로 데려갔다. 밥상 위에는 이미 점심이 차려져 있었다. 리아의 몸 상태를 생각해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은 피했다. 대신 부드러운 채소죽 한 솥과 입맛 돋우는 반찬 두어 가지. 간단하면서도 정갈했다.리아의 눈이 반짝였다.“정은 씨, 제가 밥을 언제 이렇게 먹어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바람 섬에서는 고기만 죽어라 먹였거든요. 채소라고는 코빼기도 없고, 먹다 보니 이제는 고기 보기만 해도 토할 지경이었어요...”말하면서 그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밥을 입에 퍼넣기 시작했다.처음에 리아는 말없이 밥만 삼켰다. 그러다 속이 조금 가라앉자, 젓가락질이 느려지며 입이 풀렸다.“정은 씨랑 조 교수 헤어진 일, 연구실 사람들이 다 속상해했잖아요.”정은은 눈을 크게 떴다.“왜요?”“밥 해줄 사람이 사라졌으니까.”“어휴, 다 조 교수가 못난 탓이죠.”정은이 말문이 막혔다.‘아, 이건 또 뭐지?’“혹시 다시 잘될 가능성은 있어요? 다들 정은 씨 밥 그리워해요. 제가 전 교수랑 다른 분들 대신 물어보는 거예요.”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리아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침묵은 긍정이죠. 결국은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단 뜻이군요. 시간이 해결할 문제인 것 같네요.”“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쉬! 말하지 말고 밥이나 드세요.”‘변 선생님... 생각보다 은근히 남의 일이 관심이 많네.’정은이 속으로 좀 어이가 없었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그리고 변 선생님,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리아는 한숨 돌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정은 씨... 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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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9화

정은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그동안 지켜본 결과, 우리 연구팀은 채집을 전적으로 직접 현장에 나가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효율도 떨어지고, 지난번 늪지대에서처럼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게다가 저희가 다루는 건 바이러스 시료입니다. 보호 장비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감염될 가능성이 큽니다.”“PO-X 바이러스가 지금은 치사율이 낮다고 하지만, 감염된 개인에게는 백 퍼센트 위험입니다. 그 확률을 전적으로 운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그래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건 비접촉식 채집 방식입니다.”“허...”길게 뱉는 비웃음이 들려왔다. 한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던 이조화였다.“네가 말한 거, 우리가 모르는 줄 아나? 비접촉식 채집? 흥! 말은 쉽지. 그게 가능하기나 하다고 생각해?”모두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답이 없으니 해결하지 못했을 뿐.‘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벌써 누군가 나섰겠지. 그게 아니라서 우리가 지금 이러는 거다.’이조화의 눈에는 조롱이 어렸다.정은은 젊고, 욕심이 앞선다. 연구팀 책임자 자리를 지키려다 성급하게 허황된 청사진을 내놓은 꼴.이조화는 속으로 비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왜 불가능합니까?”정은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지금은 드론도, AI 로봇도, 로봇 개도 다 상용화돼 있습니다. 충분히 채집 업무에 응용할 수 있죠.”“드론? 로봇?”이조화는 점점 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그런 게 원한다고 바로 손에 들어와? 제일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네가 쓰고 싶다는 AI 로봇, 지금 시장에서 쓸 만한 수준의 회사는 세 군데뿐이야.”“두 곳은 미국, 한 곳은 국내. 어디에 연락할 건데? 또, 그런 대기업을 움직이려면 돈은 얼마나 들겠어? 네가 뭔데?”정은은 흔들림 없이 받아쳤다.“첫째, 채집용 로봇을 새로 개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있는 로봇에 채집 과정을 학습시켜서, 관련 파라미터를 조정하면 충분히 가능하죠.”“둘째, 예산 이야기 잘 꺼내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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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0화

방으로 돌아와서 리아가 툭 내뱉듯 말했다.“그러니까, 제가 연구팀 채집 로봇 문제까지 떠안게 됐다는 거네요?”정은은 힐끔 쳐다보더니 장난스럽게 대꾸했다.“걱정 마세요. 공짜는 아닙니다. 저희가 돈 드릴 겁니다.”“그럼 반대로 제가 이득인데요? 여기서 상처 치료하면서 요양까지 하고, 큰 계약도 따내고?”정은은 표정을 고쳐 잡았다.“진지하게 묻겠습니다. 제가 구상한 기능, 변 선생님 보시기에 실현 가능합니까?”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단호히 답했다.“어렵지 않아요.”정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변 선생님, 역시 믿음직합니다.”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계속 제가 빚만 지면 불공평하잖아요. 정은 씨도 한 번쯤은 나한테 빚을 져야 공평하죠.”...같은 시각, 서비대 총장실.송영한은 노트북 화면을 돌려 한중기 앞에 내밀었다.“봐, 좀 봐! 연구팀 책임자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돈 달라고 징징대는지! 이 소정은이라는 친구 말이야, 정말... 대단해!”뒤로 갈수록 목소리에는 분노와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한중기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화면을 들여다봤다.“아니, 근데 총장님. 이미 승인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나도 참... 답답해서 그래! 메일 끝부분 좀 보라고. 뭐라고 썼는지 알아?”“‘학교 측에서 연구팀의 고충을 헤아려 주시고, 연구원들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열악한 환경을 고려해, 인도적 차원에서 빠른 지원 부탁드립니다.’ 이랬어!”“빠른 지원! 그냥 지원도 아니고!”송영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이를 갈았다.“내가 조금만 늦게 돈 내려주면 인도적 배려도 없는 사람 되는 거냐?”한중기가 툭 웃음을 터뜨렸다.“어떤 포인트가 웃기다는 겁니까?” 송영한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그냥, 총장님은 늘 근엄하고 점잖은데 정은이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발끈하시니까요. 딱 천적 같아서요.”“그 말,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한중기가 웃음을 거두고 곧장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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