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701 - Chapter 1710

1723 Chapters

제1701화

“선배, 진정해. 그렇게 말하면 선배가 다음 순간 칼 들고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아.”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내가 지금 어떤데? 진정하라니, 무슨 말이야?]슬아는 입꼬리를 씰룩였다.‘냉정 개그, 고마워요 선배.’[누군데?]선배의 목소리가 다시 단단해졌다.[어떤 사주야? 천을 귀인? 문창 귀인? 아니면 녹존? 천마?]“그런 건 아닌 것 같아.”‘그럼 대체 왜 말한 거야, 나도 모르겠다.’“선배, 내 말 좀 들어봐. 그 사람 자체는 평범한데, 가족들이 하나같이 특이해. 칠살 기운 있는 사람 하나, 문곡 기운 둘, 그리고 군신경회격이 하나 있더라.”군신경회격은 자미성을 중심으로 한 격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윗자리에 오르거나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사주였고, 조지언이 딱 그랬다.[근데 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 집안 사람 중에 아무나 잡아도 되잖아.]그 말에 슬아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슬아는 태어날 때부터 사화살이 강한 팔자였다.할머니가 점을 봐줬을 때 ‘스물다섯은 못 넘긴다’는 말을 들었다.살아남으려면 스물다섯 전에 운이 강한 사람과 인연을 맺어야 했다.그게 결혼이든, 다른 형태든.그 ‘운이 강한 사람’은 단순히 좋은 사주가 아니라, 압도적인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선배, 나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동안 좋은 사주 가진 사람은 많았지만, 그건 다 부드럽고 순한 쪽이었어.”“혹시 진짜 강한 운은, 본인보다도 주변이 다 좋은 운으로 둘러싸인 형태 아닐까?”잠시 전화기 너머에서 생각에 잠긴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네 말, 흥미롭다. 일단 해봐. 아니다 싶으면 바로 빠져나오고.]“알았어. 잘 자! 돈만 벌지 말고 인생도 좀 즐겨. 근데 들었어? 그 이씨 집안 아들, 존잘에 스타일도 좋대. 한 번 썸이라도 타보는 거 어때?”[하, 남자는 내 돈 버는 속도만 늦추는 존재야.]“너무 그러지 마. 나 요즘 돈 많아. 내가 선배 먹여 살릴게.”[그래? 그럼 5백억만 먼저 보내봐.]...아침 햇살이 리조트 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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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2화

‘만약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하늘이 벼락을 내리는 건 이해하지만,’‘왜 이런 윙윙거리는 벌레 떼로 겁을 주는 건데!’지훈이 벌레들의 습격에 멘붕이 온 반면, 슬아는 익숙하다는 듯 태연했다.“나방은 종류별로 스무 마리씩, 딱정벌레는 마흔 마리. 나머진 적당히 섞어서 백 마리 채워 주세요.”슬아가 계산을 마치자 사장은 기분 좋게 포장을 마친 케이스를 내밀었다.슬아는 받지 않고 턱으로 지훈을 가리켰다.지훈이 멍하니 물었다.“뭐?”“조 변, 수고 좀 해. 이것 좀 들어줘, 응? 고마워.”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그게 도와달란 거야?”“응. 간단하지? 내가 괜히 ‘쉬운 일’이라고 한 게 아니야.”지훈이 말문이 막혔다.“아니... 왜 직접 안 들어?”절망하면서도 지훈의 판단력은 아직 남아 있었다. 즉시 반박했다.슬아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은리’랑 ‘화리’ 알지? 이 둘은 서로의 냄새를 싫어해. 그래서 먹이는 꼭 분리해서 옮겨야 해. 지금 네가 드는 건 ‘화리’ 거고, 난 이따가 ‘은리’ 거 사서 들면 돼. 이렇게 하면 딱 맞잖아?”지훈은 여전히 찌푸린 눈썹을 펴지 못한 채 생각했다.‘듣고 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뭐지, 이 설득력은.’“‘은리’ 먹이는 뭐야?”“뱀 사료.”“좋아, 그럼 내가 ‘은리’ 거 들게. 넌 ‘화리’ 거 들어.”슬아가 말릴 틈도 없이 지훈이 단정 지었다.슬아가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봤다.“조 변... 진짜 그렇게 할 거야?”“당연하지. 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뱀 사료는 고양이 사료나 개 사료처럼 완제품 형태 맞지?”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좋아, 확실히 그걸로 할래.”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무 말 없이 포장된 곤충 백 마리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그리하여 둘은 함께 뱀 사료를 사러 갔다.역시 지훈의 예상대로, 사료는 밀봉된 완제품이었다.그는 안도하며 속으로 외쳤다.‘휴, 다행이다. 살아 있는 건 아니네.’사장이 말했다.“이게 제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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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3화

지훈이 리조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손에 든 봉투를 던지듯 내밀었다.“가져가, 얼른 가져가!”슬아가 순식간에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왜 그래? 배웅은 끝까지 해야지.”지훈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배웅은 무슨... 이 여자는 조금 나쁜 여자도 아니고 그냥 악마 그 자체야!’딩-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슬아가 먼저 나섰다.“가자.”지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리조트에 로열 스위트룸도 있었어? 직원은 그런 거 없다고 하던데?”슬아가 말하려는 순간, 지훈이 혼자 중얼거렸다.“아, 알겠다. 희귀동물 키우니까 리조트가 겁먹은 손님들 피하려고 아예 한 층을 통째로 주는 거네.”‘음... 뭐, 그렇게 생각해도 틀린 건 아니지.’슬아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지훈은 들고 있던 봉투를 거의 던지다시피 하고 몸을 홱 돌렸다.“나 간다! 바이!”“잠깐만...”“괜찮아, 물 한 모금도 사양할게! 고맙다는 말은 됐고, 진짜 푹 쉬어!”지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기에 바빴다.지금 이 순간,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아무도... 뱀 빼고.스슥- 스슥-문 손잡이에 손이 닿으려는 찰나, ‘은리’가 카펫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와 지훈 발치에 나타났다.“으악... 씨, 뭐야! 살려줘!!”지훈은 크게 한 번에 뛰어 물러섰다.하지만 ‘은리’는 포기하지 않고 바로 지훈의 뒤를 좇았다.지훈은 허둥지둥 도망치며, 슬아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고 소리쳤다.“너, 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내가 도와줬더니 나한테 뱀을 풀어?! 다음에 또 도와주면 내가 진짜 네 아들이다!”슬아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내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안 들은 건 본인이면서 누굴 탓해?”“기다리면 뭐 해! 조금만 늦었어도 네 뱀한테 잡아먹혔을 텐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은 이미 방 안을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다행히 방이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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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4화

“슬아야, 나중에 결혼할 땐 꼭 엉덩이에 탄력 있는 남자 만나. 그럼 평생 밤마다 행복할 거야.”할머니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그래, 내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었어!’지훈은 마치 뜨거운 것이라도 만진 듯 깜짝 놀라 슬아에게서 떨어졌다.“방금... 뭐 한 거야?!”슬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조 변 한대 때렸지.”‘그게 문제냐고! 어디를 때렸냐가 문제지!’지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가까지 촉촉해져, 꼭 동네 불량배한테 괴롭힘당한 학생처럼 보였다.그 표정에 슬아는 괜히 양심에 찔렸다.‘아... 약한 남자 울리는 건 또 못 참겠단 말이지.’결국 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 미안...”그러다 무언가 번뜩였는지, 슬아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조 변, 걱정 마. 내가 책임질게.”“아까 조 변이 내 조건 하나 들어준다고 했잖아.”“그래서?”“그 조건이... 나랑 결혼하는 거야. 우리, 그냥 같이 살자.”‘헐? 이 여자 진짜 제정신인가?’...잠시 후, 방을 나서는 지훈의 발걸음은 휘청거렸다.‘잠깐, 내가 뭘 잘못한 거지?’‘그냥 도와줬을 뿐인데... 갑자기... 강제로 결혼 당하게 생겼네...’그때 슬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왜? 약속 어길 거야? ‘은리’...”지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저었다.“지훈아? 조지훈?!”지언이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지훈은 꿈쩍도 안 했다.“야, 뭐하냐? 엘리베이터 타고 명상 중이야?”언제부터였는지, 엘리베이터는 이미 리조트 1층 로비에 도착해 있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지언의 가족 네 명과 딱 마주쳤다.현우가 먼저 고개를 갸웃했다.“삼촌, 저보다 더 유치한 거 아니에요? 저도 이제 엘리베이터 놀이 안 해요.”그제야 지훈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현민이 슬쩍 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엄마, 삼촌 저런 거... 요정한테 홀린 사람 같지 않아요?”리아는 지훈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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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5화

“안 받아요.”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흥, 민슬아 뜻대로는 안 돼. 절대.’직원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민슬아 씨가 그럴 줄 알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안 볼 거 알아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썼어요, 히히.’”지훈은 반사적으로 종이를 낚아채 펼쳤는데, 정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직원이 덧붙였다.“그리고... 민슬아 씨가 약속 잊지 말라고도 하셨어요.”지훈은 직원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약속...? 또 무슨 약속이야, 대체.’그때 마침 재석과 정은이 프런트로 걸어왔다.둘은 무심코 들리는 대화를 엿들었다.지훈은 눈빛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그 약속이요... 공항까지 차 보내주신다고 하셨거든요.”정은이 고개를 갸웃했다.“우리 이렇게 많은데 차 한 대로 되겠어?”“그럼 몇 대 더 부탁드리면 되죠.”직원은 여전히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네,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비행기는 예정대로 시간에 맞춰 J시 공항에 착륙했다.이미숙, 소진헌, 이춘재, 봉수진은 L시 직항이라 벌써 도착했을 터였다.정은이 도착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이미숙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이미숙 일행은 이미 집에 도착해 짐 정리하고 샤워까지 마친 뒤, 저녁 먹으러 나갈 준비 중이었다.한편, 정은과 재석이 아파트에 도착했을 땐, 창밖에는 이미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긴 이동에 지친 두 사람은 더 움직일 힘이 없었다.결국 배달 음식을 시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식사를 마친 뒤 각자 노트북을 켜고 잠깐 일하다가, 조용히 불을 끄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반쯤 산허리에 자리 잡은 조씨 가문의 본가는 짙은 밤빛 속에 잠겨 있었다.서늘한 밤공기에는 엷은 안개가 섞여, 고요한 집 안에 쓸쓸한 기운을 덧칠했다.조기봉은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았고, 이틀 먼저 일정을 마치고 J시로 일찍 돌아왔다.이유는 간단했다. 며칠 동안 낚시를 못 해서 손이 근질거린다고 했다.지언이 말했다.“바다낚시 나가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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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6화

“안 믿어.”조기봉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절망이 묻어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 강서원은 더 이상 남편에게 어떤 신뢰도, 그럴듯한 믿음도 주지 못했다.사랑하던 부부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시작이었다.그 첫 시도가 모든 걸 틀어버렸다.돌이킬 수도, 다시 쌓을 수도 없었다.‘때린 사람은 잊지만, 맞은 사람은 평생 못 잊지.’강서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조기봉은 고개를 돌렸고, 아내를 외면했다.“난 이만 쉴게.”“그래...”문이 조용히 닫혔다. 짧은 마찰음이 잔잔한 방 안을 가르고 사라졌다.복도엔 불이 꺼져 있었다.창문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희미하게 흘러,그 빛이 강서원의 어깨를 감쌌다.하얗고, 차갑고, 외로웠다.강서원의 그림자는 마치 종잇장처럼 얇디얇았다.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훅 찢어질 것 같았다.그제야 강서원은 후회했다.재석과의 대립, 남편과의 싸움.그 모든 걸 다 자신이 이길 거라고 믿었던 오만이었다.‘나는 늘 당연했지.’‘아들은 나를 이해해야 하고, 남편은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하지만 세상엔 ‘당연한 사랑’ 같은 건 없었다.오미선의 죽음은 모든 균형을 무너뜨린 폭탄이었다.그날 이후, 조기봉은 사람이 달라졌다.정은은 호주로 떠났고, 재석은 사랑을 잃은 채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다.‘오미선... 왜 죽은 거야?’강서원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오미선이 밉고, 두렵긴 했어도... 죽길 바란 적은 없었어...’하지만 오미선은 죽었다.너무 갑작스럽게, 너무 수상하게.그 순간부터 모든 게 어그러졌다.마치 자신을 덮치기 위해 미리 쳐둔 그물처럼, 오미선의 죽음은 강서원의 삶을 위에서 그대로 덮쳤다.그리고 모든 것이 뒤틀렸다.강서원은 피식 웃었다.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누가 사람 하나 죽여가며 나한테 함정을 팠겠어.’결국 오미선의 죽음은, 운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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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7화

“사실은...”시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명문가 사모님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강서원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소문이라니요?”“예.”“어디 한번 들어보죠.”강서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지만, 입 안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명문가 사모님들 사이에서는...” 시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사모님께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고, 세 아드님도 사모님을 오해하고 있다더군요.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며 사신다고.”“말도 안 돼요!”강서원이 단호히 외쳤다.“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남의 얘기를 들은 채로 판단하다니, 그 여자들이야말로 뭘 모르는 진짜 불행한 사람들이죠!”시호는 그런 강서원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연민이 섞인 눈빛을 드러냈다.그 시선이 오히려 강서원을 자극했다.“나를 왜 그렇게 봅니까? 설마... 그 사람들 말을 믿는 거예요?”“내가 얼마나 바보로 보이길래? 나한테 그런 동정 따윈 필요 없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런 걸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뿐이죠!”“사모님.”강서원이 분노를 쏟아내고 난 뒤, 한참이나 가쁜 숨을 고를 때 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인생은요, 마치 화려한 드레스 같아요. 겉으로는 반짝이지만, 그 속엔 벌레가 들끓죠.”“이건 제 말이 아니라, 단지 전해 들은 말일 뿐이에요.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모님을 믿고 싶어요. 하지만 다른 명문가의 사모님들은... 과연 믿을까요?”“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습니까? 소문엔 거짓이 섞여 있지만, 그 안엔 진실의 조각도 있죠. 사모님은 부정하실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그 진실의 조각만 믿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요.”시호의 말에 강서원의 팽팽히 버티던 등이 서서히 굽었다.마침내 강서원은 무너져 내렸다.그녀가 평생 지켜온 명예와 체면이, 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병을 앓은 이후로, 강서원은 사교 모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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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8화

저녁 무렵,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정은은 막 실험실에서 나오는 길에 두리에게서 전화받았다.[소정은 씨, 조사 결과 메일로 보냈어요.]정은의 눈이 반짝였다.계산해보니, 두리에게 조사를 의뢰한 지 꼭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수고 많으셨습니다. 대금은 열두 시간 안에 아버님 계좌로 입금될 거예요. 늘 말씀드리지만, 출처는 합법적이고 추적에도 문제없습니다.”[감사합니다. 전에 살았던 주택의 등기권리증은 오늘 택배로 보냈어요.]“확인하겠습니다.”역시 스마트한 사람과의 거래는 깔끔하고 편했다.정은은 곧장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그리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서재로 뛰어 들어가 컴퓨터 전원을 켰다.뒤이어 재석이 앞치마를 두른 채 들어왔다.“뭐야, 왜 이렇게 급해?”“임시호 조사 보고서예요. 재석 씨도 같이 봐요.”컴퓨터가 부팅되는 사이에도 정은의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그럼 난 불부터 끌게.”재석은 주방으로 돌아가 불 위의 냄비를 정리했다.잠시 후, 그는 손을 털며 다시 서재로 들어왔다.정은은 이미 메일을 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화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10분쯤 흘렀을 때...“역시나, 서연희 뒤에 있는 사람은 임시호였어요.”전에 계속 추적하던 리조트 투숙 명단의 ‘HO’는 임시호였고, 서연희를 H국으로 보내 성형을 시킨 사람도 임시호였다.그리고 교통사고를 조작해 서연희를 제거한 사람 역시 임시호였다.성형 후 서연희는 H국에서 유하린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이걸 보고도 유 씨 가문과 임시호 사이에 숨겨진 관계가 없다고 믿을 수 있을까?유씨 가문이 만든 맥스 군도의 ‘비밀 훈련소’와 ‘스파이 섬’.그 출입 기록에도 똑같이 ‘HO’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모든 흔적이, 하나같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임시호 바로 그가 ‘HO’, 모든 사건의 배후였다.“그렇다면... 오미선 교수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도 임시호였다는 거네요.”정은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고,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재석이 살짝 손을 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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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9화

“악몽 꿨지?”재석이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불빛이 번지자, 땀으로 젖은 정은의 얼굴이 보였다.“네.”정은은 짧게 대답했다.꿈속에 임시호가 나왔으니, 그게 악몽이 아니면 뭐겠는가...“왠지... 임시호가...”정은이 말을 멈췄다가, 낮게 이어갔다.“국내에 나타난 게 너무 이상해요.”“이상하다고?”“네.”정은은 이불을 꼭 쥔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서연희를 해외로 보내 성형까지 시키고, 그걸로 유하린의 이름을 쓰게 만든 사람이에요.”“그 정도로 치밀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면, 맥스 군도의 비밀 훈련소가 무너지고 우리가 그 흔적을 쫓는다는 걸 알면... 당연히 잠적했어야 해요.”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평범한 놈이라면 일단 숨어야지. 당분간은 절대 안 나타날 거고.”“그렇죠. 그런데 임시호는 정반대였어요.”정은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났다.“국내에 들어와서, 그것도 우리 앞에 버젓이 나타났어요. 마치 ‘나 여기 있다’라고 일부러 보여주듯이요.”“그럼...” 재석이 눈썹을 찌푸렸다.“헷갈리게 하려는 거 아니야? 일부러?”정은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그럴 수도 있지만... 전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봐요.”정은의 표정이 굳어졌다.“국내에서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해야만 해서 그 위험을 감수한 거예요.”‘궁지에 몰린 짐승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지... 지금이 딱 그때야.’정은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임시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에요.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나중엔 우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재석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내일 임시호에게 연락할 거예요. ‘구름’ 업그레이드 건 다시 이야기하자는 명목으로요. 그쪽에서 뭔가 노리고 있다면... 제가 먼저 그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방법이예요.”...다음 날, 시호는 정은에게서 전화받았다.“실험실에서 보자.”정은이 내뱉은 장소를 들은 순간, 시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실험실?]“그래. 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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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0화

정은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럼 더할 나위 없지.”‘늑대가 미끼 냄새를 맡았는데,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임시호의 잠깐의 침착함은 단지 관망일 뿐이었다.결국 그는 눈앞의 ‘먹이’ 앞에서 스스로 무너졌다.‘좋아...’정은은 속으로 시원했다. 시호를 배웅한 뒤, 정은은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다.“‘구름’, 응접실 들어가서 청소해. 구석구석 전부. 그리고 공기 청정제 꼭 뿌려.”임시호가 바로 그 ‘HO’라는 걸 생각하니, 정은이는 그가 머물렀던 공간, 심지어 그가 마셨던 공기까지도 역겨웠다.그때 실험 구역 안쪽에서 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언니, 손님 오셨어요?”민지는 배가 살짝 불러 있었다. 이제는 실험복 안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멀리서 보면 눈치채기 어렵지만, 가까이서 보면 민지의 몸에는 어딘가 부드럽고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응, 아까 갔어.”“누구세요?”“임시호.”민지의 눈이 동그래졌다.“그쪽 회사와는 거래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정은이 어깨를 으쓱했다.“생각 좀 해봤는데, 지금 ‘구름’ 업그레이드 맡길 만한 회사는 네오젠텍밖에 없어. 한번 해보자고. 임시호가 얼마나 진짜인지, 직접 봐야겠어.”“그렇군요.”정은이 화제를 바꿨다.“검진은 잘 받고 왔어?”민지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몸 전체가 따스한 빛으로 감싸인 듯했다.“네, 의사 선생님이 아주 좋다고 하셨어요. 아기도 건강하고요.”“12주 지나면 NT 검사해야 하고, 그다음엔 비침습 검사랑 4D 초음파도 있잖아. 그때는 자주 쉬어야 할 수도 있을 거야.”정은이 웃으며 말했다.“아기의 안전과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필요하면 언제든 쉬어. 건강하게 낳는 게 제일이야.”“네, 고맙습니다, 언니.”민지는 기분 좋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문득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그런데 언니, 언니랑 조 교수님은요? 언제 혼인신고 하시고, 결혼식 하세요?”정은의 손이 잠시 멈췄다.“그건...”‘결혼이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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