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691 - Chapter 1700

1723 Chapters

제1691화

“담배 한 개비만.”“어, 여기요.”도겸이 라이터를 켜며 선우 옆에 앉았다.“근데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아까부터 멍하니.”선우가 핸드폰을 얼른 내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도겸이 고개를 기울이며 선우의 화면을 같이 봤다.‘이건... 그냥 프로포즈 영상인데.’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을 그대로 두었다.‘그래, 어차피 형이 봐도 상관없겠지.’그 순간, 도겸의 표정이 굳었다. 웃음이 입가에서 천천히 사라졌다.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식어버린 듯했다.선우는 숨을 삼켰다.“형... 그... 그냥 동명이인일 수도 있잖아요. 정은 누나 아닐 수도 있고요.”도겸이 낮게 말했다.“IP 주소 좀 봐봐.”“아, 예.”선우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렀다. IP 위치가 뜨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보세요, C시예요. 여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닐 거예요, 형.”도겸이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정은이, 실험실 팀이랑 함께 C시에 포럼 갔어.”“아...”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도겸이 조용히 일어섰다. 의자를 밀고 문 쪽으로 걸었다.“먼저 간다.”문까지 가던 그의 발걸음이 잠시 비틀거렸다.술 한 잔도 안 마신 밤이었다.도겸은 문틀을 잡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이어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형! 잠깐만요, 같이 가요!”선우가 서둘러 따라나섰다.그는 내내 불안했다.‘제발... 제발 별일 없기를...’길가에 이르렀을 때, 도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선우야.”“네, 형.”가로등 불빛 아래, 도겸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난... 그 사람 완전히 잃은 거겠지?”선우는 입술을 떼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무슨 말을 해야 형에게 위로가 될까?’도겸이 힘없이 웃었다.“만약에 우리가 그때 안 헤어졌으면... 지금쯤 애가 커서 유치원 다닐 나이일 텐데.”선우는 고개를 숙였고, 한숨이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도겸이 계속 말했다.“다 내 잘못이야. 진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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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2화

길에서 시호에 의해 구조받은 그날 이후, 강서원과 임시호는 연락처를 주고받았다.처음 인사 한번 나눈 뒤로는 서로 아무 연락도 없었다.그래서 강서원은 임시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지냈다.그 젊은 남자의 얼굴도, 이름도.그런데 오늘 밤, ‘임시호’라는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다시 뜨는 순간, 그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사람을 이토록 생생히 기억하다니, 자신도 놀라웠다.문자엔 링크 하나가 달려 있었다.라이브 방송 주소였다.강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뭐야?’그녀는 무심코 손가락으로 눌렀다.화면 속은 바다였다.파도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는 천천히 하늘로 향했다.수십 대의 드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글자를 그려냈다.[Marry Me.]처음엔 강서원도 그저 스쳐 지나갈 영상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카메라가 멀어지며, 드론들이 만든 문장 안에 선명히 떠오른 이름.[정은 씨]강서원의 눈이 크게 떴다.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이 뻐근했다.‘설마...?’얼마 전, 지언이랑 지훈이가 나란히 C시 간다고 했었다.그때 조기봉도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왔지.그녀는 그냥 언제나처럼 낚시하러 나간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지금 남편과 아들 둘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정은의, 그리고 재석의 프로포즈 현장에.오직 자신만 아무것도 모른 채 집 안에 홀로 남겨졌다.‘그래, 나만 몰랐네. 내가 친엄마인데도... 나만...’강서원은 재석이 호주에서 돌아온 이후, 태도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아들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겉으론 예의 바르고 다정했지만, 하는 일은 전부 단호했다.정은을 다시 만나지 말라고 말한 뒤,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그날, 강서원이 직접 재석을 찾아갔을 때조차, 재석은 한마디 말도 없이 정은을 데리고 L시로 내려갔다.며칠을 그곳에서 지내며 정은의 부모님을 만났다.그건 재석의 결심이었고, 동시에 경고였다.그날 이후, 강서원은 두려워졌다.‘내 아들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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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3화

포럼이 끝난 뒤에도 다들도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두 C시에 며칠 더 머물며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우리 이번에 온 김에 재석이 프로포즈도 도와주고, 겸사겸사 휴가도 즐기자!”지언이 웃으며 말했다.그 말대로 지언과 리아는 며칠째 두 아이를 데리고, 서핑하고, 갯벌에서 조개를 캐느라 잔뜩 신이 나 있었다.어느 날 오후, 현우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뛰어왔다.“이모! 오늘 제가 킹크랩 세 마리나 잡았어요! 리조트 주방에 맡겨놨어요. 이모랑 재석 삼촌이랑 같이 드셔야 해요!”“응?”정은이 눈을 깜빡였다.‘킹크랩?’‘세 마리나?’‘설마... 그렇게 쉽게 잡히는 게 아닌데?’어제 리조트 로비에서 부모들이 바닷가에 쓰레기가 많아서 조개껍데기 하나 건지기도 어렵다고 불평하는걸... 분명 들었던 터였다.‘킹크랩 세 마리라니... 진심인가?’현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전화 좀 해볼게요. 왜 이렇게 늦지? 오늘은 다 함께 제가 잡은 킹크랩 먹는 날이에요! 한 명도 빠지면 안 돼요! 이모 기다려요!”그렇게 말하고 현우는 신나게 달려 나갔다.현민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입꼬리가 살짝 비뚤어졌다.“이모, 믿지 마요.”아이가 정은의 손을 살짝 흔들었다.“아빠가 돈 주고 산 거예요. 게랑 물고기 다 사서 해변에 몰래 놔두고 오빠한테 주운 척하라고 했어요.”정은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현민은 표정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오빠가 그것도 제대로 못 알아봤어요. 물고기랑 조개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주워가고, 킹크랩도 두 마리나 없어졌어요.”“결국 제일 작은 세 마리만 남은 거예요. 그걸 또 보물인 줄 알고 들고 왔어요. 오빠는 진짜 자기가 ‘갯벌의 왕자’래요.”정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현민이는 왜 같이 안 했어?”현민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런 유치한 짓, 제가 왜 해요. 바보 같잖아요.”잠시 말이 끊겼다.현민이 정은을 올려다보며 작게 물었다.“이모... 저 혹시 말이 너무 많았어요? 이모도 선생님처럼 저한테 말버릇이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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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4화

정은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그럼 담임 선생님께는 뭐라고 했어?”“제가요, 이미 교장 선생님이랑 교육청에 다 신고했다고 말했어요!”현민이 해맑게 대답했다.“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바로 태도를 바꾸셨어요. 저를 응원하신다고요. 그 이후로 그 원어민 선생님은 학교에 다시 안 나왔어요.”“알고 보니까요, 그 선생님은 교사 자격증도 없었대요. 우리 학교 같은 데에서는 원래 수업 못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추천해서 임시로 뽑았던 거래요.”정은의 눈이 커졌다.현민은 계속해서 말했다.“담임 선생님도 같이 처벌받을 뻔했어요. 교장 선생님이 해임하려고 하셨대요. 근데 제가 부탁드렸어요. 담임 선생님 잘못은 아니라고요.”“그래서요, 선생님은 계속 학교에 남으셨고 지금도 저희 반 가르치세요. 전 이제 반장이에요. 그리고 상이나 대회 나갈 사람 뽑을 때, 항상 저 먼저 추천해 주시거든요.”“다행이죠? 그때 교장 선생님께 부탁 안 했으면 새 선생님이 더 별로일 수도 있잖아요. 그쵸, 이모? 저 잘한 거 맞죠?”정은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이게... 만 일곱 살짜리 아이가 하는 생각이라고?’억울하면 증거를 모으고, 신고는 위에서 아래로.상대는 제압하되, 이익은 챙긴다.그런 판단을, 이 아이는 본능처럼 하고 있었다.“현민, 이런 거 누가 가르쳐줬어?”“아무도요.”현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어떻게 이렇게 생각했어?”“그냥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요?”현민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정은은 말문이 막혔다.‘현우는 평생 저런 생각 못 할 텐데...’그때 현민이 덧붙였다.“당연히 오빠는 빼고요. 오빠는 그런 생각 절대 못 해요!”정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요즘 아이들은... 어쩐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리는 것 같아.’...이번 C시 방문이 처음인 소진헌에게 C시는 낯설었다.이미숙은 일 때문에 몇 번 다녀간 적이 있지만, 마음 편히 휴가로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둘이 합치면 나이가 거의 백 살인데, 요 며칠 새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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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5화

그리고 그날, 지훈은 정말 재수가 없었다.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장소가 문제였다.그는 뒤늦게 생각해 보니, 입구 간판이 핑크색 배경에 역삼각형 모양이었다.그날의 행운의 색이 핑크라서 괜히 끌렸던 걸까?‘그냥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들어갔는데... 하필 거기가 문제였지.’바 안은 평범했다. 조명도 적당히 어둡고, 바텐더는 스킬이 좋아 보였다.“뭐로 하시겠어요?”“석류 마티니요.”지훈이 시킨 칵테일은 상큼하고 달달했다. 입안에서 은근하게 퍼지는 과일 향기, 도수도 높지 않아 딱 좋았다.‘이 집, 괜찮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2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수고하셨어요.”하지만 바텐더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오, 프로 의식 있네? 괜히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데.’지훈이 돈을 도로 넣으려는 순간, 바텐더가 갑자기 바 안쪽에서 훌쩍 뛰어나왔다.“뭐야?”지훈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바텐더는 자기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특유의 달콤한 목소리로...“손님, 오늘 기분 좀 내보실래요?”순간, 지훈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네? 뭐라고?’그가 들고 있던 2만 원이...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더럽게 느껴졌다.그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안에 있는 손님들 대부분이 남자들뿐이었다.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젠장, 나 게이 바에 들어왔구나.’‘어쩐지 여자 손님이 하나도 없더라니...’지훈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그... 죄송한데, 저는... 그쪽 취향이 아니라서요.”바텐더는 아쉬운 표정으로 붙잡았다.“에이, 그냥 놀다 가요~ 한 잔 더 드릴게요.”‘이래서 ‘왔으니까 경험이나 한 번 해보자’라는 말이 문제야.’‘사람이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지훈은 속으로 절규했다.“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피해야 산다.’바깥 공기가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그 순간이었다.바텐더가 갑자기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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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6화

“민슬아...?”지훈은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말문이 턱 막혔다.슬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와, 조 변... 이런 데도 오시네?”지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그건 오해야!”“굳이 변명 안 해도 돼.”슬아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변명은 곧 인정이니까. 게다가, 난 조 변 취향엔 관심 없어.”지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네가 나한테 별 관심 없고, 내 말 안 믿는 건 알지만... 그래도 명예는 지켜야지. 나, 게이 아니야! 그냥 길 잘못 든 거야. 오해하지 말아 줘, 제발.”“그래.”슬아는 시큰둥하게 손끝을 튕겼다.“은리야, 돌아와.”그 말이 끝나자, 은빛 뱀이 슬아의 발목에서부터 천천히 기어올랐다.가느다란 허리를 따라, 하얀 목선을 타고, 마지막엔 그녀의 밀짚모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지훈은 가까이 있었기에 그 뱀이 움직이는 궤적을 낱낱이 다 보았다.비늘이 달빛에 반짝이며 미세하게 일렁이는 게, 소름 끼칠 만큼 생생했다.순간, 지훈의 등골이 서늘해졌다.‘뭐야 저 여자... 진짜 정상이 아니야. 아니, 그것보다 훨씬 ... 위험해.’지훈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미 숨어 있던 ‘은리’가 갑자기 모자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그러고는 정확히 지훈을 향해 날카롭게 혀를 내둘렀다.쉭-분명 경고였다.‘은리’의 눈빛엔 ‘한 번만 더 보이면 물어 죽이겠다’라는 의지가 가득했다.심장이 쿵 내려앉은 지훈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이 여자는 진짜... 보통 사람 아니다. 거리를 유지해야 해. 그것도 아주 멀리.’톡-슬아는 그런 지훈을 보고, 손끝으로 살짝 뱀의 머리를 건드렸다.그게 칭찬인지, 꾸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그 한 번의 손짓에 ‘은리’는 번개처럼 모자 속으로 숨어버렸다.“조 변, 그렇게 겁나?”슬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당연하지! 그건 독사잖아! 물리면 죽어!”‘누가 안 무섭겠어, 어? 나도 사람이라고!’지훈은 속으로 절규했다.“나... 나 죽기 싫단 말이야...”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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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7화

술집을 나서자, 지훈은 슬아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갑자기 슬아가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왜 따라와?”“그냥... 그 변태, 거기서 죽은 거 아니야?”“조 변, 또 겁나는 거야?”“장난치지 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21세기 법치 사회잖아. 술집 안에는 CCTV 없겠지만, 길거리엔 잔뜩 있단 말이야. 그 사장이 진짜 죽으면, 우리도 곤란해져.”“좋네. 조 변이랑 공범이라니, 형량이 좀 줄어들겠지?”“그래도 조 변은 최고의 형사 변호사잖아? 아, 재판 때 자기변호도 할 수 있어?”“민슬아, 너 진짜... 정신 나간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3년 전 어느 밤이었다.지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거실 소파에 슬아가 앉아 있었다.지훈은 아직도 모른다.그녀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문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창문도 멀쩡했다.슬아의 옷차림은 단정했고,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처음엔 지훈도 헷갈렸다.‘내가 집을 잘못 찾아온 건가?’하지만 둘러보면 볼수록, 분명 자기 집이었다.“누구세요?”꽤 오래 기다렸던 듯한 슬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샤워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남자 맞아?”서른 살 평생, ‘남자 맞냐’라는 질문을 처음 들었다.그 이유가 샤워 시간이 길어서라니...‘이건 진짜 말하면 아무도 안 믿겠다. 믿는다 해도 웃겨 죽을 일이지.’그런데 지훈이 뭐라 하기 전에, 슬아가 본론을 꺼냈다.“조 변호사님이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라며? 내 사건 좀 맡아 줘. 조건은 조 변호사님은 정해.”순간, 지훈의 눈빛이 달라졌다.그에게 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은 두 부류뿐이었다.살인자, 아니면 피해자 가족.이 시각에 이런 식으로 찾아온 건,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누가 죽었어요?”“우리 할아버지.”“누가 죽였죠? 자세히 말해보세요.”그 순간, 슬아의 눈빛이 바뀌었다.지훈은 분명 느꼈다.슬아의 눈빛에 단단한 벽이 세워지고, 싸늘한 기운이 번졌다.지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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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8화

지훈은 살면서 수많은 농담을 들어봤지만, 이렇게 웃긴 건 처음이었다.“아니... 아직 잠에서 덜 깼냐?”“아직 잠들기 전이야. 고마워.”“미안한데, 상속 소송은 못 맡아. 다른 변호사 알아봐.”“싫어. 다들 조 변호사님이 제일 잘 한다고 하던데? 꼭 맡아줘야 해. 그리고 꼭 이겨야 하고.”‘다들? 누가 다들인데?’‘젠장.’지훈은 어이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미안하지만, 세상에 나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이제 나가. 안 나가면 주거침입으로 신고할 거야.”슬아가 차갑게 눈을 들었다.“그래? 다시 말해봐.”그때의 지훈은 참 순진했다.그 말... 진짜로 다시 했다.심지어 비웃으면서.“빨리 꺼져.”“좋아.”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순간, 어디선가 알록달록한 꽃무늬 거미가 ‘슉’ 하고 날아와 지훈 얼굴에 들러붙었다.거미가 날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분명 누군가 지훈에게 거미를 던졌다는 뜻이었다.하지만 그때의 지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 위로, 다리까지 합치면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그 장면은 지훈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놨다.‘신이 없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으아아아아아악...!!”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좁은 거실 안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녔다. 그는 손으로 거미를 떼려 했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거미가 손을 타고 올라와 팔을 타고 돌더니, 결국 옷깃 사이로 들어가 옷 속을 이리저리 기어다녔다.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지훈과 달리, 슬아는 제자리에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지훈의 난리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알았어! 할게! 상속 소송이지?! 내가 무조건 이겨줄게!”슬아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진짜야! 약속해! 그러니까 이거 당장 치워! 젠장, 팬티 안으로 들어갔잖아!!”지훈이 고함쳤다.그제야 슬아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화리야, 돌아와.”그러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거미가 정말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순식간에 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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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9화

슬아가 고개를 숙이자, 거미는 순순히 슬아의 튜브톱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지훈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슬아가 눈썹을 올렸다.“어디 가?”“술집.”지훈은 정말로 그 사장이 독에 중독되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성자도 아니고’ 지훈이 그럴 리 없었다.그가 그렇게까지 나선 건 다만 뒤따를 골칫거리를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사람 하나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하지만 슬아처럼 공공연히 뱀을 풀고 물게 하는 방식은 영악하다고 하기엔 너무 조잡했다.만약 그 사장이 오늘 밤 진짜로 목숨을 잃는다면, 경찰 조사부터 시작해 심문, 검찰, 법원으로 이어지는 절차들이 줄줄이 따라오리라는 건 변호사인 지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 과정을 아는 만큼, 거기 뒤따라오는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운지도 잘 알고 있었다.‘귀찮다. 아주 골치 아프게 됐어.’슬아가 빈정대듯 말했다.“조 변호사님, 참 인자하시네? 상대가 당신 옷 벗기려고 할 때도 넌 다시 들어가서 구해오고.”“입 닥쳐!”지훈이 갑자기 화를 터뜨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그런 말에 속지 않았다.“진짜 J시 사람들 웃기다. 속으론 미칠 듯이 미워하면서 행동은 또 딴판이고. 다 연기 잘하고, 머리가 칠백 개씩 달렸나 봐.”이미 꽤 걸어간 지훈은 그 말에 끝까지 참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리고 슬아에게 팩트폭격을 퍼부었다.“내가 그 쓰레기 구하러 간다고? 내가 그걸 왜 구해! 너를 구하러 간다, 민슬아!”“알아. 네가 좀 수완이 있다는 것도. 그래도 나 좀 놀라게 하는 정도면 됐지. 진짜 국가기관이 나서면 특공대가 우르르 몰려와서 실탄 장착한 총이라도 들이대면 넌 뱀을 풀래? 거미를 풀래? 그게 되겠어?”“헛소리하지 마. 이 사회가 건국 초기도 아니고, 지금은 첨단 기술과 수사력으로 못 찾는 게 없어. 믿든 안 믿든, 오늘 그 사람이 죽으면 내일 너 손에 수갑 채워서 조사할 수도 있어.”“난 네 변호사 하고 싶지 않아!”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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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0화

슬아는 자신을 알아본 지언을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민슬아예요.”지언도 미소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지훈이 형, 조지언입니다.”그러더니 바로 옆의 여자를 팔로 감싸 안았다.“그리고 이쪽은 제 여자친구, 변리아 씨.”리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슬아는 리아를 바라보다가, 잠깐 눈썹을 올렸다.‘살성 사주...? 여자한테서 이런 기운이 나올 줄이야. 흥미롭네.’다시 시선을 지언으로 옮겼다.‘이마는 넓고 코는 튼튼하고, 귀랑 눈썹 높이가 딱 맞네.’‘귀는 지혜, 눈썹은 성격... 머리도 좋고 유연한 데다, 포용력까지 있어.’‘그러니 이런 여자를 잡지.’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어, 다들 여기 있었네?”재석이 정은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슬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재석과 정은에게 인사를 주고받았다.“안녕하세요.” 슬아가 웃으며 인사했다.재석과 정은에게 시선을 옮긴 순간, 슬아는 또 눈이 커졌다.‘뭐야, 이번엔 문곡과 문창 쌍성이라니?’‘이런 조합은 나라의 운명까지 움직이는데...’‘조씨 집안은 대체 뭐야, 인간들이 왜 이래?’지언과 리아는 아이들을 씻기러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방금까지 수영장에 있었던 터라 몸이 젖은 채였다.재석과 정은도 각자 일 때문에 곧 자리를 떴다.결국 남은 건, 지훈과 슬아 둘뿐.지훈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왜 자꾸 재석이랑 정은이를 쳐다봐? 사람들은 다 갔는데.”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꼬리를 올렸다.“조 변, 나 갑자기 깨달았어.”“뭘?”“조 변네 가족이 조 변보다 훨씬 재밌어.”그 말 한마디를 던지고, 슬아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마침 문이 열리자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올라타 버렸다.지훈은 물끄러미 슬아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뭐야, 민슬아 저게 무슨 뜻이야?”‘설마 우리 형이나 재석이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겠지?’‘안 돼, 그건 진짜 안 돼.’지훈은 그 자리에서 이를 악물었다.‘내일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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