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711 - Chapter 1720

1723 Chapters

제1711화

혼인신고 당일, 재석은 새벽에 일어났다.그는 먼저 집 안을 한 바퀴 돌며 깔끔하게 정리했다.며칠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하얀색 풍선 세트를 꺼내, 거실 벽 한쪽에 ‘Just Married’라는 글씨로 된 풍선을 붙이고,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다발과 향초를 올려두었다.그 다음엔 정성껏 아침을 차려놓고, 안방 문을 살짝 열었다.“정은아, 일어나야지.”“으음...”정은이 천천히 눈을 떴다.“지금 몇 시예요?”“일곱 시 반.”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린 순간, 정은은 재석의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깔끔한 네이비색 정장에 반듯한 넥타이, 구두까지 반짝였다.벌써 완벽하게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몇 시에 일어났어요?”“다섯 시 반.”“네?”‘어제 그렇게 늦게 잤는데,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고...?’‘이 남자는 대체 체력이 어디까지야.’정은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 번 깨어나면 다시 눕는 법이 없는 성격이었다.그녀는 하얀 원피스를 안에 입고, 초가을의 쌀쌀한 공기를 막기 위해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쳤다.재석은 서류 가방을 열어 두 사람의 신분증과 혼인신고서, 도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모든 게 완벽했다.“됐어. 다 챙겼어.”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요.”문을 열고 나서자, 살짝 서늘한 바람과 함께 햇살이 얼굴을 비췄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햇빛은 투명하게 쏟아졌다.‘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네.’재석이 문득 손을 내밀었다.정은이 그 손을 잡자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집을 나섰다.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엔, 어색함보다 설레는 평온이 감돌았다....오늘은 정말 결혼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햇살은 따뜻했으며 바람마저 유난히 부드러웠다.아침 아홉 시, 두 사람은 구청 앞에 도착했다.창구 앞에는 이미 두 커플이 줄을 서 있었다.재석과 정은은 세 번째였다.문이 열리고, 첫 번째 커플이 창구 앞 의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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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2화

집에 돌아와 손에 든 혼인관계증명서를 바라보며, 정은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했다.‘이제 진짜 법적으로 정식 부부라니...’“여보, 무슨 생각해?”남자의 낮고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입맞춤이 정은의 귓가에 닿았다.여보...그 호칭에, 정신이 채 돌아오지 않은 정은이 다시 놀라서 멈칫했다.“방금 뭐라고 했어?”“‘여보’라고 했지.”재석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장난기와 만족이 뒤섞인 웃음이었다.“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지. 내가 당신 불렀으니까, 당신도 한번 불러봐. ‘여보’라고.”“여보, 이러면 돼?”정은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그 한마디에 재석은 순간 전기가 흐른 듯 굳어버렸다.그러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정은을 번쩍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정은아, 우리 진짜 결혼했어. 이거 꿈 아니지?”“아직 꿈 같으면 내가 깨워줄까? 꼬집어줄까?”“좋아, 꼬집어.”재석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참, 바보 같아.”‘그래도 이런 바보, 나한테만 바보 같겠지.’재석은 정은을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아내가 뭐라 하든 그저 다 좋았다....늦은 오후, 정은은 흔들의자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각도를 맞추며 새로 발급받은 혼인관계증명서를 사진으로 찍었다.사진 속엔 혼인관계증명서뿐 아니라, 결혼반지가 빛나는 정은의 왼손도 함께 담겼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구를 입력했다.[이제, 함께 저녁노을을 보고, 함께 따뜻한 끼니를 나눌 사람이 생겼다.]업로드 버튼을 눌렀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논문 수정에 들어갔다.‘이제는 진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그렇게 머리를 숙인 채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정은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 이미 카톡은 폭발해 있었다.‘뭐야... 언제 이렇게 댓글이 많이 쌓였지?’먼저 눈에 들어온 건 SNS의 알림 창이었다.‘좋아요’와 댓글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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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3화

마지막 메시지에 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그건 정은의 톡 대화창에 가장 먼저 축하를 보냈던 사람이었다.현빈이었다.메시지는 간결했다.그저 한 마디.[축하해.]아무 이모티콘도, 아무 부연 설명도 없었다.정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 오빠.]그 뒤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대화창이 조용했다.‘그래, 이제 진짜 끝인가 봐요.’정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마음 한구석이 살짝 저릿했지만, 금세 고요해졌다....호주, 해 질 녘.잔잔한 진동음이 울리자 창가에 서서 멀리 시선을 두던 남자가 돌아보았다.정은의 답장이라는 것을 그는 금방 알아차렸다.단 한 번의 진동.답장은 한 줄뿐이라는 뜻이었다.현빈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그래, 그럴 줄 알았잖아.’예상했던 일이었다.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그녀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릴 날이 올 거라고, 수없이 각오했었다.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닥치니,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듯했다.‘이게 다 뭐였을까...’수년간의 집착.묵묵히 쌓아온 감정.그 모든 게 한순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현빈은 허공을 움켜쥐었다.텅 빈 손바닥.‘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네.’꿈이었다.현빈은 이미 알고 있다.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도 안다.‘이제는, 정말 깰 때가 된 건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깨어나면 뭐가 달라질까...’‘정은이는 이제 다른 사람의 곁에 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 있는데...’‘정은이는 행복하겠지. 그럼 그걸로 된 거야.’현빈은 고개를 들어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붉은 노을이 유리창에 비쳤다.남자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스쳤다.‘그래, 난 그냥 이 꿈속에 조금만 더 있을래.’그 웃음엔 체념과 미련, 그리고 아주 약간의 평화가 섞여 있었다....곧 재석도 SNS에 글을 올렸다.정은과 똑같은 사진에, 글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에서 ‘우리’로, ‘안녕’에서 ‘앞으로 잘 부탁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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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4화

혼인신고는 마쳤지만, 재석과 정은은 서로 상의 끝에 여러 이유로 결혼식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첫째, 연말이라 두 사람의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마감 중이었다.정리해야 할 보고서와 마무리해야 할 논문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둘째, 결혼식 준비엔 시간이 필요했다. 둘 다 바쁜 와중에 대충 하고 싶지 않았고, 억지로 일정을 끼워 넣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래서 자연스럽게 내년으로 미루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그리고 마지막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강서원이었다.강서원의 건강이 다시 악화했다.암 재발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이미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재석은 형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는 순간 그대로 굳었다.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형, 뭐라고?”[아직 정밀 검사 결과는 안 나왔는데, 의사가 보기엔 암이 재발했을 가능성이 높대.]“그럴 리가...”[암이라는 게 원래 그래. 운도, 마음가짐도 다 작용하지. 어머니 성격 알잖아. 예민하고 생각 많고, 늘 속으로 삭이고... 그것도 영향이 있었겠지. 나랑 지훈이는 병원에 와 있어. 너도 시간 되면 와.]통화가 끝난 뒤, 재석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정은에게 말했다.“재발 같대.”정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뭐라고?”“큰형도 자세한 건 모르겠대. 그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그럼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야지!”정은은 서둘러 외투를 챙겨 들고 차 키를 꺼냈다.재석이 잠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렇게 봐?”정은이 외투를 그의 품에 밀어 넣었다.재석은 옷을 입으며 중얼거렸다.“난 그냥... 당신이 말릴 줄 알았어.”“뭘? 내가? 내가 그 정도로 속 좁은 줄 알아? 내가 싫다고 해서 당신까지 엄마를 못 보게 할 수는 없잖아.”호주에서 돌아온 뒤로, 정은은 강서원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그게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분명 재석이 중간에서 막아주고 있었을 것이다.‘이 사람은 나한테 충분히 많은 걸 해줬어.’정은은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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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5화

강서원의 병 재발 소식은 조씨 집안 남자들을 제대로 뒤흔들어 놓았다.지언이 먼저 제안했다.“우리 셋이 돌아가면서 병원 지키자. 엄마 혼자 두면 불안하잖아.”지훈과 재석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강서원이 먼저 선을 그었다.“너희가 병원에 있어봤자 아무 소용 없어. 간호사도 있고, 간병인도 있고. 각자 자기 할 일 하러 가.”지언과 지훈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뭐야... 우리 강 여사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야?’‘설마 농담이지?’늘 ‘왜 안 와’, ‘얼굴 좀 보자’라며 불러대던 강 여사가... 이젠 알아서 가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이었다.“간병인은 간병인 일 하면 되죠. 우린 그냥 옆에서 엄마랑 같이 있으려는 거예요.”지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나 사람 필요 없어.”강서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지언은 몇 번이나 확인했다. 혹시 기분이 상했나, 눈치 싸움까지 하면서 떠봤지만, 결국 강서원의 뜻이 진심임을 깨닫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문이 닫히자, 병실 안은 조용해졌다.강서원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동안 애들한테 얼마나 무섭게 굴었으면... 이제는 다들 내 눈치만 보네.’그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똑똑-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여사님, 채혈하겠습니다.”“응.”강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내밀었다.팔 안쪽에는 자국이 가득했다.반복되는 채혈과 주사 덕에 여기저기 멍 자국이 퍼져 있었고, 상처가 나아 새살이 돋을 틈이 없었다.간호사는 순간 움찔했다.‘와... 저렇게 맞으면서도 말 한마디 안 하시네.’그녀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이 VIP 병동의 악명 높은 환자.불만 있으면 기계 던지고, 직원들을 호출하고, ‘강 여사님이 오늘 또 난리 쳤다’라는 말은 일상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단 한마디의 불평도,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주사기 다섯 개 가득 피를 모두 뽑을 때까지 강서원은 미동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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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6화

물론 조기봉이 그렇게 한 이유는 조씨 집안의 체면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세 아들에게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계산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유가 뭐래도 상관없었다.결과적으로 조기봉은 강서원을 지켰다.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결국 날 지켜줬잖아. 그걸로 충분해.’그 순간, 강서원은 오래된 응어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사랑은 이미 식었지만, 조기봉이라는 남자는 끝까지 자신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그걸로 됐어. 나한텐 그걸로 충분해.’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는 순간, 후회와 미안함이 밀물처럼 가슴을 덮쳤다.‘그때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생각하면 할수록 숨이 막혔다.그리고 이제는 임시호가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도 확실해졌다.‘이놈, 결국 중간에서 이간질이었잖아.’짝- 짝- 짝-시호가 손뼉을 천천히 치며 비웃었다.“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모님.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현명하시네요. 전 사모님이 이미 조 회장님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식은 줄 알았거든요. 이 집안에 미련도 없을 거라고... 그런데, 놀랍네요. 정말 놀라워요.”그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강서원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당신... 대체 뭐야? 목적이 뭐지?”시호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이제 와서 내가 누군지 묻는다고요?”웃다 못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내가 당신을 알아야 하나?”강서원이 차갑게 되받았다.“아니요. 사모님이 아실 리 없죠. 늘 높은 곳에서 남들 내려다보던 조씨 집안의 안주인께서 저 같은 저 구석 먼지 같은 인간을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그래요, 사모님은 몰라요. 모르니까 아무렇지 않죠. 언제나 그랬으니까.”시호의 말은 점점 비틀려갔다.강서원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이쯤에서 나가.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시호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랐다.“사모님, 암 재발하셨다면서요? 몸이 아프시죠? ...죽음을 앞두고 사는 기분은 더 괴롭죠?”강서원의 손이 떨렸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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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7화

강서원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리아가 병문안차 병원에 다녀왔다.나오자마자 리아가 지언에게 말했다.“당신 어머니, 뭔가 달라지신 것 같아.”...정은은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정성껏 국을 끓이고 담백한 반찬을 준비했다.그걸 보온통에 나눠 담아 재석에게 건넸다.“이거 병원에 좀 갖다드려.”강서원은 첫 숟갈을 뜨자마자 맛을 알아챘다.“이거... 집에서 한 거 아니지?”“네.”재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히 말했다.“정은이가 한 거예요.”강서원이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맛있네. 정은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예전에 있었던 일, 미안하다고도... 그냥 그 애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네.”재석의 눈꺼풀이 퍼덕였다.그는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봤다.요 며칠 사이 강서원은 이런 시선을 꽤 자주 받았다.사람들의 눈빛 속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밉고, 얼마나 피곤한 사람이었는지’가 고스란히 비쳤다.강서원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재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재석이 건넨 보온통을 받아 들고 정은은 부엌으로 가며 물었다.“응? 다 비었네? 다 먹었어?”“응. 어머니가 고맙다고 전해 달래. 그리고 예전 일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셨어.”정은이 살짝 눈썹을 올렸다.“진짜? 당신 어머니, 좀 달라지신 것 같긴 하네...”정은은 문득 어제 학교에서 마주친 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리아도 똑같이 말했다.“정말 이상해요. 예전이랑은 많이 달라요.”재석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리아에게는 오해할 이유가 없었다....무한 실험실.민지는 강화 유리문 너머로 외부 접견 구역을 바라봤다.그곳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임시호.그는 노트북을 펼쳐 두고 집중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닷새 전, 네오젠텍은 ‘구름’ 업그레이드 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금액은 4천만 원.직접 프로젝트를 맡은 건 대표 임시호였다.그래서 다음 날, 시호는 노트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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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8화

정은이 격리문 앞에 섰다. 안면 인식과 홍채 인식이 동시에 진행되고, 짧은 전자음이 울리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정은이 안으로 들어섰다.시호는 모니터를 향한 시선 사이로 그녀를 힐끗 보는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다.저녁 무렵, 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민지는 실험복을 벗어 걸고, 외투를 챙겼다.서준과 함께 퇴근할 준비를 하며 물었다.“정은 언니, 언니는 안 가세요?”“난 조금만 더 있다 갈게. 너희 먼저 가.”“네.”민지는 정은이 늦게까지 남아도 걱정하지 않았다.안쪽에는 남진일과 탁재민이 있었기 때문이다.요즘 재민은 체질이 바뀐 건지, 이미 큰 키가 더 자랐다.보수적으로 봐도 거의 190은 되어 보여, 9등신에 가까웠다.민지는 재민이 많이 먹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 나이에 아직도 크는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게다가 진일의 권유로 올 초부터 복싱을 배우기 시작해, 이제는 실험실의 ‘수호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재민이 있으면, 정은은 언제나 든든했다.“그럼 우리 먼저 갑니다! 내일 봬요!”“응, 잘 가.”민지와 서준은 짐을 챙겨 격문 앞으로 갔다.늘 하던 대로 얼굴 인식과 홍채 인식을 마쳤지만, 이번엔 문이 열리지 않았다.“어? 왜 이래?”민지가 문을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인식이 잘 안된 거 아냐? 내가 해볼게.”서준이 앞으로 나섰다.5초 후...“나도 안 돼.”둘은 눈을 마주쳤다.민지가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정은 언니! 문이 고장 난 것 같아요!”정은은 바로 실험대에서 내려왔다.“무슨 일이야?”“저랑 서준이 둘 다 인식이 안 돼요.”정은도 직접 시도해봤다.역시 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 구역으로 돌아가 ‘구름’의 제어 패널을 꺼냈다.수동으로 문을 여는 명령을 입력했다.하지만 화면에는 오류 메시지와 함께 붉은 X 표시가 떴다.정은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심장이 빨라졌다.그녀의 눈빛에는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오히려 사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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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9화

아침 일찍, 정은은 평소처럼 생체 시계에 맞춰 저절로 눈을 떴다.주방에선 이미 식탁이 정리돼 있었다.재석이 아침을 다 차려 두었고, 정은 몫의 음식은 냄비에 따뜻하게 보관되도록 뚜껑을 덮어 두었으며, 또 하나는 보온통에 정성스레 담아놓았다.누가 봐도 강서원에게 가져갈 음식이었다.“왜 일어났어? 토요일인데 좀 더 자도 되잖아.”정은이 고개를 저었다.“습관이 돼서 이 시간 되면 그냥 깨.”그리고 벽시계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곧 나갈 거야?”“죽이 아직 좀 덜 됐어. 한 십 분만 있으면 다 될 거야.”“그럼 나도 같이 갈게. 씻고 옷 갈아입을게.”재석이 잠시 멈칫했다.정은이 직접 병원에 가겠다고 나선 건 예상 밖이었다.“근데...”“응?”정은이 돌아보며 물었다.“내가 가면 안 돼?”“돼.”‘그냥... 싫어할까 봐 그랬지.’정은의 손놀림은 빠르고 단정했다.정확히 10분 후,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30분쯤 지나 강서원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강서원이 보였다.그녀는 손에는 한 권이 들려 있었다.환자복 차림이라 조금 수척해 보였지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단정히 빗겨 있었다.문소리에 고개를 돌린 강서원이 책을 내려놓았다.“재석이, 너...”다음 순간, 문 뒤에 서 있는 정은을 보고 멈칫했다.정은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사모님, 좋은 아침이에요.”그 한마디 ‘사모님’에 강서원의 눈가가 순간 붉어졌다.정은이 처음 집에 인사 오던 날, 정은은 그녀를 ‘어머님’이라 불렀다.그땐 강서원이 굳이 “사모님’으로 부르라며 오만하게 굴었다.‘그땐 왜 그렇게 오만했을까...’“그래, 아침 잘 잤지? 어서 들어와.”강서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다가가려다 멈춰 섰다.‘괜히 들이대면 또 불편해할지도 몰라.’그 어정쩡한 공기를 깨듯, 정은이 먼저 말했다.“재석 씨가 사모님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 왔어요.”강서원이 살짝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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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0화

“무슨 생각해?”병실을 나온 뒤부터 정은은 계속 멍했다.걸음은 느렸고,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다.재석은 속이 근질거렸다.‘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결국 말이 나오지 않았다.“응? 당신 방금 뭐라 그랬어?”정은은 정신을 차리고 재석을 돌아봤다.그 말에 재석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우리 어머니가... 혹시 뭐라고 하셨어?”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조금, 이야기하셨어.”“그거 믿지 마! 듣지도 말고!”재석이 다급하게 말했다.“아... 괜히 당신 데리고 갔네. 다음엔 내가 혼자...”푸-정은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왜 그렇게 긴장해?”“뭐? 우리 엄마... 당신 괴롭힌 거 아니야?”“아니.”그제야 재석의 어깨가 살짝 풀렸다.“그럼 뭐라고 하신 거야?”정은이 재석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안, 알, 려, 줄, 거야.”“에이... 말 좀 해줘, 여보...”“안 해.”“좋아. 그럼 집 가서 내가 직접 알아낼게. 힘으로든, 손으로든.”“입 닥쳐! 사람들 다 듣잖아.”“그럼 작게 말할게.”“...”“어? 저기 정은 언니랑 조 교수님 아니야?”민지가 손을 흔들려던 순간, 서준이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야, 부르지 마. 교수님 손 어디에 있는지 안 보여?”“손? 어디... 왜?”“정은 누나 허리에.”서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게... 아무 관계 없겠냐?”정은과 재석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다정했다.재석 손에는 보온통이 들려 있었고, 누가 봐도 병문안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그리고 집에 가서 뭘 할지는...“흠!”서준이 괜히 헛기침했다.‘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아, 정은 언니랑 조 교수님 벌써 가버렸네.”민지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서준은 한숨을 쉬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둔해졌냐. 임신하면 예민해진다던데, 너는 반대네.”민지의 볼이 붉어졌다.“뭐야 그 말, 싫어!”“...”서준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그래, 이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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