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821 - Chapter 1830

1952 Chapters

제1821화

“여긴 왜 왔어?”강서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저요?”시호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당연히 병문안이죠.”“나가.”강서원은 눈가의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낮고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여긴 너 같은 사람 환영 안 해.”시호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미소를 유지했다.“아드님 돌아가셨는데도 기력이 대단하시네요.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온 겁니다. 사모님께서 너무 상심하실까 봐 걱정돼서요.”이 순간에 재석을 입에 올리는 건, 강서원의 심장에 바늘을 꽂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꺼져. 당장 꺼져!”시호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화내지 말라니까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십니까.”강서원은 시호를 똑바로 노려봤다.겉모습 너머에 숨겨진 속셈과 목적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강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너... 대체 누구야?”“처음 만났을 때부터 넌 계산적이었어. 내 신뢰를 얻으려고 접근했지. 그리고 두 번째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을 거야.”강서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왜 일부러 나한테 접근했어? 대체 뭘 원해?”“아이고, 들켜버렸네요.”시호는 과장된 표정으로 놀란 척하며 말했다.말투에는 조롱과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이미 조재석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소정은은 조사받으러 끌려갔고... 사모님도 곧 끝이니까요.”“조씨 집안은 이제 와르르 무너질 겁니다. 몰락은 시간문제죠.”“조씨 집안이 그렇게 미워?”시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웃음은 점점 날카로워졌다.“조씨 집안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사모님 때문입니다. 모든 원인은 당신이에요, 강서원 사모님!”“그러니까...”강서원은 천천히, 한 글자씩 눌러 말했다.“네가 증오하는 건 조씨 집안이 아니라... 나라는 거지.”그 순간, 시호의 미소가 사라졌다.시호는 병상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분노에 가까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제가 사모님을 미워하면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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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2화

시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아니야...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시호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분노에 휩싸인 맹수처럼 시호는 거의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어릴 적부터 장호구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시호는 친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라는 말이었다.시호는 믿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울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그러면 장호구는 허리띠를 풀어서 들어 올렸다.한 번 내리치며 매질할 때마다, 장호구는 같은 말을 내뱉었다.“네 엄마 이름은 강서원이야. 그년은 잘살겠다고 우리 부자를 버린 년이야. 천하의 걸레 같은 년이지.”“그리고 너는 그년이 낳은 자식이야. 똑같이 더러운 놈이라고.”그 폭력은 시호의 유년기 전체를 관통했다.시호의 몸은 채찍 자국이 남긴 고통을 기억했고,귀는 장호구가 퍼붓던 저주와 욕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강서원... 널 버린 여자...’장호구는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자였다.집안 형편은 기본적인 생활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그래서 시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도둑질을 배웠다.몸집은 작았고, 동작은 빨랐다.웬만해선 들키지 않았다.학교에 갈 수 없었다.주민등록조차 없었다.시호에게 유일한 배움의 창구는 텔레비전이었다.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고,국가 제도와 법률, 그리고... 미성년자 보호법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열두 살이 되던 해, 장호구는 늘 그렇듯 술에 잔뜩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 사흘 뒤, 장호구의 시신이 한 저수지에서 발견됐다.경찰은 조사를 거쳐, 술에 취해 실족한 사고사로 사건을 종결했다.그 시각, 시호는 집에 없었다.경찰은 시호를 찾지 않았다.장호구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장호구 단 한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었고, 주민등록상 주소지로 확인된 집 안에서는 아이가 함께 살았다는 흔적을 끝내 찾아낼 수 없었다.그렇다. 시호는 그 집에서 12년을 살았지만, 옷 한 벌, 개인 물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이웃들도 집단으로 기억을 잃은 듯 침묵했다.경찰 앞에서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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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3화

강서원은 다른 사모님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역시 사모님은 복도 많으세요. 큰아들은 회사 물려받았고, 둘째는 이름난 변호사, 막내는 아직 젊은데도 대학교수에 학자라니요.”“오늘 대강당에서 강좌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설마 연사가 사모님 아드님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 부러워서 죽겠어요.”시호는 두 사람에게서 채 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대화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귀에 꽂혔다.시호의 주먹은 이미 꽉 쥐어져 있었고, 손가락 마디는 힘이 들어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강서원과 그 사모님은 시호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시선을 주지도 않고 곁을 지나갔다.시호는 강서원을 노골적으로, 숨김없이 바라봤다.그러나 강서원의 시선은 끝내 시호를 스치지도 않았다.그동안 시호는 ‘강서원’이라는 이름을 잊으려 애써왔다.장호구가 마음속에 심어 놓은 독을 품은 가시를 외면하며 살아왔다.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강서원이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재벌가에 시집가 남편은 공경하고, 자식들은 효도하고, 모든 걸 다 가진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시호는 깨달았다.‘이 독가시... 이건 평생 못 뽑아.’그 독가시는 빠지기는커녕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어 결국 상처를 썩게 만들고, 심장 전체를 망가뜨릴 거라는 걸.그날 이후, 시호는 강서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자연스럽게, 강서원 뒤에 있는 조씨 집안까지 파고들게 됐다.‘그래서였군.’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재벌가에 시집간 이유.조씨 집안 같은 집안이라면, 유혹을 견딜 여자가 몇이나 될까?강서원을 무너뜨리는 것.조씨 집안을 끝장내는 것.그것이 시호가 스무 살 이후 세운 유일한 목표였다.그래서 오랜 시간 숨어 있었고, 한 발 한 발 계산하며 여기까지 왔다.이제 거의 다 왔다.승리는 눈앞이었다.그런데 강서원이 뭐라고 했는가?시호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강서원은 눈앞에서 무너져 가는 듯한, 광기에 가까운 얼굴의 남자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너 정도 인맥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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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4화

시호는 멀쩡히 서 있는 조재석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충격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너... 안 죽었네.”재석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실망하게 해서 미안하다.”시호의 시선이 조기봉을 스쳤고, 곧 강서원에게 꽂혔다.“전부 짜고 친 거예요? 그럼 당신... 애초에 암 재발도 없었던 거고, 항암치료도 안 받은 거네요?”강서원은 시호를 똑바로 바라봤다.“입원 안 하고 버티지 않았으면, 네가 모습을 드러냈겠어? 인제 그만 악행을 멈춰. 아직 기회는 있어.”그 순간, 복도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발걸음은 병실 앞에서 멈췄다.문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특수기동대 요원들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였다.은폐는 없었다.병실은 이미 완전히 포위돼 있었다.체포를 전제로 한 공개적인 압박이었다.저항을 포기하고 스스로 손을 들라는 무언의 경고. 강서원이 말한 ‘기회’가 바로 이것이었다.시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은 광기에 가까웠고, 그 안에는 절망이 섞여 있었다.“하하하... 결국 이긴 놈이 왕이고, 진 놈이 죄인이지. 옳고 그른 건 중요하지 않아. 승패만 있을 뿐이야.”시호의 웃음이 멈췄다.“근데 난 인정 못 해.”“뭘 인정 못 해?”그때,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지언과 리아가 함께 들어왔다.리아가 앞장섰고, 지언은 한 발 뒤에서 조심스럽게 따라왔다.방금의 날 선 반문은 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해외 출장을 갔다고 알고 있던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시호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됐다.그 아주 작은 변화조차 리아는 놓치지 않았다.리아는 입꼬리를 차갑게 올렸다.“뭐가 그렇게 겁나?”시호는 냉소를 띠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는 한마디라도 더 하면 불리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다만, 시호의 시선은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으로 흘러갔다.‘시간을 벌 수 있을까?’리아는 그 시선을 읽었다.“혹시 백업을 기다리고 있다면, 미리 말해 줄게. 못 와.”“무슨 소리야?”“네가 따로 운용하던 무인 드론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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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5화

시호의 증오와 복수는 지금에 와서는 거대한 농담처럼 보였다.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왜 단 한 번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을까?왜 한 번도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을까?시호만큼 영리한 사람이 정말 아무런 의심도 느끼지 못했을까?단서들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의심할 지점도, 되짚어볼 기회도 충분했다.그러나 시호는 한 번도 그 흔적을 따라가지 않았다.어쩌면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그 분노를 쏟아낼 배출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혹은 재석이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모습이 너무 눈부셔서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강도겸과 심현빈조차 끝내 얻지 못한 여자.그 여자가 결국 재석의 아내가 되었다.시호가 질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시호는 정은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집요하게 매달리지 않았고, 그 부분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승리자’인 조재석에게 아무런 적의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었다.시호에게는 양심이나 도덕에 명확한 경계선이 없었다.법조차도 필요하다면 무시해도 되는 장치에 불과했다.시호에게는 목적이 필요했다.텅 비고, 상처투성이인 인생을 채워 넣을 대상이.그 거대한 표적이 된 것이 조씨 집안이었다.리아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비참한 어린 시절, 불행한 출신.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동정받아야 할 악역이 되는 건 아니야.”“네가 말하는 복수와 증오는, 결국 네 고통을 합리화하고 남에게 떠넘기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어. 그 대가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렸을 뿐이지.”리아의 시선이 시호를 정면으로 꿰뚫었다.“네 인격의 바탕에는 처음부터 악의가 있었어.”마지막 한마디는 결정타였다.시호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숨은 가빠졌지만, 반박할 말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그 틀 안에서 모든 악행을 정당화해 왔다.그 자체가 이미 자기기만이었다.그리고 지금 그 가면이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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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6화

이 판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당연히 정은의 협조도 포함돼 있었다.졸업식에서 정은이 국가안보 관련 부서에 연행되는 장면은 시호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낮추는 역할을 했다.그 덕분에 시호는 짧은 시간 안에 조씨 집안을 향해 움직일 수 있었고, 결정적인 수를 두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이제 시호는 완전히 만천하에 드러났다.계획대로라면, 이쯤에서 모든 판은 끝나야 했다.정은 역시 풀려났어야 했다.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이상해.’재석의 표정이 굳었다.“어머니 잘 부탁해. 난 먼저 가볼게.”짧게 말한 뒤, 재석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멀어지는 뒷모습에는 차가운 기운과 함께, 설명하기 힘든 살기가 서려 있었다.지훈이 낮게 중얼거렸다.“설마... 또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막이 내려간 연극에서 배우들은 차례로 무대를 떠난다.강서원 역시 마침내 ‘집이 된 병원 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됐다.퇴원 전날, 강서원은 각 VIP 병동 간호 스테이션의 간호사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건넸다.“세상에... 금이잖아요?”상자를 열자 윤기가 흐르는 금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간호사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최근 몇 년 사이 금값은 미친 듯이 올랐다.이제는 현금보다 금이 더 반갑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강서원의 선물은 말 그대로 마음을 정확히 찔렀다.“강서원 사모님 퇴원하신다니까... 괜히 섭섭하네요.”“야야야, 섭섭하긴 뭐가 섭섭해. 여기가 좋은 데도 아니고, 나가면 다시는 안 오는 게 최고지.”“아 맞다, 맞다. 내가 말실수했네.”“와... 이게 진짜 재벌인가 보다. 금을 선물로 주네. 갑자기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싶다.”“...”해가 질 무렵, 강서원은 남편과 아들, 그리고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오랜만에 마주한 익숙한 저택이었지만,강서원의 마음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이제는 무언가를 바라지도... 무언가를 더 가지려 애쓰지도 않았다.그저 살아 있다는 것.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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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7화

조사관 두 명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총장님 말씀은 소정은 씨가 개인 실험실을 설립하게 된 책임이 학교 측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솔직히 말해,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었다.학교로서는 더욱 불리한 해석이었다.이 질문의 의도는 명확했다.송영한에게 말을 바꾸게 만들고,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그리고 그 책임을 떠안기 가장 좋은 대상은... 이미 연행돼 조사받는 입지가 위태로운 정은이었다.사실, 아주 잠깐.송영한의 마음이 흔들린 순간도 있었다.총장이라는 자리는 본질적으로 학교와 한편이 되어야 한다.어떤 상황에서도 학교의 명성과 체면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그러나 송영한은 한 사람의 인간이기도 했고, 교육자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었다.‘만약 나까지 사실을 왜곡한다면... 그때는 무슨 자격으로 학생들 앞에 설 수 있지?’‘교육의 의미는 어디로 가고, 한 사람으로서의 양심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고민은 길지 않았다.불과 몇 초였다.송영한은 고개를 들고 분명하게 말했다.“우선, 이 사안에 대해 학교 측에 과실이 있었던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조사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무한 실험실’의 설립 과정은 모든 행정 절차를 거쳤고, 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이미 조사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송영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마지막으로, ‘무한 실험실’의 연구 성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서비대는 개방적인 학문 환경을 지향하며, 학생의 연구 역량을 최대한 보장하는 학교입니다.”“만약 학생이 스스로 실험실을 설립할 능력을 갖추고, 그 결과로 학문적 성과를 확장할 수 있다면, 학교는 당연히 이를 지지하고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더 이상 캐물을 여지는 없었다.두 조사관은 다시 한번 시선을 교환했다.“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님. 이제 한중기 부총장님을 모셔도 되겠습니다.”“알겠습니다.”송영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다 문득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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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8화

서민호는 맞은편에서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정은을 바라보다가 문득 웃었다. 참을 새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두 사람이 오늘 처음 마주한 것은 아니었다.예전에 맥스 군도로 향했던 작전 당시, 조사팀의 팀장이었던 서민호는 정은 앞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챈 조재석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그 순간, 민호는 턱이 빠질 뻔했다. 수년간 알고 지낸 조재석은 언제나 침착했고,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는 인물이었다.조재석은 한 번도 선을 넘는 법이 없었고, 상황에 맞춰 정확하게 반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스로 설정한 이성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결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정밀한 기계 같았다.그런데 정은의 존재는 ‘조재석이라는 기계’만을 위해 설계된 오류처럼 보였다. 정은은 마치 아주 사소한 틈 하나만으로도 완벽하던 ‘조재석이라는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대단한 존재였다. 민호는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았다. 이미 몇 번째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부재중 전화와, 쏟아지듯 도착한 문자 메시지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맛있어요?”민호가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식사는 괜찮네요.”민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떨렸다.“식사 끝나면, 이제 돌아가도 되겠어요?”상황만 놓고 보면, 조사받는 쪽이 민호인 것처럼 들릴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박힌 돌이 굴러온 돌에게 돌아가도 되느냐고 묻고 있었다.민호 자신도 웃음이 나왔다.정은은 씹던 동작을 멈추고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서 팀장님, 이전에 상부와 최소 2주는 협조하기로 말씀 나누지 않으셨나요?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요. 왜 벌써 돌아가라는 말씀이세요?”말을 마치자마자, 정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요?”민호는 숨기지 않았다.“임시호 건은 원래 계획대로 진행 중이었습니다. 임시호에게 추적 장치를 심어두고, 그 사람을 통해 국내에 잠복한 H국 세력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잠시 말을 멈췄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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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9화

“뭐라고요?”민호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나가면 나가는 거지, 적절하고 말고가 어딨어?’정은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저는 앞으로도 학계와 교육계에서 계속 활동해야 합니다. 명성은 제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번 일에 대해 공식적인 발표나 입장 표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말끝을 조금 낮추며 덧붙였다.“세부 내용을 밝히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 결백은 분명히 해주셔야죠.”졸업식이라는 공개된 자리에서 조사 대상으로 연행됐고, 인제 와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조용히 빠져나가라니.이 상황은 정은을 무엇으로 보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정은이 조사에 협조한 이유는 임시호를 붙잡아 곁에 숨어 있던 시한폭탄을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굴욕을 감수하며 끌려온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상하관계에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정리하자면, 정은과 조사팀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였다.그리고 이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이상, 정은이 아무 설명도 없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민호는 말문이 막혔다. 시선을 피하는 눈빛에는 묘한...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상부에 문의한 적이 있었다.외부 공개가 어렵다면 내부 공지라도 내는 게 어떻겠느냐고.하지만 돌아온 답은 애매했다.결정하지 않은 듯한 태도, 무언가를 재고 있는 기색.그 애매함 때문에 민호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정은은 이 상황을 호락호락 넘길 인물이 아니었다.이렇게 빠르게 상황을 짚고, 직접 문제를 제기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정은이 손가락을 굽혀 민호 앞의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어떻게 하실 건가요?”그제야 민호가 정신을 차렸다.“일단은... 소정은 씨가 먼저 돌아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사팀에서도 이후에 관련 조처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은의 속이 가라앉았다.‘일단은 돌아가라?’‘이건 확정이 아니라 여지를 남기는 표현이네.’‘된다는 말도 아니고, 안 된다는 말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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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0화

임씨 집안 본가.요즘 들어 집 안 공기가 유난히 무거웠다.장인화는 남편 임정식을 한 번 보고, 상석에 앉아 있는 시아버지 임용재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채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때 장인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뒤에도 바로 받지 않고, 잠시 벨 소리만 흘려보내며 남편에게 시선을 옮겼다.임정식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또 서준이야?”“네. 아마 정은 씨 소식 물으려고 전화했을 거야.”임정식은 더 말하지 않고 다시 침묵했다. 전화는 끝내 받지 못한 채 자동으로 끊어졌다.장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제는 민지가 전화했어. 오늘은 서준이까지... 정말 많이 다급한 모양이야.”“급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임정식은 전화받지 않아도, 아들과 며느리가 무슨 말을 할지 훤히 알고 있었다.요지는 하나였다. 하루라도 빨리 정은을 조사팀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것.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성급히 빼내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조사팀은 애초부터 정은의 결백을 공식적으로 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그 이유는... 어쩌면 임정식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았다.정은은 지금 모든 흐름의 중심에 놓인 핵심 인물이었다.임정식이 가진 권한으로 당장 풀어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그러나 그렇게 하는 선택이 정말로 가장 나은 결론일까?우선, 정은의 명성은 지켜지지 않는다.사람들은 여전히 왜 연행됐는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온갖 억측을 늘어놓을 것이다.그리고 정은에 대한 조사는 곧 ‘무한 실험실’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된다.그 안에 속한 서준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그리고 서준의 뒤에는 임씨 집안 전체가 있다.이번 일을 흐지부지 넘겨버린다면, 언젠가 그 모호한 결과는 임씨 집안을 겨냥한 시한폭탄이 될 수 있었다.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필요할 때 꺼내 불을 붙일 수 있는 위험한 불씨.정은을 나오게 하는 건 쉽다.하지만 정은을 아무 흠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나오게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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