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1811 - 챕터 1820

1952 챕터

제1811화

“얼마 전에 배웠어. 재석이가 가르쳐 줬거든. 재석이가 요즘 너무 바빠서 도시락을 병원에 못 가져가니까, 이 중대한 임무를 나한테 맡겼지.”민슬아는 공기 속에 퍼진 갈비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그럼 우리 조 변, 꽤 재능 있는 거네.”“그럼! 내가 뭐든 못하는 게 없지. 이제 ‘은리’랑 ‘화리’ 먹이는 것도 내가 한다고!”이 이야기가 나오자, 슬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조금만 쥐 집을 때 손 덜덜 떨고, 파리만 봐도 속 울렁거리는 게 가능하다는 기준이면... 그래, 인정해 줄게. 간신히 먹이기는 하더라.”“근데 다음엔 좀 조심해. 쥐를 덜덜 떨면서 들고 있다가 벽에 던져버려서 ‘은리’가 너를 공격할 뻔했잖아. 그리고 메스꺼울 때 ‘화리’ 앞에서 토하지 마. 한 번 겪고 나더니, 이제 너만 보면 스트레스 반응 오잖아.”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이 정도면... 이 장비는 꼭 분해해야 하는 거 아니야?’“몇 번만 더 하면 나아질 거야!”슬아가 말했다.“아니, 그냥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언젠가 걔들이 참다참다 너한테 동시에 달려들까 봐 무서워.”한 시간 뒤, 갈비탕이 완성됐다.지훈은 주방으로 들어가 불을 껐다.그때 슬아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슬아가 막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 지훈은 마치 생선 비린내를 맡은 고양이처럼 주방에서 휙 튀어나왔다.“흥! 또 누가 메시지 보냈어? 10번의 그 순수한 남학생이야, 아니면 12번의 그 투자은행 엘리트야?”슬아가 물었다.“조 변, 냄새 안 나?”“무슨 냄새?”“푹 삭은 질투 냄새.”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슬아는 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지훈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봐. 한설 선배가 보낸 거야.”지훈은 무심코 화면을 눌렀고, 다음 순간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슬아는 영문을 몰라 속으로 생각했다.‘뭐야? 한설 선배가 방금 보낸 메시지, 나도 아직 안 읽어 봤는데...’지훈이 이를 갈았다.“좋아, 좋아. 열여섯 명 쫓아냈더니 이번엔 스무 명이야? 끝이 없네, 진짜?”슬아
더 보기

제1812화

지훈은 갈비탕을 용기에 담아 포장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슬아에게 물었다.“같이 갈래?”“어?”“병원. 너 아직 우리 어머니 못 봤잖아.”슬아의 눈이 살짝 돌아갔다.“조 변, 이거 혹시 나 데리고 부모님 뵈러 가는 거야?”지훈이 말했다.“안 돼? 방금 내 정체성 인정했잖아. 그럼 나도 권리 좀 행사하면 안 되나?”십 분 뒤, 슬아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무릎에는 강서원을 가져다줄 갈비탕을 올려놓았다.“조 변 어머니는... 어떤 분이셔?”지훈은 잠시 생각했다.“좀 무서워. 성격도 썩 좋은 편은 아니고, 사람 보는 기준도 되게 까다로워. 근데 요즘은 꽤 많이 부드러워지셨어.”슬아는 앞부분만 귀에 들어왔다.뒷말은 들리긴 했지만, 마음에는 안 남았다.‘설마... 드라마에 나오는 그 악명 높은 시어머니 타입?’“저기... 나 지금이라도 차에서 내려도 될까?”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꿈도 꾸지 마.”...병원, VIP 병동.지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자마자, 담당 의사가 다가와 그를 붙잡았다.“조 변호사님, 마침 잘 오셨어요. 강 여사님 최근 상태에 대해 잠깐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슬아가 물었다.“어? 그럼 나는?”지훈이 말했다.“502호실이야. 너 먼저 가 있을래? 갈비탕 식겠다.”“알겠어.”슬아는 혼자 남친 엄마를 먼저 만난다고 해서 딱히 부담되지는 않았다.아까 지훈이 직접 말하지 않았나?자기 엄마, 엄청 까다롭다고.‘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까다로운지 한 번 보자.’“502...”슬아는 병실 번호를 확인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그때, 중년 여성이 비틀거리며 슬아 쪽으로 들이닥쳤다.퍽!“으윽!”슬아의 허리에 충격이 와, 숨이 확 멎었다.“아니, 이 사람은 대체...”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딪친 중년 여성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신음하기 시작했다.“아이고, 아이고! 요즘 젊은 것들은 눈이 장식이야? 내가 오는 게 안 보였어? 먼저 내 쪽으로 와서 들이받아 놓고! 너 내가
더 보기

제1813화

“퉤, 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나 지방 흡입하러 온 거야!”이추애는 이런 말을 극도로 꺼렸다.말을 마치고도 찝찝했는지, 연달아 몇 번이나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그때, 병원 방송이 울려 퍼졌다.“이추애 님, 2층 수술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추애 님...”“나 오늘 일정 바빠서 너희랑 더 엮일 시간 없어! 특히 이 아가씨, 눈 크게 뜨고 숨도 쉬지 말고 앞좀 잘 보고 다녀!”말을 끝내자마자, 이추애는 돌아서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사라졌다.슬아는 강서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 안 계셨으면... 저 진짜 뺨 맞았을 거예요.”강서원이 담담하게 말했다.“별말을 다 하네. 봤으니까 말린 거지. 이추애는 원래 그래. 입도 거칠고, 성질도 급하고, 손부터 올리는 사람이라.”예전의 강서원이라면, 이런 부류와 얽히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다.이추애가 참석한다는 얘기만 들려도, 그 자리는 아예 가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더라도, 최대한 멀리 피했다.두려워서가 아니었다.애초에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싸움이 나면 이기든 지든, 그 순간 이미 자신의 격이 떨어진다고 여겼다.그런데... 오늘처럼 정면으로 부딪혀, 속 시원하게 한 판 붙고 나니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사람이라는 게, 너무 오래 점잖게만 굴면 가끔은 이렇게 거칠어져야 속이 풀리는 법이었다.슬아는 눈앞의 강서원을 바라봤다.혈색이 좋고, 눈꼬리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묘하게 익숙했다.‘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은데...’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 떠오르지는 않았다.강서원의 시선이 슬아가 들고 있는 보온병으로 내려갔다.“아가씨, 병문안 온 거야?”“네. 남자친구 어머니가 입원해 계셔서요. 방 찾느라 정신없다가, 아까는 피할 틈도 없이 부딪쳤어요.”“몇 호실인데? 내가 같이 찾아줄게.”강서원은 이 병원 VIP 병동의 ‘터줏대감’이었다.원래 입원 환자도 소수여서, 누가 어디에
더 보기

제1814화

그 순간, 강서원의 머릿속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슬아의 손바닥 위에서 거미가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자, 그제야 이 장면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강서원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슬아에게 물었다.“이거... 슬아 씨 애완동물이야?”슬아는 진지하게 말했다.“아니요. 제 친구예요.”“그럼... 슬아 씨 말도 알아들어?”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전부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영특해서요. 몇 가지 정해진 신호나 명령 정도는 알아들어요.”“이건 좀... 대단한데.”강서원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최근 병원에 입원해 할 일도 없다 보니, 하루 대부분을 핸드폰으로 숏폼 드라마를 보며 보냈고, 그 덕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많았어?’‘무슨 현학적 재벌 친딸, 점쟁이 여주, 천재 무당까지...’강서원은 그런 드라마를 골고루 챙겨 봤다.“물지는 않아?”강서원이 다시 물었다.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물어요.”“너네 집안... 혹시 독 쓰는 쪽이야?”슬아가 잠깐 머뭇거렸다.“음... 그런 단체는 소설에나 나오고요. 저희는 교파 같은 건 없고, 그냥 마을 단위예요.”“알겠다! 그럼 그쪽 지방이지?!”강서원의 눈이 반짝였다.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세상에... 숏폼 드라마 여주인공이 지금 내 눈앞에 있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씀하세요.”“대체 우리 아들 어디가 좋아서 만나는 거야?”지훈이 어이가 없었다.슬아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네...?”강서원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지훈이는 솔직히 말해서, 너한테 너무 과분하지 않니.”지훈은 말문이 막혔다.‘와... 진짜 친엄마 맞네.’슬아도 좀 당황스러웠다.‘두 번 본 게 전부인데, 남자친구 어머니가 나한테 이렇게 관심 많아도 되는 건가?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운데...’슬아가 얼른 말을 돌렸다.“저기... 어머니, 갈비탕부터 드실래요? 식기 전에요.”지훈도
더 보기

제1815화

논문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이 시작됐다.보통은 트집 잡는 순서였다.목표는 단 하나.대학원생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발표실에 앉은 교수들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누가 먼저 할까?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봐주려는 게 아니었다.정은의 이 논문은... 이미 학술지 ‘네이쳐’에 실린 논문이었다.그렇게 권위 있는 학술지, 그렇게 까다로운 심사위원단, 전 세계 연구자들의 공개 검증까지 거친 결과물이다.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흠을 못 찾았는데,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대단한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총장 송영한은 수십 년간 총장을 지내면서도, 박사 졸업 논문 심사에서 대학원생 하나가 교수 전원을 침묵하게 만드는 장면은 처음이었다.그는 눈짓으로 부총장 한중기를 가리켰다.‘빨리 질문 좀 해봐요.’한중기는 얼굴에 난처함을 그대로 드러냈다.‘사양합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두 사람 다 생명과학에 관한 분야 전공자는 아니었다.학문적 식견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행정에만 매달리느라 연구 감각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이 상황에서 질문을 하라고? 뭘 물어?’송영한은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본 뒤, 더는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주 교수님, 시작 좀 해 주시죠.”호명된 주 교수는 오십 대 초반으로, 이 자리에 모인 교수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차출’당했다.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소정은 선생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여쭤보고 싶은’이라는 표현부터가 이미 많은 걸 말해 주고 있었다.주 교수가 길을 터 주자 다른 교수들도 그대로 따라 했다.질의응답 시간은 어느새 ‘대형 공개 질의 및 해설 세션’이 되어 있었다.모르는 것, 늘 궁금했지만 그동안 묻지 못했던 것들을 그냥 하나씩 던지면 됐다.모든 답은 단상 위의 정은에게 있었다.정은은 단 하나의 질문도 흘려보내지 않았다.이 ‘답변’은 한 시간 반이나 이어졌다.아래에서는 교수들이 돌아가며 질
더 보기

제1816화

부부로 산 세월이 수십 년이다 보니, 이미숙은 한눈에 소진헌의 속내를 알아봤다.“자, 오늘은 딸 졸업식이에요. 갱년기 지나고 너무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소진헌이 코를 훌쩍였다.“누, 누가 그래. 나 감동해서 그런 거야!”이미숙은 앞으로 다가와 정은을 꼭 안아 주었다.“우리 딸, 축하해. 넌 언제나 엄마의 자랑이야.”정은도 조심스럽게 품에 안겼다.엄마의 품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다.어릴 때처럼 무의식적으로 살짝 몸을 비볐다.설명하기 힘든 시큰함이 코끝으로 올라왔고, 눈가가 살짝 뜨거워졌다.그때, 이미숙이 딸의 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신탁 통장 하나 만들어 놨어. 엄마가 주는 졸업 선물이야. 이제 평생 돈 때문에 고개 숙이거나 고민하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것만 보고 앞으로만 가.”“엄마...”“우리 공주님, 너무 감동하지는 말고. 지금 울면 화장 다 번진다.”정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소진헌이 투덜댔다.“두 사람은 뭐 그렇게 귓속말을 해?”이미숙이 흘겨봤다.“소 선생님, 귓속말인 거 알면 좀 묻지 마요.”“근데, 조 서방은 어디 갔어? 왜 안 보여?”이런 날, 재석이 빠질 리가 없었다.소진헌은 앞뒤로 한 번 더 둘러봤지만, 끝내 재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정은이 설명했다.“원래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하기로 돼 있던 교수님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입원하셨어요. 그래서 재석 씨가 대신 투입돼서 세미나에 가게 됐고요. 일정이 닷새예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지금 돌아오는 중이에요.”“그럼 됐다. 이런 중요한 날 못 오면, 평생 후회할거야.”“정은 언니... 제가 아버님, 어머니랑 같이 사진 찍어 드릴까요?”민지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다.아이는 이미 임수인이 안고 있었기에 민지는 손이 자유로웠다.정은이 웃었다.“그래.”소진헌은 바로 깃과 소매를 정리했고, 이미숙도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정돈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부부가 좌우에 서고, 정은이 가운데 섰다.민지가 외쳤다.“카메라 보
더 보기

제1817화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는 단 한마디는, 마치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찬물을 들이붓는 것과 같았다.순간, 현장은 폭발하듯 술렁이기 시작했다.“뭐야? 왜 국가안보 관련 부서가 여기까지 와?”“교육부나 학회 쪽에서 나오는 거야 흔하지. 근데 국가안보 관련 부서라니, 이건 좀...”“...”웅성거림은 점점 낮아졌고, 마침내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소정은이... 무슨 사고를 친 거야?”그 말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주문처럼 작용했다.억눌려 있던 악의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세상에, 국가안보 관련 부서면 나라 지키는 곳 아니야? 설마 소정은... 간첩질이라도 한 거야?”“그걸 누가 알아? 겉모습만 보고 사람 속을 다 알 수는 없는 거지.”“소정은이 ‘무한 실험실’에서 매년 쏟아내는 연구 성과가 얼만데. 해외 쪽에서 접근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에이, 미쳤나 봐. 어떻게 그런 짓을 해?”“그러니까 말이야. ‘무한 실험실’이 학교 밖에 따로 있고, 연구 성과도 학교와 공유하지 않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나라 팔아먹으려고 그랬던 거 아냐? 진짜 어이가 없다.”“야, 너희 말 너무 심한 거 아냐?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큰 죄를 멋대로 씌워?”정은을 두둔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맞아! 정은 선배 실력 알잖아. 앞날이 훤한 데다, 총장님이 직접 붙잡고 교수로 남아 달라고 할 정도였어. 그런 사람이 굳이 나라를 팔 이유가 어딨어?”“그러니까. 정은 선배 돈도 부족할 게 없잖아. 어머니는 베스트셀러 작가에다 제작자고, 해마다 인세만 수십억이라던데. 남편도 조재석 교수 같은 명문가 도련님이고. 갖고 싶은 거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이건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소진헌과 이미숙은 뒤늦게 상황을 인식하고, 거의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무슨 일이 있어도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 정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손이 나타났다.
더 보기

제1818화

“어? 그게 무슨 뜻이야?”“집에 가서 기다려. 내가 보기엔 정은 누나가 연행된 순간부터, 나랑 너, 그리고 진일 선배랑 탁재민까지 이미 관련 부서의 감시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커.”민지는 얼굴이 굳은 채로 중얼거렸다.“그, 그렇게 심각한 거야?”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기라곤 전혀 없는 눈빛이었다.“응. 꽤 심각해.”국가가 직접 나선 상황이었다.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일 리 없었다.민지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그, 그럼 우리 집에 가서 아버님이랑 어머님께 여쭤보자. 아니면 할아버지께라도... 그래, 그분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고 계실 거야...”“응.”“잠깐만...”민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서준이 시선을 보냈다.“왜?”“이상해. 왜 조재석 교수님은 아직도 안 보이는 거야?”서준도 그제야 멈춰 섰다.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아내가 졸업식 무대에서 끌려 나간 이 시점까지, 조재석 교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전 교수님한테 전화해 봐.”“알겠어. 지금 바로 할게...”곧바로 통화가 연결됐다.민지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빠르게 말했다.“전 교수님, 저 하민지예요! 혹시 조재석 교수님 지금 어디 계신지 아세요? 조 교수님이 정은 언니...”‘정은 언니’라는 말이 나온 순간, 전진욱의 목소리가 확 바뀌었다.[너... 정은이 후배 맞지?!]“네, 맞아요!”[잘 전화했어. 정은이 어디 있니?! 방금부터 계속 전화가 안 돼서 학교에도 연락했는데, 아무도 모르겠다고 하고... 지금 당장 시립병원으로 와야 해. 재석이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어. 지금 수술실이야. 아직...]그 뒤의 말은 민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머릿속이 새하얘지며, 귓가에서 ‘웅’ 하는 소리만 울렸다.서준은 민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걸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민지는 굳어버린 눈을 힘겹게 굴려 서준을 바라봤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참아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졌다.“조재석 교수님이... 교통사
더 보기

제1819화

갑자기 전일의 발걸음이 멈췄다.몇 걸음 나아가던 전일은 방향을 바꿔 다시 돌아섰고, 곧장 관련 부서 인원들 앞에 섰다.선두에 서 있던 남자는 전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더 할 말이 있습니까?”전일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공무 수행 중이라고 했죠? 그럼 공무원증 같은 것을 좀 볼 수 있을까요?”선두의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렸다.‘하...’역시 소정은 밑에서 일하던 사람답다.의심하는 타이밍까지 똑같았다.“물론입니다.”공무원증이 내밀어졌다.전일은 대충 보지 않았다. 눈으로 훑으며 세부 사항을 확인했다.잠시 후, 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됐어요.”그제야 전일은 재민과 함께 실험실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건물 전체에 이미 통제선을 둘러쳤고, 몇 대의 검은 관용차 안에서는 군복 차림의 인원들이 희미하게 보였다.재민은 숨이 막히는 기분에 본능적으로 전일의 얼굴을 확인했다.전일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분명히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이거... 생각보다 큰 일이 터진 거 아니에요?”전일은 말없이 재민을 데리고 조금 더 걸었다.사람들과 차량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만큼 거리를 벌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일단 흥분하지 말고, 정은이한테 먼저 연락해. 정은이가 뭐라고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해.”“네... 알았어요.”전일은 핸드폰을 꺼내 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돌아온 것은 기계적인 안내음뿐이었다.연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반복됐다.전일의 마음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한층 더 짙어졌다.전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재민을 바라봤다.“정은이에게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네?”재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말이 안 됐다.정은은 늘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재민에게 정은은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반면 전일은 비교적 침착했다.정은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전일은 곧바로 민지와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두 사람에게서 정은이
더 보기

제1820화

강서원이 쓰러지는 순간, 고요하던 바다 위로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오는 것 같았다.피할 틈도 없이, 감당할 시간조차 없이, 재석의 죽음이라는 현실이 모두의 머리 위로 그대로 떨어졌다.민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리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고, 조금만 더 흔들렸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아니야... 말도 안 돼... 조재석 교수님이잖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죽어...”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단 하나였다.‘조 교수님이 돌아가셨으면... 정은 언니는 어떡해?’‘정은 언니도... 죽는 거 아니야?’“난 못 믿어!”민지는 그렇게 외치며 수술실 쪽으로 달려들려 했다.서준은 있는 힘을 다해 민지를 붙잡아 끌어당겼다.“여보, 정신 차려!”“여보, 당신도 안 믿지? 그렇지?”서준은 고개를 숙였다.“의사는 거짓말 안 해.”“너...”민지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서준은 말없이 민지를 끌어안아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지훈과 의료진이 함께 강서원을 응급처치실로 옮긴 뒤, 지훈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섰다.마치 삶을 지탱하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사라진 사람처럼, 남은 건 텅 빈 몸뿐이었다.“아버지...”지훈은 조기봉을 바라봤다.그러나 조기봉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지훈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한 박자 늦게, 거대한 슬픔이 밀려왔다.지훈은 복도 한쪽에 주저앉아 손등을 악물고 울었다.울음은 짐승처럼 거칠고 처절했다.“재석아... 너무 억울하게 갔다...”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복도 끝 모퉁이에 서 있던 임시호가 지켜보고 있었다.시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모두가 무너지는 장면을 감상하듯 바라봤다.마치 아주 흥미로운 연극을 보는 관객처럼,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환자 보호자이신가요?”간호사가 다가와 물었다.시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간호사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더 보기
이전
1
...
180181182183184
...
196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