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Bab 1851 - Bab 1860

1892 Bab

제1851화

전화기 건너편에서 봉수진과 이춘재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할머니.”현빈이 낮고 차분히 말했다.“약속드리겠습니다. 올해 안에는 꼭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정말이야?]봉수진의 목소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그럼 약속한 거다. 이번엔 집 문 앞에서 도망가기 없기!]“네.”[아이고, 잘됐다!]봉수진은 울먹거릴 정도로 기뻐했다.이춘재 역시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두 노인에게는 이제 매일이 덤이었다.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가족이 다시 모이는 걸 보고 싶어 했다.그런데 현빈의 가출은 그들의 가슴에 오래 박힌 가시였다.봉수진은 수없이 자책했다.정은도, 현빈도 모두 자기에게는 소중한 외손녀와 외손자였으니까.누구 한쪽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그저 시간이 지나 모든 상처가 아물기를, 현빈도 정말로 내려놓기를 바랄 뿐이었다.전화가 끝나자, 현빈은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 사이 두리는 걸음을 멈춘 채 임민의 입을 막아두고 있었다.손바닥에 눈물과 콧물이 잔뜩 묻어 더할 나위 없이 난감한 표정이었다.현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두리는 다시 이를 악물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잠깐.”두리가 멈춰 섰다.현빈이 손을 들어 올렸다.그건 분명한 ‘정지’의 신호였다.두리는 즉시 임민을 내려놓았다.현빈이 임민 앞으로 다가갔다.“자기 이름이 뭔지 알아?”임민은 고개를 저었다.“기억해. 한 번만 말한다. 너 이름은... 심윤우다. 성실할 윤, 지켜낼 우.”임민은 멍한 얼굴로 따라 말했다.“심... 윤우...”현빈은 아이를 깊게 내려다보았다.“진짜 기억이 사라졌든, 사라진 척하는 거든... 네가 살아난 이유는 하나다. 내가 지켜야 하는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네 목숨 한 번 살려준 거다.”‘그 아이에게 덕을 쌓는 셈이지.’몇 년 후, 심윤우는 알게 된다. 자기와 정은의 뱃속 아이 사이 인연은 열 살 그 해부터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아이에게 심윤우는 이미 빚을 지고 있었다.하지만 그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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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2화

정은이 조사팀에서 나오자 비로소 그동안의 전말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모든 게 함정이었다.아주 오래전부터 정은이 직접 깔아둔 판이었다.그때 열렸던 학술 세미나에서 임시호가 먼저 접근해 왔을 때부터 정은의 의심은 시작됐다.이후 강서원의 입을 통해 임시호가 교묘하게 강서원과 조씨 가문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듣게 되자 정은은 마음속 추측을 거의 확신으로 굳혔다.서연희를 도와준 뒤 다시 서연희를 죽인 의문의 인물.맥스 군도 지하 비밀 연구소의 출입 시스템에 등록된 ‘HO’라는 코드.그 모든 조각이 향하는 곳은 결국 하나였다.임시호.하지만 임시호는 큰 그림을 품고 있었는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정은은 오히려 그 느긋함이 더 거슬렸다.‘기다릴 거면, 내가 서두르게 해주지.’그래서 판을 바꿨다. 임시호의 음흉함을 드러내게 할 기회를 일부러 만들어주기로.그 마지막 미끼가 바로 ‘구름’ 업그레이드 의뢰였다.임시호는 드디어 무한 실험실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통행권을 손에 넣었다.그 역시 정은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결국 욕망이 신중함을 이겼다.놓칠 수 없는 유혹.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그 뒤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죠.”정은이 말을 마치자 진일은 멍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그가 연구 속에 파묻혀 세상과 단절돼 있던 동안 이렇게 많은 소용돌이가 있었다니.“나... 하나도 몰랐네.”민지가 바로 받았다.“진일 선배는 실험이랑 논문만 보는 사람인데, 뭘 알겠어요.”재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일의 복사본이나 다름없었다. 둘이 죽이 맞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무한 실험실의 재가동은 정은이 다시 ‘학교–집–실험실’을 반복하는 하루를 시작한다는 의미였다.슬아는 한 번 정은을 찾아왔다.슬아와 강서원이 진행하는 항암 치료 지원 재단 설립식에서 정은에게 개막 연설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그날 정은은 실험에 한창이었다.미팅은 내일로 잡아두자고 하려던 참이었지만, 슬아는 성격대로 곧바로 말했다.“제가 그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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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3화

“저요?”“네, 정은 언니요.”“제가... 가능한가요? 전 그쪽 분들하고는 원래 인연도 없고...”“그게 오히려 좋아요. 재벌 모임도 아니고, 사교 모임도 아니고, 정은 언니는 연구계의 대표잖아요. 그 격차가 사람들한테 큰 임팩트를 줄 거예요.”“행사는 언제예요?”“이번 주 토요일이요. 시간 괜찮으세요?”“괜찮아요.”결국 정은은 승낙했다.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다른 이들을 돕는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슬아의 말처럼, 정은의 도움으로 더 많은 후원금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정은이 동의했다는 소식에 재석이 빠질 리도 없었다.그날 저녁,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슬아의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중간에 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너 정은 제수씨 만나고 왔지?]“응. 정은 언니가 매실차 레시피 보내줬지?”[거 봐라. 분명 네가 나한테 보내라고 시킨 거잖아. 직접 받아도 되는데 왜 우회하겠어?]슬아는 숨김 없이 인정했다.“맞지. 그래서 너 나한테 끓여줄 거야? 말 거야?”[끓여! 꼭 끓이지!]대단한 과정도 아니었다.두세 단계면 완성되는 간단한 레시피였다.그래서 슬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매실차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고 심지어 차갑게 식혀져 있었다.슬아가 신발을 갈아신자마자 지훈이 직접 컵을 건넸다.“공주님, 차 나왔습니다!”“고마워, 조 집사.”“아니, 왜 내가 갑자기 조 집사인데?”“그럼 뭐라고 부를까?”“당연히 왕자님이지!”슬아는 매실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맛을 음미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왜? 뭐야 그 표정?”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정은 언니가 끓인 것만큼은 아니네. 정말 그대로 했어?”“대충? 뭐 비슷하게?”“아, 그러면 그렇지.”“야, 끓여주기까지 했는데 불만이야?”“맛은 있어. 근데 정은 언니 버전이랑 비교하면 좀 멀었어.”“알겠어. 난 앞부분만 들을게.”...밤이 깊어질 무렵, 정은과 재석이 거의 동시에 집으로 들어왔다.간단히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산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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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4화

행사장, 눈에 잘 띄지 않는 한 구석.직원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주위를 살피며 슬쩍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빨리 먹어. 지금은 다들 무대만 보고 있어서 아무도 우리 안 봐. 야, 이 스테이크 진짜 맛있다. 이거부터 먹고... 그다음에 샴페인 한 모금 마셔봐. 완전 환상적이야.”“오, 그래?”키가 큰 태영은 동기가 알려주는 대로 먹을 줄도 잘 몰랐다.스테이크도 처음 먹어보는 데다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감도 없었다.“어때? 괜찮지?”“응... 맛있다.”“많이 먹어. 어차피 공짜고, 남는 거야. 안 먹으면 아깝잖아.”둘은 오전부터 행사장에 도착해 줄곧 일했다.중간에 물만 두 잔 마셨을 뿐, 밥은 한 톨도 못 먹은 상태였다.지금은 그야말로 ‘굶주린 귀신’ 수준이었다.“아니, 시급만 높지 않았으면 이런 알바 안 한다니까. 시간 길지, 힘들지.”두 사람은 서비대 신입생.같은 기숙사에 살고, 같은 지역 출신이라 금세 친해졌다.그때, 무대의 사회자가 이름 하나를 호명했다.“소정은 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두 사람의 손이 멈추고, 동시에 무대를 바라봤다.정은은 네이비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올린 채 고요한 기품을 품고 무대로 걸어 나왔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과학과 기부의 연결 고리를 자연스럽게 풀어내자 예태영의 눈이 커졌다. 입안의 음식이 거의 흘러나올 뻔했다.“저... 저거 우리 소정은 교수님 아니야?”맞았다.학교 규정상 정은은 1년 동안 학부 지도교수를 겸임해야 했고, 마침 담당이 예태영과 고영환이 속한 학년이었다.개강 첫날 모든 학생이 깜짝 놀랐다.남녀 구분 없이 지나치게 젊고 지나치게 예쁜 지도교수에 압도됐다.강의실은 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조용했다.정은이 물었다.“저기... 왜 아무도 말 안 하세요? 제가... 많이 엄격해 보이나요?”아니었다.너무 아름다웠다.예태영은 자기소개 때 긴장한 나머지 얼굴이 터질 듯 빨개져 원숭이 엉덩이처럼 변해버렸고, 그날 이후로 반에서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됐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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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5화

정은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렇다는 말씀인가요?”남자는 눈치가 전혀 없는 편은 아니었다.오늘 정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도 단정했으며, 태도에서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자연스럽게 오늘 행사에 초대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이런 자리에 오는 사람들은,대부분 돈이 있거나, 배경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하필이면...’그제야 남자는 상황을 이해했다.이 두 학생의 지도교수였다.‘재수 없게 걸렸네.’속으로 욕을 한 번 삼킨 뒤, 얼굴에는 서둘러 웃음을 걸었다.“하하, 오해입니다. 아까는 그냥 농담 삼아서 한 말이었습니다.”영환이 코웃음을 쳤다.“농담? 눈 뜨고 거짓말을 그렇게 해요? 이제 와서 겁나니까 말 바꾸는 거죠?”남자는 발끈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회사가 원래 대학생들 아르바이트 많이 연결해 주는 걸로 평판이 좋습니다. 아니었으면 이런 일에 두 분을 부르지도 않았겠죠. 뭐, 다 오해고요. 괜히 일이 커졌네요.”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냈다.두 묶음.영환과 태영이 각각 정확히 받아야 할 금액이었다.남자는 웃는 얼굴로 영환과 태영에게 내밀었다.‘돈은 이미 준비돼 있었네. 줄 생각이 없었을 뿐이지.’영환은 그 돈을 확 낚아챘다.태영 몫까지 한 번에 잡아챈 건, 괜히 다시 말을 바꿀까 봐서였다.빠르게 세어 보고, 금액이 맞는 걸 확인한 뒤에야 태영에게 건넸다.태영은 말없이 돈을 받았다.그때, 영환의 시선이 정은에게 한 번 스쳤다가 다시 불안해 보이는 남자에게 돌아왔다.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오늘은 끝까지 간다.’“이야, 우리 알바비 딱 맞네. 그럼 회사 문제가 아니라 아저씨가 중간에서 떼먹으려던 거였네요?”남자의 표정이 굳었다.사실이었다.하지만 속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이렇게 입 밖으로 드러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무슨 소리야? 돈도 다 받아 놓고 더 뭘 바라? 적당히 해.”영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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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6화

태영과 영환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그리고 말없이 바로 따라붙었다.여기서 학교까지 택시를 타면 요금이 만만치 않았다.택시비로 허리가 휘는 거리였다....셋이 차에 올라 자리를 잡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재석이 백미러로 뒤를 힐끗 보며 잠시 멈칫했다.뒤이어 태영과 영환도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 동시에 멈칫했다.정은이 안전벨트를 매며 자연스럽게 말했다.“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야.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우연히 만났어. 학교 가는 길이라 같이 가는 거고.”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영환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크게 말했다.“조재석 교수님 안녕하세요! 말로만 듣다가 오늘 처음 뵙습니다!”“와... 진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재석이 웃으며 말했다.“실망했어?”“아뇨, 절대요!”“조 교수님이랑 소 교수님, 진짜 잘 어울리세요. 이 조합은 실망할 수가 없습니다.”재석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은 참 잘해.’영환이 사람 사이를 휘젓는 타입이라면, 태영은 정반대였다.차가 학교 정문 앞에 멈출 때까지 태영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내리면서 고개를 숙여 조용히 한마디만 했다.“감사합니다.”차가 다시 출발하고, 두 사람은 그대로 서서 정은과 재석의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영환의 입은 쉬지 않았다.“와, 진짜 오늘 대박 아니었냐? 소 교수님은 또 왜 그렇게 예뻐? 조재석 교수님은 또 왜 그렇게 멋있고. 둘이 같이 있으니까 그냥 그림이더라.”“아, 그리고 조 교수님 논문 봤어? 진짜 말도 안 돼. 저 정도면...”말을 하던 영환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야, 태영아. 왜 그래? 기분 안 좋아?”그제야 영환은 느꼈다.태영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걸.원래 말수가 적긴 했지만, 오늘처럼 아예 침묵한 적은 없었다.“뭐라도 말 좀 해 봐.”태영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조재석 교수님... 소 교수님 남자친구야?”영환은 잠시 멈췄다가 이내 크게 웃었다.“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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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7화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정은은 소파에 앉는 순간 크게 하품을 했다.“물 마실래?”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이 물을 따라 컵을 들고 돌아서자, 이미 소파 쿠션을 끌어안은 채 잠든 정은이 눈에 들어왔다.‘많이 피곤했나 보네.’재석은 그렇게 생각했다.컵을 내려두고, 소리 나지 않게 다가가 정은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침실로 옮겨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에어컨 온도까지 맞춘 뒤, 욕실로 들어갔다.정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재석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논문을 보고 있었다.“어?”정은이 몸을 일으켰다.“나 언제 잠들었지?”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켠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세 시간이나 잤어?”집에 들어왔을 때는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왜 안 깨웠어?”“너무 곤히 자길래. 괜히 깨우기 싫었어.”“이 시간인데 당신은 왜 안 자?”“아직 논문 보고 있고...”재석이 웃으며 보온컵을 건넸다.“기다리고 있었어.”정은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내가 깰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혹시 아침까지 쭉 잤으면 어쩌려고.”“그럴 일은 없어.”그렇게 확신하는 말투에 정은이 고개를 갸웃했다.“근거는?”“안 씻고는 못 자잖아. 결국 깨게 되지.”정은은 피식 웃었다.‘맞아.’정은은 목을 천천히 돌렸다. 같은 자세로 오래 자서인지 어깨가 뻐근했다.“요즘 왜 이렇게 졸리지? 나 계속 피곤해.”“요즘 실험실 일이 많아?”“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그럼 강의가 많아?”“두 과목뿐이야. 다른 교수들은 네다섯 과목도 하잖아. 난 오히려 여유 있는 편이지.”말하다 말고, 또 하품하는 정은의 눈가가 살짝 젖었다.“나 먼저 씻을게...”정은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재석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정은이 바로 돌아보며 말했다.“당신 왜 따라와? 나 씻으려고 가는 건데.”“응, 알아.”“아는데 왜 와?”“아니까 오는 거지.”재석이 웃으며 말을 바꿨다.“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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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8화

이른 아침, 봉수진도 결국 이춘재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오게 됐다.“아니, 괜찮다니까 자꾸 병원에 가자고 하네요. 병원이 무슨 좋은 데라고요.”봉수진은 투덜거렸다. 자신은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급하게 여는 바람에 햇빛이 눈에 확 들어와 잠깐 눈물이 났을 뿐이었다.금세 괜찮아졌는데, 이춘재는 그걸로는 도저히 안심이 안 됐다.결국 병원에 와서 검사받게 했다.봉수진은 끝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따라나섰다.“보세요.”봉수진이 검사 결과지를 가리켰다.“수치 전부 정상이에요. 괜히 온 거죠.”원래는 오늘 정은이랑 재석을 집으로 불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좀 해 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이춘재는 이렇게 말했다.“괜히 온 게 아니라 다행이지. 난 앞으로도 매번 헛걸음이면 좋겠어. 당신이 계속 건강하면 그게 최고야.”봉수진은 결국 웃었다.“이제 안심됐죠?”“응.”“그럼 집에 가자.”두 사람은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중간에 3층에서 잠시 멈췄고, 그때 임산부 한 명이 올라탔다.아주 짧은 그 사이, 봉수진은 무심코 엘리베이터 밖을 훑어봤다가 눈이 커졌다.급히 이춘재의 손을 붙잡았다.“여보, 나 방금 정은이 본 것 같아요.”“뭐?”그사이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고 곧바로 1층까지 내려갔다.두 노인은 내리지 않고 다시 3층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자 이춘재, 봉수진 두 사람과 재석, 정은 두 사람이 복도에서 그대로 마주 섰다.뜻밖의 만남에 모두 잠시 굳었다.정은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디 아프세요? 왜 병원에 오셨어요?”“엄마는 알고 계세요? 제가 전화할게요.”정은이 핸드폰을 꺼내려 하자 재석이 바로 자기 것을 내밀었다.“아니야, 아니야.”봉수진이 손을 저었다.“별거 아니야. 외할아버지가 괜히 걱정해서 데려온 거야. 검사 다 했고, 아무 문제 없어.”그러다 봉수진의 시선이 재석을 지나 정은 뒤쪽 벽에 붙은 커다란 글씨에 멈췄다.산부인과.봉수진의 눈에 놀람과 기쁨이 동시에 스쳤다.“너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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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9화

소진헌은 마음 같아서는 집 뒤에서 가꾸는 텃밭을 통째로 정은이 사는 J시로 옮기고 싶었다.하지만 손이 두 개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택배로 보내자니, 아무리 신선한 채소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배송 과정에서 상하고 만다.그 외에도 정은이 좋아하는 장조림이 잔뜩 있었다.전부 진공 포장으로 싸 왔다.“아빠, 이건 너무 많아요.”정은이 다가가 냉장고 정리를 도우려 했지만, 손을 뻗기도 전에...“너는 가만히 있어.”소진헌이 바로 막았다.“차가운 거 만지는 거 아니야. 지금 네 몸으로.”재석도 얼른 거들었다.“제가 할게요. 장인어른은 말씀만 하세요.”정은이 난처하게 웃었다.“아빠, 저 그렇게 약하지는 않거든요.”이미숙이 손을 씻고 다가왔다.“이럴 때는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말을 마치고 정은 대신 냉장고 앞에 섰다.소진헌은 건네고, 재석은 받아서 옮기고, 이미숙은 정리해서 자리를 찾아 넣고...임산부는 한쪽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정은이 입을 삐죽였다.“엄마, 저 지금 감독관 된 기분인데요.”재석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더 빨리해야겠네. 안 그러면 혼나는 거 아니야?”정은은 말문이 막혔다.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 따뜻했지만, 그만큼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도 들었다.그래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밥상 차려지는 생활은 확실히 편했다.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정은의 아침, 점심, 저녁은 전부 소진헌의 손에서 나왔다.영양 배합, 고기와 채소 비율, 철분, 칼슘...소진헌은 그 모든 걸 아주 자연스럽게 챙겼다.영양 이야기만 나오면 막힘이 없었다.정은은 살짝 다가가 이미숙에게 물었다.“우리 아빠... 어디서 따로 공부하셨어요? 왜 이렇게 다 알아요?”이미숙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진헌이 국자를 들고 끼어들었다.“공부로 배운 건 이론이지. 이건 다 경험이야.”“경험?”이미숙이 웃으며 설명했다.“너 가졌을 때 집안일, 네 아빠가 다 했어.”임신부를 돌보는 일도 당연히 포함이었다.그때 정은의 할머니는 출신이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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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0화

말을 마치고, 소진헌은 다시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였다.정은은 곁에서 이것저것 도우며 따라다녔다.겉으로는 거드는 모양새였지만, 속으로는 하나라도 더 보려는 눈치였다.‘이게 다 공부지.’월요일에 강의가 없었다면, 소진헌은 열흘이고 보름이고 딸 집에 더 머물고 싶었다.임시로 빌린 숙소를 정리하고, 다시 L시로 돌아가는 고속열차 안.소진헌이 아내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근데 말이야. 내가 보여 준 거, 좀 도움이 됐을까? 조 서방이 과연 얼마나 배웠을지 모르겠네. 이틀은 너무 짧았어. 휴가만 낼 수 있었어도...”이미숙이 눈을 크게 떴다.“당신 그럴 생각이었어요?”“그럼. 내가 본을 보여 줘야지. 그래야 조 서방도 뭘 기준으로 해야 할지 알 거 아냐. 내 딸이랑 외손주. 단 하루도 허투루 대접받으면 안 되지.”이미숙이 웃었다.“이제 좀 스마트해지셨네요?”“에이.”소진헌이 머쓱하게 웃었다.“난 당신이 아직도 사위만 끔찍이 챙기는 줄 알았어. 예전엔 아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딸 편이네?”소진헌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조 서방한테 잘하는 건... 조 서방이 정은이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야. 조 서방은 정은이 남편이고. 모든 전제는 정은이야.”딸이 없으면, 사위도 없는 법이다.소진헌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조 서방이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는데...”그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재석은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일을 자기 몫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장인어른께서 그러셨어. 밖에서 사 먹는 건 안 좋다고. 집에서 직접 해 먹는 게 제일 깨끗하대.”“또 부엌에 들어왔어? 말했잖아, 가만히 있어. 이건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나가서 쉬어.”“이거... 좋은 거야. 장인어른께서 그러시는데 이거 임산부한테 좋다더라.”“조금 더 자. 오늘은 일정도 많잖아. 고깃집 사장님이랑 얘기해 놨는데... 토종 돼지고기 열 근 확보했어. 가는 길에 농가에서 바로 딴 채소도 좀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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