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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Kabanata 1281 - Kabanata 1290

1676 Kabanata

제1281화

다음 날.시연은 하루 종일 수술실에 묶여 있었다. 겨우 내려왔을 때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지시할 것만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후배 의사들에게 맡긴 뒤, 서둘러 나왔다.병동을 나서려는 순간, 간호사실 앞이 소란스러웠다. 젊은 간호사들이 동그랗게 모여 수군거리다가, 시연이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그녀를 에워쌌다.“지 선생님!”“지 선생님,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남자친구?’시연은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 쪽을 가리켰다.“저기요. 한참 전부터 와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라니까, 남자친구 분이 부끄럽다고 안 들어오시잖아요.”시연이 고개를 들자, 은범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오늘 은범은 목발을 짚지 않았다. 얇은 캐시미어 맨투맨에 공용 디자인의 청바지. 깔끔하면서도 눈에 띄게 멋졌다.“지 선생님, 맞죠? 남자친구.”“네...”시연은 짧게 대답하곤, 빠른 걸음으로 은범에게 다가갔다.“어떻게 온 거야?”그녀가 손을 뻗어 은범을 붙잡았다.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왜 목발 안 짚고 나왔어...’은범은 그녀의 손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약간 머쓱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 일도 없고 해서... 그냥, 너 데리러 오고 싶었어. 목발 짚고 오면, 네 동료들이 보기 좀 그럴까 봐...”혹시 시연이 화낼까 싶어, 은범은 바로 덧붙였다.“나 이제 진짜 많이 좋아졌어. 천천히 걸으면 괜찮아.”그 말은 사실이었다.걷는 것뿐만 아니라 말도 훨씬 나아졌다. 이제는 긴 문장도 제법 이어서 할 수 있었고, 중간에 멈추는 횟수도 줄었다.시연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그래도 조심하는 게 낫지. 내 동료들이 보면 뭐 어때?”“응.”은범은 입술을 다물고 살짝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가자.”“응.”두 사람이 사라지자, 간호사실은 더 시끌벅적해졌다.“지 선생님 진짜 대단하다니까. 남자친구가 하나같이 다 잘생겼어!”얼굴만 보자면 유건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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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2화

“39.6도네요.”순간, 은범의 얼굴이 굳어졌다.“지 선생님, 약으로는 안 돼요. 열이 너무 높으니까 수액 맞으셔야겠어요.”간호사가 말했다.“네, 부탁드릴게요. 빨리 좀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은범이 먼저 결정해 버렸다.“그리고... 누울 자리 좀 있을까요?”“그럼요.”간호사가 웃으며 대답했다.“관찰실 칸막이 자리 비었어요. 거기서 쉬시면 돼요.”“감사합니다.”은범은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시연이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을 때까지, 단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은범은 원래 성격이 온화했다. 화가 나도 소리치거나 표 내지 않는다. 이렇게, 마음속에 꼭 눌러 담을 뿐이었다.“은범아.”시연은 괜히 미안해졌다.“화내지 마.”은범은 시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화 안 낼 수가 없어.”“...”시연은 순간 말이 막혔다.‘이렇게까지 화난 거야?’은범은 언제나 그녀를 다 받아줬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말했다.“미안해.”“에휴...”은범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네가 아니라, 나한테 화난 거야.”“뭐?”시연은 멍해졌다.뜻밖이면서도, 어쩐지 예상할 수 있는 말.“시연, 내가 널...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어.”두 사람은 연인. 당연히 서로를 돌봐야 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동안은 늘 시연이 은범 곁을 지켜주기만 했다.은범은 스스로를 탓했다.“나는 아무것도 못 해줬어. 네가 이렇게 열이 나는데도... 바로 눈치도 못 챘어.”“바보...”시연의 가슴이 저릿했다.‘괜히 감동스럽고... 또 슬프다.’“네 잘못 아니야.”“이제 조금 자. 내가 옆에 있을게. 편하게 자.”은범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응... 알았어.”시연은 더는 버티지 않았다. 몸이 지쳐 있었고,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약기운이 돌면서 땀이 배어 나왔지만, 여전히 춥고 몸은 떨렸다. 잠에 빠진 듯하면서도 반쯤 깨어 있는 기분이었다.은범은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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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3화

은범은 시연을 붙잡아 앉혔다.“조금만 앉아 있어.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워.”“알았어.”그는 곧장 돌아서더니, 쟁반 위에 올려둔 죽을 가져왔다.“배고프지? 이거 먼저 먹어.”“이건...”죽이 담긴 그릇이 눈에 익었다. 은범 집에서 쓰던 그릇이었다.“우리 어머니가 다녀가셨어.”은범이 설명했다.“내가 어머니한테 전화드렸거든...”시연이 잠든 사이, 강수희가 직접 다녀갔던 것이다. 그녀는 죽만 두고 갔고, 시연이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다.“사모님을 괜히 번거롭게 했네.”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번거롭지 않아.”은범의 시선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시연, 우리 가족이야. 그런 말 하지 마.”시연은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죽그릇을 두 손으로 받으며 웃었다.“알았어.”그리고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너는 괜찮은데... 사모님은, 내가 아직 좀 불편해.” ‘아무리 그래도... 내 엄마는 아니니까.’‘게다가 예전에 사모님이 나한테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알아.”은범은 피식 웃었다.“괜찮아. 네가 힘들어할 필요 없어. 나중에 우리 따로 나가 살면 되잖아.”시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자, 어서 먹어. 식으면 맛없어.”은범은 담담하게 재촉했다.“응.”죽은 곱게 끓여져서, 한 숟갈 삼킬 때마다 속이 따뜻하게 풀렸다. 시연은 어느새 그릇을 다 비웠다. 아직 더 먹고 싶었지만...“그만. 나머진 챙겨서 가자. 지금은 더 먹으면 속에 무리 갈 거야.”은범이 단호하게 막았다.‘역시 세심해...’잠시 후, 은범은 옷 가방을 열더니 캐시미어 맨투맨 하나를 꺼냈다. 은범의 옷과 똑같은 디자인, 단 세 사이즈 작은 것이었다.“어? 똑같네?”“응.” 은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같이 맞춘 거야.”원래는 오늘 밤 시연이 집에 오면 주려고 준비한 옷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몸져누운 바람에, 강수희가 함께 가져다준 것이었다.“밤에 서늘한데, 땀도 났잖아. 바람 쐬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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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4화

은범이 목숨 걸고 지켜낸 아이.하지만 정작 은범은 아직 단 한 번도 조이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시연의 말에 은범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마음이 흔들린 게 분명했다.그럼에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다음에 보자.”지금 보면, 자신이 너무 들뜨는 바람에 혹시 아이를 깨울까 걱정됐다.무엇보다 조이와의 첫 만남이 이렇게 불시에, 대충 이뤄지는 건 싫었다.“그래...”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나 들어간다...”그때였다. 시연이 돌아서려던 순간, 안쪽에서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작은 그림자가 뛰어나왔다.통통한 팔이 와락 시연의 다리를 끌어안았다.“엄마! 엄마 왔다!”“조이.”시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를 보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그리고 급히 뒤를 돌아 은범을 바라봤다.은범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얇게 벌어진 입술, 밤빛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잔뜩 긴장했다는 건 시연 눈에도 뚜렷했다.누구도 예상 못 했다. 은범이 이런 상황에서 조이와 맞닥뜨리게 될 줄은.조이는 엄마 다리를 안은 채 고개를 들어 은범을 바라봤다.“와...”작은 아이는 금세 감탄사를 내뱉더니, 이내 엄마 뒤로 쏙 숨었다.‘뭐지? 조이가... 날 피하는 건가? 내가... 무서워 보이나?’은범이 속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G시에서 제일 유명한 꽃미남 노은범이 무섭게 생겼을 리는 없었다.조이는 어리지만, 미적 감각은 또렷했다.아이의 동그란 눈망울이 엄마 쪽으로 굴러갔다. 그러더니 작게,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엄마, 저 아저씨... 너무 잘생겼어요.”말을 끝내자마자 얼굴을 엄마 다리에 파묻었다.아저씨가 너무 잘생겨서, 부끄러워져 버린 거였다.“푸흣...”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은범을 보며 눈짓했다.“들었지? 긴장 풀어. 네가 긴장하니까 조이도 긴장하잖아. 우리 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잘생긴 아저씨 본 거야.”시연은 부드럽게 이어갔다.“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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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5화

“조이!”시연은 깜짝 놀랐다.은범 체력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혹여 조이를 안다가 다칠까 걱정됐다. 그러다 아이까지 덩달아 다치면 어쩌나 싶었다.하지만 은범은 이미 조이를 품에 안아 올리고 있었다.시연은 은범이 일어서는 순간, 그의 발밑이 살짝 흔들린 걸 놓치지 않았다.“은범...”시연이 손을 뻗어 붙잡으려 했지만,“괜찮아.”은범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길을 거절했다.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잠시 호흡을 고르고, 중심을 다시 잡아 섰다.시연은 속으로 안도하며, 은범에게 작게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조이는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 따위를 알 리 없었다. 아이는 은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천진하게 기대고 있었다.시연이 아이를 보며 물었다.“조이야, 왜 그래? 은범 아저씨랑 더 있고 싶어?”조이는 첫인상부터 은범을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었다.“은범 아저씨.”동그란 얼굴을 들고, 작은 두 팔로 은범 목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조이가 아저씨한테 굿나잇 말하는 걸 잊었어요.”‘뭐야... 그 한마디 하려고 다시 나온 거야?’은범은 아이의 단순한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아저씨 잘못했네. 아저씨도 잊었네. 조이, 잘 자.”“네!”조이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시연이 손을 뻗어 아이를 받아내려 했지만, 조이는 고개를 돌리고 은범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쉽게 떨어지지 않을 기세였다.“어?”시연은 살짝 당황했다.평소 낯가림이 심한 아이인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곧바로 안기다니.“조이야, 은범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네.”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진하게 대답했다.시연과 은범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웃었다.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아이들은 어른과 다르다고.아이들의 마음은 더 맑고 깨끗해서,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어른들이 느끼지 못하는 걸 느낀다고.그래서 조이가 이렇게 은범에게 마음을 연 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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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6화

도경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조이야, 이제 가자. 엄마가 집에서 기다리셔.”“사모님, 죄송해요. 저희는 이제 가야 해요.”“아, 네.”케빈은 조이와 헤어지기 싫었다. 작은 책가방 속에 넣어둔 과자도 아직 나누어주지 못했으니까.“오빠, 나 집에 가야 해.”조이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잠깐만!”케빈은 조급해지더니, 아예 책가방째로 조이에게 건넸다.“안에 다 맛있는 거야. 전부 너 가져.”조이는 동그랗게 눈을 깜빡였다. ‘엄마가 없는데... 받아도 될까?’부명주가 다가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착한 아가. 가져도 돼. 케빈 오빠가 준 거니까. 엄마도 화 안 내실 거야.”“아, 네.”조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이모.”‘이모?’부명주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조이야... 난 네 외할머니인데...’울컥 올라오는 서글픔을 꾹 삼키며, 부명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우리 조이 참 예쁘네.”도경미가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조이야. 인사해야지.”“오빠, 잘 있어. 이모도 안녕히 계세요!”“응, 잘 가!” 케빈이 손을 흔들었다.“안녕히 가세요.” 도경미도 웃으며 답했다.작은 발자국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며, 부명주의 마음은 복잡했다. ‘시연이가 아픈 건가? 아니, 나도 지금 아프잖아...’...다음 날 정오.시연이 막 수술실에서 나와 복도로 걸어가는데, 간호사가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다.“지 선생님, 가족분이 오셨어요. 제가 큰 오피스에 모셔뒀습니다.”“가족이요?”시연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곧,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간호사가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지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가족분이 큰 보따리를 들고 오셨거든요.”시연은 간호사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더 욱신거렸다.그대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역시나... 부명주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시연이 들어오는 걸 본 부명주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시연.”시연은 두어 초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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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7화

시연은 똑똑히 보았다.부명주 눈빛 속 작은 불씨가 하나씩 꺼져 가는 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해야 할 말은 끝까지 해야 했다.며칠째, 시연은 잠 한숨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기만 하면 떠올랐다.피투성이가 된 지동성의 모습이.시연은 눈을 깜빡였다. 메마른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여사님과 레오 선생님이 제게 목숨을 주셨죠. 하지만... 여사님과 레오 선생님은 제 목숨을 빼앗아 가기도 하셨어요.”출생의 비밀이 드러난 뒤, 모든 게 선명해졌다.그동안 시연이 겪어온 수많은 일들, 그 모든 원인이 이제는 분명해졌다.레오의 뒤엔 앤더슨 가문... 얽히고설킨 이익 관계들.예희주의 가문 또한 시연 같은 사생아의 존재를 용납할 리 없었다.“시연...”부명주는 무언가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 복잡한 얘기, 굳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그러고는 허무하게 웃었다.“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단 하나예요. 지금 여사님 눈앞에 서 있는 지시연, 이 목숨은 제 아버지, 지동성이 주신 거예요.”부명주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 다시는 오지 마세요. 만약 참기 힘들다면... 제 아버지를 생각하세요.”“여사님은 제 아버지를 평생 불행하게 했고, 결국 제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아요.”“그런데도 여사님은 아직도 가족이니, 화목이니, 그런 걸 꿈꾸세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욕심낼 수가 있어요?”“아... 시연...”부명주의 입에서 낮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 다행히 점심시간이라 복도엔 사람이 없었다.“여기서 울지 마시고, 가져오신 거 챙겨서 빨리 나가세요.”말을 마친 시연은 더 이상 부명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섰다.“시연...”부명주는 울먹이며 불렀다. 하지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딸이 말한 대로였다. 지금 자신에게 그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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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8화

사실 따지고 보면, 시연은 전통적인 ‘들러리 조건’과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가정은 산산조각 났고, 이미 이혼 경력까지 있었다.“불길해?”진아는 그 말에 오히려 크게 웃어버렸다.“하하... 그럼 더 좋지! 지 선생님, 너 꼭 들러리 자리 딱 붙잡아. 불길한 기운 잔뜩 발휘해서, 나 결혼하자마자 이혼하게 만들어 줘! 그럼 난 너를 부처님처럼 모실 거야.”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이 결혼... 진아는 무조건 해야 하는 거구나.’진아는 더 묻고 싶지 않은 듯 손을 툭 내저었다.“그나저나, 너는? 너랑 노은범,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우린 아직 멀었어. 당장은 아냐.”은범 집안에서 미리 준비하는 건 맞지만, 은범이 회복할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며칠 뒤, 시연의 휴일.그녀는 조이를 데리고 외출했다.시연은 진아의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는 김에 들러리 드레스를 맞춰야 했고, 조이도 필요한 옷이 있었다.조이는 결혼식에서 신부 뒤를 따라 베일을 잡고 걷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지하가 직접 차를 보내 시연과 조이를 데리러 왔다. 도착했을 때, 진아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지하는 보이지 않았다.“어?”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너 혼자야?”지하와 진아가 이미 같이 산다는 걸 아는 시연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진아는 고개를 저었다.“부지하는 지금 신랑 들러리 데리러 갔어.”말을 마친 진아의 얼굴에 순간 망설임이 스쳤다.“시연아... 잠시 후에 신랑 들러리 올 텐데, 네가 불편하면, 난 강요 안 할게...”“뭐야 그게?”시연은 어리둥절했다.“말을 하다 마네.”“시연...”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오늘 아침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지하의 신랑 들러리가... 고유건이라는 걸.이 사실을 어떻게 시연에게 꺼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왜 그래? 뭐가 그렇게 난감한데?”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그리고 굳이 진아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샵 문이 열리며, 지하가 유건을 데리고 들어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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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9화

지하의 말에 진아는 순간, 자기가 괜히 악역이 된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난 고유건이 불쌍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건 시연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야.”“아니야.”지하는 진아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유건은 원래 신사야. 괜히 오버 같은 거 안 해. 그냥... 가까이서 시연 씨를 한번 보는 것뿐이지.”진아가 여전히 미덥지 않은 눈빛을 하자, 지하는 덧붙였다.“생각해 봐. 유건이 뭔가 하려면, 굳이 내 결혼식 빌미로 해야겠어?”‘그건 그렇지...’진아도 순간 납득이 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그래도 시연한테 물어봐야 해. 시연이가 싫다고 하면, 고유건 불러온 건 당신이니까, 당신이 직접 내보내.”진아는 지하 손을 홱 뿌리치고 시연을 향해 걸어갔다.“하아...”지하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시연.”진아가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미안.”“괜찮아.”시연은 이제야 아까 진아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했다.진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혹시 불편하면... 억지로 안 해도 돼. 내가...”“정말 괜찮아.”시연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이건 네 인생에 제일 중요한 날이잖아. 네가 날 불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내가 뭘 따져?”그러고는 조금 전, 진아가 지하한테 화내는 걸 떠올리며 덧붙였다.“괜히 이 일로 부 대표랑 다투지 마. 넌 평생 단짝을 옆에 두고 싶었던 거고, 부 대표도 마찬가지로 자기 제일 친한 친구 부른 거야. 서로 좀 이해하면 돼.”진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저놈은 분명 사심 있어서 그런 건데...’말은 못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가자. 네 드레스부터 입어보자.”...오늘은 약혼식 드레스를 피팅하는 날이었다.진아와 지하의 부모는 약혼식을 간단히 치르고, 바로 2주 뒤 결혼식을 올리기로 합의했다.“조이야.”진아가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이모랑 가자. 예쁜 드레스 입으러 가야지.”“네.”조이는 얌전히 대답하고, 유건 품에서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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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0화

“물론, 유건 씨가 혹시라도 불편하다면...”“아니.”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시연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그는 시연이 조금 긴장한 걸 눈치채고, 목소리를 낮췄다.“이건 지하랑 진아 씨의 큰일이야. 우린 그냥 곁에 있는 조연일 뿐이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네.”그 말에 시연은 어깨에 힘이 조금 빠졌다.하지만 그 뒤로 두 사람은 다시 침묵했다.다행히도 조이가 모습을 드러냈다.“엄마! 아빠!”소파 양쪽 끝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조이는 작은 드레스를 입고 총총 달려왔다.유건은 습관처럼 두 팔을 벌려 안아 올리려 했다.“안 돼요!”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연의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조이 지금 치마 입었단 말이에요! 구겨지잖아요! 아빠는 그것도 몰라요?”유건은 잠시 멍해지더니, 곧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래, 아빠 잘못했네.”“히히, 괜찮아요.”조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빙그르르 돌았다.“아빠, 엄마! 예뻐요?”“당연히 예쁘지.”유건은 허리를 숙여 조이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엄마?”조이는 볼을 불룩 내밀었다.“엄마는 아기 예쁘다고 안 해줬어요. 아기 예쁜 거 아니에요?”“아.”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엄마가 잘못했어. 우리 조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님이지.”“히히...”조이는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피팅룸 입구.지하와 진아는 나란히 서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둘은 눈빛만 주고받고는,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차마 이 고요한 순간을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진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참, 예쁜 가족 같은데.”정말로 사랑했던 두 사람인데, 결국 함께하지 못한 사이.지하는 조용히 진아의 손을 잡았다.“왜 그래? 갑자기 울적해졌어?”“부지하.”진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이 결혼... 정말 꼭 해야 해?”“진아...”지하의 얼굴빛이 단번에 어두워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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