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열여덟, 스물 다섯: Bab 61 - Bab 70

100 Bab

제61화

다음날 주말, 나는 레스토랑에 출근하지 않았다.성지연의 사촌 오빠 덕분에 식당에서 보상금을 주었고 나는 곧 식당의 감시 카메라에서 진세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잠시 후 성지연이 휴대폰을 들고 나에게 달려왔다.“은성아, 이거 봐.”휴대폰을 받아보니 그 뚱뚱한 남자의 정보가 들어있었고 내가 클릭해 보는 사이 성지연이 말했다.“오빠 말로는 이 사람이 단성 출신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래. 그냥 어디선가 식당에 섞여 들어온 양아치인 것 같다던데.”마침내 머릿속의 모든 추측이 하나로 이어졌다.왜 내가 식당에서 진세라를 봤는지, 왜 그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직원이 성희롱당했는데도 바로 제지하지 않고 냉정하게 방관했는지.성지연은 옆에 앉아 내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은성아, 우리 둘 다 요즘 좀 재수가 없는 것 같은데 절에 가서 평화 부적이라도 받아오자.”정신을 차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그래.”성지연은 말한 대로 움직이는 타입이라 내가 동의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그 후 그녀는 나를 절에 데려가 평화 부적 두 개를 받았고 저녁에 나는 그녀를 공항으로 데려다주었다.공항에서 그녀는 아쉬워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안아주었다.“은성아, 너 혼자 여기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꼭 나한테 말해.”내 대답에 그녀는 사촌 오빠의 카톡을 넘겨주며 기어코 자기가 보는 앞에 추가하라고 시킨 뒤 그제야 마음 놓고 떠났다.늦은 밤 공항에는 적막함이 감돌았고 성지연이 가면서 자꾸만 뒤돌아보는 모습에 마음 한편에 따뜻함이 피어올랐다.이 세상에는 언제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다.지난 생엔 그녀를 잃었지만 이번 생엔 그러지 않을 거다....다음날 수업이 있어 학교에 일찍 도착했다.며칠 동안 기숙사로 가지 않아 권수아와 이혜린이 왜 오지 않았는지 물었고 간단히 이유를 말했더니 곧 수업 시간이라 내게 빨리 짐을 챙기라고 했다.이효정맍 책상에 앉아 거울을 보면서 립스틱을 바르더니 비아냥거리듯 말했다.“허, 말로는 친구들이랑 시간 보냈다면서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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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공부에 집중하고 인턴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단순히 디자이너 조수 일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주얼리, 원단, 의류 가공 같은 의상 디자인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다 해보고 싶었다.운이 좋았는지 정말로 디자이너 조수 자리를 얻었고 상대 디자이너는 업계에서 나름대로 유명세가 있었지만 성격이 조금 특이했다.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고민욱이 다시 내게 연락했다.막 퇴근하고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그가 내게 어디 있냐고 묻자 나는 머리 위로 뜬 달을 힐끗 쳐다보았다.“고민욱 씨, 내 돈 끊어버린 거 잊었어요? 이제 우리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내가 왜 어딨는지 알려줘야 해요?”고민욱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성, 내가 요양원에서 할머니 데려오지 않길 바라는 거야?”그 말에 내 목소리가 단번에 싸늘해졌다.“고민욱 씨, 감히 어떻게 그래요? 당신 어머니잖아!”고민욱은 코웃음을 쳤다.“우리 엄마? 그 망할 늙은이는 하루도 날 키운 적이 없어. 내가 지금 잘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 고마워해야지. 그러는 넌, 널 10살까지 키워주신 분인데 이젠 죽든 말든 신경 안 써?”고민욱과 박혜경이 이혼했을 때 난 겨우 세 살이었다. 그때 박혜경은 단호하게 나를 버렸고 고민욱은 돈 벌기에 바빠서 나를 시골 할머니에게 떠넘겼다.그렇게 내가 열 살이 되고 할머니가 뇌졸중을 앓기 전까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그러다 할머니가 뇌졸중을 앓게 되었고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외국에서 잘살고 있던 박혜경이 나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힘들게 산다는 걸 알고 고민욱과 상의 끝에 날 고씨 가문으로 다시 데려왔다.돌아갔을 때 고민욱은 이미 김다비와 결혼을 했고 고은빈도 그때쯤 일곱 살이 다 되어갔다.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깨문 내 가슴에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치밀어 올랐지만 털어놓을 곳은 없었다.전생에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편히 돌아가셨고 이번 생에도 그럴 거라 생각해 고민욱이 할머니로 나를 협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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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언제 내 시력이 이렇게 좋아졌을까. 진세라에게 건넨 물건에 ‘생리통 약’이라는 글이 눈에 확 들어왔다.이 늦은 시간에 진세라에게 이런 걸 가져다주러 왔구나.문득 아까 캠퍼스에서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그게 전부 사실이었네.전생에 유산을 하고 배가 너무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때도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날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은성, 넌 당해도 싸.”갑자기 진세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정민규가 고개를 들었고 시선이 마주쳤지만 나는 침착하게 피했다.내가 부른 택시가 길가에 멈춰서자 나는 이내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30분 후.차는 별밤 앞에 멈췄다.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고민욱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전화를 받았더니 또 어디냐고 물어본다.금방 간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은 뒤 가방 안에 호신용품을 확인하고 업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고민욱이 말한 룸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생각했던 것만큼 어수선하지는 않았다.고민욱을 제외하고 그 또래의 중년 남성 한 명뿐이었는데 그를 슬쩍 쳐다보고 의자 세 개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민욱은 웃는 얼굴로 나를 소개하던 중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일순간 가라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아 있어? 장 대표 옆에 앉아.”꼼짝하지 않고 고민욱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장 대표라는 사람은 우리 때문에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고 대표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하니까 애가 놀라지. 딸이 어려서 반항하는 것도 당연해. 우리 딸은 저 나이 때 나와 가까이 앉는 게 아니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눈을 희번덕거렸어.”상대가 한발 물러서자 고민욱도 그쯤하고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아이들은 참 버릇이 없어. 하지만 쟤도 이젠 나이가 됐지.”고민욱은 장 대표에게 술을 따라주며 나를 힐끗 바라봤다.“우리 때는 저 나이면 벌써 애 엄마가 다 됐지.”“그건 그래.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결혼에 관심 없고 놀 생각밖에 안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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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고민욱이 당황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장 대표랑 결혼하기 싫으면 정민규나 나상민 잡아.”“내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아요?”웃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니 고민욱은 가방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불을 붙이고 몇 모금 피워댔다.“듣기 싫어도 들어야지, 네가 어쩌겠어. 네 할머니가 내 손에 있고 조인그룹에 자금 문제가 생겼어. 난 지금 네게 큰돈을 건지라고 말하는 거야, 알아들어?”그렇게 말하며 고민욱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동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영상 속 할머니는 병원 침대에 눈을 뜬 채 누워 있었고 간병인은 그 옆에 앉아 간식을 질겅질겅 씹으며 욕을 하고 있었다.“늙은이가 왜 하루 종일 소리만 질러대. 내가 어떻게 혼내주나 봐라.”곧 깡마른 노인이 ‘으으윽’ 소리를 또 내자 영상에서 욕하고 때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고민욱은 영상을 끄고 나를 올려다봤다.이를 악물고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으로 꽉 쥔 채 고민욱의 얼굴을 때리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당신 어머니한테 어떻게 이래요? 이러면 하늘이 벌하실까 두렵지도 않아요?”“벌?” 고민욱이 웃었다.“은성아, 아빠 말대로 장 대표랑 잘 지내면 네가 손해 볼 것 없어. 더구나 아빠는 너한테 부끄러운 내연녀가 되라는 게 아니라 사모님이 되라는 거야. 결혼해서 1년 안에 아들만 낳으면 넌 앞으로 하고 싶은 것 다 해도 되고 아빠도 더 이상 너를 힘들게 하지 않을 거야.”갑자기 고민욱의 휴대폰이 울리더니 나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잘 생각해 봐.”가만히 서 있으니 그저 춥기만 했다.기숙사는 문을 닫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고 흐릿한 정신으로 택시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갔더니 새벽 1시가 다 되어 있었다.씻고 방으로 돌아와 눈을 감았을 때 할머니의 어눌한 ‘으윽’ 소리가 들렸다.다시 태어났을 땐 왜 보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죄책감이 들었다.어렸을 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할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등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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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저녁 7시 30분, 검은색 미니 드레스로 갈아입고 약속된 장소에서 장 대표를 기다렸다.곧 그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서고 창문이 내려가며 장 대표의 점잖으면서도 위선적인 얼굴이 드러났다.“역시 예쁘네.”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에 타라고 했다.그 순간 갑작스러운 굴욕감이 밀려와 돌아서서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고민욱의 협박이 생각나서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차에 탔다.타자마자 문에 바짝 붙었고 둘 사이엔 적어도 사람 한 명은 더 탈 수 있을 공간이었다.장 대표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싫은 건가?”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네 아버지가 말 안 했어?”높은 지위에 있는 남성은 위엄과 더불어 남들이 떠받드는 것에 익숙한 오만함이 있었다.나는 고개를 돌려 별다른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알기로 장 대표님은 단성에서 대단한 사람이죠. 몸값이 조를 넘고 회사의 주가는 상장 이후 계속 급증하고 있어요. 조인그룹은 장 대표님 안목으로 봤을 때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장 대표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두 눈이 어두워지며 정장 외투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단성의 밤은 화려하고 복잡했다.답답함에 창문을 열자 순식간에 시원한 바람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생각보다 재미있네.”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리는 데만 집중했다.옷을 두껍게 입지 않아 잠시 바람을 맞고 나니 손과 발이 차가워졌지만 지금은 머리를 식혀 차분함을 유지해야 했다.그 후로 나와 장 대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곧 우리는 파티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장 대표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나는 장 대표를 바라보다가 굽은 팔 안으로 내 손을 넣었다.밤새도록 옆에서 예쁜 꽃 역할이나 하는데 가끔 누군가 나에 대해 장 대표에게 물을 때면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고 상대는 여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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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한번은 할머니가 외출했을 때 마침 내가 아팠고 늦게 돌아온 할머니가 집에 들어섰을 때 내 상태는 심각해진 뒤였다.그 이후로 나는 어두운 환경을 무서워했고 등과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는 사이 앞뒤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앞이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밀리고 부딪히기를 반복하다가 누군가 뒤에서 내 머리핀을 가져간 뒤 내 손목이 크고 건조하며 따뜻한 손에 꽉 잡혔다.곧 나는 누군가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익숙한 우디 향이 코끝을 가득 채웠고 놔달라고 말해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소매를 움켜쥐었다.“무서워하지 마.”나를 앞으로 데리고 가는 정민규의 차가운 목소리가 지금은 왠지 모르게 부드러웠다.눈을 감고 그를 따라갔다.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탁탁탁.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나지막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대로 그의 손에 이끌려 한 방으로 들어갔다.정민규는 나를 문에 밀친 채 한 손으로 내 두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싼 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지난번과 다른 키스였다.그의 입맞춤은 가벼웠고 섬세한 움직임에 귀한 대접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몸부림치는 것도 잊은 나는 그의 호흡이 가빠지고 내 입술을 아프게 빨아들일 때쯤 정신을 차리고 홱 그를 밀친 뒤 어둠 속에서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정민규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세라를 두고도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거칠게 입술을 닦으며 어둠 속에서 정민규의 눈을 마주했다.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내게 성큼 다가왔다.“가까이 오지 마.”한 손을 내밀어 가까이 다가오려는 그를 제지했다.“은성아...”“정민규, 너 정말 역겨워.”밤새 속에 화를 참고 있었던 나는 무척 괴로웠고 정민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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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내 말이 정민규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어두운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심호흡을 하고 몸을 돌려 문고리를 더듬으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내 손이 손잡이를 잡는 순간 정민규의 온몸이 내 등 뒤에 바짝 붙었다.그의 넓고도 따뜻한 가슴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지만 나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정민규...”“거짓말!”미처 말하기도 전에 정민규가 가로채며 문고리를 잡은 내 손등을 지그시 감쌌다.“날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평생 나만 좋아하겠다고.”...“분명히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정민규의 목소리에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속상함과 괴로움이 담겨 있었고 깊은 두 눈은 꼭 상처받은 듯했다.문득 눈을 떠보니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천장이 보였다.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 앉았다.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두통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잠시 앉아 있다가 휴대폰을 확인하니 이제 겨우 새벽 4시였다.다시 누웠지만 도저히 잠들지 못했다.두 시간 동안 침대에서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날이 조금 밝았을 때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어젯밤 파티가 끝난 후 장 대표는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니 억지로 얻는 것엔 관심이 없다며 내가 기꺼이 함께하길 원했다.내 지난 경험은 정민규와의 추억이 전부였기에 남자의 생각을 알 수 없었고 장 대표의 이상한 소유욕이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다행인 건 당분간은 안전하다는 것, 그리고 고민욱을 상대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었다.오전 10시 30분, 두 번째 수업이 끝나고 어제 약속한 사설탐정을 만나러 갔다.내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할머니가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알아보고 고민욱을 휘어잡을만한 약점을 찾아내 그에게 반격하는 것.사설탐정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휴대폰을 열어 돌아갈 비행기표를 예매하려 했다.지금 조인그룹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알고 싶었지만 곧 나상민이 떠올랐다.고민욱은 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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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그 위기는 고민욱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규격에 맞지 않는 건축 자재를 사용했고 프로젝트가 끝난 뒤 합격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해당 부문에서 건물을 인정하지 않아 매각이 지연되었고 하루 억대의 손해를 고민욱은 감당할 수 없었다.이번에도 같은 이유인지 확인만 한다면 고민욱은 할머니로 날 협박하지 못하고 나도 할머니를 아무 문제 없이 데려올 수 있었다.그런 생각으로 사설탐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후에는 수업이 없어 앨런의 사무실로 가서 그동안의 디자인 시안을 정리했다.나상민은 내내 내 문자에 답장이 없었고 나도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문을 잠그고 떠나려 할 때쯤 안방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나는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들어갔고 안방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나는 이내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의 호흡을 살폈다.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었지만 열이 있는 것 같았고 온몸이 용광로처럼 뜨거웠다.서둘러 119에 연락한 뒤 손을 뻗어 그를 두드렸다.“이봐요, 괜찮아요?”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있어 얼굴을 보지 못했고 누군지도 몰랐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라 몸을 뒤집는 것조차 하지 못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야 했다.다행히 구급차가 빨리 와서 30분 만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검사를 마치고 수액을 놓은 뒤에야 내 앞에 누워 있던 혼혈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내 상사인 앨런이라는 걸 알았다.시간을 보니 이미 밤 9시가 넘었고 연락했는데도 그의 가족은 아직 오지 않았다.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침대에 보호자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돌아갈 생각을 접은 채 얌전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내리는 수액을 바라보기만 했다.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졸음이 밀려왔고 어느 틈엔가 잠이 든 나는 깨어났을 때 누군가 내게 담요를 덮어주는 것 같았다.어렴풋이 눈을 뜨니 정민규의 얼굴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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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정민규가 말하고 나서야 그에게 고모가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지난 생에 정한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해외에서 돌아왔고 정한석이 죽은 뒤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떠났다.한숨을 내쉰 나는 이 세상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다. 정민규와 선을 긋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형 밑에서 일하고 있다.“가족이 왔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가려는데 정민규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발짝 움직였다가 문득 조금 전 치료비를 전부 내가 냈다는 걸 떠올리고 다시 돌아섰다.가방에 있던 진료비 계산서를 전부 정민규에게 내밀었다.“방금 내가 결제한 치료비, 총 528,514원인데 잔돈은 됐으니까 52만 8천원만 줘. 형이 깨어나면 나한테 주라고 하든지 지금 네가 먼저 나한테 줘도 돼.”이젠 더 이상 재벌 아가씨가 아니었기에 손에 있는 한 푼이 아쉬웠다.정민규는 내가 이 정도로 돈을 밝힐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얼굴에 살짝 놀란 표정이 담겼다.이해했다. 전에 그를 쫓아다녔을 땐 다 가졌다고 말할 순 없어도 노트 하나도 십만원 이하는 쓰지 않았고 초콜릿 한 통, 만년필 하나, 작은 물건 하나까지 전부 몇백만원은 했었다.정민규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기침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렇게 돈이 급해?”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먼저 줄게.”정민규의 깊은 두 눈에 교활함이 스쳐 지나가며 휴대폰으로 카톡을 열었다.“친구 추가하면 돈 보내줄게.”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풋풋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뒤 큐알 코드를 열었다.“스캔하면 돼, 고마워.”순간 정민규의 두 눈에 담긴 교활함이 사라지고 묵묵히 짧게 대꾸한 그가 큐알 코드를 스캔했다.왠지 모르게 한 방 먹은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돈을 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동 문을 나섰다.병동에서 나온 후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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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아량을 베푼다고 생각하자. 게다가 나상민은 전에 나를 도와준 적이 있고 나도 그에게서 조인그룹 상황을 알아내야 하니까.나상민은 나를 3, 4분 정도 껴안고 있다가 놓아주고는 미소를 지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지금 내 꼴이 우습지?”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며 자기 비하적인 어투로 말했다.“웃어. 나도 내가 우스워.”나상민은 원래 이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바람둥이에 능글맞고 오만하며 그럴 자신감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지금처럼 볼품없는 꼴이 아닌 초원을 내달리는 치타 같은 사람인데.툭 떨군 그의 고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듣고 싶어?”나상민이 고개를 들어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밤은 길었고 나상민의 이야기도 길었다.나는 그에게서 그와 정민규가 숙명의 라이벌이 된 이유와 부모님이 남긴 원한을 알게 되었다....나상민의 어머니 연지선은 정민규 아버지 정남준의 동창이었고 연지선은 대학에 입학해서 정민규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당시 정남준은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었기에 연지선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기회가 없었다.시간은 흘러 1학년에서 4학년이 될 때까지 연지선은 정남준에게 사랑을 고백할 기회가 없었고 그렇게 그 감정은 그녀의 마음속에 아쉬움으로만 남게 되었다.대학 졸업 후 정남준은 구나경과 결혼했지만 정략결혼이라 구나경은 정남준을 사랑하지 않았다.정민규의 할아버지로부터 첫사랑의 목숨을 위협받았기 때문에 정남준과의 결혼에 동의한 것뿐이었다.결혼 후 정남준은 점차 구나경을 사랑하게 됐고 구나경도 정민규를 임신하면서 정남준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구나경이 임신 3개월이 됐을 때 구나경의 첫사랑이 그녀를 찾아왔고 구나경은 그와 함께하기 위해 정민규를 버리려다가 정남준에 의해 집에 갇히게 되었다. 바로 그때 연지선이 정남준과 다시 만나면서 유혹을 견디지 못한 남자는 구나경의 세심한 위로에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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