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Chapter 1421 - Chapter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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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1화

밤은 짙은 먹물처럼 다시금 천지에 스며들었다.금역의 입구에서 묵직한 석문이 서서히 열리며, 바위를 갈아내는 듯한 거친 소리를 길게 끌었다. 마치 오랜 잠에서 몸을 틀던 거대한 짐승이 마침내 만물을 삼키려 입을 벌리는 듯했다.목설하는 곁에 선 목설원을 스치듯 복잡한 눈길로 바라본 뒤, 김단을 향해 목소리를 가라앉혔다.“장로들께서 그대들의 재입문을 허락하셨으나 내 마음 한켠에 근심이 남았소. 그리하여 설원을 동행케 하였으니 염려 마시오. 저자는 겉으로는 경박해 보이나 속으로는 분수를 아는 자요. 결코 일을 그르치거나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오.”문설주에 비스듬히 기대 선 목설원은 금박 접부채의 살을 무심히 튕기며 입꼬리에 상습의 미소를 걸고 받았다.“가주께서야 무엇하러 말을 보태시오. 단이는 가장 영민한 아이가 아니오. 그 뜻을 어찌 모르겠소.”그러나 그 미소는 눈끝에 이르지 못했고, 보이지 않는 가늠질이 은근히 배어 있었다.그의 동행은 목가의 마지막 안전장치였다. 이른바 보장을 여는 순간, 김단이 제 몫이 아닌 것을 ‘슬쩍’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는 굳센 쇠못과도 같았다.최지습은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의 침묵은 마치 두른 기운처럼 깊고 무거웠다.그는 다만 김단의 차가운 손을 더 뜨겁게 감싸쥐었다. 마디에 힘을 실어, 말 대신 묵직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김단의 마음은 맑게 갠 거울처럼 환했다.그녀가 구하는 것은 오직 자옥정초 한 줄기. 목설원의 걸음이 동행이든 감시이든, 그녀에겐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목설하를 향해 온화하고도 순히 미소 지었다.“오라버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분명히 알고 있사옵니다.”목설하의 굳게 다물린 턱 선이 잠시 풀리더니, 안도와 고마움이 어린 빛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단이가 알아주면 족하오.”더 말할 것 없이 김단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최지습은 그녀의 손을 굳게 잡은 채 나란히 걸음을 떼었다. 두 사람은 먼저 거대한 짐승의 목구멍처럼 깊고 음습한 석문 안으로 사라졌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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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2화

호랑이군이 꿈에서 깨어난 듯 곧장 미리 마련해 둔 돈혈을, 석주에 뚫린 아득히 바닥 모를 구멍으로 살얼음 걷듯 조심스레 부었다. 질끈한 암홍빛 액체가 콸콸 스며들며 둔탁한 울림을 토해냈다. 한 통, 또 한 통…… 피비린내가 공기를 짓누르듯 가득 차올라 더욱 사납고 매캐해져, 거의 구역질이 치밀었다.모든 이의 시선은 죽은 듯 고요히 서 있는 거대한 석주에 붙들렸다. 공기는 엉겨 붙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고, 적막 속에는 횃불이 타는 잔잔한 타닥거림과 끝까지 눌러 참은 숨소리만 겹겹이 얹혀 맴돌았다. 심장이 뛸 때마다 북을 울리듯 둔중한 고동이 전신에 메아리쳤다.시간은 끝도 없이 늘어지는 듯했고, 절망은 차가운 덩굴처럼 김단의 심연 깊숙이 스며들어 조용히 얽히며 목을 죄어 왔다. 혹시 이 월영석이 결국 범물에 불과해, 참달빛을 요구하는 장치를 끝내 일으키지 못하는 것인가.목설원의 시선이 팽팽히 굳어 가는 얼굴들을 훑다 멎었다. 접부채조차 더는 흔들지 못한 채, 그는 낮게 물었다.“어찌, 효험이 없단 말이오?”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그는 낙담이 덕지덕지 묻은 낯빛들을 보고 마음까지 함께 가라앉았다. 김단의 마음은 이미 밑 모를 한연으로 추락해 있었다. 지난번에는 이 석주가 분명 금세 응답했는데. 정말로 안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소한은……모두를 짓눌러 버릴 듯한 질식의 절망이 막 정점에 이르려는 찰나.딸각… 딸깍……지극히 미미하면서도 유리 부서지는 듯 또렷한,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불현듯 터져 나왔다. 마치 하늘이 낸 음색처럼 맑고 날카로웠다.곧이어웅—태고의 거수가 낮게 울부짖는 듯한, 거대한 힘을 머금은 굉음이 석주의 기단 깊숙한 곳에서 맹렬히 솟구쳤다.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 앞에서, 대지와 한몸인 듯 꿈쩍도 않던 거대한 석주가 드디어 장엄한 힘을 머금고 더디면서도 굳세게 위로 치올랐다.“성공했다!”김단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삼켜 버릴 듯 밀려오던 절망이 한순간에 환희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제야 이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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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3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지습이 먼저 그 깊고 미지의 석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우람한 그림자는 문 안의 어둠에 순식간에 삼켜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더없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문 안에서 흔들린 횃불 불빛이 그의 긴장된 옆얼굴을 스치듯 비추었다.목설원은 자신도 모르게 어둠 속을 오래 응시했다. 그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잠시 뒤, 문 안에서 그의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들어오시오, 안전하오.”확인이 떨어지자 김단의 굳었던 가슴이 비로소 조금 풀렸다. 그녀는 가득한 기대를 안고 재빨리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목설원과 나머지 호랑이군도 뒤이어 들어갔다. 높이 치켜든 횃불들이 번쩍이며 밀려들어, 문 너머 수백 년 묵은 어둠을 몰아내려 했다.그러나 일렁이는 불빛이 마침내 밀실 안을 낱낱이 비추는 순간, 모두는 보이지 않는 한기의 얼음에 덮인 듯 그 자리에서 굳어 섰다.산처럼 쌓인 금옥이 눈부신 반짝임을 흩뿌리지도 않았고, 빛결 고운 옥과 마노가 불빛 아래 찬란히 빛나지도 않았다. 월영석처럼 기묘한 광을 내는 보물도 없었으며, 김단이 밤낮으로 그려 온 소한의 목숨을 붙들 마지막 희망, 자옥정초는 더욱이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아무것도 없었다.밀실은 텅 비어 사방의 벽만 썰렁히 서 있었고, 거대한 묘혈처럼 적막했다. 다만 사방의 거칠고 냉랭한 석벽 위에 깊고 얕은 각자들이 빽빽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불빛 속에서 그것들은 마치 무수한 차가운 눈동자가 되어, 침입자들을 묵묵히 굽어보는 듯했다.목설원의 낯에서 버티던 침착과 마지막 핏기마저 단박에 사라져 종이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거의 비틀거리듯 가장 가까운 석벽으로 달려갔다. 손의 횃불이 차가운 석면에 닿을 듯 들이대져 뜨거운 불꽃이 그 오래된 각자들을 달구었다.그는 그 글자들을 눈을 떼지 못한 채 응시했다. 입술은 뜻대로 붙지 않아 가늘게 떨렸고, 목소리는 쉬어 갈라진 채 짓눌린 듯 새어 나왔다.“이… 이것이 의서이오? 전부 의서이오?”그는 번쩍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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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4화

찰나에 그녀는 마침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목씨 가문의 이른바 경세의 보장, 대대로 목숨을 갈아 지켜 왔다는 그 비밀은, 요망서가 임종에 이르러 마지막 심력으로 꾸며 놓은 철저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애초에 나라의 곳간에 견줄 재보 따위는 없었다. 있는 것은 네 벽 가득, 글자마다 피눈물이 서리고 문장마다 독이 서린 통렬한 고발뿐이었다.요망서는 단 한마디, ‘보장’이라는 말로 목씨 가문의 후예들을 수치의 기둥에 단단히 묶어 두었다. 그 말에 그들은 기꺼이 피와 생명을 바쳤고, 앞선 이의 뒤를 이어 차례차례 이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 순간 김단은 백 년의 세월을 꿰뚫어 보듯 환영을 보았다. 삶의 끝자락에서 가장 믿던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집안을 빼앗기고, 만성의 독에 잠식된 한 여인이 부서진 몸을 이끌고 참혹한 고통을 견디며 마지막 한 줄기 힘을 짜내어 이 냉엄한 석벽에 글자를 새기는 장면이었다.그 얼굴에는 끝없는 고통과 극에 달한 쾌락이 뒤섞여, 일그러진 표정이었다.분명 그녀는 그 광경을 상상했으리라. 목씨 후예들이 무수한 핏줄을 잃어 가며, 보장을 향한 가장 뜨거운 꿈을 품고 이 석문을 열었다가, 선조의 죄적과 자신의 백 년 희생이 조롱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그 찰나, 지옥으로 추락하듯 무너져 내리는 낯빛을.바로 지금 김단의 뒤편에 선 목설원이 그러한 것처럼.김단은 더없이 무거운 몸짓으로 돌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손으로 냉혹한 석벽을 미친 듯이 파헤치고 있었고, 손톱은 바위 틈에 박힐 듯 날카로웠다. 너무도 힘이 실린 손마디는 섬뜩할 만큼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늘 세상사를 우습게 여기던 고운 얼굴은 이 순간 사귀처럼 일그러졌고, 풍류를 담던 눈매에는 오로지 새빨간 혈광만이 치올라, 끝없는 절망과 치욕, 그리고 산산이 짓밟힌 광기가 소용돌이쳤다.결국 요망서는 해냈다.목씨 가문 대대로의 자긍이던 수호와 희생을, 하늘에 사무치는 우스개로 바꾸어 놓았다.목씨 자손들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혈육의 뜨거운 피로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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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5화

아마 그 목소리가 너무 미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목설하는 스스로 잘못 들었다고 여겼거나,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듯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그 음성에는 알아채기 어려운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무어라 하였소?”바로 그때, 목설원이 비틀거리며 김단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김단을 보지 않은 채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충혈로 물든 눈이 잠시 목설하를 스치고, 곧 멀리 학수고대하던 목씨의 어른들 쪽으로 향했다.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쉰 듯 광기 어린 큰 웃음이 불현듯 터져 나왔다.“하하하하! 가소롭구나! 가소롭다! 우리 목씨 가문의 백년 가업, 이 대대의 수호가 과연… 가소롭기 짝이 없도다!”한없는 비애와 분함, 치욕과 절망이 뒤엉킨 그 광소는 독을 머금은 칼날처럼 밤의 고요를 단숨에 갈라놓았다. 그리고 현장에 모인 모든 목씨 사람들의 가슴을 거칠게 꿰뚫었다.사람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놀라움과 의혹, 불안과 분노의 낮은 수군거림이 물결처럼 번져 갔다. 목설하는 벼락을 맞은 듯 굳어졌고 얼굴빛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질렸다. 그는 한 걸음에 다가서서 쇠집게 같은 손으로 목설원의 팔을 거세게 움켜잡고 흔들며 호통쳤다.“설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 안에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서 말해라!”목설원의 몸이 붙들린 채로 약간 흔들리더니, 웃음이 뚝 그쳤다. 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예쁜 복사꽃 같은 눈가에는 웃음과 함께 눈물이 맺혀 있었고, 횃불빛에 얼음 같은 절망의 광채가 번뜩였다.그는 코앞의 목설하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아무것도 없다! 황금도 없고! 보석도 없고! 너희가 꿈에 그리던 천문학적 부귀도 없다! 목숨을 구할 자옥정초도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우리 목씨 선조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업뿐이다!”쾅.목설원의 말은 벼락처럼 목씨 사람들 머리 위에서 굉음으로 터졌다.순식간에 무리가 술렁이며, 끓는 물처럼 들끓었다. 경악과 허탈, 불가해함과 농락당한 분노가 뒤엉켜 사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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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6화

최지습은 한마디 말도 없이, 탈진에 가까운 김단의 몸을 팔로 떠받쳤다. 그리고 반쯤 안아 주듯 묵묵히 별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호랑이군은 눈치껏 한 걸음 물러 난 채,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의 뒤를 따랐다.희미한 등롱빛이 발치에 흔들리는 고리를 그려냈으나, 김단을 휘감은 짙은 절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뒤따르던 호랑이군은 넋이 빠진 듯 발을 헛디디는 김단의 모습에 가슴이 와락 죄어들었다.다섯번째 도령이 미간을 질끈 모으고 낮게 말했다.“단이가 이 모양이니… 아마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오. 이번 타격이 너무 컸소.”두번째 도령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단이는 자옥정초만 생각하며 소한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소. 이제는… 허, 그 아이가 아마…”세번째 도령이 콧김을 내쉬었다.“내 보기엔 단이는 마음이 너무 약하오. 소한은 예전엔 단이에게 어떻게 했소. 그런데도 단이는 이리 애를 태우고 넋을 놓다니, 그럴 필요가 없소.”일곱번째 도령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온화한 눈길로 거들었다.“그리 말 마오. 단이는 의원이오, 인이 본성이오. 소한이 아니더라도 우리 같은 뒤늦게 맺은 오라버니들 가운데 누가 탈이 나 그녀의 손이 필요하다면, 아마 이와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오. 남의 고통을 못 보오, 하물며 마음에 두는 이의 고통은 더더욱 그러하오.”모두가 일리가 있다 여겨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네번째 도령의 눈길이 무리를 넘어, 앞서 걷는 최지습의 묵묵한 등과 그에게 힘없이 기대 선 김단의 모습에 머물렀다.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낮게 투덜거렸다.“백도령은 도대체 어찌하오. 단이가 이 지경인데, 그냥 끌어안고 가기만 한단 말이오. 위로의 말 한마디도 못 하오. 영락없는 목석이로구려.”두번째 도령이 혀를 찼다.“그대가 백도령을 하루이틀 안 지낸 것도 아니지 않소. 본디 말보다 일이 앞서는 이요. 지금 가서 무슨 말을 하라 하오. 괜찮다, 슬퍼 말라… 그런 말이 쓰이겠소.”쓸데없는 말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여덟번째 도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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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7화

최지습이 걸음을 멈추고 무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모든 것이 가라앉은 뒤에 남은 피로와 무거움이 배어 있었다.“자옥정초는 없소.”그 말은 차가운 선고와도 같아, 숙희와 고지운의 낯빛을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게 했다. 눈동자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줄기 희망마저 꺼져 버렸다.자옥정초가 없다는 것은 곧 소한의 죽음을 막을 길이 없다는 뜻이란 말인가.최지습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김단을 속히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고자 했다. 그는 몸을 약간 비켜, 그들을 돌아 지나가려 했다.“그럼…” 다소 엇나간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영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들었다. 아래로 깔린 눈빛엔 날카로움이 번뜩였고, 최지습과 김단을 훑어보며 예사롭지 않은 다급함으로 물었다.“금역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소?”최지습과 김단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영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물음은 이때와는 어딘가 맞지 않아, 더욱 어색하고 기묘하게 들렸다. 최지습의 눈동자에 미세한 경계가 스쳐 지나갔다.지칠 대로 지친 김단은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요망서가 남긴 의서뿐입니다.”“의서요?” 영칠의 눈빛이 살짝 밝아지며 더 바싹 다가섰다.“그 의서는 어찌하셨소? 가져오셨소?”김단은 그 다급한 추궁이 의아하여 고개를 저었다. 피곤이 짙게 밴 목소리였다.“모두 석벽에 새겨져 있어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영칠, 그 의서에 어찌 그리 마음을 두십니까?”영칠은 자신의 성급함을 자각한 듯 즉시 눈꺼풀을 내려 감정을 감추고 낮게 아뢰었다.“아뢰오니 송구하오나, 소자는 다만 요망서가 남긴 의서라면 혹 약왕곡이 잃어버린 비전일지도 모른다 여겼소. 그리하여 경솔히 여쭈었소니, 약왕곡의 주인께서는 넓게 용서하여 주시오.”그 해명은 그럴듯했으나, 방금 번뜩인 조급함과 지금 애써 누르는 태도는 가느다란 가시가 되어 최지습의 예민한 신경을 콕 찔렀다.이때 김단은 심력이 다하여, 소한을 구할 길 없다는 절망이 거대한 바위처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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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8화

숙희는 방금 최지습이 보내던 그 한 번의 눈빛을 떠올리자, 아직도 가슴이 서늘해졌다.영칠은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상가로 가서 냉차 한 잔을 따랐다. 손끝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몸을 돌려, 언제나처럼 담담한 낯으로 앞서의 변명을 되풀이하였다.“별일은 아니오. 요망서가 약왕곡 출신이니, 그가 남긴 물건이 예사롭지 않을까 하여, 약왕곡에 전해 내려온 귀중한 비급일지도 모른다 여겨 잠시 호기심이 일었을 따름이오.”숙희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를 보았으나, 지금은 무엇보다 김단의 마음을 더 염려하였다.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타이르듯 말했다.“무엇이든 당분간은 입에 올리지 마오. 아씨가 지금… 속이 오죽하겠소. 애타게 바라던 자옥정초도 없어졌으니, 소 장군 쪽은… 하.”말을 멈춘 그녀의 어조가 한층 엄숙해졌다.“한동안은 얌전히 지내시오. 쓸데없는 말을 보태 아씨 속을 더 뒤흔들지 마오. 방금 대군자의 그 눈빛을 못 보았소? 그대가 한마디만 더 보탰다면, 정말 혀를 뽑을까 두려웠소.”영칠은 차가운 찻잔을 움켜쥔 채 손마디가 희미하게 하얘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하였다.“알겠소.”그는 더는 숙희를 보지 않고 창밖의 짙은 밤을 바라보았다. 가슴속 근심은 덩굴처럼 뻗어 매순간 자라났다.이튿날 이른 아침.억눌린 기운이 별당을 온통 덮어 눌렀다.김단은 뜬눈으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눈밑에는 짙은 먹빛 그늘이 드리워졌고, 얼굴은 비칠 듯 창백했다. 창가에 앉은 그녀는 뜰의 마른 가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빛이 공허했다.고지운이 뜨거운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몰골을 보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 조심스레 다가가 부드럽게 권하였다.“단이, 어찌하든 먼저 조금이라도 드시오. 소한 쪽 사정도 아직 분명치 않으니, 그대 몸부터 쇠약해져서는 아니 되오.”그러나 이런 위로는, 분명 이 순간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였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우는 것보다 더 보기 괴로운 웃음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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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9화

“안 되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사옵니다!”김단의 목소리에는 무너지기 직전처럼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서찰을 꽉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최지습은 내내 문밖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가 그렇게 뛰쳐나오자 곧장 달려와 휘청이는 몸을 부축했다.숙희와 몇 명의 호랑이군도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으며, 모두의 낯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단이, 무슨 일이오?”“소한이오!”고지운이 김단의 뒤를 따라오며 다급히 말했다. “소한이 큰일이오. 거의 버티지 못하오!”이 말을 듣자 최지습도 크게 놀랐다. 그는 김단의 눈에 어린 절망에 가까운 근심을 내려다보며, 가슴이 세차게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곧 낮고 단호히 명했다. “말을 준비하오. 둘째 황자 관저로 가겠소.”일행이 서둘러 채비를 하고 막 편원 대문에 이르렀을 때, 눈앞의 광경이 그 발을 가로막았다.뜰문 밖에는 언제부터인지 목씨 가문 호위들이 조용히 도열해 있었다.그들은 같은 복색에 엄숙한 낯빛으로 허리에 검을 차고, 바깥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조리 엄중히 막아섰다.선두에 선 이는 낯빛 또한 험악한 목설하였다. 그 뒤로는 눈매가 매서운 목씨 가문 장로 몇이 버티고 섰다.“단이…”목설하의 목소리는 메마르고, 깊은 체념과 알아차리기 힘든 강경함이 배어 있었다. “그대들은 당분간 목씨 가문을 떠날 수 없소.”김단의 마음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목설하를 보다가, 적을 맞이하듯 팽팽히 긴장한 목씨 가문 호위들을 훑어보며 외쳤다.“어찌 그러시옵니까?”최지습은 낯빛을 어둡게 굳히고 차갑게 꾸짖었다.“목설하, 무슨 뜻이오?”목설하는 김단과 최지습의 추궁 어린 시선을 피하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어젯밤… 장로들이 친히 금역에 들어가… 확인하였소.”그는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천근만근의 말처럼 무겁게 이었다.“석벽에 새겨진 것들이… 목씨 가문 백년의 청명에 관련되오. 일이 중대하니, 모든 것을 아는 이들은 사안을 단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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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0화

최지습의 안색은 먹구름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목씨 가문이야말로, 양국이 맞서 싸워 무고한 백성이 화마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는 그들의 마음을 틀어쥐고, 그 위에서 마음껏 군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그러나… 사실이 그러하였다.목씨 가문이 한마디만 하면, 당국 주상이라 하더라도 전쟁을 마다한다 한들 그들의 줄기찬 압박을 끝내 막아 내기란 어렵다. 그때가 오면 양국은 피할 수 없이 칼날을 맞대게 될 터였다.최지습의 주먹이 저도 모르게 굳게 죄어 들었고, 이름 모를 노기가 가슴끝에서 치밀어 올랐다.바로 그때, 소매끝이 가볍게 잡아당겨졌다.고개를 돌리자, 김단이 그를 마주했다. 그 눈동자에는 깊고 무거운 심정이 눌려 있었다.그녀는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군이 칼을 빼들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최지습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울컥였고, 턱선은 쇠처럼 단단히 굳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켜 서늘한 살기를 억눌렀으며, 곧 김단의 차갑게 떨리는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목씨 가문 사람들에게 더는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김단을 감싸 보호하며 몸을 돌려 편원으로 발길을 옮겼다.등 뒤에서 무거운 뜰문이 쾅 하고 닫히며, 바깥의 서늘한 칼빛과 숨막히는 감시를 단단히 가로막았다.문 안에서는 숙희와 고지운이 더는 참지 못하고, 가슴속 분노가 화산처럼 치솟아 터졌다.“은혜를 원수로 갚는 무리들이로다, 짐승과 다를 바가 없구나!” 숙희가 분통을 이기지 못해 온몸을 떨며 뜰문 쪽을 가리켰다.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아씨께서는 그 불쌍한 아이들의 넋을 천도하시려 애써 힘을 다하시고, 목씨 가문의 숨기고 싶은 비열한 죄책감마저 달래 주셨지요. 저와 공주 전하 또한 손이 저릴 만큼 종연과 종마를 접으며, 사탕알을 사 들여 그 아이들의 영혼을 위로했는데, 저들은 어떠합니까. 돌아서자마자 우리를 죄인처럼 가두다니. 결국 조상들의 구역질 나는 추문을 덮으려는 수작일 뿐이잖습니까. 참나.”고지운이 곁에서 달랬다. “이제 그만하자. 우리도 저 바깥의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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