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21 - 챕터 1130

1150 챕터

제1121화

용강한은 가볍게 웃었다.이제도 보아내지 못하면, 두 생을 헛살았단 말이지.“도대체 누가 아직 젊다고 한 것이냐?”정 대인의 목소리는 천둥같이 울려 퍼졌다.이영이 뒤를 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한 정 대인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풍골은 여전했으나, 그 기운은 노년에 가까웠다.그러나 용강한은 달랐다.하얗게 빛나는 머리칼과 준수한 얼굴, 마치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듯했다.용강한은 웃으며 말했다.“정 대인이야말로 정정하지 않소. 발걸음이 아직도 빠르구려.”정 대인은 껄껄 웃으며 이영에게 손을 모아 인사하곤, 용강한 맞은편에 앉았다.잠시 바둑판과 그 위에 펼쳐진 ‘산해경’을 훑어보더니 말했다.“무슨 일로… 이제 정말 먼 길을 떠나려는 것입니까?”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육진과 소우연이 떠나면, 자신도 떠날 작정이었다.“그래서 이 흠천감을 정말로 황자마마께 맡기시겠다는 것입니까?”정 대인이 다시 물었다.용강한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정 대인이 있지 않소.”“허허, 이건 다 목숨이 질긴 탓이로군요.”“복과 화는 항상 함께 오는 법이오. 정 대인의 복은 깊고도 넓지.”이영은 그 둘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무엇보다도 용강한이 이번엔 정말로 경성을 떠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이 나라를,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기대를, 그리고 이 황태녀의 자리를 모두 내려놓고 그와 함께 유랑할 수 있을까?이천이 과연 저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황녀 마마.”정 대인이 문득 이영을 바라보았다.‘이 아이…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구나.’용강한, 그걸 모른단 말이냐?용강한은 시선을 내리고, 조용히 답했다.방금 알았다.그는 단지 그녀가 훌륭한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군주가 되도록 인도했을 뿐이다.그런데 어쩌다, 일이 이리 되었을까.“황녀마마, 이젠 돌아가십시오.”용강한이 부드럽게 말했다.이영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네, 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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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2화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정 대인의 기운이 넘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그가 돌아온 날, 용강한은 그에게 괘를 한번 봐주었다.이 노인네, 참 질기기도 하지. 앞으로 십 년은 더 거뜬히 살 것 같았다.정 대인도 일어나며, 용강한을 힐끗 바라봤다.속으로 중얼거렸다. ‘속으론 날 죽지도 않는 노인네라 생각하고 있겠지.’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말해버리면 재미가 없으니까.용강한은 은월각을 나서 영화궁으로 곧장 향했다.“오라버니, 어쩐 일로 여기까지? 참 드문 일이네요.”그가 스스로 이 궁에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용강한은 말했다.“도와주었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다.”“좋아요!”그녀는 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큰 영광이라 여겼다.얼마나 기쁜지 얼굴 가득 웃음이 피어났다.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용강한도 덩달아 기뻤다.하지만 이영의 마음을 떠올리는 순간,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함향은 차를 올리고 물러났다.용강한이 말했다.“금이 좀 필요하다.”“네?”용강한이 금을?예전에 그녀가 준 적도 있었지만, 그는 그때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필요하다니… 그야말로 잘된 일이었다.소우연은 함향을 향해 말했다.“내 열쇠를 가져다가, 금 몇 상자를 용부로 보내도록 해라.”함향은 공손히 인사하며 물러났다.“예, 마마.”용강한이 말했다.“내가 왜 금이 필요한지는 묻지도 않느냐?”“오라버니께서 필요하시다는데, 제가 왜 묻겠어요.”“제가 두려운 건 오히려 오라버니께서 제게 부탁조차 안 하는 거예요.”소우연은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다.그녀가 그토록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용강한은 더욱 미안해졌다.정 대인이 따로 입을 열지 않았어도, 그는 이미 이영의 마음을 정리해야 함을 깨닫고 있었다.그 아이가 헷갈리고 복잡한 감정을 품은 채 사랑과 혈연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그런 감정은 제대로 정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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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3화

“예, 마마. 다만 방금 송이를 만났는데, 황녀마마께서 오늘 궁 안에 계신다고 하였습니다.”“영이가….”그 일은 몰랐지만, 이영이 황태녀부와 영화궁을 오가며 애쓰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럼 전해다오. 금융궁은 본래 모습 그대로니, 마음 편히 머물라고.”“예, 마마.”반 시진이 흐른 뒤, 하늘이 어스름해졌다.이육진은 먼지바람을 일으키듯 급히 돌아왔다. 소우연에게 간단한 인사만 건넨 후 곧장 목욕하러 들어갔다.잠시 후, 아무도 없는 전각에서 그녀를 번쩍 안아올리며 말했다. “간석이에게 들었다. 너, 용강한에게 금괴를 다섯 여섯 상자나 보냈다더구나?”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께서 먼저 부탁하셨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분이 그 금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시는 걸까요?”“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그분이 필요하다 하시니 우리가 도와드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이육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금이야 넘쳐나니까.소우연은 그의 가슴을 살짝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 나이에 무슨 힘이 저리 세요. 이리 번쩍 들어올리시고…”“지금 이 몸을 늙었다고 여기는 게냐?”이육진은 그녀를 안은 채로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청동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보아라, 젊지 않느냐?”그런데 정작 거울 속 소우연은 여전히 스물넷 스물다섯의 고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서니, 자신이 몇 살은 더 많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소우연도 거울 속 이육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세월을 머금은 단단함과 무게가 느껴지긴 했다.하지만 그것도 겉모습일 뿐. 단둘일 때 그는 여전히,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장난기 가득한 사내였다.소우연은 거울에서 시선을 돌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손끝으로 살짝 자라난 수염을 어루만졌다. 조금 따끔거렸다.“연이 네가 나를 유혹하는구나.”이육진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은 어떻게 받고 싶으냐?”“정말, 여전히 철없으세요.”“우리는 아직 한창이다. 인생은 이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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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4화

같은 시간, 용강한은 궁을 나서서 용부로 향했다. 소우연이 보내온 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창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문은 쌓여있는 금괴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떻게 이렇게 또 많이…”용강한이 담담하게 말했다.“황녀마마의 생신 선물로 금으로 만든 천마 모형을 준비하지 않았더냐. 공주마마도 그 형평에 맞게 대해줘야지.”비록 이영에게 천마를 약속했을 때는 이진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소우연의 아이들을 차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흠천감의 이천에게는 이 정도 금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진귀한 보물들 중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주면 될 일이었으니까.“공주마마는 돼지띠라고 들었습니다. 금돼지로 만드심이 어떨까요?”경문이 물었다. 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그래. 직접 감독해서 실수 없도록 하여라.”“알겠습니다.”경문은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대답하고, 부하들에게 금을 창고로 옮기도록 했다.경문이 업무를 마치자 용강한이 다시 불러냈다.“심초운을 찾아오거라.”“예, 어르신.”심초운은 오늘 황태녀부에 있지 않았고, 아마 자신의 거처인 진국공부로 돌아갔을 것이었다.두 시진이 지나서야 경문은 심초운과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왔다.“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심초운은 경문을 보며 물었다.그는 무술뿐만 아니라 간단한 도술까지 용강한에게 배운 제자였다.용강한은 겉으로는 제자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심초운은 그로부터 무공과 간단한 도술을 배운 적이 있었기에 그 은혜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경문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큰일은 아닐 테니 긴장하지 마십시오.”그 말에 심초운은 안도하며 숨을 돌렸다.경문은 그를 용부 내 용강한의 방까지 데려다준 뒤 물러났다. 심초운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사부님, 저 심초운입니다.”용강한은 좌선하며 명상 중이었다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떴다. “들어오너라.”“예.”심초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실을 지나 내실에 이르자, 용강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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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5화

용강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봉황이 함께 날아드는 상서로운 조짐이니, 대길한 괘다.”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연이어 나에게 묻는 것도, 혼인을 보는 괘도… 너도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심초운은 얼른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사부님, 혹시… 황녀마마와 저의 인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그래.”심초운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렇다면 현재 황녀마마가 자신의 고백을… 고민 중이신 건가? 정말 자신을 배필 택할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그 가능성만으로도 심초운은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러나 용강한은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인연의 줄이 조금 비뀌고 있다. 그대로 두면, 설령 인연이 닿아 있더라도 너희는 몇 해를 헛되이 흘려보내게 될 것이야.”“그렇다면…”용강한은 탁자 위 바둑알을 다시 쥐어 들고, 자리를 새로 정리하며 말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너에게 품은 호감만 믿고 있어선 안 된단 뜻이다.”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심초운은 진심으로 물었다. “사부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용강한은 곧바로 대답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황후께서 아직 태자빈이시고, 회남왕비셨던 시절에도 폐하의 뜻에 순종하시는 한편, 자신이 믿는 바가 있다면 누가 말리든 기어이 관철하셨지. 그런 결단이 있었기에 황제께 평생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용강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소우연,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육진은 결국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맺어져 있는 인연이었다.하지만 심초운과 이영의 인연은 그렇지 않았다. 방치해두면 멀고 먼 길을 돌아야 겨우 닿을 수 있을 것이다.본래 그는 인과에 얽히는 것을 꺼려했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전생부터 엮인 소우연과의 인연을 고려하면 심초운의 앞길을 조금쯤은 바꾸어도 괜찮았다.'그래, 심초운. 이제는 너도 좀 써먹혀야 할 때다!'심초운은 멍한 얼굴로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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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6화

용부를 떠났을 무렵,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심초운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마차를 몰던 하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국공부로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국공부로 가자.”“예.”마차의 방울소리는 딸랑딸랑, 말발굽 소리는 다다다 울려 퍼졌다. 심초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오늘 사부가 불러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사부께서 어째서 자신과 이영의 일에 간섭하시려는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사부께서 이영의 속마음을 이미 아시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시려는 건 아닐까.그 가능성에 닿자, 심초운은 괜히 목이 말라 연거푸 차를 마셨다. 그렇게 고민을 안고 국공부에 도착하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이 저녁을 들고 있었다.“오라버니!”둘째 심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노란 치마저고리를 입은 그녀는 마치 나비처럼 가볍고 우아했다.넷째 심교은은 주황색 옷차림으로 달려와 심초운에게 안겼다. “오라버니!”심초운은 미리 준비해 둔 토끼 인형을 꺼내 심교은에게 건넸다. “교은아, 자.”심교은은 기뻐서 방방 뛸 뻔했지만, 숙녀다움을 지키라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 꾹 참았다.심연희는 삐친 얼굴로 말했다. “동생 것은 있고, 저는 없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초운이 옥패를 하나 내밀었다. “자, 이건 네 거야.”우옥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동생 것은 다 챙기고, 이 어미 것은 없단 말이냐...”심초운은 마치 마술이라도 부리듯 소매에서 비단 상자 하나를 꺼냈다. “어머니 것도 준비했어요.”그리고는 덧붙였다. “아버지 것도 있답니다.”우옥명에게는 고운 금비녀를, 심소균에게는 옥으로 만든 반지를 내밀었다.“어머나, 우리 모두 다 받았구나.”우옥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심초운은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두 여동생 모두가 이런 사소한 정성에도 매우 행복해한다는 걸 말이다.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둘째 심책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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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7화

지금, 도성 전체가 누가 시군이 될지에 대해 들떠 있었다.잉어가 용문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하지만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이 있었다.지금의 황제, 이육진은 실로 도량이 넓은 분이라는 점이었다.감히, 어떤 집안이 딸에게 가산을 물려주겠는가?아니, 물려주기는커녕 상속의 ‘상’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그만 말하자구나.”인연이 있다면야 어찌 될지 모를 터였다.우옥명도 그것만은 예단할 수 없었다.어쨌든 심초운은 열 살이 되기 전까지 늘 이영과 함께 금융궁에서 지낸 아이였다.그 이영과 심초운 사이의 정은 여느 관계와는 분명히 달랐다.어떤 결과가 닥치든,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운명이었다.심소균이 자리에 일어서며 심초운을 향해 말했다.“초운아, 아비와 잠깐 이야길 나누자구나.”“예, 아버지.”심초운은 정중히 절을 올리며 어머니께 인사드렸다.“어머니,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다녀오거라.”우옥명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지만, 아들이 요즘 들어 조금 야윈 듯하여 눈길이 한참 머물렀다.부자는 함께 서재로 향했다.문이 닫히고, 등불이 밝혀지자 그제야 날이 완전히 저물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촛불이 타오르며 방 안을 서서히 밝혔다.심소균은 온돌 위에 앉으며 심초운을 불렀다.“이리 올라오너라. 우리 부자가 바둑 한 판 둔 게 얼마 만이더냐.”“그러게 말입니다.”심초운은 무언가 심각한 얘기라도 있는 줄 알았기에, 뜻밖의 말에 순간 놀랐다.심소균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비는 평생 바둑을 두면서, 폐하께도, 네 사부님인 용강한에게도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심초운은 어색하게 웃었다.그는 그런 사람들과 바둑을 둬 본 적이 없었다.무엇보다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그러다 조용히 손을 들어 바둑알을 집었다.심소균은 흑돌을 잡아 선수로 한 수를 놓으며 말했다.“너는 이 심가의 장자다.”심초운은 말없이 들었다.“시군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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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8화

“너는……”심소균은 놀란 눈으로 아들을 보다가, 끝내 말을 멈췄다.“귀목이 물들었다 한들 무엇이냐. 너는 어쨌든 도가와 인연이 없는 아이다.”이토록 오랜 세월 수도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황태녀와의 혼인만을 꿈꿔온 아들이니, 심소균은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게다가 용강한의 파벌은 감정만 얽히지 않으면 혼인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심초운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바둑알을 놓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나와 폐하, 그리고 용 대인까지… 우리 셋 중에서 네가 가장 본받을 만한 사람은 바로 나다.”잠시 말을 고르던 심소균이 다시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어찌 여인의 마음을 얻는 법을 네게 가르쳐 주시겠느냐?”심초운도 알고 있었다.그럴 리 없었다.“용 대인은 혼자 외롭게 지내는 사람이다. 그가 남녀의 정을 어찌 알겠느냐? 만약 그분이 사랑을 알았다면, 벌써 폐하와 수백 번은 싸웠을 것이다.”그 말에 심초운은 헛기침만 내뱉었다.“황태녀라 해도 저군일지언정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여인이기도 하지. 신분은 군주일지언정, 마음은 평범한 이들과 다를 바 없단 뜻이다.”“너는 그분에게 경외심과 애모를 함께 품고 있으면서도, 그 둘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몰라하니… 경외는 신하로서의 도리요, 애모는 사내로서의 감정이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 끝은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심초운은 입술을 다물었다.“사부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도, 아버지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결국, 누구도 확실한 해답은 주지 못한다는 뜻이었다.“황태녀는 어쨌든 여인이니 총애를 받아야 한다.”“허나 그 분은 또한 군주시다. 평범한 총애는 그 분에겐 사치요, ‘총애’라는 말조차 그녀 스스로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어떤 이를 총애할 것인가… 그것은 황태녀가 스스로 정해야 할 몫이다.”심초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그 역시 은밀하게나마, 이영이 자신을 총애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아버지 입에서 그 말을 직접 들으니, 얼굴이 뜨거워져 견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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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9화

“소자는 황녀마마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소원은 오직 마마와 한 생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허나… 마마께서 어째서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는지, 저는… 어떻게 해야 마마 마음에 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심초운은 결국 마음속에 담아뒀던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고백했던 일도, 황태녀가 고려해보겠다는 말로 대답한 것도 숨김없이 모두.처음엔 단순한 마음이라 생각했던 아들의 감정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절박하다는 것을 심소균은 그제야 깨달았다.오랜 세월 속에서도 아들은 늘 이영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그 감정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자꾸만 찌푸려지는 눈썹과 떨리는 숨결로서 보여주고 있었다.“사내라면, 강하게 나아가야 할 땐 나아가야 한다.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 강한 자를 따르는 법이다.”심소균은 바둑돌을 내려놓고, 아들 곁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그 분을 진심으로 돕되, 결정적인 순간엔 의지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라.”그리고 뻔뻔하게 웃으며 덧붙였다.“듣자 하니, 네 고백에 황녀마마께서 딱히 거절하지는 않으셨다 하지 않았느냐?”“그럼 됐다. 아들아, 좀 더 당당해지거라.”심초운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그 분을 유혹하거라.”“입맞춤도 하거라!”“하지만 만약 그 분께서 화를 내신다면…”“아들아.”심소균은 목소리를 낮추고 단호하게 말했다.“너희 둘, 함께한 세월이 얼마나 되느냐..너는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분이 네게 조금의 감정조차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애매한 말들’을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가장 나쁜 경우라 해봐야, 그분이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게 되는 정도겠지.”“하지만 네가 그분을 마음에 품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분을 바라보기만 하고, 결국 그분을 지켜주지도, 함께하지도 못한다면… 그건 마치, 참수형과 능지처형 중에서 네가 스스로 고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한칼에 끝나는 것이 낫지, 천천히 찢기며 죽는 건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이라면, 어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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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0화

이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마마마,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혹시 언니와 관련된 일일까?소우연은 짧게 대답했다.“괜찮다.”“아…”이진은 말끝을 흐리더니, 반은 걱정스럽고 반은 어딘가 찜찜한 표정으로 영화궁을 떠났다.궁을 나서던 길, 그녀는 곁에서 함께 걷고 있던 궁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언니는 언제부터 다시 황태녀부에서 지내신 거야?”궁녀 영이는 고개를 숙여 복을 올리며 대답했다.“공주마마, 황녀마마께서는 입궁하신 셋째 날부터 매일 출궁하셨습니다. 계속 궁 밖에서 지내고 계신다 들었습니다.”“셋째 날부터?”이진은 걸음을 멈추고, 작게 중얼거렸다.그럼 십여 일 동안, 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궁한 셈이 아닌가?‘궁 밖에, 누가 있는 거지?’이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영아, 어서 준비하거라. 지금 바로 출궁해야겠다.”궁녀 영이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지금 말씀이십니까?”“그래, 지금 당장.”언니를 찾아야 했다. 이상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긴장하실 정도면 분명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그렇지 않고서야 그 평정심 강한 어머니가 그런 얼굴을 하실 리 없었다.하지만…‘아니야, 안 돼. 언니에게 말해서는 안 돼. 혹시라도 정말 중대한 일이라면, 괜히 내가 꼈다가 오히려 일이 더 꼬일 수도 있잖아?’이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바꿨다.“필요 없다.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낫겠어.”발걸음을 돌려 향한 곳은 흠천감이었다.이천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는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터였다.“천이 오라버니!”이진은 숨을 헐떡이며 흠천감 안으로 뛰어들었다.“오라버니…!”이천은 푸른색 도포를 걸치고 불진을 안은 채 고요히 앉아 있었다.그 모습은 꼭, 진짜 도사 같았다.이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외삼촌께서도 이렇게 자주 도포는 안 입으시는데, 오라버니는 더 도사 같아 보여요. 삼촌은 큰 법회 있을 때만 도포를 입으시잖아요.”이천은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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