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201 - Chapter 210

212 Chapters

제201화

“네, 대표님이 물건 가지러 오라고 하셔서요. 사모님도 계시죠?”“네, 지금 위에 계십니다.”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귀로 주워 담은 유하는 재빨리 서재 안쪽을 훑었다. 그리고 곧 눈에 들어온 건, 구석에 놓여 있는 검은색 캐리어였다.‘내 캐리어!’‘증명 서류... 분명 저 안에 있을 거야!’그러나 계단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의아한 얼굴의 준서가 유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어떡하지?’마침내 태건이 계단 모퉁이를 돌았다. 눈앞에는 아이 손을 꼭 잡고 내려오는 유하가 있었다.“사모님.”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유하는 고개만 끄덕일 뿐, 대꾸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태건이 조심스레 물었다.“사모님, 이건...?”“아이 데리고 본가에 가려는 길이에요.”담담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제가 모셔다 드리겠...”끝까지 말을 잇기도 전에, 유하는 준서의 손을 잡고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단 한 번도 태건을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태건은 계단에 서서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얼굴에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곧 몸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그는 익숙한 손길로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챙겼다. 나가던 중, 무심코 구석에 있는 캐리어를 흘끗 바라봤을 뿐이었다.그가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유하의 차가 떠난 뒤였다. 태건은 별다른 생각 없이 차에 올라타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자료는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모님 명의로 된 사택은 전부 확인했는데, 그 빨간 중절모 로봇은 없었습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계속 찾아. 사모님 명의가 아니라면, 주변 사람들 것까지 확인해. 누군가 대신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어. 특히... 강이솔.]목소리는 단호했고 차갑게 내려앉았다.[유하가 버렸을 리 없어. 그 로봇은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된다.]“알겠습니다.”태건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병원 병실.전화를 끊은 승현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곁에 앉자마자 연우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 번졌다.“승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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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다음 날.아침 식사가 끝난 뒤, 유하는 준서를 데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멀찍이 걸어가며 유하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받았다.“이솔아.”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유하야, 내가 좋은 소식 전해 줄게!]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잠시 듣자마자, 유하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이솔과 태준혁의 협력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고, 태씨 가문은 여전히 위태로운 태풍 속에 서 있었지만 기반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얘기였다.[내가 태준혁 씨한테 직접 물어봤어. 며칠 안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서, 실종이니 사건이니 하는 소문을 다 부인하는 공식 발표가 있을 거래.][그렇게 되면 판은 거의 이대로 가는 거지. 거기다 ‘유산’과 협력 발표까지 나면, 우리 집안도 힘을 실을 수 있어. 그럼 널 붙잡아 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질 거야!]유하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마침 대답하려는 순간, 짧은 비명과 함께, 거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수화기를 때렸다.유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이솔아!”아무 대답이 없었다.유하는 목이 터져라 이솔의 이름을 불렀다. 세 번째쯤 되었을까, 숨이 잦아든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괜찮아, 나 진짜 괜찮아. 방금 누가 차를 몰다가 실수로... 거의 부딪칠 뻔했어. 그냥 놀랐을 뿐이야.]“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응, 응. 걱정 마. 며칠 뒤면 우리 또 만날 수 있어. 기대되지 않아?]이솔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발랄함을 되찾았다.유하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응... 기대돼. 정말 기뻐.”...다른 한편.전화를 끊은 이솔은 다리에 힘이 빠져 잠시 휘청거렸다.방금 그 오토바이가 무슨 실수였을까? 분명히 자신을 향해 돌진해 왔다.‘길 한복판에서 사람을 들이받다니...’‘태씨 가문을 노리는 저 인간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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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유하는 오히려 담담했다.며칠째 머릿속은 온통 그린힐 집에 다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솔 쪽 일은 거의 매듭을 지어가고 있었지만, 떠나기 전까지 반드시 찾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증명 서류들이었다.그게 손에 없으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금요일 오후, 마침내 이솔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이 거의 끝나 간다는 소식이었다.이제 유하는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그날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경호원과 함께 학교에 준서를 데리러 갔다.돌아오는 길, 유하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준서야, 엄마가 널 위해 선물 준비해 뒀어. 공부 열심히 한 보상이야.”“진짜요?!”준서는 환하게 웃으며, 신나게 외쳤다.“그럼 그린힐 집으로 가자!”유하의 가슴은 서늘하게 저렸다. 사실 준비한 선물 같은 건 없었다.아이에게 거짓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린힐의 집에 도착하자, 유하는 준서를 방 앞까지 데려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엄마 금방 올게.”발길을 돌리던 순간, 미안함에 발이 멈췄다.유하는 몸을 굽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목소리도 모르게 나직해졌다.“꼭 기다려.”‘다음엔 진짜 선물을 준비해야지. 오늘은 꼭.’준서의 눈은 기대와 기쁨으로 반짝였다.엄마가 예전처럼 다정하게 다가와 주었다. 요즘 들어 엄마가 조금 멀게만 느껴져 속상했는데, 다시 이렇게 자신을 꼭 안아 주니 마음이 벅차올랐다.“엄마는 역시 나를 좋아하는구나.”준서는 작은 얼굴을 엄마의 볼에 비비며 말했다.“엄마, 기다릴게요.”유하는 순간 얼어붙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준서야, 제발 연우 이모랑은 만나지 마. 엄마는 싫어.’그러나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자신에겐 아이의 선택을 막을 권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이 말해 주었다. 억지로 잡으려 하면, 아이는 오히려 더 멀리 달아날 뿐이라는 것을.승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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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비바노치아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테이블에는 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승현의 일행 세 사람, 그리고 ‘유산’ 팀에서 나온 세 사람.승현의 시선이 낯선 얼굴들을 훑고 지나간 후, 미간이 좁혀졌다.미팅 시작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미 10분 늦었다. 그런데도 정작 핵심 인물, ‘유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여러 차례 난관 끝에 잡힌 자리였지만, 승현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태건이 눈빛으로 재촉하자, 상대편 세 사람은 서로 얼굴만 살폈다. 결국 그중 한 명이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뒤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들어왔다.“임 팀장님께서... 직접 말씀 나누고 싶다고 하십니다.”‘임 팀장? ‘유산’의 본명이 ‘임’ 씨였던가?’승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스피커폰이 켜졌다.슥- 바람 소리만 스치듯 흘렀다. 긴 정적이 이어진 끝에, 차분하고 맑은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후배님, 오래간만이네.]한치의 망설임도 필요하지 않았다.승현은 곧바로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안색이 짙게 가라앉았다가, 곧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룸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다.연우는 잠시 놀란 눈길을 주었다.‘‘유산’이... 승현과 아는 사이였어?’무심코 물음을 꺼내려던 순간,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태건의 싸늘한 표정을 보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뭐지, 이 분위기...?’그때, 승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한 음절씩, 무겁게 떨어졌다.“임, 청, 산.”전화기 너머, 잔잔한 웃음이 흘러나왔다.[7년 만인가? 아직 날 기억하고 있구나.]승현은 임청산을 잊을 리가 없었다.그리고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언제 귀국했습니까? 왜 미리 말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사람을 보내, 선배님을 환영하는 자리라도 마련했을 텐데...”수화기 너머의 웃음은 낮고도 쓸쓸하게 번졌다.[우리 사이가...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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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승현은 여전히 잔잔히 웃고 있었다.겉으로는 그 웃음이 평온해 보였지만, 연우의 마음은 점점 옥죄어 오는 듯 불안에 휩싸였다.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연우가 아는 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략은 알고 있었다.그때 승현은 유학을 불과 1년 만에 접고 서둘러 귀국했다. 고리대학교에 복학해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곳에서 마침 박사과정 수료를 앞둔 청산과 심각한 충돌을 빚었다.소문에 따르면 꽤 크게 번진 사건이었다.연우가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중심엔 유하가 있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현은 번개 같은 결혼을 했다.그 무렵, 청산은 돌연 고리대를 떠나 해외로 나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연우는 이번에야 알았다.‘유산’ 팀의 실질적 수장이 바로 그 임청산이라는 걸.받아들이기 힘들었다.게다가 그 청산이 속했던 학번 친구들 사이에서도 청산과 유하와 각별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소유하 따위가 뭐라고!’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연우의 가슴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여자 주제에, 왜 늘 나와 맞서려 드는 거야?’‘왜 세상은 다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지?이번 미팅은 물거품이 된 게 뻔했다.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옆에 있는 승현을 의식한 순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누른 뒤, 남자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승현아... 그럼 우린 어떻게 해?”승현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손등을 토닥이며 담담히 말했다.“괜찮아. 세상에 AI 잘하는 사람이 임청산 하나뿐인 줄 알아? 다른 선택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그는 연우의 손을 조용히 놓고 일어섰다.“여기 잠시 있어. 곧 사람 불러서 집에 데려다줄게.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승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룸을 나섰다. 태건도 곧장 뒤따랐다.룸에 남겨진 연우는 두 손을 허공에 펼친 채, 한참 동안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눈빛은 차갑고 독했다.“소유하... 소유하... 소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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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쾅!안방 문이 크게 흔들렸다.준서는 승현이 돌아온 걸 보자마자 유하의 손을 뿌리치고 승현에게 달려가려 했다.유하는 반사적으로 아이 손목을 꽉 잡으며, 간절한 속삭임 같은 목소리를 냈다.“준서야, 가지 마.”준서는 화가 치밀어 오른 듯 ‘엄마가 또 나를 속였어’ 하고 생각하며, 있는 힘껏 유하의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아빠 다리에 매달렸다.“아빠, 엄마가 절 속였어요!”승현은 창가에 웅크린 채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유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여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소는 부드러웠고, 목소리 또한 따스했다.“그래?”“그럼 아빠가 이따가 물어볼게. 엄마가 뭘 속였는지.”말을 마치며 승현의 눈매가 옆에 서 있던 태건을 스쳐 지나갔다.태건은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나와 준서를 안아 들고 방 밖으로 걸어갔다.준서는 아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발버둥쳤지만, 어른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그래도 억지로 안긴 채 문밖으로 향하는 순간, 아주 미약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엄마?’준서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과 마주쳤다.순간, 준서의 몸이 굳어 버렸다.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게다가 그 눈빛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했다.어린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엄마...”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태건은 아이를 더욱 단단히 안고 방을 나섰다.그리고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버렸다.문틈 너머, 엄마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장면이 스쳐 갔다.준서의 눈도 붉게 물들며, 멍한 듯 중얼거렸다.“엄마... 엄마가 울고 있어요.”태건은 아이의 뒷머리를 감싸안고, 작은 얼굴을 자신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파묻어 버렸다.“도련님, 보지 마요, 괜찮아요.”...방 안.유하는 창가에 반쯤 웅크린 채 다가오는 승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은 쿵쾅거렸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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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바닥에 흩어진 유하의 증명 서류들이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억눌러 온 분노가 폭발하듯, 승현은 유하의 목덜미를 거칠게 물어뜯었다. 그리고 피가 맺히고 번지며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았다.승현은 유하의 허리를 감싸 안아 침대 위로 내던졌다.간신히 숨을 돌린 유하는 거칠게 기침을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살아야 해... 제발...’승현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스친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훑었다. 다른 한 손은 천천히 양복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그가 몸을 숙이며 귀가에 낮고 쉰 목소리를 흘렸다.“여보, 우리... 아이 하나 더 갖자.”승현의 말은 망치가 되어 유하의 머리를 후려쳤다. 유하는 단번에 각성했다.방금 겨우 되찾은 숨도 잊은 채,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남자의 힘은 벽 같았고, 유하의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유하가 걸친 옷가지들이 허망하게 흩어지며, 차가운 피부 위로 뜨거운 체온이 밀려왔다.‘안 돼... 제발, 안 돼...’유하는 밀쳐내려 했지만, 손끝이 허공을 헤매다 무언가 단단한 것에 닿았다.바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떨리는 손이 그것을 휘둘렀다.쾅!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방안을 뒤덮었다.그리고 모든 것이 멎었다.뜨거운 액체가 위로 떨어졌다.유하의 눈가를 적신 눈물에 붉은 핏방울이 섞였다.유하는 넋이 나간 듯 자신 위에 엎드린 남자를 바라보았다.승현의 머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마치 피눈물처럼 뺨 위에 떨어졌다.그는 이마를 짚더니, 피 묻은 손끝을 바라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낮고 서늘한 남자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다음 순간, 유하의 창백한 입술이 다시 거칠게 짓눌렸고, 피가 입안 가득 번지며 철 냄새와 함께 광기 어린 집착이 스며들었다.‘숨... 못 쉬겠어... 무서워...’유하는 제어할 수 없는 떨림에 휩싸였다.잠시 후, 승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피에 젖은 입술 끝이 천천히 올라갔다.“소유하, 넌 평생 날 잊지 못할 거야.”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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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혼돈이 휩쓸고 지나간 뒤, 안방은 다시 고요해졌다.유하는 옷이 흐트러진 채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한참 만에야 제정신을 되찾았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발에 힘주어 바닥을 딛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숨을 몇 차례 고른 뒤,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거울 속 유하의 얼굴과 몸 곳곳에 핏자국이 번져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유하는 수도꼭지를 틀어 피 묻은 손을 물에 담갔다. 계속해서 문질렀지만 피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그러고 나서 욕실을 둘러보았다.곧 샤워기 아래로 다가가 아무렇게나 물을 틀었다.차가운지 뜨거운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대로 물줄기가 유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그녀는 온몸을 씻어내리며 얼굴과 몸 곳곳을 거칠게 문질렀다.몸은 계속해서 떨렸고, 머릿속은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했다.‘내가 오승현을... 때렸어?’‘쓰러뜨렸다고? 피가 그렇게 많이... 내가... 사람을 죽인 거야?’‘나... 감옥 가는 건가?’이와 동시에 두려움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을 조여 왔다. 얼굴에 묻은 피는 이미 다 씻겨 내려갔지만 거울 속 유하는 여전히 온통 붉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아. 없어지지 않아.’...승현을 실은 차는 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들것에 실린 승현의 몸이 급히 안으로 옮겨졌다.오광진은 전화를 받고, 박영심에게는 알리지도 못한 채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준서는 본가로 먼저 옮겨졌다.병원에 있는 승현은 당분간 태건이 책임지고 지켜야 했다.소식을 들은 연우와 하지철, 류정인도 병원으로 급히 달려왔다.승현의 지인들 역시 속속 모여들었다.혼란이 커지던 그때, 그린힐 저택 앞에 낯선 차량 행렬이 들어섰다.검은색 고급 차 여러 대가 멈춰 섰고, 그중 한 대에서 하얗고 긴 재킷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은테 안경 너머로 맑고 단정한 인상이 드러났다.경호원들이 길을 열었다.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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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안에 있던 유하의 눈에서 눈물이 한순간 터져 흘러내렸다.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숨조차 삼켜가며 한참을 버텼다.그러다 금세 질식할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 왔다.유하는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청산은 반걸음 물러서며 흰색 코트를 문틈 사이로 내밀었다.유하는 잠시 손을 뻗었다가, 코트를 보자마자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나 더러워요.”피와 물에 젖은 몸, 그 새하얀 옷을 망칠 것 같았다.“알아. 괜찮아.”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부드러웠다.그는 시선을 안으로 들이지 않은 채, 코트를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받아 들고, 조심스레 어깨에 걸쳤다. 몸을 감싼 천 아래로 겨우 숨을 고른 뒤, 문을 활짝 열었다.드디어 마주 선 두 사람.긴 침묵이 흘렀다.‘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오랜 시간, 처절하게 헤어진 끝의 재회.서로의 눈빛이 스친 순간, 유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그때, 청산이 갑자기 한발 다가섰다.유하는 놀라 뒤로 물러섰으나, 눈앞의 남자는 몸을 낮춰 무릎을 굽혔다.“허리끈이 제대로 안 묶였네.”그는 서둘러 유하가 대충 묶은 매듭을 풀어내고, 단정하게 다시 묶어 주었다. 정갈하게 매듭을 고친 뒤에야 일어나 한 걸음 물러섰다.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늘 그랬던 것처럼 온화했다.마치 시간 따윈 흐르지 않은 듯,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던 사람처럼.“가자.”유하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 손끝을 그의 팔에 얹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침실을 나섰다.계단 아래로 이어진 복도를 지나며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왔지만, 누구도 막지 못했다.그때 맞은편에서 윤해월이 달려왔다.“사모님, 안 됩니다!”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경호원이 먼저 유하를 막아섰다.윤해월은 눈앞에서 유하가 다른 남자와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청산 일행이 자리를 뜨자, 윤해월은 곧장 태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는 윤해월이 감당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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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승현의 친구들이 모여 유하를 헐뜯고 비난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연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묘하게 가벼웠다.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세수를 핑계 삼아 계단 쪽으로 몸을 숨겼다.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얼굴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거칠게 문질러 지우고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뭐 하나 좀 알아봐 줘.”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7년 전, 고리대학교에서 오승현, 소유하, 임청산 이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소한 것까지 전부.”7년 전의 일 따위, 연우는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때는 단순히, 승현이 소유하와 갑작스레 결혼한 게 자신을 향한 보복이라고만 여겼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승현은 그 일을 아직도 붙들고 있어... 분명 뭔가 있어.’그 사실이 연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알아내야 했다. 7년 전, 자신이 해외에 있던 그 시절, 이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승현이 소유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나는 반드시 그 뿌리까지 도려내야 해.’연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과거든 현재든, 하연우와 오승현만이 집안도, 배경도, 능력도 서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소유하 따위는 그저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그리고 임청산.그 역시 반드시 파악해야 했다.‘임청산이라는 남자, 반드시 내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해.’연우는 이어서 차갑게 지시했다.“임청산. 그 사람에 관한 건 전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록까지 빠짐없이.”소유하 같은 여자를 선택할 수 있는 남자라면, 자신이 못 가질 이유도 없었다.아니, 본래 연우가 손에 넣지 못하는 남자는 없었다....밤이 깊어졌다.검은 차량 여러 대가 줄지어 ‘대나무숲’ 주택단지로 들어섰다.연등 불빛을 따라 한 별장 앞에 차들이 멈췄다.유하는 차에서 내려 얼굴에 스치는 밤바람을 잠시 느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자 마음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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