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211 - 챕터 220

464 챕터

제211화

청산은 쓴웃음을 지었다.“차마 널 마주할 용기를 못 냈어.”유하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가슴이 저릿하게 시려왔다.“사실은 내가 선배를 볼 자격이 없잖아요.”정작 피해야 할 쪽은 자신이 아닌가 싶었다.청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유하야, 다 지난 일이야.”유하가 여전히 망설이자, 청산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조금 안정되면... 내가 널 해외로 보내 줄게. 괜찮지?”‘해외...’그 한마디에 유하의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지금 이대로 여기서는 견딜 수 없어.’‘오승현이 깨어날지조차 모르는데... 깨어난다 해도 어떻게 될지.’‘신분증이며 증명 서류도 다 빼앗겼어.』숨을 고르며 유하는 생각했다.‘내겐 도망칠 공간이 필요해. 이솔이 말했지...’‘청산 팀은 태씨 가문과도 협력 중이라고.’‘국가사업까지 맡을 실력이라면, 승현 쪽을 붙잡아 둘 수도 있을 거야.’‘그 틈에... 이혼하고 떠날 기회를 만들 수 있겠지.’“얼마나 걸릴까요?”“정확히는 몰라.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유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부탁할게요. 다만 챙겨야 할 게 있어요.”유하는 자신의 별장으로 들어갔다.소성란이 맡긴 디자인 작업.유하가 감금된 동안 멈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 막 빠져나온 만큼 곧바로 손을 대야 했다. 국제 쇼까지는 채 석 달도 남지 않으니까.‘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시간이 없어.’케리어는 압류돼 밑그림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다행히 유하는 평소 클라우드에 작업물들의 백업을 해 두는 편이었다. 별장 안에 노트북과 장비, 재료들이 여전히 있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안으로 들어서자, 사방 가득한 그림과 도안, 샘플들이 유하의 눈에 들어왔다.청산은 잠시 둘러보다가 나직이 말했다.“좋아하는 건 여전하네.”그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하가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유하는 엷게 웃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곧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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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악몽에 시달린 밤.유하는 악몽에 시달리며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방 안의 불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아침 일찍.유하는 눈 밑에 검은 그늘을 드리운 채 기운 빠진 걸음으로 1층에 내려왔다.마침 주방에서 나온 청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남자의 시선이 유하의 창백한 얼굴과 희미한 다크서클에 머물렀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조금 더 자도 되는데.”청산은 방금 구운 아침 식탁을 차리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마침 식사 준비가 끝났어. 집에 감자가 없어서 네가 좋아하던 해시브라운은 못 했고, 대신 흑설탕 넣은 호떡을 만들었어.”유하는 눈을 크게 떴다.‘아직도 내 입맛을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녀는 늘 아침 식사로 달콤하고 쫀득한 튀김류를 좋아했다. 특히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 해시브라운을 자주 찾곤 했다.생각해 보니 지난 7년 동안, 가족의 식탁은 언제나 승현과 준서의 입맛에 맞춰져 있었다.맵고 자극적인 음식 위주였고, 유하의 취향을 챙겨 준 건 박영심뿐이었다.‘그래... 나의 취향은 늘 뒷전이었지.’유하의 마음 한쪽이 묘하게 복잡해졌다.잠시 후 청산은 갓 만든 단팥 두유를 내놓았다. 앞치마를 벗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유하 맞은편에 앉았다.둘은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익숙한 풍경이 한순간, 유하를 몇 년 전으로 돌려놓았다.그때 청산은 유하보다 세 학번 위의 선배였다.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부에서 이미 ‘천재’라 불리며 박사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었지만, 대학에 갓 입학한 유하는 그저 시골에서 도망치듯 올라온 어린 신입생에 불과했다.두 사람은 원래 전혀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 알게 되었고, 이후 같은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주 마주쳤다.유하는 모르는 게 있으면 청산에게 물었고, 청산은 늘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그러다 보니 프로젝트도 함께하게 되었고, 같이 식사하는 일도 잦아졌다.식탁 위에 마주 앉은 지금 이 순간은, 그 시절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아직 아무 일도 없던 때... 모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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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문득, 유하는 재윤의 엄마를 떠올렸다.배남진의 누나이자, 남편을 죽이고 6년을 복역했던 여자.예전에 이솔과 이야기할 때만 해도, 유하는 단호히 말했다.“나는 절대 그런 짓 안 해. 완전히 나만 손해잖아. 젊은 인생, 남자 하나 때문에 망칠 이유가 뭐가 있어?”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이제는 남편이 자신의 손에 맞아 병원에 누워 있다. 생사조차 불분명한 채로.‘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도 않았다.승현이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자신은 단지, 조용히 이혼 얘기를 하려 했을 뿐이다.‘난 아직 젊어. 감옥은 싫어. 더구나 사람을 죽였다는 짐은 평생 못 견딜 거야.’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입안 가득 달콤하던 아침 식사도, 어느새 맛을 잃었다....맞은편에서 청산의 시선은 한순간도 유하를 떠나지 않았다.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유하의 얼굴과 눈빛에 드러나는 불안을, 그리고 그녀가 지금 무엇을 걱정하는지까지도.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청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시립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어. 그분께 부탁해서 오승현 상황을 알아볼게. 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유하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진심 어린 감사가 그 눈빛에 드러났다.“정, 정말 고마워요.”감사의 말을 하고도, 곧 부족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도, 지금도... 늘 선배한테 폐만 끼치는 것 같아요.”“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청산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유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끝내 더 말은 잇지 못했다.아침 식사가 끝나자 청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직 태씨 가문과의 일, 그리고 여러 업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떠나기 전, 그는 차분히 당부했다.“혹시 뭘 하거나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차동석 집사님을 불러. 같이 있으면 훨씬 안전할 거야.”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저녁은 내가 일찍 와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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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본인이 세대주가 아니신 거예요?”직원의 얼굴에 묘한 불쾌감이 번졌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성가셔하는 것이 분명했다.“이러면 좀 복잡해집니다. 이렇게 하시죠. 일단 제 동료에게 가셔서 기본 안내부터 받으시고 다시 오세요. 설명만 해도 시간이 오래 걸려요. 뒤에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거든요.”오늘따라 민원인이 유난히 많았다.줄은 길게 늘어섰고, 유하가 신청해야 할 증빙 서류는 한둘이 아니었다.처음 겪는 상황이라 유하도 잘 모르는 것이 많았다.결국 다른 안내 담당자를 찾아가 자세히 설명을 듣기로 했다.“소유하 씨, 지금은 다른 증명 서류보다 주민등록등본부터 발급받으셔야 해요. 서류만 제대로 준비되면 보통 2주 이내에 나옵니다.”이번 직원은 안내 전담이라 그런지 훨씬 친절하고 차분했다.“그런데 본인이 세대주가 아니시네요. 그러면 세대주의 신분증이 필요합니다. 세대주가 직접 오기 어렵다면, 반드시 서명된 위임장과 관련 증빙이 있어야 하고요.”설명을 다 들으니 유하도 대강 상황을 알 수 있었다.결국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으려면, 세대주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서류 떼려면 또다시 오승현을 마주해야 한다는 거네.]잠시 망설이던 유하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혹시 분실이 아니라, 세대주가 일부러 안 주는 경우라면요?”직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그럴 땐 사안에 따라 달라요. 우선은 세대주와 조정 절차를 밟게 되고, 조정이 무산되면 법률구조공단을 통한 법률 지원이나 관할 주민센터 신고 절차로 넘어갑니다.”“신고가 접수되면 세대주에게 15일 이내 제출을 요구하는 통보가 가고, 그 기한이 지나도록 제출하지 않으면 ‘분실’로 간주해서 재발급할 수 있습니다.”“그럼 신고하겠습니다.”유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버틴다 해도 결국 15일 뒤면 내 손에 새 주민등록등본이 들어오겠지.’‘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신고서에 서명한 뒤, 유하는 다시 물었다.“그럼 새로 발급되는 주민등록등본으로 제 주민등록을 분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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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소유하는 숨 쉴 틈을 가질 자격도, 내 믿음을 받을 자격도 없어.”승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태건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곧 말을 삼켰다.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말자. 아직 머리도 다 낫지 않았는데...’그는 무엇보다 두려웠다.승현이 치료도 마치기 전에 곧장 유하를 직접 찾아 나설까 봐.‘제발, 몸 좀 회복하고 나서 움직여라...’그때, 침대 옆 탁자 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승현은 몸을 가누기 어려워, 태건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발신지는 동사무소 민원실이었다.짧은 통화 끝에, 태건은 담담히 말했다.“일 때문에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승현은 몸이 불편해 최근 모든 업무를 태건에게 맡긴 상태였다.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실 문을 나선 태건은 복도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통화를 이어갔다.“죄송합니다. 분실한 것 같아서 지금은 제출이 어렵습니다.”상대가 몇 차례 더 확인했지만, 태건의 대답은 같았다.전화를 끊고 난 뒤, 태건의 미간이 좁혀졌다.‘우리 사모님, 생각보다 빠른데... 벌써 움직이는 건가?’‘대표님한테서 직접 서류를 받는 건 포기했구나.’하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신고가 접수되면 최소 15일은 더 끌 수 있었다.‘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해.’다시 병실로 들어온 태건은, 몇 마디 업무 보고를 던졌다.승현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임청산... 언제 들어왔는지,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이번에 무슨 목적으로 돌아온 건지 전부 확인해.”“이미 조사 중입니다.”태건의 대답에, 승현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7년 전에는 운 좋게 빠져나갔지. 하지만 이번에 돌아왔다는 건... 이제 그 운도 끝이라는 뜻이야.”태건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연우가 양손 가득 보온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승현아, 내가 직접 영양식 준비했어. 몸 보양하는 데 좋으니까 이거 먹고 빨리 회복하길 바라.”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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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어머니가 직접 허락한 일이니, 승현도 끝내 주성을 병실에서 내쫓지는 않았다.“나 지금은 요양 중이라 바쁘다. 몸 좀 나으면 그때 얘기하지.”“네.”주성은 마치 그 말에 담긴 ‘나가라’는 속뜻을 전혀 못 알아들은 듯, 오히려 대놓고 승현과 연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헤벌쭉 늘어뜨렸다.그 웃음은 방자했고, 태도는 버르장머리 없었다.승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주성이 먼저 나섰다.“형, 우리 아버지가 뭐라 그러셨냐면, 주말마다 여기 안 오면 저를 엄청 혼내시겠대요. 게다가 형이 아프다는데, 동생이 찾아와서 안부도 못 전하면 그게 사람이에요?”승현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나 웃음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꺼져.”말이 끝나자, 태건이 바로 앞으로 나섰다. 키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단숨에 주성을 낚아채듯 붙잡았다.어리둥절한 주성이 아무 반항도 못 한 채, 태건의 한 손에 휘둘려 병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쿵 하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주성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와... 이게 뭐야, 무슨 괴력이지?’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걸 알았기에, 주성은 발버둥을 칠 생각도 못 했다.대신 병실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형, 쑥스러워하지 마요! 내일 또 올게요!”그러고는 안에서 더 화내기 전에, 슬쩍 발길을 돌려 유유히 사라졌다.‘눈에 보이는 뻔한 손해는 안 보는 게 상책이지.’병원 1층 로비로 내려온 주성은 휘파람을 불며 외투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곧 단추 하나를 잡아 뜯자 그 안에서 손톱만 한 초소형 카메라가 나왔다.핸드폰을 꺼내 클라우드 앨범을 열자, 방금 찍힌 영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연우가 숟가락을 들어 승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는 장면이었다.“오늘 얻었던 것들... 나쁘지 않은데? 그래도 이 정도론 아직 부족해.”주성의 눈빛에 욕심이 번졌다.다음엔 더 자극적인 장면, 확실한 승현의 불륜 증거라 불릴 만한 영상이나 사진을 찍어 부모님께 보여줄 작정이었다.‘그렇게 입버릇처럼 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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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유하가 입을 열어 사양하기도 전에, 청산이 먼저 덧붙였다.“우린 여전히 친구잖아, 그렇지?”유하는 대꾸하지 못했다.저녁 식탁 위에는 다시 잔잔한 대화가 이어졌다.청산이 외국에서 본 풍경과 경험했던 소소한 일들을 들려주었고, 유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식사가 끝날 무렵, 유하는 결국 병원 이야기를 꺼냈다.청산은 이미 확인을 해둔 터였다.청산이 전해준 소식은 이랬다.오승현은 웬만한 사람보다 강인해, 머리가 깨졌어도 이튿날 벌떡 일어나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며칠 안에 퇴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는 말이었다.그러나 지금 유하가 묻자, 청산은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응급실은 이미 나왔다고 해. 다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더군. 친구한테 계속 살펴 달라 부탁해 뒀어.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전해 줄게.”유하의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녀는 밥을 다 먹고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건성으로 인사를 남긴 채 자신이 머무는 손님방으로 돌아갔다....밤, 서재.청산은 책상 앞에 앉아 문서에 눈을 두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차동석이 문을 열고 들어와 두툼한 메모와 몇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소유하 씨가 오늘 다녀간 곳과 한 일들입니다.”“그래요.”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종이에 적힌 기록을 차근히 훑고, 유하의 옆모습과 뒷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한 장씩 바라봤다.그리고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그 모습을 보던 차동석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정말로 소유하 씨를 아끼신다면, 직접 말씀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본인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청산은 안경을 고쳐 쓰며 손끝으로 문서를 정리했다.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집사님은 모르실 거예요. 7년 전에도 유하는 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시선을 서류 위에 고정한 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승현이가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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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악몽 꾼 거야?”청산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래층에서 물을 가지러 올라오다, 네가 소리치는 걸 들었어. 걱정돼서 문을 두드린 거야.”‘내가... 소리를 냈다고? 아래에서 들릴 정도로 컸나?’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일 것이다.유하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잠을 잘 못 자요.”눈만 감으면 피투성이가 된 승현의 얼굴, 어둡고 좁은 철창 속 감옥의 풍경이 밀려왔다.‘이러다 멘탈이 무너져 버리겠어.’잠시 망설이다가, 유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수면제 있어요?”계속 이대로라면 버틸 수 없었다.제대로 자지 못하면 컨디션이 무너지고, 결국 디자인 작업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게 뻔했다.청산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답했다.“수면제는 오래 먹으면 몸에 좋지 않아.”유하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그 모습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청산이 제안을 내놨다.“만약 네가 괜찮다면... 침대 옆에 내가 앉아 있을게. 네가 잠들면 그때 나갈게.”유하는 순간 얼어붙은 듯 멈췄다. 대학 시절, 불안에 시달리며 며칠 밤을 새우던 때가 떠올랐다.그때도 청산은 늘 곁에 앉아, 유하가 잠들 때까지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우린 이제 예전의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래선 안 돼.’유하는 고개를 저었다.“선배를 못 믿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요.”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며칠 동안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볼게. 부작용 없는 방법이 있는지.”“네, 고마워요. 나도 생각해 볼게요.”짧게 답한 유하는 곧장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따뜻한 노란 불빛이 흐르는 복도.철컥-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자, 청산의 입술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그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안경을 벗고 콧대를 눌렀다.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한동안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청산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대신 유하의 옆방 문을 열어, 그곳에서 몸을 눕혔다.그날 밤도 유하는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깐 눈을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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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소성란이 준비해 준 변호사팀의 변호사는 유하의 상황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한 듯했다.내부 논의를 거친 결론은 간단했다.[유하 씨가 해외로 나가 승현 씨와 별거 기간을 최소 2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현재 우리가 가진 조건으로 바로 소송을 제기하려면 최소 6개월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물론 남편의 외도 장면... 예컨대 호텔 출입, 신체 접촉, 침실 사진이나 영상 같은 중대한 증거가 있다면 곧바로 가능하지만, 승현 씨는 워낙 조심스러워서 여태껏 증거를 잡지 못했죠.][그래서 저희 변호사팀이 권하는 건, 투트랙 전략입니다. 첫째, 유하 씨는 가능하면 시댁 근처에 다시 가지 마시고, 해외로 나가 별거 사실을 확실히 남겨 두세요. 속도는 느리지만, 이쪽은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둘째, 저희도 계속 오승현 씨 외도 증거를 확보할 방법을 찾겠습니다. 만약 잡히면, 즉시 소송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투트랙 전략으로 나간다... 확실히 그 편이 성공 확률도 높고...’‘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겠지.’유하는 그 제안에 동의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핸드폰에 쌓인 부재중 전화를 훑어보던 유하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기자 김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초에도 이미 부탁한 적이 있었다.동생 유민의 여자친구이자 하지철의 사생아 진주연에 대한 조사였다.‘진주연이 계속 유민을 부추겨 나한테 돈을 달라 들이대게 하고, 문제를 만들었던 게...’‘혹시 하연우가 뒤에서 조종한 건 아닐까?’그 의심은 유하를 놓아주지 않았다. 실제로 그 일로 병원에까지 실려 갔고, 시력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하지만 석진에 대한 조사의 진척 속도는 기대만큼 빠르지 않았다.게다가 연휴 뒤로 사건들이 겹쳐, 유하 자신도 시댁에 갇히면서 연락이 끊겼다.결국 지금까지도 결과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석진이 전화를 받았다.[누나,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최근에 연락이 전혀 안 돼서 무슨 일 난 줄 알았잖아요.]“괜찮아. 조사 어떻게 됐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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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누나? 누나?]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유하는 석진의 다급한 부름에 겨우 정신을 돌아왔다.[이거 터뜨릴까요?]석진의 목소리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진위가실일 가능성이 반반이라 해도, 한 번 나가면 큰 파문은 확실해요. 하씨 가문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어도, 한동안은 제대로 흔들릴털릴 겁니다.]그는 철저히 기자였다. 그것도 연예와 스캔들을 다루는 기자.누가 대상이든, 사실이든 추측이든, 일단 ‘기사’가화하면 되면 된다고 여기는 쪽이었다.유하는 이마를 찌푸렸다.‘이 소식의 무게를 내가 모르는 게 아니야.’‘하지만 근거 없는 폭로라면, 그건 내가 받아들일 수 없어.’그는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다른 질문을 던졌다.“내가 부탁한 건 진주연이 하연우와 접촉한 적이 있는지, 혹은 그쪽 말을 듣고 뭔가 움직였는지 확인하는 거였지. 그건 어때?”석진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없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두 사람은 피만 섞였을 뿐 생활에서 아무 접점도 없었어요. 연락한 적도 없고요.]“연락도... 없다고?”유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곱씹었다.‘그럼 진주연이 유민을 부추겨 20억을 요구하게 만든 것도...’‘내가 병원에 실려 간 것도, 심지어 눈까지 잃을 뻔한 일도...’‘하연우의 지시는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면 누가?’무엇보다 진주연과 유민이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너무 절묘했다.정보 역시 기묘할 정도로 정확했다.마치 누군가 유하의 행적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듯했다.‘이건 분명 누군가 뒤에서 움직이는의 손이 있었겠지.’유하는 불현듯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언제든 자신의 상황을 알 수 있고, 친정을 약점으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그리고 또 한 사람 승현이었다.‘오승현이라면... 못 할 짓이도 아니지.’‘지금껏 날 옭아매던 방법이 다 그런 식이었잖아.’‘내가나를... 일부러 외면하고 싶었던 건가?’그녀는 핸드폰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그 사이에도 석진은 계속 유하를 불렀다.[누나, 그래서요? 기사 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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