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191 - Chapter 200

212 Chapters

제191화

유하는 승현이 어떤 마음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승현의 마음속에 유하를 향한 감정이 아주 조금, 그간의 부부생활에서 익숙해진 듯한 집착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도 미미했다. 회사 일, 어린 시절 친구들, 오랜 인연들... 이 모든 것은 늘 유하보다 먼저였다. 지난 7년간 유하는 그 사실을 똑똑히, 잔인할 만큼 바로 눈앞에서 보아왔다.‘만약 오승현 마음속에 저울이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가장 가볍고 하찮은 존재겠지.’‘이 점에서 오승현이 단 한 번도 나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어.’박영심은 구체적인 사정을 몰랐다. 그저 아들이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버린 게 화가 나서 몇 마디 불평을 늘어놓았을 뿐, 곧이어 유하를 달래며 눈치를 살폈다. 며느리의 마음이 상할까 봐....점심때가 가까워지자 박씨 집안 사람들이 찾아왔다.온 사람은 박영심의 친오빠, 박학경이었다. 그는 승현의 외삼촌이었고, 그와 함께 아내 강문영, 아들 박주성이 동행했다.마침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유하는 시어머니 박영심과 함께 나가 박학경 일가를 맞았다.차에서 내린 박학경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교양 있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동생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영심아!”박영심은 박씨 집안에서 막내이자 유일한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랑을 받으며 자란 터라, 이미 결혼하고 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오빠 앞에서는 여전히 소녀 같았다. 그녀는 냉큼 안기듯 달려들어 오빠와 포옹을 나누고, 곧바로 올케 강문영에게도 팔을 벌렸다. 강문영 역시 친근하게 안아 주었지만, 조카 주성을 끌어안으려 하자 그는 슬쩍 몸을 빼며 피했다.“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여긴 네 고모시다!”강문영이 주성의 이마에 손바닥을 퍽, 내리쳤다.지금은 한겨울이었다. 그러나 열아홉쯤 된 주성은 아버지만큼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도 얇은 청 재킷 하나만 걸친 채, 목덜미에는 가느다란 은목걸이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허술한 듯 시크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큼 강렬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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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방 안은 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불손한 어투의 한 마디가 끝나자, 모두가 멍하니 서서 어떻게 반응할지 난감했다.유하 역시 굳어 버렸다.‘내가 박주성을 언제 건드린 적도 없는데...’‘얼굴 본 것도 몇 번 안 되는데, 이 공격적인 악의는 또 뭐지?’“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당장 사과해!”강문영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아들의 귀를 잡아채며 유하를 향해 민망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드러냈다.그러자 주성은 곧바로 몸을 빼내며 얼굴을 찌푸렸다.“왜요? 전 시킨 대로 불렀는데요? 형수님이라 했잖아요, 뭐가 잘못됐는데요?”“박주성!”박학경이 낮게 호통을 쳤다. 얌전하고 점잖던 기품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아버지가 진짜로 손찌검할 기세를 보이자, 주성은 순식간에 눈치를 채고는 박영심 뒤로 쏜살같이 달려가 웅크렸다.“고모, 살려주세요!”박영심은 잠시 난처하게 서 있었다. 무표정한 유하, 얼굴이 굳은 오빠, 그리고 지나치게 발랄한 조카까지... 어느 쪽을 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짧게 한마디 건넸다.“그래도 네가 잘못한 거야. 사과해야지...”주성은 곧바로 눈을 굴리더니, 아버지 옆을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 별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부르는 소리에 대꾸도 없이 종적을 감춰버렸다.박학경도 화가 난 듯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쿵쿵거리는 소리와 고함이 섞여 들려왔다. 강문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어쩔 줄 몰랐다.“준서 엄마, 정말 미안해. 우리 애가 완전히 버릇이 없어서... 아직 개념도 부족하고... 내가 얘 꼭 혼낼게. 제발 얘 행동 때문에 기분 상하지 마.”유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고생 많으시네요, 정말...”강문영은 더 말끝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점심시간.온 집안이 떠들썩하던 오전이 지나고, 드디어 온 가족이 식탁 앞에 모여 앉았다.아까의 소동 때문인지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아 있었지만, 곧 박영심과 박학경 남매의 다정한 대화 덕에 공기가 조금씩 풀렸다.유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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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화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유하가 고개를 돌리자, 얇은 청자켓 하나만 달랑 걸친 채 한겨울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주성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웃음은 제멋대로였고, 표정은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형수님, 안녕하세요!”...서재 안.“영심아, 우리도 별다른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야.”박학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알다시피, 나랑 네 언니는 지난 몇 년 동안 일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신이 없었지. 그 사이 주성이는 사실상 방치된거나 다름없었고...”“부모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 예쁘다고, 너무 아낀다고, 아예 지켜야 할 선을 안 알려주셨어.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야. 이젠... 이젠 정말 말도 안 되게...”말끝을 잇지 못한 채, 그는 고개를 떨궜다.박영심과 오광진이 눈을 마주쳤다.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야?”“내가 말할게.”강문영이 길게 숨을 내쉬며 대화를 이어받았다.“고모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예술로 먹고 살아왔잖아요. 세대마다 예술계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 꼭 하나는 있었고, 우리도 당연히 주성이에게 그런 기대를 했죠.”“주성이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국내에서 손꼽히는 예술가들이잖아요. 우리 부부는 늘 바쁘니까, 아이를 곁에 두면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주성이도 꽤 소질이 있었어요.”“근데...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어요. 작년에 대학 입시에서 주성이가 홍이대 수석을 했는데, 원래 정해져 있던 홍이대로 진학하지 않고, 뜬금없이 하용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갔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박영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얘기는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원서 지원 마감 쯤에 부부가 해외에 있어서 끝까지 챙기지 못한 사이, 주성이가 부모에게 장난 아닌 큰 반전을 안겼다.하지만 그건 작년의 일이었다.“그래도 나중에는 우리도 마음을 돌렸어요.”강문영의 얼굴에는 이미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뭘 배우든 배움이지, 아이가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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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10분 전.유리 온실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주성이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문을 닫으며 입꼬리를 올렸다.“형수님, 안녕하세요!”유하는 몸을 돌려 장미 아치를 등지고 섰다.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뭐 하나 두고 보자.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건지.’주성은 몇 걸음 다가오더니 손가락 끝으로 장미 줄기를 건드리며 싱긋 웃었다.“형수님, 왜 말씀을 안 하세요? 저 사실 형수님 얘기, 예전부터 많이 들었는데요.”도통 진심인지 농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유하는 곧장 받아쳤다.“말해요. 원한이라도 있나요?”“원한?”주성이 순간 멈칫했다.“도련님이 이런 태도로 구는 거, 달리 생각할 수가 없네요. 원한 때문 아닌가요?”말끝이 냉정했다.“오늘 차라리 속 시원히 말하세요. 끝을 보죠.”“하하하하하하!”주성은 두 초 정도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어버렸다.“역시, 형수님답네요. 우리 승현 형을 잡은 분이라 그런가, 보통내기가 아니시군요.”승현의 이름이 나오자, 유하의 눈빛이 싸늘하게 표변했다. 대답 없이 주성만 뚫어지게 바라봤다.한참 웃던 주성은 꽃대 사이에 몸을 기대며 장미에 둘러싸인 듯한 모습으로, 더욱 건방지고 제멋대로였다.“형수님, 사실 전 형수님 편이에요.”“뭐라고요?”유하는 잠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형수님 편이요. 승현 형 바람난 거, 저도 다 알아요. 음... 누구더라?”탁!주성이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손뼉을 쳤다.“아, 맞다. 하연우. 그 누나 맞죠? 승현 형이 어릴 때부터 알던 소꿉친구라던데? 형수님으로선 그 여자랑 형 상대하기 버거울 거예요.”주성의 눈빛은 장난스럽고, 목소리는 더욱 가볍게 흘렀다.“걱정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우리 집에, 그 누나는 절대로 발도 못 들이게 하죠.”유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이상했다.“도대체 무슨 뜻이에요?”주성이 히죽 웃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저는요... 승현이 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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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유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미안한데, 난 남자도 때려요.”그녀는 며칠째 이혼 문제로 부딪히고, 협박과 감시까지 당하며 지쳐 있던 참이었다.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질 만큼 지쳐 있었고, 짜증은 한계선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입버릇 고약한 주성이 스스로 총구 앞에 뛰어든 셈이었다.‘이딴 소리를 하고도 멀쩡히 넘어가길 바랐어?’유하는 주저하지 않았다. 주성의 뒤를 쫓아가며 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 게다가 저주까지 해?’남의 일을 제멋대로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은근한 욕설에, 심지어 승현과 자신이 평생 부부로 얽혀 살라고 저주까지 한 이 녀석.‘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지.’그렇게 쫓고 때리며 두 사람은 그대로 서재 앞까지 밀려들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유하는 서재 밖에 서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고, 손에는 여전히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서재 안에 있던 네 사람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굳어 있었다.누구도 이런 유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얌전하고 조용하고 온순하던 그녀가 이렇게 폭발하는 모습이라니.‘유하...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그야말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주성의 울부짖음은 뒷전이었다. 박영심이 제일 먼저 서재에서 달려 나와 유하의 손을 덥석 붙잡았고, 시선은 손이며 팔이며 이곳저곳을 다 훑고 다녔다.“다친 데 없지? 괜찮아?”유하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저는 안 다쳤어요.”“고모!”주성이 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제발 똑바로 좀 보세요! 형수님이 저 때린 거잖아요! 전 여자 안 때린다고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성의 뒤통수에 묵직한 손바닥이 내리꽂혔다.“사과해라!”박학경이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주성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힘껏 눌렀다. 고개가 유하 쪽으로 강제로 숙여졌다.서재 안의 네 사람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주성이 원래 어떤 성격인지.유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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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강이솔이요?”연우의 눈이 커졌다. 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소유하의 절친 아닌가?’“그래.”하지철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내 쪽 사람들이 태씨 가문과 얽힌 고객 자원과 주요 프로젝트를 은밀히 빼내는 중인데, 그걸 심하게 가로막고 있어. 확인해 보니, 강이솔이 무리까지 이끌고 판을 흔들고 있더군. 벌써 큰 건 몇 개 이미 날아갔어.”“강이솔이 왜 그렇게까지...?”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사실 승현이 잠깐 관심을 보였던 이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유하와 얽혀 있었기에 예전부터 알아본 적이 있었다.해윤그룹, 강씨 가문의 딸.‘강씨 가문은 돈은 좀 있어도 권력 기반은 약한 편인데...’‘태씨 가문과 사업 분야도 크게 겹치는 게 없었잖아. 그런데 왜?’지금 태씨 가문은 가장이 실종되며 흔들리고 있었다. 큰 덩어리를 노리는 집안은 많았고, 하씨 가문이 가장 앞서 있었지만, 강씨 가문이 끼어들 이익은 분명히 없어 보였다.하지철도 고개를 저었다.“알아봤는데, 강씨 가문은 관련 없어. 이건 철저히 강이솔 개인 행동이라고 하더군.”‘더 이상하잖아...’연우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설마... 보복인가요?”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굴러갔다.‘내가 승현 곁에 있는 걸 견디지 못한 소유하를 위해...’‘그 친구 강이솔이 일부러 하씨 가문을 흔드는 건가?’하지만 곧 스스로 반박이 따라왔다.‘아니야. 아빠가 움직인 건 전부 은밀하게 처리됐어.’‘겉으로 드러난 건 하나도 없는데... 소유하가 뭘 안다고 감히?’무게를 잃은 추론이었다. 오씨 가문의 작은사모님이라는 자리를 잃은 순간, 유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며, 감히 하씨 가문과 맞설 힘도 없었다.“말도 안 돼.”하지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냥 판을 흔드는 애일 뿐이다. 태씨 가문 관련한 자원이라면 뭐든 높은 가격을 불러서 가로채거나, 터무니없이 가격을 올려 판 자체를 무너뜨려 버린다.”연우는 깊게 찡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완전히... 깽판 놓는 애로군.’“강이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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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우리, 진작 눈치채야 했어요.”연우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태준혁, 살아 있어요. 그런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TR그룹이 흔들리는 걸 지켜만 봤죠. 분명 뒤에 숨어서 여유만만하게 구경하고 있을 거예요. 아빠는 TR그룹이 무너지는 데 얼마나 남았다고 보세요?”하지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아직 멀었지.”“맞아요. 아직 부족해요. 그런데 더 나아가다간 우리가 먼저 드러날 거예요.”연우는 눈길을 내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지금까지 챙긴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니까, 일단 여기서 멈추고 손에 쥔 걸 지켜요. 태씨 가문 일은... 기회가 또 올 테니까.”하지철은 곱씹듯 듣다가 미소를 흘렸다.“그렇지. 태준혁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잖아. 바로 그 동생. 그 녀석은 네게 홀딱 빠져 있지 않나? 잘만 이용하면 태씨 가문은 결국 무너져. 시간문제일 뿐이야. 요즘도 태준범이랑 연락하고 있지?”“네.”연우는 눈을 감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형 일 때문에 불안해하는 태준범, 매일 연락해요. 저를 향한 집착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어요.”“잘 됐다. 태씨 가문은 당분간 숨 좀 돌리게 놔두자고.”하지철의 시선은 딸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단단해진 연우의 모습은 그가 해외 유학을 허락했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자신이 딸에게 들인 돈과 시간, 정성... 헛되지 않았다. 아름답고 영리한 딸은 이제 가문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승현이가 널 신경 쓰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하지철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너는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다 알아. 며칠 전 승현이가 원래 이혼하려다가 중간에 마음을 바꿨지?”연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천천히 얼굴을 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자, 승현에게 아들을 낳아 줬잖아요. 당장은 끊어내기 어렵겠죠. 저는 이해해요.”하지철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네가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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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예전에 이혼이 무산된 뒤로, 유하는 늘 승현의 눈길 아래 놓여 있었다.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이솔과 그 집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방을 에워싼 촘촘한 감시망도 문제였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유하의 신분증, 여권 같은 모든 증명 서류가 승현 손에 들어있다는 것.‘오승현이 병원에서 하연우랑 붙어 있는 동안엔... 적어도 당분간 집에 안 들어올 거야.’‘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그린힐로 가서 서류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해.’그렇지 않으면, 설령 이솔과 태준혁이 손을 잡아 강씨 가문을 수렁에서 건져낸다 해도, 증명 서류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유하의 가슴이 요동쳤다.‘이제 남은 건 구실이야.’‘본가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는, 누구도 수상히 여기지 않을 핑계.’하지만 유하가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박학경 일가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거실.박영심은 오빠의 소매를 붙잡고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어쩌다 한 번 오는 건데...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 돼?”“다음에, 다음에 또 올게.”박학경은 동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웃었다.“내일 우리 비행기 타야 해, J국으로. 대신 앞으로는 주성이가 매주 주말마다 이리로 올 거야. 학업 틈틈이 오씨 가문에 와서 승현이 곁에서 배우게 할 거다.”결국 그렇게 합의가 났다.주성이 앞으로 주말마다 오씨 가문의 본가에 머물며, 승현을 따라다니며 사람 됨됨이와 처세를 배우기로.유하는 그 이야기를 박영심에게서 들으며, 속으로는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오승현이 좋아할 리 없지.’‘박주성 본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오승현을 얼마나 싫어하는데...’‘두 사람 붙여 놨다간 집안이 발칵 뒤집히겠네. 절대 얌전히 굴지 않을 텐데.’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씁쓸하게 휘어졌다.‘게다가 오승현한테 사람 노릇을 배운다고? 우습다.’‘오승현 먼저 사람 구실 하는 법부터 배워야지.’...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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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순전히 그 여자애들 착각인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주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아버지는 늘 똑같아요. 승현 형한테 불리한 건 다 거짓말이고, 유언비어라 하고. 근데 제가 이야기하면 하나도 안 믿잖아요!”박학경도 목소리를 더 높였다.“네가 그럴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오해를 해? 한두 명도 아니고 열댓 명이 다 오해한다고?”“다른 애들 머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까지 내가 책임져야 해요?”부자 간의 설전은 불꽃처럼 튀었다. 강문영은 중간에서 지쳐 나가떨어진 듯 중얼거리며 달래 보려 했지만, 결국 고성과 험한 말이 오가며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 주성은 잔뜩 굳은 얼굴로 현관을 지나쳐 곧장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내 2층에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울려 퍼졌다.방 침대에 드러누웠지만,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주성은 벌떡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컴퓨터를 켜고 SNS에 접속했다. 곧장 클릭한 건, 유일하게 ‘특별 팔로우’해 둔 계정 하나였다.‘드림’이라는 이름의 만화가 계정.몇 년 전 개설된 개인 계정으로, 이미 팔로워 수가 육십만을 넘겼다. 하지만 올라온 작품은 단 하나.였다.제목처럼 그림 형제 동화 속 소녀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빨간 중절모를 눌러쓴 통통한 작은 로봇. 친구와의 내기에 휘말려 ‘달을 따 오겠다’라는 기상천외한 약속을 하고는 세계를 떠돌며 모험을 이어가는, 성인을 위한 SF물이었다.주성은 이 만화가의 그림체와 상상력이 가득한 세계관에 푹 빠져 있었다. 기분이 뒤숭숭할 때마다 늘 이곳을 찾아와 한 장면씩 다시 보곤 했다. 기계 개조에 흥미를 느끼고 결국 전공까지 기계공학으로 바꾼 것도 이 만화 때문이었다.‘한 번쯤 직접 만나 보고 싶었는데...’그러나 ‘드림’은 2년 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연재도 멈추고, 계정 역시 정적만 감돌았다. 애니메이션 업계 회사 계정들이 수차례 댓글을 남기며 판권 제안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답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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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밤, 그린힐 단지 앞.차가 천천히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경호원 둘은 집 현관 아래서 대기하고, 유하는 곧장 2층 침실로 올라가 준서를 찾았다.준서는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와 와락 안겼다.“엄마!”“응...”유하는 마음이 분주해 아이를 꼭 안아 주고 몇 마디 다정하게 달래더니, 곧 가벼운 핑계를 댔다. 본가에 며칠 머물러야 하니 짐을 좀 챙겨야 한다고. 준서에게는 혼자 잠깐 놀고 있으라고 했다.준서는 혼자 남는 게 싫었지만, 엄마가 곧 같이 간다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가 게임에 빠져 있는 사이, 유하는 방안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짐을 꾸리는 척하면서 사실은 신분증이나 여권이 숨겨져 있을 만한 곳을 찾는 것이다. 2층의 공간들은 거의 다 샅샅이 살폈다. 아이 방까지도 훑어봤다.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조차.“엄마, 뭐 찾는 거예요?”태블릿으로 게임을 하던 준서가 고개를 들어 의아하게 물었다.“아, 그냥... 본가에 가져갈 장난감 고르려고 했지.”순간적으로 대답을 흘리며, 유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벽 한쪽을 가득 메운 프라모델 선반을 건드렸다.건담 하나를 꺼내려던 찰나였다.“건드리지 마요!”준서가 벌떡 일어나 외치더니, 유하를 거칠게 밀쳐 냈다.“엄마, 함부로 만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부러지면 어떻게 해요!”“미안, 미안. 깜빡했네.”순간의 방심이었다. 유하는 아들이 자기 물건, 특히 게임 피규어나 건담에 대해선 극도로 예민하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잊고 있었다.아이 방에서 빠져나오며, 유하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남은 공간으로 향했다.서재였다.단 하나 아직 손대지 못한 곳.‘그래, 이제 남은 건 거기뿐이야.’사실 유하가 가장 의심하던 곳은 바로 서재였다.하지만 이 집에서 서재는 언제나 유하에게 ‘출입 금지 구역’과도 같았다.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공간.승현은 아예 문에 비밀번호 잠금장치를 달아 두었고, 유하는 애초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그래도... 여길 확인하지 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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