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221 - 챕터 230

464 챕터

제221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주연이 답장을 보내왔다.[그럼 뭘 원해?][네가 하연우 집에 들어가 사는 거.][거기 들어가서 뭘 하라고?]유하는 단 두 글자를 보냈다.[촬영.]유하는 예전에도 비슷한 방법으로 주연을 단단히 제압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주연은 감히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제 꼭꼭 숨겨둔 이 패도 쓸 때가 된 것이다.연우가 직접 시킨 일이 아닐지라도, 유하와 하씨 가문은 어떤 이유에서든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유하가 하씨 가문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내가 언제까지 당하기만 할 줄 알아?’‘이제부터 그쪽은 그동안 준 거 돌려받을 준비 해야지.’하지철이 주연의 어머니를 의도적으로 해쳤다는 건 확신할 수 없으니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 그걸 이용해 주연을 연우 곁에 붙이고, 연우와 승현의 친밀한 순간을 찍게 만든다면... 그건 곧 유하에게 이혼 소송에 유리한 새로운 증거이자 증인이 될 것이다.주연은 이해가 잘 되지 않다는 듯 물었다.[촬영?][오승현은 자주 하연우 집에 들러서 자고 가. 네가 들어가면, 둘이 키스하거나 함께 자는 장면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 줘.]주연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상대의 노골적인 요구에 눌린 듯, 긴 정적 끝에 겨우 대답했다.[너도 날 도와준 적 있으니까, 알았어.]얼마 전, 유하는 오씨 가문의 본가에 갇히기 전에 다른 사람의 계좌를 통해 주연에게 1억을 송금해 둔 적이 있었다. 주연의 어머니 치료비와 다른 필요한 비용을 메운 돈이었다.유하는 주연이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유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진행 상황은 내가 정기적으로 확인할게. 연락은 지금처럼 한 루트로만 유지하고.][응.]잠시 뒤, 주연이 다시 물었다.[그럼 공개는 언제 해?]“일주일 안. 언제든.”어젯밤 이솔과 얘기할 때, 이솔이 말했었다.다음 주 월요일, 태준혁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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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화

유하는 남진을 특별히 대하지는 않았다. 과거 그가 줬던 정신적인 모욕을 용서할 생각도 없었고, 더 이상 거기에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어른은 어른이고, 아이는 아이였다.재윤의 심리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졌다는 건 유하도 예상하지 못했다. 밤마다 몽유병 환자처럼 집 안을 돌아다닌다니.재윤과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재윤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재윤이 힘들다는 말을 들으니 괜히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나설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저는 곧 해외로 나갈 생각이에요. 재윤이가 저한테 너무 의지하면, 제가 떠났을 때...”“괜찮습니다.”유하의 대답에서 긍정의 기운을 읽은 남진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소유하 씨만 괜찮으시다면, 재윤이가 같이 가도 됩니다. 저희 집안도 해외에 사업이 있고, 저도 곧 그쪽으로 옮겨 가니까요.]혹여 유하가 부담스러워할까 싶었는지, 남진은 다시 덧붙였다.[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래 폐 끼치진 않을 겁니다. 재윤이 어머니가 6월에 출소하면, 아이는 반드시 데려갈 테니까요.]그 정도라면, 유하도 생각해 볼만했다.“저도 친구랑 상의해 봐야 해서요.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알겠습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전화를 끊고 난 뒤, 유하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일들이 이제야 조금 정리된 기분이었다.예상치 못한 일들이 너무 한꺼번에 많이 일어났다.이제 유하가 가장 걱정되는 건 승현이었다. ‘오승현...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데...’‘그렇지 않으면 계획이고 미래고 다 무너져 내릴 게 뻔하잖아.’‘난... 감옥에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아...’쌓여만 가는 불안과 걱정 탓에, 유하는 도무지 디자인 작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래픽 태블릿을 집어 들어 무작정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정오, 병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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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화

학교 쪽으로 향하던 주성은 택시에서 방금 찍은 영상을 핸드폰으로 다시 재생해 보았다.연우가 숟가락으로 승현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화면.‘이게 다야? 좀 더 자극적인 건 없어?’영상 몇 초를 보던 주성은 문득 깨달았다.‘혹시 내가 있어서 형이 하연우랑 가까이 못 하는 건가?’‘앞으로는 숨어서 찍어야 하나?’차라리 병실에 조금 더 앉아 있을 걸 그랬다.자신이 나오자, 병실에는 연우와 승현만 남았을 텐데.아쉬움 섞인 한숨을 내쉬며, 주성은 대수롭지 않게 영상을 껐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어서 SNS를 켜고 무심히 피드를 넘겼다.학교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SNS 알림창이 반짝 떴다.특별 관심으로 설정해 둔 계정이었다.순간 반응이 늦었다가, 주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2년 넘게 잠적했던 정체불명의 만화가, 드림이 드디어 새 작품을 올린 것이다.주성은 잽싸게 클릭해 들어갔다.주인공은 여전히 빨간 중절모를 쓴 로봇.이번 회차에서 로봇은 세계를 떠돌다 달을 좇는 여정 속에서 천재 엔지니어를 만났다. 엔지니어는 로봇의 등에 기계로 된 새하얀 날개를 달아 주었고, 로봇은 그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하늘로 치솟아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주성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페이지를 넘겼다.‘드디어... 이번에는 달을 잡을 수 있는 거야?’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그림체가 확 바뀌었다.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 순간, 로봇의 새하얀 날개가 산산조각 부서진 것이다.날개가 흩날리며, 로봇은 추락했고 달은 점점 멀어졌다.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서 뚝 끊겼다.주성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댓글 창을 열었다. 이미 수많은 독자가 아우성치고 있었다.주성도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였다.[로봇 죽은 거예요?]심지어 DM까지 열어 ‘드림’에게 직접 물었다.[작가님, 설마 이 만화 여기서 끝내는 건 아니죠? 로봇이 달로 가는 것을 포기하는 건가요?]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주성은 핏대가 오를 정도로 열을 받았다.‘2년 동안 잠수 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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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향초가 은은히 피어올랐다. 연무 같은 얇은 연기가 퍼지며, 가라앉은 향이 방 안에 서서히 번졌다.유하는 포근한 이불을 몸에 감고, 달콤하면서도 서늘한 향이 코끝을 감도는 가운데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이제 좀 편안해지고 있네.’그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깊은 잠이 찾아왔다....새벽 무렵.누군가 유하의 방문을 세 번,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한 번이 아니라 세 번 연달아.문밖 복도에는 회색 셔츠 차림의 청산이 서 있었다. 그는 높은 콧날 위에 은테 안경이 걸려 있었고, 따스한 조명에 안경테가 은빛으로 반짝였다.그 순간, 복도 저쪽 끝에서 차동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안 주무셨습니까?”청산은 고개를 조금 돌려 미소 지으며 답했다.“방금 유하 방에 향초를 두고 갔는데, 혹시 효과가 없을까 봐 와 봤어요. 지금 보니... 꽤 잘 듣는 것 같네요.”“그렇군요. 어서 들어가 쉬시죠.”차동석은 복도 한쪽에 서서 청산이 유하의 옆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는 계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그날 밤, 유하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자, 몸이 개운하고 정신도 맑았다.‘이렇게 잘 잔 게 얼마 만이지...’기분도 훨씬 가벼워졌다.아침 식탁에서 출근 준비를 하는 청산에게 인사를 건넸다. 청산은 요즘 내내 바빠 보였다. 전에도 식사 자리에서 들었다시피, 국내 증시에 새 회사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자세한 건 묻지 않는 게 낫다고 유하는 생각했다.조금 늦게 걸려 온 전화 통화를 마치고, 유하는 차동석과 경호원들과 함께 시내로 향했다.차는 곧 한 카페 앞에 멈췄다.2층 단독 룸의 문을 열자, 아이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재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리고, 끝은 울먹였다.유하의 마음이 순간 녹아내렸다. 가슴이 아렸다.그녀는 재윤을 품에 안고 한참이나 다독인 후,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배남진은 확연히 지쳐 있었다. 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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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화

“저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남진은 코끝을 만지며 재윤에게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남진 역시 오늘 여유가 없었다. 아침부터 TR그룹의 실질적 권력자인 태준혁이 전격적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터지면서, 매출이 크게 요동쳤고 주가도 출렁였다. 그 여파는 배씨 가문의 PS그룹에도 일부 미쳤고, 남진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카페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유하는 재윤의 손을 잡고 인근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고급 생활용품과 장난감을 한가득 사 들고서야 ‘대나무숲’ 주택단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돌아오는 길 내내, 재윤은 말이 거의 없었다. 작은 손으로 유하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불안한 눈빛만 보였다.유하는 낮게 목소리를 낮춰 아이의 일상에 관해 물었다. 학교는 어떤지, 밥은 잘 먹는지,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재윤은 묻는 말에만 작게 대답했다. 묻지 않으면 그대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예전보다 더 말이 줄어든 모습이었다.‘아이가 얼마나 외로웠으면...’유하의 가슴이 저렸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이번 일들만 정리되면, 재윤이를 데리고 나가야겠어.’‘바깥세상도 보여 주고, 넓은 세상에 눈을 뜨게 해야 해.’‘그래야 여기에서의 외로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러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까.’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유하는 이솔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뉴스를 확인하라는 말에 무심히 핸드폰을 켰다.화면 가득 도배된 건 TR그룹 태준혁의 공식 등장 소식이었다.며칠째 쏟아지던 실종·사망 루머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태준혁의 귀환은 곧장 여론을 뒤집었다.같은 시각, TR그룹과 손잡은 ‘유산’ 팀 소속 회사에서도 협력 관계 확정 공고를 내며, 이 소식은 단번에 실시간 검색어 최정상에 올랐다.이번 주의 첫날은 그야말로 TR그룹의 무대였다.하지만 유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태씨 가문이 자리를 안정적으로 잡고, ‘유산’과의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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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6화

TR그룹 사태가 터지면서 그룹 내부에는 처리해야 할 현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파트너로 얽혀 있는 청산도 발을 빼지 못한 채 이리저리 조율하느라, 그날은 드물게 밤이 늦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현관문을 들어서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동석이 청산의 흰색 재킷을 받아들었다.“소유하 씨와 재윤 도련님은 이미 쉬고 계십니다.”청산은 재윤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오늘은 얼굴이라도 보려 했지만 결국 일에 묶여 아이를 볼 시간을 놓쳐 버렸다.“그 아이는 어때요?”차동석이 잠시 떠올리듯 대답했다.“아주 얌전합니다. 하지만 조금은 폐쇄적인 성향이 있고, 심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소유하 씨를 ‘엄마’라고 부르더군요.”“유하를... 엄마라고요?”청산은 셔츠의 은빛 커프스를 풀던 손길을 멈췄다. 따뜻한 조명 아래 안경테가 미묘한 빛을 반사했다. 곧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흥미로운 아이네요.”그는 천천히 커프스를 풀어내 차동석의 손에 건넸고, 차동석은 조심스레 그것을 챙겼다....재윤은 불안이 높아, 곁에 누군가 있어야 겨우 잠들었다.유하는 아이를 오래 달래지도 않았다. 그저 유하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윤은 금세 안도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그 모습을 확인한 유하도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하지만 새벽, 불현듯 몸을 뒤척이며 손을 뻗은 순간 허공만이 닿자, 유하는 단번에 잠이 깨 버렸다.‘재윤아...?’옅은 스탠드 불빛에 눈을 적응시키며 방 안을 훑던 유하는 곧 몸이 굳어졌다.귀여운 동물 잠옷을 입은 재윤이 침대 끝에 서 있었다. 눈은 멍했고 표정에도 전혀 생기가 없었다.‘설마... 몽유병?’남진이 예전 말했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심리 치료도 큰 효과가 없고, 밤마다 엄마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부딪쳐 다친다고 했던 말.‘근데 지금은 날 엄마라고 부르는데... 이래도 잠결에 돌아다니나?’잠결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함부로 깨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유하는 소리 내는 걸 삼갔다.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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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7화

유하도 살짝 음식 맛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했다.“선배, 애들 음식도 이렇게 잘하시네요.”청산은 이미 식사를 마친 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해줘야 하니까 미리 연습해야지.”유하는 순간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선배는 역시 준비도 완벽하게 해내시네요.”청산은 무엇이든 최고로 해내고 또 잘 해내는 사람. 대학 시절부터 유하는 청산의 그런 점을 존경해 마지않았다.청산은 매사에 늘 치밀하고 완벽했다.유하가 아는 사람 중에 청산만큼 해내는 이는 드물었다.게다가 그는 언제나 앞일을 내다보고 계획하는 사람이었다....집을 나서기 전, 청산은 유하에게 한마디를 남겼다.“유하야, 나 오늘 밤 조금 늦을 수도 있어. 기다려줄 수 있지? 너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진지한 표정에 유하는 놀라면서도 호기심이 일었고,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오전, 유하는 재윤의 장난감들을 챙겨 화실로 갔다. 함께 놀아주다가, 재윤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길래 작은 이젤을 하나 세워주었다.유하는 재윤 옆에서 디자인 시안을 계속 들여다보았다.여름 국제 쇼의 테마는 두 가지.하나는 루비, 또 하나는 산수.유하는 각각의 주제에 어울리는 두 벌을 디자인해야 했다.그리고 몰입하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중간에 재윤의 그림이 궁금해 다가가 본 유하는, 종이를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캔버스에는 두 가지 색만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검정과 붉은색.뒤엉킨 선들이 내뿜는 기운은 어린아이가 품기에는 지나치게 어둡고 무거웠다.‘그림은 그리는 이의 마음을 비추는 거라 했는데... 이건...’재윤은 풀이 죽어 있었다.“원래는 지난번 엄마가 준 연등 위 작은 동물 그리려 했는데... 이상하게 돼버렸어.”의도치 않게 엉망이 된 그림이 마음에 걸리는 듯, 눈가가 젖어 있었다.유하는 곧장 그림을 받아들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고마워, 재윤아. 엄마는 정말 마음에 들어.”새 종이를 꺼내 재윤의 작은 손을 잡고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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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그날 밤, 청산은 업무 때문에 또다시 늦게 들어왔다.미리 늦는다고, 그리고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던 터라, 유하는 재윤을 재워놓고 1층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거실에는 은은한 주황빛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다.그 불빛 아래 앉아 있던 유하는 어느새 졸음이 밀려와,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흐릿한 시야 속, 지금 이 장면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그래, 예전에도 그랬지...’그녀는 승현을 기다리며 매일 밤 거실 불을 켜놓고 앉아 있던 과거의 시간들.하지만 대부분은 끝내 승현은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도 닿지 않았다.길고도 지루했던 7년의 결혼 생활은, 유하 혼자만의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었다.그러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졌다.피곤이 쌓여서인지, 갑작스레 복받친 감정이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이 아득해질 즈음, 문득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누구지... 돌아온 건...’유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은 것은 한 남자의 몸.그가 곧장 손을 받아주었다. 건조하면서도 따뜻한 손바닥이 포근하게 감싸왔다.그는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유하 앞에 앉아, 위로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유하?”익숙한 목소리가 순간, 유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유하는 전기가 흐른 듯 손을 홱 거두었다.청산은 가볍게 쥐고만 있었던 탓에 손을 빼내는 것도 너무 쉬웠다.그는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웃으며 물었다.“많이 기다렸어? 졸리지?”유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피곤이 몰려와서인지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결 가볍고 부드러웠다.“하려던 얘기가... 뭐예요?”주황빛 조명 아래, 피곤에 젖은 유하의 눈매와 얼굴선은 오히려 더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다.청산의 안경 너머 시선이 그녀에게 오래 머물렀다. 차분한 눈빛 속에 묘한 빛이 일렁였다.유하의 말에 청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서재로 가자.”...서재.청산은 가져온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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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25%라니,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게다가 그때 ‘CN 대형 언어 모델’은 겨우 초창기 단계였다.지금 이 정도로 성장하기까지, 유하는 이후 과정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만약 그녀는 이걸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당연히 팀의 핵심 멤버들이 반발할 게 뻔했고, 청산 입장에서도 곤란해질 것이다.청산은 마치 유하의 마음을 읽은 듯 설명을 덧붙였다.“내 지분에서 떼어주는 거라 신경 쓸 필요 없어.”‘그러니까 더더욱 받을 수 없는 거야.’유하는 무심코 이마를 눌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한참 단어를 고른 끝에 입을 열었다.“선배,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그걸 받을 수는 없어요. 선배는 이미 저한테 너무 큰 도움을 줬어요.”“안전하게 살 집도 마련해주셨고, 해외로 나갈 길도 열어주셨고... 그 과정에서 오승현까지 자극했잖아요.”“난 이미 너무 죄송하고, 감사하기도 모자란데... 어떻게 이걸 감히 받겠어요.”말을 끝내자마자 유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재윤이 자고 있어서, 오래 비울 수 없어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서재에는 청산 혼자만 남았다.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시선은 탁자 위 흩어진 서류에 멈췄다가, 이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또 한 번, 거절했네.”청산은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친 그 안은 대부분이 하얀 공백이었다.다만 맨 앞 두 장에만 붉은 펜으로 숫자 1, 2가 적혀 있었다.그는 세 번째 장을 넘기더니, 같은 붉은 펜으로 숫자 3을 써 내려갔다.펜을 내려놓은 뒤 안경을 벗어 옆에 두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었다.“세 번째구나.”낮은 한숨이 서재 안을 가만히 울렸다....유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문을 닫아 잠근 뒤, 침대에 곤히 잠든 재윤을 확인하고서야 힘이 풀린 듯 바닥에 깔린 담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지분 같은 건 차라리 괜찮아. 문제는 그 증여 계약서가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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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유하는 재윤의 주변을 따라다니며 조심스레 이끌어 다시 침대에 눕히고 나니, 어느새 새벽 3시가 가까워졌다.어제와 비슷한 시간이었다.유하는 시간을 메모해 두고, 잠깐 눈을 붙였다....다음 날.조금 불안한 마음에 1층으로 내려갔지만, 다행히 청산은 평소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얼굴에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그제야 유하는 긴장을 조금 내려놓았다.아침 식탁에서 청산은 다시 지분 증여 이야기를 꺼냈다.하지만 이번에는 말투가 한결 유연했다.“언제든 네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와서 사인하면 돼.”유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두어 번 헛웃음을 흘렸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어떤 건 받을 수 있지만, 어떤 건 절대 받으면 안 돼. 선은 늘 분명히 그어야지.’...오전 내내 유하는 디자인 시안에 매달렸다. 옆에서는 재윤이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닫힌 문이 아이를 세상에서 고립시켰지만, 동시에 다른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그림 앞에서는 재윤이 놀라울 만큼 몰입했고, 그 안에서 작은 재능이 빛나고 있었다.다만, 재윤이 그려내는 그림은 언제나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설명할 수 없는 그림은 어디까지나 추상에 가까웠다.하지만 유하는 끝까지 격려했다.인정을 받으면 재윤은 늘 잠시나마 밝아졌다.‘아직 어린아이잖아. 뭐든 천천히, 조금씩 나아가면 돼.’유하가 며칠 전에 심리학을 전공한 친구와 통화한 대화가 떠올랐다.재윤의 상황은 복잡했다.어릴 적 부모가 희생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이후 따뜻한 보살핌과 올바른 지도가 전혀 없었다.그 결과 자폐 성향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믿고 의지할 사람이 곁에 있었다.그렇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었다.유하는 잠시 아이와 놀아주었다.이어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차동석이 동행해 함께 한빛초등학교로 향했다.현재 재윤의 상태로는 당장 학교에 다니는 건 무리였다.재윤의 휴학 절차를 밟기 위해서였다....유하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정문 앞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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