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181 - Chapter 190

212 Chapters

제181화

유하는 이미 승현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지분도 필요 없고, 오씨 가문으로부터 단 한 푼의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고.그런데도 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안방은 숨 막히는 듯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승현은 여전히 유하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남자의 눈을 가려 그 속을 엿볼 수 없었다. 다만 목소리만큼은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그 로봇, 내가 직접 만든 거야.”유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어쩌라고? 날 매일 조롱하는 고철 덩어리를 내가 왜 붙잡고 있어야 해?”그 로봇은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그건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지난 7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매일 상기시키는 수치였다.‘그거야말로 오승현의 진심이겠지. 죽어도 날 사랑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유하는 이미 사랑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오승현...”이번엔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렇게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당신도 알잖아. 날 평생 가둬둘 순 없어. 이 결혼은 반드시 끝낼 거야.”유하의 그 결심만큼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다.유하는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승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깊고 어두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좋아. 당신을 내보내 줄 수 있어. 대신, 외국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건 절대 불가능해. 기회만 생기면 난 반드시 떠날 거야.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섣불리 약속할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인 사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차갑고 뜨거운 감촉이 입술을 스쳤고, 짧은 키스였다. 곧바로 떨어져 나갔지만, 승현의 눈빛은 이미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날 기만하지 마.”유하는 한순간 힘이 풀렸다. 더는 대화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이제 이 사람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그녀는 소파에
Read more

제182화

유하는 연우가 집에 와서 서재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알았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승현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유하는 이솔에게 전화를 걸었다.[유하야.]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이솔의 목소리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나른했다.“어때, 태준혁이 널 곤란하게 하진 않았어?”유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위험한 인물과 부득이하게 맞닥뜨리게 한 게 늘 불안했기 때문이다.[곤란하게 하진 않았어.]적잖이 놀라긴 했지만, 총구가 자신을 겨눴던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이솔은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나서 이제 겨우 정신이 들었다.[나 태준혁이랑 손잡으려고 해. 어떻게 생각해?]“태준혁이랑... 손을 잡는다고?”유하는 순간 숨이 막히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본의 아니게 높아졌다.“너 무슨 생각이야. 태 씨 가문 지금 일 터져서 엉망인 거 알잖아. 위험해, 괜히 거기에 휘말리면...”[하지만 그게 유일하고, 또 가장 빠른 방법이야.]이솔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그날 내가 태준혁을 구한 순간부터 이미 끝난 거라고. 우리는 이미 그 일에 얽혀 버렸어.][지금은 해외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차라리 태준혁과 손잡는 게 제일 안전해. 적을 하나 늘리는 것보단 차라리 줄이는 게 낫지.]유하는 대답하지 못했다.이솔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지?’알 수 없는 서글픔이 유하에게 덮쳐왔다. 그녀는 두 다리를 소파 위로 끌어 올려 무릎에 턱을 파묻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반쯤 얼굴을 가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은 붉어졌다.“나 때문에 그래?”쉰 목소리로 묻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이윽고 전화기 너머로 이솔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너 때문이기도 하고... 나 때문이기도 해. 우리 집안을 위해서도.]“어떻게 협력한다는 거야?”유하는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그 일에 발을 담갔다고 받아들이며, 이솔과
Read more

제183화

[유하야? 소유하?]갑자기 들려온 이솔의 다급한 부름에 유하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응, 듣고 있어.”속에서 끝없이 밀려오던 파동을 꾹 누르고, 유하는 다시금 이솔과 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마지막에 조심스레 물었다.“내가... 해야 할 일 있어?”[너는 네 몸만 잘 지켜. 그것만 하면 돼.]이솔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내가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올게.]전화가 끊겼지만, 유하는 한참 동안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유산... 그 이름...’...몇 년 전, 컴퓨터실.유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원시 코드, 그 숨김 없는 결과물을 바라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대단해!”“청산, 넌 정말 천재야!”여자의 목소리엔 감탄이 가득했다.“이 모델만 완성하면, 분명 AI 업계 전체가 뒤집힐 거야. 업계를 이끄는 선구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고!”옆에 서 있던 청년은 곧게 뻗은 어깨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목소리에는 특유의 맑은 힘이 실려 있었다.“그러면, 유하. 네가 이 길을 함께 지켜봐 줬으니까... 또 늘 나를 믿어줬으니까... 이 모델이 완성되면, 우리 이름을 합쳐서 부르면 어때? 이름은... ‘유산’. 괜찮지?”뜻밖의 제안에 유하는 순간 놀라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 시절, 서툴지만 분명히 피어오르던 마음. 그러나 그 감정은 세상이라는 폭풍 앞에 채 자라기도 전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다.그 후, 긴 이별이 이어졌다.‘정말 청산이라면... 내가 어떻게 마주해야 하지.’유하는 문득 자신 안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소파 위,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고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조금만 움직여도, 뻐근하고 아린 마음이 찢기듯 쓰라려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서재.연우가 문을 밀고 들어섰다. 무심히 방 안을 훑던 눈길이 한 곳에 멈췄다.구석에 놓인 검은색 여행용 가방. 공항 보안 검
Read more

제184화

연우는 서재에 남아 승현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두 사람의 대화는 정오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점심은 함께하지 않았다. 며칠 내로 연우의 부모님 댁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한 뒤, 승현은 직접 연우를 아래까지 배웅하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승현은 다시 안방으로 향했다.윤해월이 유하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있었고, 승현은 그 곁에 앉아 함께 식사했다. 하지만 이내 시선이 이상하게 변했다.유하는 얌전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가만히 입을 오물거리며 천천히 씹어 삼키는 모습은 그 자체로 단정하고도 눈길을 끌었다.잠시 바라보던 승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이모님, 잠깐 나가 주시겠어요?”윤해월은 이유를 몰랐지만 순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승현을 바라봤다.‘이번엔 또 뭐야...?’그때, 승현이 다가와 유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집어 유하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남자의 눈빛에는 묘한 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유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배불러.”“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잖아. 혹시 이모님 음식이 입에 안 맞아?”승현은 가볍게 웃었다.“그럼 다시 하라고 하면 되지.”“당신 그만 좀 해!”유하는 정면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승현은 미소만 지으며 젓가락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나 혼자 먹을 수 있어.”유하가 젓가락을 잡으려 하자,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아직 손 다친 거 안 나았잖아. 얌전히 있어.”결국 유하는 승현이 떠먹여 주는 대로 음식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손길은 세심하고 의외로 부드러웠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태도였다.하지만 그 시선만큼은... 도무지 온당치 않았다.‘왜 이렇게... 소름 끼치게 느껴지지.’몇 입 뜨지도 못한 유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정말 배불러.”유하는 입술을 닦고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팔이 거칠게 뒤로 잡아당겨졌다.순간 유하의 몸이 휘청이며 남자의 넓은 품에 파묻혔다. 이어 뜨겁고
Read more

제185화

이솔이 바깥에서 분주히 뛰고 있을 때, 유하도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비록 집 안에 갇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좁았지만, 변호사팀과 꾸준히 연락을 이어갔다. 변호사팀에 부탁해 은밀히 사람을 붙여 승현의 행적을 따라붙게 하고, 더 확실한 외도 증거를 잡아 오라 지시했다.‘이번엔 반드시, 결정적인 걸 잡아야 해. 그래야 저 인간을 끝장낼 수 있어.’승현에게 더는 휘둘리지 않기 위한, 재기의 발판.유하는 절대로,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금세 금요일 오후가 되었다.저녁때가 다 되었는데도 준서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유하는 마음이 불안해져 식사를 들여온 윤해월에게 물었다. 하지만 윤해월은 우물쭈물하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그 순간, 유하는 직감했다.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더는 묻지 않고, 윤해월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했다.유하의 손은 이미 많이 나아서 혼자 식사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서재에서 일을 마친 승현은 안방으로 들어서자 곧장 불 켜진 베란다로 향했다.따스한 조명 아래, 유하는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은은한 빛 속에서 드러나는 가녀린 실루엣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다.승현이 다가서려는 순간, 유하는 가녀린 팔로 남자의 가슴을 막아섰다.차갑게 눈길을 맞추며, 짧게 내뱉었다.“본가에 가서 어머니 뵙고 싶어.”준서가 없는 집.유하는 승현과 단둘이 이 공간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시어머니가 문득 보고 싶기도 했다.승현은 다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 양옆에 손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남자의 눈길은 고요했지만, 속내는 분명 불온했다.두 사람은 숨결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석양빛이 번지며 공간은 고요하고, 어디선가 은근한 열기가 스며들었다.오래도록 정적이 흘렀다.유하는 입술을 세게 깨물다, 결국 승현의 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더 이상 승현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고 싶진 않았다.승현은 묘하게 웃었다.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는 허리를 휘어 유하를 안아
Read more

제186화

“싸우냐고요? 아니에요.”준서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사실대로 대답했다.준서의 눈에 엄마는 언제나 온화한 사람이었다.단 한 번, 엄마가 화내는 모습을 본 건 연우 이모와 함께 있었을 때였다.그래서인지 요즘은 연우를 만나러 가는 일조차 엄마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다.“이모, 예전에 엄마랑 오해가 있다고 했잖아요. 이제 화해하고 잘 지내기로 했다면서... 언제 화해하는 거예요?”엄마를 피해 다니는 게, 어린 준서에겐 그저 답답하고 번거로웠다.“곧이야, 곧.”연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 잠시 스친 어두운 그림자는 감쪽같이 감춰졌다.“아빠랑 엄마가 안 싸운다니 다행이네. 그럼 준서는... 엄마 잘 챙겨주고 있어?”연우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준서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모가 말한 대로 했어요! 매일 엄마랑 같이 자고, 엄마 되게 좋아하셨어요.”“그래?”연우의 입술이 서서히 휘어지며 눈빛에는 뚜렷한 만족이 번졌다. 며칠 동안 준서를 일부러 집에 붙들어 둔 보람이 있었다.사실, 그날 승현이 약속을 지켰다면 진작 준서를 데려와 자기 집에서 놀게 할 수 있었다.하지만 연우는 마음을 바꿨다. 준서를 집에 더 머물게 하여, 유하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켜주고 싶었다.‘오승현이 갑자기 왜 이런 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약속은 약속이야.’‘내 남자가 다른 여자랑... 아무리 전처라도... 같은 침대를 쓰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지난 7년의 결혼은 없던 일로 치더라도...’‘앞으로의 오승현은 철저히 내 것이어야 해!’오늘 밤은 준서를 데리고 친정에 들러 부모님께 인사드릴 생각이었다.그 후에야 준서를 다시 집에 돌려보낼 예정이다.그런 생각에 잠긴 연우의 눈가에 은빛 물결 같은 미묘한 빛이 스쳐갔다....다음 날 아침.승현의 품에서 눈을 뜬 유하는 허리에 걸쳐 있던 그의 팔을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곧 팔이 더 세게 조여 오더니, 순식간에 몸이 끌려가고 말았다.승현이 유하를 안
Read more

제187화

차는 곧장 본가의 난방이 켜진 대청으로 들어섰다.유하가 차에서 내리자, 미리 나와 기다리던 시어머니가 곧장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유하야.”귓가에 맴도는 익숙하고 다정한 부름.유하의 눈가가 단숨에 붉어졌다. 이 집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챙겨주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시어머니였다.유하는 시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어머니...”“아이구,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어서 들어가자.”박영심은 오랜만에 며느리를 보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그리고 유하의 손을 꼭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걸음을 옮기며, 유하는 곁눈질로 시어머니의 안색을 살폈다.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혈색이 한결 좋아졌다. 차도가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유하도 가슴속 무거움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유하와 박영심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승현은 뒤따라오다 문득 굳은 표정의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쳤다.“서재로 따라와라.”오광진의 냉랭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는 곧장 발걸음을 돌려 2층 서재로 올라갔다.승현은 유하가 사라진 방향을 짧게 바라보다가, 결국 묵묵히 아버지를 따라갔다.“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냐!”서재 문이 닫히자마자, 오광진의 억눌러 온 화가 폭발했다.아들이 아니라면, 그동안의 공적이 아니라면, 이미 따귀를 날렸을 터였다.한바탕 분노가 쏟아진 뒤에야 승현은 무심히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해외로 나가려고 합니다.”오광진의 분노가 순간 멎었다. 얼굴빛이 굳으며 미묘하게 일그러졌다.“해외? 어디로? 어느 나라냐?”“F국입니다.”“F국이라...”그제야 오광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다시금 낮게, 무겁게 목소리를 눌렀다.“그래도 그게 네가 제멋대로 날뛰어도 된다는 이유는 안 된다. 교통사고? 납치극? 네 주변에 얼마나 많은 눈이 달려 있는지 몰라? 누가 윗선에라도 보고하면 그때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냐!”“조용히 처리했습니다. 문제없습니다.”승현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오광진은 쏟
Read more

제188화

오씨 가문 본가.오늘 하루 종일, 유하는 박영심 곁을 떠나지 않았다.시어머니가 무엇을 하든 곁에서 함께했고, 대화를 나누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늘 옆에 앉아 있었다.박영심은 원래 서화계에서 이름을 알린 인물이었다. 특히 산수화와 동물화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박영심의 그림 속 풍경과 동물은 마치 눈앞에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했고, 동시에 서정적이기도 했다.넓은 화실. 창문에 걸린 흰 커튼이 바람에 일렁이고,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리창을 가득 채웠다.하얗게 번지는 공간 한가운데, 두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캔버스에는 흑백의 선과 색감이 스며들며 겨울 풍경이 점차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작은 서양식 첨탑이 달린 성채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 외로이 서 있고, 가지마다 까마귀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친 채 고요히 웅크린 모습.유하는 시선을 내렸다.캔버스 한쪽 구석, 눈밭 위에 쓰러진 까마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검은 눈동자는 희뿌연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삶과 죽음, 생기와 압박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었다.유하의 미간이 무의식적으로 좁혀졌다.유하 역시 그림을 알았다. 기술과 감각만 놓고 본다면, 웬만한 화가 못지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림마다 묻어나는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데도 익숙했다.‘어머니는 분명 예전보다 밝아지셨는데... 그림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겉으로는 웃고 떠들며 천진한 모습을 보이지만, 화폭 속에는 늘 생기와 절망이 맞닿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끊임없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듯했다.유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끝이 캔버스 위, 힘없이 누운 까마귀 근처를 허공에서 따라 그었다.“어머니가 그리신 동물들은 늘 이렇게 살아 있는 것 같아요.”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인물화는... 왜 한 번도 안 그리셨어요?”박영심은 붓을 내려놓고, 그림 속 까마귀를 한참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나는 사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그릴
Read more

제189화

승현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잠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었다. 옷걸이에 걸린 긴 검은색 패딩을 대충 걸치고는 곧장 문밖으로 향했다.“지금은? 이모 상태가 어때? 구급차는 불렀어?”다급한 추궁에 류정인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흐느끼며 병원 이름을 불렀다.승현은 류정인의 장황한 말들을 끊고 준서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한 뒤, 직접 가서 확인하겠다고 짧게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패딩 지퍼를 대충 끌어 올리고, 바로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준비하라 지시했다.승현이 곧장 마당으로 나서자, 상황을 보고받은 오광진이 급히 달려 나왔다.이미 차와 운전사가 대기 중이었고, 승현은 차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멈춰!”오광진의 고함이 정적을 찢었다.승현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돌아섰다.“아버지.”집사에게 대략 사정을 들은 오광진의 얼굴은 검게 굳어 있었다.“네가 의사라도 되냐? 가서 뭘 어쩌겠다고!”“확인해야 합니다.”“확인?!”오광진은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유하가 네 아내야! 유하를 이 집에 붙잡아두고도 관계를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한밤중에 다른 여자한테 달려간다고? 그게 어떤 꼴로 비칠지 생각은 해봤냐!”승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야,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버지, 아시잖아요. 전 연우에게 약속했습니다. 외면할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오광진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그럼 네 귀에 안 들어오냐? 너랑 하연우에 대한 얘기들이 요즘 어디서나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네 어머니 말고, 집안 친척들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오광진의 호흡은 거칠어졌다.“내일은 네 외삼촌네 가족이 온다! 유하 혼자 남겨두고 네가 밤새 나가 있으면, 사람들이 유하를 뭐로 생각하겠어? 유하 마음은 또 어떻고?!”“그 똑똑한 머리는 이런 데 안 쓰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마지막엔 거의 울
Read more

제190화

병실 문이 열렸다.과다 출혈로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의 연우는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른팔은 붕대로 여러 겹 감겨 있었고,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승현은 조용히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마취가 풀리기 시작했는지 연우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서서히 눈이 열렸다. 흐릿한 시선이 승현을 향했다.“승현아...?”“응, 나 여기 있어.”여자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눈가가 붉게 젖은 채, 기운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아니. 난 너랑 약속했잖아.”“그래, 네가 약속했지. 나한테... 네가 약속했잖아.”연우의 눈동자가 눈물로 반짝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옅게 웃으며 물었다.“승현, 우리... 서로 알고 지낸 지 몇 년 됐지?”승현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20년쯤 됐을 거야.”“20년... 5개월...”연우는 정확하게 숫자를 짚어냈다.승현의 동작이 순간 굳었다.“정확히 기억하고 있네.”“당연하지. 너랑 함께한 날들은 하루하루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연우의 미소는 창백했고, 말끝은 힘없이 흩날렸다.승현은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연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여름이었지.”승현이 낮게 말했다.“맞아, 여름. 우리가 아홉 살이었어. 내가 너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났고, 처음 봤을 때부터 넌 내 눈에 확 들어왔어.”그녀는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엄마가 널 잘 보살펴주라고 했는데, 네가 그때 목각 인형에 푹 빠져 있었잖아. 내가 호기심에 네 책상 위에 있던 걸 집어 들었다가...”“네가 밀쳐내는 바람에 몇 개 부러뜨렸지. 그래서 우리, 거의 싸움 날 뻔했잖아. 결국 이모랑 엄마가 달래서 겨우 말렸는데.”승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연우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나중에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 네가 아끼는 걸 함부로 만진 게 잘못이더라. 그래서 엄마랑 같이 나무 조각
Read more
PREV
1
...
17181920212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