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Chapter 241 - Chapter 250

290 Chapters

제241화 검사는 반드시 받아야 해

‘나한테 준다고?’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비아냥과 조롱, 심지어 저주까지 퍼부었던 시아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니.오늘은 어쩐지 사람의 본능과는 정반대되는 일들만 겪는 것 같았다.‘하지만 안 받아. 이런 더러운 돈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그게 시아의 본능이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다.그러나 곧 다른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거부하면 진은채 같은 여자들이 모두 차지하게 돼.’‘내가 마다하면 결국 은채가 득의양양하게 웃게 되는 꼴 아닌가?’‘그리고 받아서 나쁠 것도 없어.’무엇보다도 이건 엄마가 목숨으로 바꿔준 값이었다. 받아서 기부해 버린다 해도, 그건 결국 마지원이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빚은 갚게 되는 일이었다. 설령 마지원이 죽어 저승에 가더라도 죗값이 조금은 떨어질지도 몰랐다.수십 번 마음속에서 갈팡질팡을 거듭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태연했다. 마치 돈 따위 흙덩이만도 못한 듯 눈빛엔 노골적인 경멸까지 담겨 있었다.“돈으로 날 사려는 거예요? 마 선생님, 제 현재 몸값을 아직 모르시나 보네요.”그 말을 내뱉는 순간, 시아는 스스로가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분명 증오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여전히 남자의 신분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사람은 증오에 휩싸이면 이렇게도 변하는 걸까?’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누가 먼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데.’더는 상처 입고 싶지 않았고 받은 상처는 고스란히 되돌려주어야 했다.“네 지금의 몸값도 결국 남자가 만들어준 거지. 스스로 가진 게 아니잖아.”마지원이 드물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자,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 말, 맞는 것 같네요.”“그러면 이제 나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겠단 거냐?”마지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네?”시아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내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마. 단, 네가 내 딸이어야 해.”마지원의 태도는 뻔뻔했고, 요구는 노골적이었다.이 순간 고개만 끄덕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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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화 세상이 생각보다 좁죠

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주든 말든 상관없었다. 본래부터 바라지도 않았고 제 피를 내주어 검사 따위를 할 생각도 없었다.집사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마지원은 고개를 저어 그를 막았다.문을 나서자마자 시아는 은채와 마주쳤다. 회색빛으로 질린 얼굴에 아까 강시아에게 뺨을 맞아 붉게 남은 자국이 선명했다.한껏 불쌍해 보였지만 그 불쌍함은 금세 눈에 가득한 독기로 바뀌어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다.마지원이 모든 재산을 시아에게 준다고 했던걸, 은채도 들었던 것이다.‘왜? 도대체 왜?’은채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시아가 얼마나주제 파악을 못 했는지 은채는 전부 들어버렸지만, 마지원은 그럼에도 봐주었다.승준도, 지호도 시아를 감쌌고, 이제는 처음 본 노인까지 시아를 두둔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아아악!’이에 은채는 멘붕이 와 마치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친부를 찾아냈고 그것도 남부럽지 않은 권세와 재산을 지닌 마지원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씨 가문에서 벗어나고, 승준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그런데, 그 자리마저 시아가 가로챈 것이다.‘아니, 가로챈 게 아니지. 아예 빼앗아 간 거야.’은채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폭발했다.‘그래, 시아가 있는 한 나는 영원히 짓눌릴 거야. 그녀가 사라져야만 내가 빛을 볼 수 있어.’증오가 눈빛에서 흘러나오자, 시아는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은채야, 날 증오하지? 사실 나도 내가 꽤 미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쩌겠어. 아까 다 들었으니 알잖아. 이건 내가 만든 일이 아니란 거.”그건 자랑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었다.은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와 억울함, 그럼에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초라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시아는 은채의 평평한 아랫배를 힐끗 보았다.“너무 흥분하지 마. 아이한테 안 좋을 테니까.”말을 마친 순간, 마당 밖에 차 한 대가 들어섰고 의료 상자를 든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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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화 과찬이세요

시아는 본능적으로 시우의 팔을 움켜쥐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시우도 즉각 위험을 감지하더니 시아를 단단히 끌어안아 대문 기둥 쪽으로 몸을 날렸다.쿵!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시우의 차가 정면으로 들이받혀 멀리 밀려 나갔고, 그제야 시아는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았다. 이에 목이 콱 막히듯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차문이 열리자, 길게 뻗은 지호의 다리가 땅을 찍었는데, 마치 그 한 발로 누군가를 짓밟아 죽일 듯한 위압감이었다.지호의 시선은 곧장 시우의 팔에 매달린 시아의 몸으로 향했다. 눈빛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면, 아마 시우는 이미 만 번은 죽었을 것이다.또 질투였다.‘하지만 그게 누구 탓인가?’ 죽일 듯 몰아붙이듯 차를 몰아온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시우는 자연스럽게 시아를 놓아주었고, 그녀 역시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방금의 접촉은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일 뿐, 어떤 애틋한 의미도 없었으나 불쌍하게 당한 건 시우의 차였다.시아는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지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경찰 불러요.”지호의 얼굴빛은 마치 제일 가까운 사람을 잃은 이처럼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는 담담하게 이어갔다.“이건 명백한 고의 충동이죠. CCTV로 다 증명될 거예요.”“허...”지호는 피식 웃었고 시아의 무심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그를 자극했다.“당신 참 정의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아.”그동안 말없이 있던 시우가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 오해 마세요.”“오해하지 마시죠, 주 대표님.”지호는 시우의 말을 끊었다.“차가 아직 손에 안 익어서요. 브레이크를 제대로 못 밟았어요. 차 수리비는 전부 제가 책임지죠.”분명 고의였는데도 태연히 브레이크 탓이라 둘러댔고, 그 억지스러운 말이 통하는 세상은 아마 지호의 세계뿐일 것이었다.시우의 입가가 굳었다.“필요 없어요.”지호는 태연하게 웃으며 다시 시아를 향했다.“여보,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너무 오래 못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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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화 합법적으로 같이 자는 사이

지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아는 남자의 발을 세게 밟아버렸다.지호는 숨을 들이마시며 고통을 삼켰지만, 시아의 손을 놓기는커녕 더 세게 움켜쥐었다.한쪽에선 시우가 찌그러진 차를 몰고 멀어져 갔는데, 그 광경은 웃음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왔다. 지호는 그 모습을 보고도 흐뭇하게 만족하며 시아에게 비아냥을 던졌다.“잘생긴 남자는 고물차를 몰아도 폼이 나는 모양이지? 그렇지, 여보?”“당신은 어쩜 그렇게 뻔뻔해요?”시아가 이를 갈았다.“에이, 주 대표님보단 조금 못할 뿐이지.”지호의 눈가에 번진 웃음은 차갑고 서늘했고 시아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당신 눈에는 늘 더럽고 구차한 것밖에 안 보이는 거죠.”“아니야. 당신은 참 아름답지.”지호의 말은 겉으론 칭찬 같았으나,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해요. 괜히 돌려 말하지 말고요.”시아의 목소리엔 분노와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물론 시아도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지호의 계획은 크게 틀어졌고, 몸에는 상처까지 남았다는 것을. 또한 평소라면 벌써 날카롭게 시아를 다루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호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한 눈빛으로 유럽풍 저택을 흘깃 바라보다, 차가운 웃음을 거두고는 묵직하게 물었다.“할 일은 끝낸 거야?”그 질문은 곧 지호가 이미 시아가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당신이랑 상관없어요.”시아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지호의 혀끝이 턱을 스치며 미묘하게 웃음이 번졌다.“새로운 기댈 언덕을 찾았구나? 그러면 이 남편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거고?”말 속에는 질투와 분노가 섞여 있었고, 겉으론 애틋함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아는 그것이 단지 환상일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지호 씨, 나는 당신을 한 번도 남편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당신 역시 날 아내라 생각한 적 없잖아요.”시아는 직설적으로 지호의 위선을 짚어냈다.이내 지호의 잘생긴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드리워졌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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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화 그 일은 끝난 거야?

“보복?”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시아가 지호를 오해한 건 결혼 첫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피를 흘리며 몸을 던져도, 수없이 지켜주려 했던 마음도 시아의 눈에는 닿지 않았다.‘시아는 마음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 마음이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있는 걸까?’“당신 또 도망칠 생각은 아니지?”지호는 웃음을 지었지만, 눈빛 깊숙이 불안이 숨어 있었다.이에 시아는 입술을 살짝 다물고는 담담히 말했다.“내가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말해요. 그렇게 빙빙 돌릴 필요 없으니까.”“누구에게 자리를 내주란 말이지?”지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이런 농담 같은 대화가 시아에겐 답답하기만 했다. ‘상처만 주고, 이용만 하다가 이제 와서 버리려 드는 건가?’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도 된 듯, 그런 태도가 더 화가 났다.지호가 다시 떠보듯 묻자 시아는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3개월 약속 아직 안 끝났잖아요.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고요. 거짓말도 안 하고, 사람을 속이지도 않아요.”분명히 지호에게 날카로운 반격을 던진 말이었다.지호는 그 뜻을 알아챘지만, 오히려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그러고는 살짝 몸을 기울여 시아에게 바짝 다가갔다.“지금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당신이 나를 떠나겠다고 말하는 거야.”시아는 비웃듯 고개를 돌렸다. “난 당신이 날 잡아가 보복할 줄 알았죠. 아니면 당장이라도 내쫓으려는 줄 알았고요.”“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당신 뒤를 쫓아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건 당신을 잃기 싫어서야.”지호의 말투는 농담처럼 가벼웠지만, 그 안엔 진심 어린 갈망이 묻어 있었다.시아 또한 지호의 속내를 읽었다.“결국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지호의 눈빛에서 농담기는 사라지고 오직 담담한 기색만 남았다.“당신이 나를 그렇게 대했던 이유는 알지만 미아에 관해서는 아직도 이해가 안가.”시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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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화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시아는 근처 민박집에 머물고 있었다. 원래라면 바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이곳은 공기가 맑고 습도도 적당했고, 날씨도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고개를 들면 온통 푸른빛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시원하고 몸도 절로 편안해져 이곳에 그냥 눌러살고 싶을 정도였다.이제 멀리까지 나왔으니, 조금은 쉬었다 돌아가기로 했다. 흐트러진 마음도 다잡아야 했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또한 마지원이 반드시 자신을 다시 찾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설령 직접 오지 않는다 해도, 자기가 슬쩍 사라지는 걸 그냥 두지는 않을 사람이었다.더구나 마지원은 중요한 말을 남겼다. 아내의 목걸이 한 줄로 수많은 자식을 불러들였다는 것이었다.그러니 이 일은 분명 파장이 있을 터였다. 괜히 말려든 게 아니라 이미 발을 담갔으니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래서 시아는 며칠 더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그런데 그날 오후, 시아를 찾아온 사람은 뜻밖에도 승준이었다.승준은 먼 길을 달려온 듯 지쳐 있었고 얼굴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움푹 파인 눈매가 얼굴선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며, 서양 사람 같은 깊은 인상을 주어, 전보다 훨씬 잘생겨 보였다.역시 ‘살 빠지는 게 최고의 성형’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도 이런데, 여자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승준과는 이미 끝났지만, 지호가 더 남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시아는 승준의 외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잘못 찾아왔어. 네 아내는 여기 없어.”시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바로 냉담하고 조롱 섞인 어투로 말했다.또한 승준은 시아의 차가운 태도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나는 널 보러 온 거야.”찾은 게 아니라 보러 왔다고 했다.국내에서도 시아를 만나려 했지만 연락조차 닿지 않았고 얼굴을 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시아는 문틀에 몸을 기댔다. 방금 막 잠에서 깬 듯 몸이 나른했는데 그런 모습은 지호의 나른한 분위기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이 승준의 마음을 찔렀다.‘시아가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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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나?

역시 기억하지 못했다.승준이 시아에게 했던 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만약 기억하고 있었다면, 오늘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네가 그랬지. 은채가 아니면 결혼식 같은 거 일찍 접어버렸을 거라고.”시아는 담담히 눈을 들어 승준을 보며 말했다.승준이 뱉었던 말을 지금 다시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확인하고 싶었다.승준의 얼굴빛이 굳었다. 목젖이 심하게 오르내렸다.“그날 너, 백작 클럽에 있었던 거야?”백작 클럽은 승준이 자주 드나들던 고급 클럽이었다.그날 시아는 한 고객을 만나 계약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기분이 좋아서 승준과 함께 축하하고 싶어 찾아갔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승준의 가벼운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다.그 순간, 시아는 7년을 함께한 자신이 단지 언제든 내팽개칠 수 있는 존재였음을 깨달았다.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하고, 마음을 접는 데는 단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그 한마디로 끝났어. 더는 필요 없다고 느꼈거든.”시아는 씁쓸히 웃었다.시아는 아직도 그날의 장면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일부러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었다.스스로를 괴롭히며, 동시에 스스로를 깨우기 위해서였다.발은 피가 날 정도로 까졌지만, 한 시간 넘게 걸으며 버텼다.그때 승준에게 전화가 왔다.[왜 집에 안 와?]이에 시아는 불 꺼진 집을 멀리 바라보다 대답했다.“비가 와서 택시가 안 잡혀.”승준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시아야, 넌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잖아.]승준의 눈에는 언제나 똑똑하고, 뭐든 해낼 수 있는 여자일 뿐이었으나, 시아가 원하는 건 단순했다.‘거기서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단 한마디 따뜻한 말이었지만 승준은 끝내 하지 않았다.그날 이후 마지막 기대가 무너졌다.그래서 다음 날 승준이 결혼식을 준비하라고 했을 때, 시아는 아무 말도 없이 수긍한 것도 이미 포기했기 때문이었다.“시아야.”승준의 목소리는 불에 그슬린 듯 탁하고 아팠다.“그 말은 진심 아니었어. 그저 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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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화 골수 이식입니까?

해 질 무렵.지호는 늘 그렇듯 여유 있는 걸음으로 작은 집 마당에 들어섰다. 시선을 돌려 사방을 훑어보니 솔직히 말해 이곳은 지호의 집보다 나았다.위치도 좋고 공기마저 깨끗해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하지호 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집사 같은 노인이 공손히 안내했으나 지호는 미간 하나 움직이지 않고 비죽 웃었다.“뭘 그렇게 서두르나요?”집사가 발걸음을 늦추자 지호가 느긋이 뒤를 잇는다.“오늘 아침에는 제 아내한테 그렇게 친절하진 않았다고 하던데.”집사가 순간 멈칫했다.“그건 은채 아가씨께서 직접 모셔 온 겁니다. 저는 그저...”“맞아요. 당신들이 제 아내를 문 앞에 세워두고 들이지 않았잖아요.”지호의 장난스러운 듯한 어투에 집사의 얼굴이 굳었다.“저는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누구의 지시인지 뻔했기에 지호는 힐끔 눈길을 던지며 나직하게 말했다.“나이도 있고 키도 큰 사람이 여자 하나 앞에서 가로막는 거, 밖에 나가 소문이라도 나면 꼴이 좋을까요?”“죄송합니다, 하지호 씨.”집사는 할 말이 없었다.그렇게 십 분 동안 지호는 느긋하게 걸어 안으로 들어왔다.아직 눈에 풍경이 들어오기 전, 먼저 향긋한 차향과 물 끓는 소리가 가득 귀를 채웠다.“향만 맡고 걸음을 재는 줄 알았네.”은빛 머리의 노인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러니 내가 삼촌이라 부르지 않겠어요.”지호는 스스럼없이 다가가 유금탁의 옆에 앉으며 마지원과 눈이 마주쳤다.“안녕하세요.”지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마 선생.”차를 우리던 유금탁이 입을 열었다.“내 아들 같은 하지호.”“알고 있어.”마지원은 단호하게 대꾸했는데 이는 이미 조사해 두었단 뜻이었다.그뿐 아니라 시아 역시 조사가 끝난 상태였다. 아마도 시아 덕분에 지호의 이름도 곧장 알게 된 거였다.비록 시아는 아버지라 부르기를 거부했지만, 피는 부정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제 아내가 오전에 다녀갔어요. 돌아올 때는 얼굴이 좋지 않았고, 저한테도 냉랭했죠. 마 선생님, 대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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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화 이런 건 진작 말했어야죠

말은 참으로 거칠어 공기마저 굳어버린 듯 고요해졌다.지호는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정교한 찻잔을 굴리며 비웃듯 마지원을 응시했다. 조금의 존중도 없이, 오히려 노골적으로 맞섰다.마지원 역시 검은 눈동자가 좁혀지며 지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말없이도 파도가 부딪치는 듯 긴장감이 흐른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유금탁이 모른 체하지 않고 가볍게 제지했으나, 지호는 냉소를 흘렸다.“두 개 다 이미 경험해 봤습니다.”마지원은 눈을 가늘게 내리깔고는 감정을 거두었다.“걱정하지 마라. 그 아이는 내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마 선생님이 건드릴 자격 없죠.”지호의 목소리는 강하게 눌려 있었다.마지원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자 유리와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이 좋은 봄차도 화기를 누르지 못하네. 역시 젊군. 그렇지, 자네?”유금탁은 묵묵히 차만 따랐다.지호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결혼반지를 굴렸다.“고작 목걸이 하나로 사생아들이 줄줄이 나타나 친자 검사를 요구하고, 심지어 배 속에 아이 가진 여자까지 내몰다니. 참 대단하세요. 철면피로 일어선 인생답네요.”꽤나 자극적인 말에 집사가 앞으로 나섰다.“하지호 씨, 언행을 삼가 주시죠.”그러나 마지원은 손을 들어 집사를 막았다.“그냥 둬. 하고 싶은 말 하게 해.”지호는 집사를 쏘아보며 물었다.“내 말이 틀렸나요?”“계속해.”마지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세월에 닳고 닳은 마지원에게 젊은 남자의 독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지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이십 년 넘게 찾지도, 인정하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아버지 행세? 그것도 재산을 미끼로 우리 아내를 화살받이 삼으려는 건가요? 그러려면 내 동의는 받았어야죠.”마지원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걔가 네 동의를 필요로 하겠나?”지호는 손에 낀 반지를 높이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그건 제 아내의 선택이겠지만 제가 허락하느냐는 별개죠.”차 끓는 소리만 방 안에 가득 번지자, 이어 마지원이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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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화 난 여기 있을 거야

시아는 막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닦던 중이었다.조금 전 배달 음식을 주문해 두었기에,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음식이 도착한 줄 알고 문을 열었다.그런데 음식 대신 들려온 건 낮게 흘러나온 숨소리였고 익숙한 음색이었다.고개를 들자, 지호가 헐레벌떡 달려온 듯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곧 시아의 미간이 좁혀지며 곧장 문을 닫으려 하자 지호가 손을 뻗어 막았다.“여보, 안에 들어가 앉아 있을 수는 없을까?”“불편해요.”시아는 애초에 지호가 올 거라 예상했고, 결심한 대로 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었다.다만 배달 음식 때문에 방심했을 뿐이었다.지호의 시선이 시아의 옷차림에 머물렀다. 진줏빛 실크 잠옷은 어깨나 피부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몸매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시선을 자극했다.다른 남자라면 눈길을 거둬야 할 장면이었지만, 지호는 분명 시아의 남편이었다.잠시 전 마지원이 던진 경고가 뇌리를 스치며, 지호의 눈빛이 깊어졌다.“낯선 사람인지 확인도 안 하고 문부터 열다니. 당신은 어쩜 그렇게 경계심이 없어? 만약 흉한 놈이라도 들이닥쳤다면 어쩔 뻔했어?”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그러면 지금부터 바로 고칠게요.”말과 동시에 문을 닫으려 하자,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스스로 자신을 비난한 셈이었다.“내 얘긴 아니고, 다른 경우를 말하는 거야. 당신은 본인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시아는 씁쓸하게 입술을 당겼다.“나한테는 지금 당신이 가장 큰 위험이에요.”지호는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기울였다.“내가 뭘 어쨌길래? 어디가 위험하다는 거지?”시아가 문을 밀어내자, 지호의 팔에 닿을 듯한 순간 남자가 몸을 바로 세웠다.“여보, 난 정말 아무것도 못 먹었어. 물 한 모금도 못 마셨다고. 물 한 잔만 주면 곱게 나갈게.”애써 비참한 척하는 어투였으나 시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을 가리켰다.“맞은편 찻집 사장님이 물도 주고, 당신 얼굴값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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