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Chapter 261 - Chapter 270

290 Chapters

제261화 명령이네

“없어요!”시아는 단호했고, 지호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알고 있었다.“당신 말은, 그 여자가 날 겨냥해 원한을 풀려는 거란 거죠?”지호의 깊은 눈빛이 시아에게 가 있었다.“하지만 내가 그 여자랑 어떤 원한이 있겠어요? 있다면, 아마도 우리 엄마가 본인 남편과 얽힌 적이 있어서겠죠.”시아는 숨기지 않았다. 이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고, 지호의 앞에서 감출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마지원은 도경란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둔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했다.겉으로 들으면 그럴듯했다. 남편이 함께 살아온 아내 말고 다른 여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면, 질투심은 당연했다. 하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마지원과 도경란은 20년이 넘는 부부였다. 그‘그 긴 세월 동안은 다 허용하다가, 지금에서야 갑자기 정신이 든 건가?’“나도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시아가 불쑥 입을 열자 지호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어?”“엄마의 지난 일을 알아보고 싶어요. 특히 마지원과 관련된 것들, 내가 태어나기 전후와 엄마의 죽음까지요.”그동안 시아가 아는 건 노하숙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뿐이었다.처음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마지원이 친자 확인을 명목으로 꺼낸 과거 이야기들, 언뜻 보면 문제없어 보이지만 어딘가 꺼림칙했다. 그리고 조금 전 하지호가 던진 질문이 시아의 마음속에 묻어둔 불안을 건드린 것이다.“사실 나도 그걸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이 말을 안 꺼내니...”지호는 코끝을 긁적였다.“차마 입을 못 뗐던 거지.”지호는 가진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시아 앞에서는 약간의 비굴함까지 보였다.“그럼 알아봐요. 하지만 무엇을 알든 전부 다 내게 말해야 해요. 하나라도 숨기지 말고요.”시아의 목소리는 부탁보다는 지시 같았다.“명령이네, 여보.”지호가 웃자 눈매까지 반짝였다.잠깐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흘렀다.“여보, 이제 나한테 그만 화내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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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내가 무섭다고

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시아가 입을 열자 그제야 떴다.“장난감이에요.”‘어?’지호가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아가 한 손으로 뱀의 머리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몸통을 붙잡고 있었다.그 뱀이 똑바로 지호를 노려보는 듯했고, 남자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문 쪽으로 더 물러섰다.‘이건 분명 살아 있는 생물이었는데, 어떻게 장난감일 수 있단 말인가?’시아는 지호가 겁먹은 모습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그것을 갑자기 남자의 쪽으로 내던졌다.지호는 놀라 세 걸음을 훌쩍 뛰어 피했다.예전 시아가 벌레 하나에도 질겁했을 때 용감하게 막아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냥 정교한 모형이고 진짜 아니에요.”시아가 설명했다.요즘 3D, 4D 기술의 정밀함은 정말 놀라웠다. ‘장난감이 이렇게까지 실제와 똑같을 수 있다니.’지호는 바닥에 떨어진 황금빛 뱀 모형을 몇 초간 노려보다가, 가짜임을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단순히 놀란 탓만이 아니라, 이런 물건이 시아의 방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다른 건 없어?” 지호는 성큼 들어와 침대를 샅샅이 뒤지자, 시아는 옆에서 담담히 말했다.“없어요.”“뭐 잃은 건 없고?”“그 사람은 물건 두고 간 거지, 훔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잃어버릴 리 없어요.”시아는 지호보다 훨씬 침착했다.지호는 다시 바닥의 뱀 모형을 주시하다가 방을 나섰다. 곧 시아는 지호가 숙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누가 방에 드나든 적이 있는지 묻고, CCTV를 확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시아도 따라 나와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화면 속에는 불룩한 가방을 멘 아이가 시아의 방에 들어갔다가, 빈 가방으로 나오는 장면이 잡혀 있었다.“이 애 누구죠?” 지호가 묻자 주인은 확인 후 말했다.“옆집 아이예요. 자주 놀러 다니는 아인데, 지금껏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어요.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해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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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억지 논리네요

한밤중.시아가 깊이 잠든 사이 지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그러고는 유천이 데려온 사람들을 훑어보며 단호히 말했다.“파리 한 마리라도 안에 못 들어오게 해.”“대표님 안심하세요!”좌우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장담했다.이에 유천이 지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내가 데려온 사람들이야. 못 믿겠어?”“너무 믿었으니까 이런 일이 터진 거지.”지호의 얼굴에는 시아 앞에서의 농담 기운이 전혀 없었다.유천도 체면이 구겨진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이번 일은 내가 처리 제대로 못 한 거야.”여기서 시아를 건드린 건 곧 자기 얼굴에 침 뱉은 거나 다름없었다.“사람은 찾았어?” 지호는 차 안으로 몸을 기댔다.검은 캐주얼 차림의 지호는 마치 어둠을 다스리는 밤의 군주처럼 차갑고 고독해 보였다.“애한테 준 게임기에서 추적했어. 그 남자도 결국 뒤에 누가 있는지 불었어.”유천이 말끝을 멈추며 지호를 바라봤다.“누군지 짐작 가?”지호는 창밖 끝없는 어둠을 응시하다가 낮게 뱉었다.“이미 짐작은 하지만 직접 설명을 듣고 싶군.”마지원은 한밤의 손님을 보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제법이구나.”지호는 마치 이 집의 주인인 양 느긋하고 거만하게 소파에 대놓고 걸터앉았다.“제힘을 시험하고 싶으면 제 아내를 건드릴 게 아니라 저한테 직접 오셨어야죠.”“아버지라면 딸이 어떤 남자를 데리고 다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지 않겠나?”마지원의 말투는 뻔뻔스러웠다.“제 아내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억지로 매달리는 건 허락받으셨나요?”지호의 입꼬리에 차가운 웃음이 흘렀다.그러나 마지원은 지호의 독설에도 미동 없었다.“인정하든 말든 내 핏줄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자기 친딸을 겁주다니, 이런 아버지도 드물죠.”지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비웃었다.“앞으로 내 후계자가 될 사람이면, 이런 작은 시험쯤은 통과해야지.”마지원은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걔도 알 거야. 이곳은 위험하다는 걸.”지호는 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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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호, 너 내일부터 이름을 하지독으로 바꿔라. 이건 너무 독하잖아!”유천은 끝내 지원의 집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얽혀 있어 괜히 발을 들였다가는 집에 돌아가서 껍질까지 벗겨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 지호가 풀어놓은 그 뱀들은 전부 유천이 사람을 시켜 구해온 것이었다.“독하다고? 난 놀라서 심장마비 나는 줄 알았는데, 그 정도면 아직 약한 거지.”지호는 건들건들하고 비열한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이에 유천이 흘깃 그를 쳐다봤다.“드물어. 너도 천적이 있네.”그러곤 말을 돌렸다.“내가 이미 저택 하나 마련해 놓았어. 너랑 네 아내 거기 가서 살아.”“아마 오래는 못 살 거야.” 지호는 동이 트기 직전의 하늘을 바라봤다.“왜, 이제 돌아가려는 거야?”“여긴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거든. 괜히 피 튀는 거 맞으면 곤란하지.”지호의 말은 의미심장하자 유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지호야, 넌 사실 그 개판 속에서 제일 큰 개야.”그 시각, 저택 안.거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뱀 무리와, 겁에 질려 뱀을 잡는 보모와 경호원들을 보던 마지원은 갑자기 탁자를 걷어찼다. 탁자에 눌린 한 마리 뱀이 머리를 길게 쭉 뻗으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눈이 충혈된 채 분노로 치켜뜨였다가 이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고 축 늘어졌다.“이제 만족했어요?”마지원의 음성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이에 2층 난간에 선 도경란이 아래의 난장판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가짜 뱀으로 사람 겁주는 수작을 부리다니, 당신 머리도 병든 거 아닌가요?”“그러면 진짜로 내 딸을 해치란 말이야?”마지원의 말투엔 처음으로 아버지다운 기색이 묻어났다.이에 도경란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자식들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유독 그 하나만 편애하다니. 당신은 강이연을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하나 보네요.”마지원은 바닥의 죽은 뱀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까.”그 말에, 도경란의 손가락이 난간을 부여잡은 채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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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영원한 버팀목일 테니까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맞췄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서로 알 수 있었다.아니면 한밤중에 동시에 전화가 올 리가 없었다.지호는 시아가 전화를 받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로 나갔다.그리고 시아도 통화를 연결했다.“형님.”발코니 쪽 지호의 얼굴은, 상대방의 말을 들을수록 밖의 밤빛마저 덮을 만큼 점점 어두워졌다.[하지호, 듣고 있어?] 진오가 말을 끝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어 물었다.“응.”[사진이랑 영상, 다 선명해. 내가 이미 보냈어. 지금 온라인에서 여론이 순식간에 퍼지고 있는데, 누가 돈 써서 유입을 산 것 같아. 그냥 이 일을 키우려는 거지.]진오의 분석이 이어졌다.지호는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줄곧 거실 유리 너머의 시아를 보고 있었다.시아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지호는 은산으로부터 이미 같은 소식을 들었다는 걸 알았다.평정심을 잃지 않는 시아의 모습은 굉장히 기이할 정도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저렸다.아마도 시아는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 담담할 수 있는 거겠지.’[그게 뭐야? 지호야, 대답 좀 해. 어떻게 처리할 거야?]진오는 다급했다.“이따가 얘기하자.” 지호가 짧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야? 지금 이건 1초만 늦어도 수십만, 수백만이 더 보게 돼. 정말 나중에 하겠다고?]하지만 돌아온 건 뚝 끊기는 신호음뿐이었다.지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켰다.진오가 보낸 사진과 영상을 확인한 지호의 눈빛은 칠흑같이 가라앉았다.그러고는 곧장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처리해.”폰을 닫고 방으로 돌아오자 시아와 눈이 마주쳤다.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묵은 단 두 걸음 만에 깨졌다. 지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손을 뻗었지만, 시아는 휴대폰을 두는 동작으로 교묘히 피했다.“날 불쌍히 여길 필요 없어요.”“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냥...” 지호는 설명하려 했으나 뒤이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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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물어볼 게 있거든요

시아와 지호는 같은 비행기로 귀국했다.시아가 기자들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VIP 통로를 택했지만, 겁 없는 몇몇 언론이 여전히 둘을 막아섰다.“하지호 대표님, 사모님의 사적인 사진이 유출된 것에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대표님, 이번 사건이 사모님에 대한 감정에 영향을 주진 않았습니까?”“사모님, 유출된 사진에 대해 해명할 수 있으십니까? 그 사진들은 누가 찍은 겁니까?”“사모님, 혹시 7년 전부터 이미 사생활이 문란했던 건 아니십니까?”쾅!그 무례한 질문을 던진 기자는 순식간에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지호의 120센티에 달하는 긴 다리는 그저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이럴 때 물건값을 했다.힘이 실린 한 방에 기자들은 입을 닫았다.지호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휘돌며 사람들을 훑었고 마중 나온 고성민을 향해 명령했다.“저놈들 얼굴 전부 찍어둬. 다시는 내 앞에서 안 보이게 해.”이건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뜻이었다.지호에게 그런 힘은 충분히 있었기에 기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대표님.”성민도 싸늘하게 말을 보탰다.“왜요? 이제 말 한마디도 못 하겠나요?”이에 순식간에 길이 열렸고 지호는 시아를 데리고 현장을 벗어났다.시아는 겉으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이번 사건이 시아 마음에 상처를 남긴 건 분명했다.차에 오르자 성민이 물었다.“대표님, 사모님. 어디로 가실 겁니까?”“요양원으로 가요.”시아에게 가장 큰 걱정은 노하숙이였다. 혹시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진 않을까 두려웠다.전화로 요양원에 확인했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다고 했지만, 시아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지호는 미묘하게 눈꺼풀을 떨고는 성민에게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지시했다.다행히도 노하숙은 아무렇지 않았다. 평소처럼 밝게 맞이하자 시아는 마음을 놓았다. 그저 곁에 남아 노하숙을 돌봤고 지호는 연구소로 향했다.“대표님.”노수한이 다가와 인사했으나 지호는 말을 자르듯 물었다.“상태가 어떻죠? 말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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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쉽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지호가 미아를 보았을 때, 여자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머리칼 끝은 물방울을 뚝뚝 흘렸고, 드러난 살갗 여기저기엔 푸른 멍이 가득했다.그 처지가 보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할 만큼 안쓰러웠다.노수한이 곁의 간병인을 흘겨보며 말했다.“왜 먼저 옷을 갈아입히지 않았죠?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면역력 낮은 몸이 버틸 수 있겠어요?”간병인은 고개를 숙였다. “미아 씨가 직접 가겠다고 해서...”미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노수한을 향해 머리를 저었다.자신 때문이지, 간병인을 탓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일단 땀부터 닦이고 옷을 덮어주세요.”노수한은 차분히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지호의 깊은 눈빛과 마주쳤지만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았다.“대표님, 전 이만 다른 일을 봐야 해서요.”휴게실미아는 운동용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앉아 있었다. 미아의 두 눈은 겁먹은 듯 가늘게 떨렸고 마주 앉은 지호를 곁눈질했다.지호는 침묵했고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결국 고개를 숙인 건 미아였다.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꼬아 쥐며 시선을 피했다.“그렇게 연약한 척할 필요 없어.”지호의 목소리는 차갑게 흘러나왔다.그러나 지호는 시아의 가련한 연기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이에 미아의 눈동자가 즉시 젖어 든 것이 마치 큰 상처를 입은 듯한 얼굴이었다.“사진 일은 알지?”지호가 물었다.시아는 말을 할 수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사고력은 멀쩡하다.휴대폰만 쓸 줄 안다면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시아를 향한 비난 여론도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었다.그 질문에 미아의 눈이 떨렸다.미아는 있는 힘껏 고개를 저으며 흐릿한 소리를 냈는데, 이는 무언가 해명하려는 몸짓이었다.“네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지호의 음성은 칼날처럼 차가웠다.미아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 다시 고개를 젓고는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지호는 미아 눈물의 뜻을 대신 읽어주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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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입 다물어

시아는 노하숙을 목욕시켜 드리고 머리도 정성스레 말려드렸다.“외할머니, 저 그 사람을 만났어요.”시아는 노하숙이 묻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자신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거였다.노하숙은 시아가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이 알게 되길 원치 않아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크게 실망했구나?”노하숙은 모든 걸 꿰뚫고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었다면, 시아가 이미 데리고 왔을 것이었다.이에 시아는 웃으며 말했다.“외할머니는 투시안이라도 있는 것 같아요. 뭐든 다 아시네요.”노하숙이 미소 지었다.“괜찮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우리랑은 상관없어. 네가 얘기해 주면, 난 들어주기만 하면 돼.”시아는 차마 그 남자가 얼마나 방탕한 사람인지 말할 수 없었다.외할머니가 가장 아꼈던 딸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사람만을 사랑했으니까.“결혼했더라고요.”시아는 단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노하숙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마지원이 결혼했다는 건, 곧 딸의 사랑을 배신했다는 뜻이었으니까.“그럴 수도 있지 이해는 해.”잠시 후, 노하숙은 낮게 중얼거렸다.이해한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시아의 마음이 저릿했고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 그저 입을 열었다.“외할머니, 그 사람은 이제 우리랑 상관없어요.”노하숙이 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너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지?”“아뇨. 오히려 그 사람이 자기 재산을 제게 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시아는 대충 얼버무렸다.“잘했어. 그동안 그 돈 한 푼 없이도 잘 살아왔잖아.”노하숙의 말에 시아는 자신과 외할머니가 함께 버텨온 지난 고생이 떠올랐다.머리를 다 말려드린 시아는 노하숙을 안았다.“전 외할머니만 있으면 돼요. 외할머니가 제일 큰 재산이에요.”무슨 시련을 겪어도 외할머니 곁에 오면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솟았다.노하숙은 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도 네 덕분에 행복해. 20년 넘게 곁을 지켜줘서.”하지만 그 동행은 결국 노하숙이 딸을 잃은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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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나는 널 믿어

응급실의 불빛은 눈부시게 차갑고 날카로웠다.시아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눈앞에 선명하게 번지는 외할머니의 피를 떠올렸다.그토록 붉은 빛은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노하숙은 매번 시아 몰래 토해냈다.그런데 이번에는 시아 앞에서 터져 나왔다. 참으려 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한 것이다.노하숙은 시아가 걱정할까 봐, 늘 참고 또 참아왔던 사람이었으니까.‘이번만은...’시아는 노하숙의 삶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마음의 준비도 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자신이 얼마나 두려운지 깨달았다.어깨 위로 갑자기 감싸오는 손길이 느껴졌다.이에 고개를 들자 지호가 깊이 응시하고 있었다.“괜찮을 거야.”지호의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있잖아.”지호는 시아의 머리를 품에 안겼다. 지호의 심장 고동이 울려 퍼지며, 그 소리마저 시아에게 버틸 힘이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실 문이 열렸다.“선생님!”시아와 지호가 동시에 불러세우기도 전에 의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남은 시간, 가족분들이 곁에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시아의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으나 지호가 단단히 부축했다.무언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끝내 짧은 한마디만 삼켰다.“네.”아무리 큰 힘을 쥐고 있어도, 아무리 많은 부와 권세를 쌓아도, 결국 생명을 붙잡을 순 없는 것이다.지호는 고개를 떨군 채 차마 시아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시아가 절망에 빠진 얼굴을 볼까 두려웠지만 지금 여자에게는 자신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숨을 고른 지호는 고개를 들어 품속의 시아를 다시금 감싸려 했으나, 여자는 조용히 몸을 떼어냈다.지호의 손끝이 시아의 소매를 스치며 흘러갔다.시아는 응급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엔 노하숙이 고요히 누워 있었다. 마치 평소처럼 단잠에 든 듯했지만, 이번 잠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영원의 잠이라는 걸 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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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요즘 잠은 잘 오세요?

시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그러나 지호의 눈에는 그 모습이 오히려 울고 있는 것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지호는 잘 알고 있었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걸.눈물이 없는 게 아니라, 다 심장 깊은 곳으로 스며든 것이다.노하숙의 장례는 아주 소박했다. 요양원에서 함께 지내던 몇몇 노인들만이 자리했고, 정은산도 하얀 백합을 들고 찾아왔다.간단한 의식이 끝나고 노하숙은 흙 속에 묻혔다.오랫동안 시아의 곁을 지켜주던 존재가 결국 차갑고 무거운 묘비로만 남았다.시아뿐만 아니라 지호의 가슴에도 커다란 구멍이 난 듯, 텅 비어버린 허망함이 몰려왔다.지호는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당신은 내려가 있어요. 저 혼자 외할머니랑 조금 더 있고 싶어요.”시아는 평온했지만 그 지나친 평온함이 오히려 지호를 불안하게 했다.지호는 시아가 혼자 있는 게 걱정되었지만, 지금만큼은 홀로 외할머니와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아래에서 기다릴게.”지호는 시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쓰다듬은 뒤, 가볍게 입을 맞췄다.며칠 동안 노하숙이 세상을 떠난 후, 시아는 예전처럼 남자를 밀어내지 않았다.마치 착해진 아이처럼 얌전히 지호의 곁에 머물렀다.그 모습이 오히려 지호를 더 불안하게 했다.지호는 몇 걸음마다 뒤돌아보며 무겁게 묘역을 떠났다.한참 동안 기다릴 각오였는데 단 반 시간 만에 내려왔다.가까이서 보니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끝내 울었고, 그 눈물은 노하숙에게만 보여준 것이었다.“요양원에 데려다줘요. 외할머니 물건을 정리해야 해요.”차에 오르자마자 시아가 담담히 말하자 지호는 물 한 병을 건네며 짧게 답했다.“알았어.”그 일은 자신이 대신할 수도 있었고, 다른 이에게 시킬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노하숙과의 모든 기억을 정리하는 건 시아 본인 몫이었다.노하숙의 부재는 요양원 전체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시아가 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동안, 지호는 방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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