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Chapter 251 - Chapter 260

290 Chapters

제251화 기억 안 나?

하지호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는데 정말로 삼십여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안에서 나온 뒤로는 아내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고 곧장 비행기를 타고 H국까지 날아왔다. 사실 비행기 안이나 오는 길에도 먹을 시간은 있었지만 도무지 입맛이 나지 않았다.김유천이 음식을 들고 찾아왔는데 만나자마자 비난 아닌 비난을 퍼부었다.“하지호, 이 자식아. 국내 양은 다 죽었냐? 왜 굳이 우리 여기까지 와서 양꼬치를 찾는 거야?”지호는 벌써 그 냄새를 맡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향은 제대로네.”“내가 H국 전역을 뒤져서 겨우 찾은 집이야. 거기다 원래는 구워주지도 않더라. 내가 사정사정해야 겨우 구워줬어. 근데 뭔 줄 알아? 어떤 걸로 구웠는지 알기나 해?” 유천이 포장된 꼬치를 내밀자 지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제발 변기통에다 구운 것만 아니면 돼.”“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먹을래?” 유천이 비죽 웃었다.지호가 은박지를 열자, 노릇노릇 기름이 흘러내리는 꼬치가 눈에 들어왔고 제대로 된 맛이었다.“유천아, 고마워.”지호가 꼬치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자 유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딜 가는데?”“내 아내 갖다주려고.”유천은 입꼬리를 씰룩였다.“겨우 몇 개인데, 너 안 먹고?”“먹지. 아내가 남긴 거 내가 먹으면 되잖아.” 지호는 조금 전 시아가 배달원에게 이 근처에 양꼬치 파는 데가 있냐고 묻는 걸 듣자, 분명히 먹고 싶어 한 게 틀림없었다.그래서 바로 유천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구해 오라고 한 것이다.시아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하지 않자, 지호가 곧장 말했다.“여보, 양꼬치 왔어.”시아가 이미 냄새를 맡고 있었기에 이는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방금 배달원이 이 근처에는 그런 가게 없다고 했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아직 뜨거워. 식으면 맛없어. 나 보기 싫으면 문 앞에 두고 갈게.” 지호가 문에 바짝 붙어 말했다.“빨리 나와서 가져가. 난 방으로 돌아갈게.”그러고는 꼬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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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2화 입 다물어

‘염문설이라니?’그 단어를 지호에게 붙이는 건 본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명문가 집안 아들들 가운데 염문설이 없는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지호는 달랐다. 늘 군계일학처럼 깨끗했고, 지금껏 엮인 소문이라고는 미아 하나뿐이었다.그런데도 이런 말을 들으니 눈매가 가볍게 올라갔다.“내 엄마만 한 여자랑 무슨 염문설이 있겠어? 전생 이야기라도 하자는 거냐?”유천은 손끝으로 휴대폰을 굴리며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이번 생 얘긴데 넌 잊은 모양이네.”“그러면 좀 떠올려 보게 해줄래?” 지호는 반쯤 눈을 감으며 기억을 더듬으려 했다.H국에 온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뭔가 있었고 더구나 반쯤 나이 든 여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절대 잊지 않았을 것이었다. 유천은 진오처럼 일부러 약을 올리는 아니었기에 입술을 삐죽이며, 솔직하게 기억을 꺼내 주었다.“I국에 오로라 보러 갔던 일은 기억하지?”지호는 당연히 기억했고, 그건 진오가 끌고 가서 얼어 죽을 뻔했던 여행이었다.지호는 비행기 타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추위도 끔찍이 싫어했다.“그 오로라 여행 중에 뭐가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 봐.”유천은 유치원 선생처럼 은근히 기억을 유도했다.그 일이 벌써 4,5년 전. 시간이 흘렀지만 지호는 머릿속 서랍을 열어보았다.그날은 정말 추웠다. 텐트 안에 난방기를 켰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렸고, 결국 화풀이 삼아 진오를 두들겨 팼다. 이런 고생길로 끌고 온 게 원망스러웠다.물론 오로라는 장관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지에는 텐트가 가득했지만 그날 밤, 지호가 텐트를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이 대목에 이르자 지호의 눈빛이 움찔거렸다. 또한 유천은 지호의 표정만 보고도 알아차리고는 낄낄 웃었다.“네가 잔 텐트가 마지원 아내 거였지.”지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단순히 잘못 들어간 게 아니었다. 아침에 깼을 때, 그 여자는 여전히 옆에 앉아 있었다.그 순간의 난처함 그리고 잠깐이지만 엄습한 두려움은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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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3화 꽤 철든 아가씨네요

문이 열리자, 서 있었던 건 시아가 아니라 배달원이었다.“네 아내는 나처럼 양심 있는 편이 아니네.” 유천이 혀를 차며 말했다.지호가 옆집 쪽을 보니, 시아가 손에 든 건 꼬치가 아니라 빈 꼬치 막대뿐이었다.‘전부 다 먹어 치운 건가?’꼬치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그만큼 입맛도 좋았고, 정말로 당겼던 모양이었다.“맛 괜찮더라고요.” 시아는 빈 꼬치를 들어 올려 보이며 지호를 바라봤다.“고마워요.”방 안의 유천은 시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문을 사이에 두고 투덜거렸다.“지호야. 세상 참 바뀌었네. 이제는 친구가 여자보다 더 믿을 만하지 않나? 내가 다 네가 굶는 꼴 못 보겠더라.”지호는 대꾸하지 않는 대신 시아를 향해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웃어 보였다.“배부르지? 부족하면 다시 구워오라고 하게 할게.”“딱 맞아요. 근데 다음엔 고추 좀 더 넣어 줘요. 난 그렇게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인 데다가 맵고 짠 걸 좋아해서요.”시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방 안에 있던 유천이 냅다 뛰쳐나왔다.유천이 시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 꼬치를 휴지통에 버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유천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나에 대한 인상이 꽤 안 좋은 것 같은데? 아이고...”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아랫배를 얻어맞아 고통을 삼켰다.“너 내 아내 심기를 건드렸어. 잘 달래지 못하면 앞으로 매일 양꼬치 사 와. 고추도 듬뿍 넣고.” 지호가 눈 앞의 배달 음식을 열어보며 투덜거렸다.꼬치만큼 맛있어 보이지도 않고 향도 별로였다.“내가 너희한테 빚진 게 있냐?” 유천이 성을 냈다.“내 아내한테 진 빚이지. 네가 화나게 했잖아.” 지호는 고추를 집어 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아내 바보네.” 유천이 이를 갈자 지호는 결정타를 날렸다.“넌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 있어야 하지.”이에 유천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너랑 더는 아는 사이 아니니까 다시는 연락하지 마. 전화해도 안 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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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화 뭐라고 했어요?

이 상처들이 생겼을 때 시아는 은채에게 병원에 가 보라고 권했지만, 여자는 가지 않았다.남겨둔 이유가 있었고 이 상처들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경란의 눈에 스친 놀람과, 곧바로 번져간 불안의 기운을 은채는 놓치지 않았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은채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또 그것을 위해 무엇을 감수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은채는 도경란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학대 속에서 자란 여자, 자신과 같은 과거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그래서 지금 이 상처를 보면, 반드시 연민을 품을 거라고 확신했다.“누가 그랬어요?” 긴 침묵 끝에, 도경란이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이에 은채는 소매를 내리덮으며 대답했다.“양부모님이요.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잘못해서 그런 거예요. 그분들도 제가 더 좋은 딸이 되길 바랐을 뿐이니까요.”비록 속으로는 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증오했지만, 이 자리에서 단 한 마디의 원망도 내뱉을 수 없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해하는 사람으로 비쳐야만 경란이 언젠가 자신을 거두었을 때 배신할 거라는 불안을 지우게 될 터였다.“왜 반항하지 않았죠?” 경란이 묻자, 은채는 입술을 깨물고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다.“버림받을까 봐 무서웠어요.”곧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저는 보육원에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엄마, 아빠가 필요했어요. 아니 그냥 집이 필요했어요.”“그런데도 은채 씨를 때렸잖아요.” 경란의 눈빛은 묘해졌는데 마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떠올리는 듯했다.“맞을 때만 아팠어요. 시간이 지나고, 자주 맞다 보면 아프지도 않아요.” 은채는 고개를 푹 숙였다.“바보 같은 짓을 했네요!” 도경란의 날 선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은채는 움찔 놀라 두 눈에 겁을 담았다.“여사님.”도경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어깨가 가볍게 떨렸고,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흔들리는 감정이 드러났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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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5화 각오해

물론 그 말이 아니었고, 이는 은채가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었다.또한 도경란도 사실은 제대로 들었지만 충격이 컸을 뿐이었다.“그게 정말로 그 사람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라고요?”“네, 제가 우연히 들었어요. 그때 집사도 옆에 있었고요.”은채가 두려운 듯 목소리를 낮췄다.“여사님.”“내가 왜 은채 씨를 도와야 하죠?” 도경란이 은채의 말을 자른 순간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해졌다.“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은채는 스스로를 극도로 불쌍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도경란이 안심하고 자신을 쓸 수 있을 테니까.“은채 씨, 난 선한 사람이 아니에요.” 도경란도 속내를 드러내자 은채는 눈을 떨구며 애원하듯 말했다.“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여사님.”은채는 무릎을 꿇은 채, 비굴하고도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도경란은 문득 옛날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 깊숙이 혐오가 올라왔지만, 사실 과거의 자신도 저런 모습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도와주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조건이 있어요.” 도경란이 손을 내밀자 은채는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할게요.”“은채 씨 배 속의 아이도 포함인가요?”그 말에 은채의 몸이 순간 흔들렸고, 붙잡고 있던 손을 곧장 놓아버린 뒤 뒷걸음질 쳤다.“여사님.”이에 도경란은 비웃듯 입꼬리를 당겼다.“그게 은채 씨가 말하는 뭐든 다라는 건가요?”“아니에요. 그건 제 아이예요. 제 유일한 핏줄이고, 저는...” 은채의 목소리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자기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은채 씨를 따라 같은 길을 걸을 거란 것도 모르는 건가요?” 경란이 한 걸음 다가섰다.“누군가를 지키고 싶으면, 먼저 본인이 강해져야 해요. 그 정도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겠죠?”은채는 입술을 세차게 깨물며 아랫배를 감쌌다. 망설임과 고뇌, 두려움이 한꺼번에 얽혀 있는 손길이었다.“이 아이를 낳아 내게 주면 내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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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6화 그건 너도 원하잖아?

“승준아, 여기 웬일이야?”은채가 승준을 보자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비비며 놀란 기색을 지었다.지금 은채가 가장 자신 있는 건 바로 연기였고, 게다가 그 연기를 즐기기까지 했다.그러나 승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왜 전화를 안 받았어? 메시지는 또 왜 씹었고.”“어? 너 전화했어?” 은채는 하품을 가볍게 터뜨리며 대꾸했다.“나 계속 자고 있었어. 휴대폰은 무음으로 해놨거든.”말할 때도 은채의 손은 무심히 아랫배에 내려앉았다.“임신하고부터는 잠이 주구장창 쏟아진다는 거. 그건 너도 알잖아.”승준의 시선이 잠시 은채의 아랫배를 스쳤다. 그러나 하려던 말은 꿀꺽 삼키고, 무표정으로 거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소파에 앉아버렸다.은채는 문을 닫고 다가와 앉으며 상냥한 아내의 모습을 연출했다.“언제 도착한 거야? 미리 알려줬으면 공항으로 마중 갔을 텐데.”아이 문제로 억지로 화해를 한 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예전처럼 날 선 말투는 줄었지만, 승준의 태도는 여전히 차갑고 거리감이 있었다.“말하는 걸 들어 보니, 이곳이 벌써 네 집이라도 된 것 같네?”승준의 어투에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고 동시에 은채의 상황을 떠보는 말이었다.은채가 마지원에게 친자 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결과가 정확히 어떻게 나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승준아, 내가 마씨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게 싫어? 아니면...” 은채는 말을 흐렸는데, 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떠오를 답은 명백했다.이에 승준은 은채를 곁눈질했다.“은채야, 한번 한 말 또 하게 만들지 마. 네가 가질 수 있는 건 네가 알아서 쟁취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는 안 돼.”그 다른 사람이란, 시아였다.승준은 여전히 시아를 감싸고 있자 은채는 씩 웃었다.“알아요. 게다가 이번 친자 검사는 나랑 시아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도 많고. 누가 진짜인지, 몇 명이나 될지 아직은 아무도 몰라.”이 상황 자체가 황당했는데, 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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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화 오로라처럼 빛이 흐르는 디자인

하지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도경란의 정보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취미와 관심사 없음, 사생활 없음, 생활 반경은 집과 주얼리 매장.이에 지호는 코웃음을 쳤다.“이 여자는 완전히 무취향 인물이네. 참 깨끗해.”“그게 오히려 더 무서운 거 아냐? 마지원의 모든 인맥과 사회적 관계를 다 관리하는 게 저 여자야. 이 바닥이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얼마나 맑겠냐?”유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그런데도 깨끗하잖아. 외모도 평범하고, 하는 일도 드러내지 않고, 평판은 아주 좋아.”도경란에 대해 유천은 높은 평가를 했다.“마지원이 얼마나 여자를 밝히는 사람인지는 네가 잘 알지? 그런데 그 여자가 옆에 붙은 뒤로는, 그 흔한 암컷 파리 한 마리조차 근처에 못 와. 그만큼 수단이 대단한 거지.”지호는 차창 너머로 도경란을 살폈다.귓불에 닿을 만큼 짧게 자른 머리, 거의 맨얼굴처럼 연한 화장, 품격 있으면서도 절제된 옷차림,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실력이 있는 자는 스스로를 낮추는 법, 이 점에서는 도경란은 살아있는 증거였다.마지원이 말한 ‘한 줄기 목걸이로 마음속 사람을 드러내겠다’는 말은, 유천의 말과도 들어맞았다.“그 여자가 진은채를 만난 건, 손을 잡으려는 거야?” 지호는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자 유천은 비웃듯 대답했다.“여기 와서 친자 확인한 사람은 모두 만났더라.”지호의 눈빛에 장난스러움이 묻어났다.“근데 내 아내는 왜 안 만났지?”“아마 마지막으로 남겨둔 거겠지. 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등장하니까.”유천이 짓궂게 말하자 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듣자 하니 좋은 말 같지 않은데.”“진짜 좋은 말이지. 그래, 넌 어떻게 만나려 해? 차나 한잔? 아니면 식사 한 번?”“촌스럽게 뭐 하러 그래.” 지호가 잘라 말했다.“그럼 넌 더 색다른 방식을 보여주겠네?”그로부터 3분 뒤.유천은 수천 평 규모의 주얼리 전시장의 VIP룸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차와 커피를 준비하는 직원의 분주한 손길을 보며 엄지를 치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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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8화 여사님 본인인가요?

유천이 갑자기 기침을 세게 터뜨렸는데,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오로라의 그 밤, 유천은 지호가 절대 다시는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악몽이라 여겼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그것도 당사자인 도경란 앞에서 먼저 꺼내다니, 지호가 무슨 속셈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기침 소리가 워낙 컸기에 지호와 도경란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고, 유천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큼, 큼 목이 좀 따갑네요. 아까 꼬치 구울 때 연기를 좀 먹었나 봐.”마침 직원이 차와 커피를 들고 들어왔고, 유천은 재빨리 받아 연거푸 마셨다.“지호 씨, 저희 MW의 차와 커피를 한번 맛보시죠. 바깥에서는 절대 못 드실 겁니다.”도경란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심지어 지호가 오로라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몇 년 전 그 사건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혹은 이미 깨끗이 잊어버린 듯했다.하지만 지호는 이런 여자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도경란은 곧 화제를 이어갔다.“지호 씨, 단독 디자인을 원하신다면 디자이너를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오로라 컨셉 디자인은 종류가 워낙 다양하거든요.”지호는 침묵했고, 도경란은 곧 남자의 불만을 알아챘다. “혹시 다른 요구 조건이 있으신가요?”“아내에게 줄 거라서 최고여야 해요.”지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손가락으로 결혼반지를 굴렸다.이에 도경란의 눈빛에 알 듯한 미소가 번졌다.“저희 MW가 최고의 디자이너를 붙여드리죠.”“여사님 본인인가요?” 지호가 말을 던지자 유천은 놀란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도경란이 MW의 주인이자 운영자인 건 사실이지만, 디자인은 직접 하지 않는다.하지호가 그걸 모를 리 없는데, 지금 이런 말을 꺼낸 건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면 모욕적인 도전이었다.“지호 씨, 농담이죠?”도경란은 미소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더 부드럽게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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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9화 우리 얘기 좀 하자

지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유천아, 너 요즘 진오랑 자주 연락하는 거 맞아?”“음 뭐, 가끔 하지. 근데 왜?” 유천이 머뭇거리자 지호의 시선이 남자의 넓은 이마에 꽂혔다.“지능이 떨어진 것 같아. 다음에 꼬치 구울 땐, 네 뇌도 같이 구워 먹어.”유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그제야 유천은 진오가 이 개 같은 놈과 붙어 다니며 얼마나 피곤하게 살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농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눈빛에는 온통 호기심만 가득했다.“너, 그날 밤 일을 들먹여서 압박하려는 거지? 그러면 그날 밤 정말 있었던 거네? 지호야?”지호는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여기 정원 있는 괜찮은 집을 하나 알아봐.”‘이 타이밍에 집 타령이라니.’ 유천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아니, 지호야. 그날 밤 너랑...”“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거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 지호가 말을 끊어 버리자 유천은 말문이 막혔다.시아가 유천을 만났을 때, 남자는 장미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웃음은 꽃처럼 환했다.“시아 씨, 이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해요. 저는 김유천이라고 하고요. 지호의 친구예요.”‘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지만, 시아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다.유천의 가벼운 농담쯤은 그동안 자신이 감당해 온 온갖 비난과 비교하면 티끌만도 아니었다.“고마워요. 그냥 편하게 강시아라고 불러도 돼요.”“지호가 저보다 몇 개월 빨리 태어나서요.”유천이 성의껏 말했다.이에 시아가 웃자, 남자는 곧장 덧붙였다.“근처에 제가 예약해 둔 중식당이 있어요. 부디 제게도 접대할 기회를 주시죠.”꽃까지 들고 와 정중히 청하는데, 시아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게다가 대체로 이런 일은 지호의 의중일 확률이 높았다.만약 자신이 거절하면, 지호는 자신을 못 괴롭히더라도 눈앞의 이 사람을 괴롭힐 게 분명했다.역시나 차에 올라타니 지호가 이미 타고 있었다.남자는 캐주얼 차림이었다. 상의는 흰색 실크 라운드 티셔츠, 하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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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화 도경란을 견제하기 위해 쓰는 수

시아는 지호가 다친 걸 알고 있었고, 영상으로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마주하니, 영상 속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심했다.이에 시아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철렁했고 지호는 낮게 중얼거렸다.“아파.”두 글자가 시아의 시선을 끌어올렸다.“자업자득이지.”시아가 차갑게 말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지호는 곧장 따라붙었다.“그래, 내가 자초한 거야.”시아가 문을 열었지만 온 몸으로 막아섰다.“당신 이거 또 자아 학대 아닌가요?”시아는 이제 더 이상 지호를 믿지 않았고 남자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신뢰를 되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기에 일부러 변명하지 않았다.“그래, 그렇게 생각해.”비록 자아 학대라 해도 진짜 살갗을 베어낸 상처임에는 변함없었다.시아의 매끈한 턱선이 긴장으로 굳어졌고 지호는 낮게 속삭였다.“벌은 이미 받았어.”스스로 벌을 내린 것도 벌이었다.시아가 안으로 들어가자 지호도 따라 들어서려 했다.“여기 약 없어요.”“내가 가져올게. 나한테 있어.” 지호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시아를 바라보며 덧붙였다.“문 닫지 마.”꼴사나울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 정말이지, 유천이 말한 대로 한 마리 강아지 같았다.이에 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호는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였고, 곧장 자기 방으로 달려가 약을 챙겨와 상의를 벗었다.곧이어 상처로 가득한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약을 바르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호의 근육은 온몸이 긴장으로 뭉쳐 있었고, 진짜로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시아도 괜히 더 아프게 할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모든 신경을 손가락에 쏟아부었다.시아는 아직 지호에게 원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 감정이 이 상처 위에 실려서는 안 됐다.약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을 때, 시아는 마침내 지호의 등까지 치료를 마쳤고 땀이 등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당신 이번 한 번뿐이에요.”시아는 다시는 지호의 상처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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