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apítulo 961 - Capítulo 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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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1화

검은 세단이 호텔 입구에 멈춰 섰을 때, 노을이 하늘을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안전벨트를 풀자마자 최수빈의 눈에는 회전문 너머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조윤미, 그녀는 강렬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의 차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주민혁이 먼저 차에서 내려 최수빈이 내리는 순간까지 곁을 지키듯 서 있다가, 차갑게 조윤미를 훑어보았다.조윤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목소리에는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뭐야? 이 원장님이랑 안면 텄다고 이긴 건 줄 알아? 세상에는 흑과 백만 있는 게 아니야. 이번 재판, 두 사람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그녀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자 호텔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카페에서 구겼던 체면을 기세로 되찾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최수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박하려는 순간, 조윤미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붉은 치맛자락이 허공을 가르며 스쳐 지나가자 코를 찌르는 진한 향수 냄새만이 남았다.“신경 쓰지 마.”주민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저건 허세일 뿐이야.”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려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도 단숨에 냉정해졌다.“조윤미 씨가 아직 법원에 제출하지 않은 증거가 있는지 바로 확인해. 특히 재판 도중 추가로 낼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 전부 조사하고.”통화를 끊고 두 사람은 나란히 로비로 들어섰다.최수빈은 굳게 굳은 주민혁의 옆얼굴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까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군 건, 오히려 약점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예요.”잠시 멈칫하고 나서 그녀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덧붙였다.“저 정도 자신감이면 분명 자기들만 믿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가능성이 커요. 아무 근거도 없으면 굳이 저렇게 도발하러 오진 않았을 거예요.”주민혁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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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2화

주민혁은 그녀의 옆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너무 몰아붙이지 마. 네 잘못이 아닐 수도 있어. 심종연이 뒤에서 조윤미 씨를 도와주고 있다면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커. 네 사인을 흉내 냈다든지, 파일의 시간 기록을 바꿨다든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자료에 손을 댈 수가 있었지?”최수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연구원의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데... 핵심 문서는 나랑 원장님만 접근할 수 있었어요.”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은 채 주민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심종연은 인맥이 넓어. 공식 경로 말고 다른 방법으로 사본을 구했을 수도 있지. 그걸 바탕으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미 권 변호사님한테 연구원 최근 문서 열람 기록을 확인하게 했어. 이상한 접근 흔적이 있는지도 전부 살펴보고 있고.”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는 언제나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빈틈없이 움직였다. 무엇보다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자잘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는 시야 역시 최수빈보다 훨씬 넓었다.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주민혁이 곁에 있으면 큰 문제조차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주민혁이 다시 말했다.“증거 문제는 내가 맡을게. 너는 지금 예린이 챙기고 푹 쉬는 게 제일 중요해.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말고.”최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옆에 있으면 어떠한 난관도 결국은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주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려운이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주민혁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조윤미가 최근 한 인쇄소를 자주 드나들고 있는데 그곳 사장이 예전에 심종연의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보고였다.최수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숨을 죽인 채 주민혁을 바라봤다.통화를 끊은 그는 곧바로 말했다.“려 비서 말로는 조윤미 씨가 인쇄소에 계속 드나들었대. 문서 위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지금 바로 가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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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3화

인쇄소 앞, 가게는 크지 않았다.쇼윈도에는 누런 조명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 안쪽에서는 사장이 카운터에 엎드린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최수빈은 주민혁을 따라 차에서 내리며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주변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 거리에는 오래된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도 드물었다.인쇄소 옆에는 문을 닫은 잡화점이 붙어 있었고 벽 한켠에는 버려진 종이 상자들이 쌓여 있어 한적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확실히 남들의 눈을 피해 뭔가를 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이 힐끗 고개를 들었다.하짐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을 한번 훑어본 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구며 무뚝뚝하게 물었다.“인쇄요? 아니면 복사요?”“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주민혁이 카운터 앞으로 다가가 지폐 몇 장을 손끝에 끼운 채 조용히 내려놓았다.“최근에 빨간 원피스 입고 선글라스 낀 여자분이 자주 와서 문서 출력하지 않았나요?”사장의 시선이 돈 위에서 잠시 멈췄다. 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고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난 장사만 하지 손님 신상 캐묻는 사람 아닙니다. 인쇄할 거면 파일 내놓고 아니면 나가세요.”경계심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말투는 일부러 빨간 원피스 이야기를 피해 가고 있었다.그러자 주민혁은 돈을 한 묶음 더 올려놓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저희는 그냥 상황만 확인하려는 겁니다. 귀찮게 할 일도 없어요. 사실대로 말해주시면 이 돈은 전부 사장님 겁니다.”사장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돈을 다시 밀어냈다.“모른다니까요. 저는 모릅니다. 계속 이러면 경찰 부를 거예요.”그러면서 카운터 위에 있는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태도가 유난히 완강했다.최수빈은 주민혁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사장이 이렇게까지 입을 닫는다는 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냥 평범한 손님이었다면 이렇게 예민할 이유도 없고 눈앞의 돈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곧 그녀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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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4화

“걱정 마세요. 규정대로 사건과 관련된 영상만 복사하고 다른 정보는 절대 외부로 유출하지 않겠습니다.”통화 내용을 들으며 점장은 점점 표정이 누그러졌다.변호사 공문과 협조 요청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괜히 법적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직접 안내해 드릴게요.”편의점 CCTV실은 2층에 있었다.좁은 공간에 여러 대의 모니터가 놓여 있었고 매장 안팎 상황이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었다.점장은 최근 일주일 치 영상을 갖고온 뒤, 주민혁이 말한 대로 인쇄소 앞의 영상을 재생했다.최수빈은 모니터 앞으로 바짝 다가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시간이 흐르다 사흘 전 오후 화면이 나오자 그녀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멈춰요. 저 사람이에요.”화면 속 조윤미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인쇄소에서 나와, 두툼한 서류봉투를 들고 빠르게 검은색 세단으로 향하고 있었다.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옆얼굴을 최수빈이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그는 심종연의 운전기사였다.“들어갈 때 뭘 들고 있었는지도 다시 확인해 봐.”주민혁이 이렇게 말하자 점장이 영상을 되감았다.인쇄소로 들어갈 때, 조윤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올 때만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파일들은 분명 그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말하던 ‘새 증거’가 바로 이것일 가능성이 컸다.“이 부분 전부 복사해 주세요.”주민혁이 이렇게 지시하자 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USB를 꺼내 관련 장면들을 저장한 뒤 건넸다.“처음 왔을 때부터 오늘 오후 마지막으로 나간 장면까지 전부 들어 있습니다.”주민혁은 USB를 받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최수빈과 함께 편의점을 나섰다.길가에 서자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최수빈은 무겁던 마음이 절반은 가벼워진 듯했다.“이 영상이면 그 새로운 증거가 원래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위조됐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요.”“그것뿐만이 아니야.”주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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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5화

차분한 말투와 달리 그 말은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더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최수빈의 가슴안은 서서히 시큰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주민혁의 자존심은 자신 앞에서조차 약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마찬가지라는 걸.최수빈은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작게 ‘네’ 하고 답하며 하고 싶던 말들을 모두 삼켰다.그렇게 차 안에는 몇 분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제야 주민혁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목소리는 이전처럼 차분했다.“조윤미 씨가 증거를 위조한 부분은 려 비서한테 계속 파헤치게 할 거야. 심종연이 개입한 흔적이랑, 인쇄소에서 문서를 조작한 과정까지 전부 정리해서. 완성된 증거 흐름을 만들어서 법원에 제출할 거야. 재판 때 빈틈없게 만들게.”“나도 도울 수 있어요.”최수빈이 고개를 들었다.“프로젝트 원본 자료를 정리해서 내가 기밀을 유출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더 모을 수 있고, 연구원 동료들에게 증언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어요.”하지만 주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다정함이 스며 있었다.“괜찮아. 너랑 예린이 잘 챙기는 게 나한테는 제일 크게 도움 되는 거야.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마.”최수빈은 말없이 굳어 섰다.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그는 늘 이랬다. 차갑게 밀어내며 자신의 싸움에 최수빈을 끼워 주지 않으면서도 이런 따뜻한 말로 그녀를 필요한 사람처럼 만들어 희망을 남겼다.의도적인 건지, 몸에 밴 습관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가슴속이 막힌 듯 답답했다.차는 곧 호텔 앞에 도착했다. 주민혁은 차를 세웠지만 내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올라가. 예린이 아직 안 잘 거야. 애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지.”“민혁 씨는 안 올라와요?”최수빈이 물었다.“응, 회사에 잠깐 들러야 해. 처리할 일이 좀 있거든. 무슨 소식 생기면 바로 연락할게.”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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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6화

최수빈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런데 그때, 휴대폰으로 주민혁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려 비서가 심종연의 운전기사와 인쇄소 사장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냈어. 증거도 차근차근 맞춰지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오늘은 일찍 쉬어.]메시지를 읽은 최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짧게 답장을 보냈다.[민혁 씨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챙겨요.]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주민혁은 여전히 자신의 약한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마음 쓰고 있는지 분명히 느껴졌다.아마도 그들 사이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다음 날 오전, 최수빈은 약속대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고객을 만나러 갔다.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며 홀을 한 번 훑어본 그녀는 예약해 둔 창가 자리로 향하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주민혁이 앉아 있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함께였다.여자도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어, 수빈 씨! 진짜 수빈 씨였네요.”최수빈은 걸음을 늦추며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희미했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곧 그녀가 다가가며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 저희...”“저 기억 안 나세요?”여자가 한 발짝 다가오더니 싱긋 웃었다.“예전에 천공 연구원 기술팀에 있었어요. 임하은이라고 합니다. 수빈 씨가 저 데리고 무인기 센서 튜닝 프로젝트 같이 해주셨잖아요. 그때 데이터 정리 꼼꼼히 했다고 칭찬도 해주셨고요.”그제야 최수빈은 기억해냈다. 예전에 천공 기술팀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눈빛이 반짝이던 동료였던 것이다.이내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아, 이제 생각났네요. 미안해요, 시간이 좀 지나서 바로 못 알아봤네요. 그럼 지금은...”“지금은 AI 쪽으로 창업 준비 중이에요. 오늘은 주 대표님이랑 협업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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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7화

최수빈은 애써 생각을 걷어내고 고객과의 대화에 다시 집중했다.고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넬 때까지 그녀는 끝까지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토랑 문을 나서는 고객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스르르 사라졌다.그녀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앞에 놓인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여전히 주민혁과 임하은이 앉아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듯했다.최수빈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향했다. 임하은은 간간이 손짓을 섞어가며 열성적으로 설명하고 있었고 주민혁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의 팔을 끼고 있는 임하은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다정해 보였다.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곧 결혼을 앞둔 연인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이었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들어 잠금을 풀었다가 다시 끄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결국 주민혁에게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임하은과의 관계를 묻는 게 맞을까, 아니면 그 ‘약혼자’라는 말 자체가 단순히 협업을 위한 명분에 불과한 건지 묻는 게 맞을까.그러나 물어본들 달라질 게 있을까.설명할 마음이 있었다면 주민혁은 조금 전 그 자리에서 이미 말했을 것이었다.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시간이 흐르면서 레스토랑 안은 점점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소란스러운 소음이 잔잔하던 바이올린 선율을 서서히 덮어버렸다.그때 주민혁과 임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하은이 여전히 그의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은 나란히 레스토랑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그러다 최수빈의 테이블 옆을 지나칠 때, 임하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주민혁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눈빛으로 최수빈을 힐끗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시선을 거둬들였다.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문밖으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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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8화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제법 따가웠다.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녀는 거리 위를 천천히 걸어가며 레스토랑에서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짚었다. 혹시 놓친 게 없었는지, 사소한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듯이 말이다.임하은이 천공 기술팀 이야기를 꺼낼 때의 말투, 소개를 들은 뒤에도 흔들림 없던 주민혁의 표정, 그리고 자연스러워 보였던 두 사람의 스킨십...하나하나가 마음속 의문을 더 크게 키웠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항공우주 연구원 동료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오후에 예정된 기술 세미나 참석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연락이었다.최수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았다.“네, 알고 있어요. 시간 맞춰서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걸음을 재촉했다.주민혁과 임하은 사이가 어떤 관계이든,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하린의 건도 차질 없이 정리해야 했다.다른 일들은 려운이 조사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날지도 몰랐다.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가슴 한켠에 남은 알 수 없는 씁쓸함은 덩굴처럼 얽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이미 위태로운 자신과 주민혁의 관계에 어떤 파문을 남기게 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오후 기술 세미나가 끝날 무렵, 멀리 보이는 하늘은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회의실 문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비는 이미 제법 거세지고 있었다.우산을 챙기지 못한 최수빈은 서류 가방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그러자 머리카락과 셔츠가 금세 젖었고 찬 기운이 옷깃을 타고 등으로 스며들었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문득, 주민혁이 일부러 무언가를 숨긴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밀어내려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주씨 가문의 복잡한 싸움과 자신의 상태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할 것 같아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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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9화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손등에 꽂혀 있던 바늘을 뽑아버렸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놀라 외쳤다.“잠깐만요! 아직 다 못 맞으셨어요!”하지만 최수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 쪽으로 급히 뛰어나갔다.손등의 바늘 자국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 앞에서 깜빡이는 숫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5, 4, 3...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자 그녀는 그대로 안으로 뛰어들어 5층 버튼을 눌렀다.거울처럼 반짝이는 내부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처참했다.창백한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미열 때문에 충혈된 눈,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난입한 사람처럼 초라해 보였다.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오해일지도 모른다고, 임하은은 단순한 검진을 받으러 온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랬다.하지만 ‘산부인과’라는 네 글자는 가시처럼 가슴을 찔러 숨이 막히게 했다.5층에 도착해보니 복도는 고요했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은 간호사 스테이션뿐이었다.그녀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가장 안쪽 진료실로 들어가는 주민혁과 임하은의 뒷모습을 멀리서 보았다.그런데 뒤따라가려던 순간, 등 뒤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환자분, 잠깐만요!”최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간호사는 링거를 들고 급히 다가오며 다소 나무라는 듯 말했다.“왜 마음대로 바늘을 빼세요? 아직 링거 채 못 맞으셨잖아요. 그러다 위험해질 수 있어요. 열 아직 안 내려갔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계속 맞으셔야 해요.”“저...”최수빈은 굳게 닫힌 진료실 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이내 그쪽으로 가려 하자 간호사가 단호하게 막아섰다.“잠깐만 있다가 돌아갈게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안 됩니다.”간호사는 단호한 태도로 최수빈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지금 상태로 이동하시면 안 돼요. 혹시라도 쓰러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담당 의사 선생님도 이미 불러두었어요. 곧 오실 겁니다.”최수빈은 더는 말할 수 없었다.간호사의 단호한 얼굴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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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0화

주민혁의 다정한 태도, 임하은의 미소, 그리고 그 산부인과 진료실까지...그 모든 장면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너랑 예린이 잘 챙기는 게 나한테는 제일 크게 도움 되는 거야.’전에 주민혁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재진에 같이 가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던 거, 또 늘 반복되던 거리 두기... 모두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자기가 나한테 짐이 될까 봐 걱정한 게 아니라 이미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눈가가 점점 뜨거워졌다. 최수빈은 세차게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밀어냈다.울면 안 된다고, 지금은 몸부터 회복하고 박하린의 일부터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주민혁에 대해서는...어쩌면 그들의 인연은 처음부터 엇갈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수액병 속 약이 거의 바닥을 보일 즈음, 바깥은 이미 밝아져 있었다.최수빈은 바늘을 빼고 링거실을 나와 병원 출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음속은 텅 빈 듯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주민혁의 번호를 찾아냈다.어찌 됐든 직접 확인해야 했고 그의 입으로 답을 들어야만 했다.곧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 너머로는 단조로운 신호음만 반복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울린 끝에 자동으로 통화가 끊겼다.어두워진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허전하게 내려앉았다.그는 이제 전화조차 받지 않는 것이었다.‘내일이면 은산시를 떠나야 하는데...’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할 때, 주예린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작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으로 보아 불안한 꿈을 꾸는 듯 보였다.최수빈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가슴 한켠이 시큰거렸다.오후에는 항공우주 연구원에 들러 업무 인계를 했다.사무실 한쪽에 모여 있던 동료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말들이 또렷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들었어? 주씨 가문에 곧 경사가 있을 거라던데? 주 대표님이 임씨 가문 딸이랑 약혼한대.”“임씨 가문?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그 임씨 가문 말하는 거야? 이거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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