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Kapitel 971 – Kapitel 980

1010 Kapitel

제971화

휴대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휴대폰을 쥔 최수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주민혁의 숨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지나치게 평온한 호흡이 마치 그녀의 질문이 날씨를 묻는 말에 불과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잠시 후, 휴대폰 너머에서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응.”가벼운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은 망치처럼 최수빈의 가슴을 세차게 내려쳤고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래도 걱정하지 마.”주민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약혼을 해도 너랑 예린이는 계속 내가 돌볼 거야. 너희가 불편해지는 일은 없게 할게.”최수빈은 기가 막힌 농담을 들은 것처럼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허무함이 가득했다.“우리를 돌본다고요? 민혁 씨, 민혁 씨가 보기에는 내가 지금도 민혁 씨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 같아요?”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목까지 차오른 울음을 삼켰다. 목소리도 점점 차가워졌다.“괜찮아요. 이제 필요 없어요. 나까지 신경 쓰지 마요. 예린이는 봐도 돼요. 민혁 씨가 그 애 아빠니까.”문득 정략결혼 얘기를 나누던 동료들의 모습과 배를 감싸 안고 있던 임하은의 모습이 겹쳐졌다.그 순간,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완전히 무너졌다.“그 약혼이 민혁 씨를 행복하게 하고 주씨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진심으로 축복해 줄게요.”그 말을 내뱉는 순간, 최수빈은 마음속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걸 느꼈다.예전에 느꼈던 설렘도, 기대도, 재회 이후의 망설임과 갈등도 모두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남은 건 차갑게 식은 공허함뿐이었다.휴대폰 너머의 주민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선을 그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잠시 후,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최수빈, 너...”“설명하지 마요.”최수빈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요.”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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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2화

짐을 절반쯤 정리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려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최수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수... 수빈 씨, 괜찮으세요?”려운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주 대표님이요... 사실 사정이 좀 있습니다.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실 수 없을까요?”최수빈은 가볍게 웃더니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려 비서님,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예전 일들도 다 넘기려고 했고요. 그런데 민혁 씨는 사과조차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매달리듯이 용서할게요, 다시 시작해요라고 말하는 게 맞나요?”그건 너무 비참했다.최수빈은 이미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했고 주민혁의 거절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어쩌면 그녀가 억지로 주민혁의 곁에 남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었을지도 몰랐다.전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마지막 옷 한 벌을 캐리어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잠든 딸을 내려다본 그녀는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예린아, 이제 엄마랑 집에 가자.”...타야 할 비행기는 오후 비행기였다.최수빈은 점심 무렵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하나 남아 있어 주예린을 도우미에게 맡겼다.항공우주 연구원 회의실.최수빈은 상석에 앉아 무인기 프로젝트 관련 기술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촘촘하게 나열된 수치와 매개변수 위를 손끝으로 짚어가며 주변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심종연이 기술팀과 함께 들어왔다.검은 정장이 그의 반듯한 체형을 더 또렷하게 드러냈고 얼굴에는 예전의 떠보는 듯한 기색 대신, 철저히 업무적인 태도만 남아 있었다.“수빈 씨, 많이 기다리셨죠?”그는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손을 거두며 말했다.“프로젝트 적용 단계에서 필요한 장비 구매 목록을 일부 조정했습니다. 세부 사항을 함께 확인하고 싶네요.”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해 둔 자료를 앞으로 밀었다.“이쪽은 저희가 산출한 핵심 부품 손실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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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3화

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주시후가 심종연의 품에 안겨 작은 얼굴을 들고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심종연은 몸을 굽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눈빛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부드러운 기색이 스쳤다.이를 본 최수빈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가슴 안쪽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렁였다.심종연이 주시후를 데려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그를 ‘종연 아빠’라고 부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주시후가 고개를 돌렸다.최수빈을 알아보는 순간 눈빛이 반짝였지만 그 빛은 금세 가라앉았다.아이는 심종연의 품에서 빠져나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최수빈 앞으로 다가왔다.그러고는 작은 얼굴로 올려다보며 눈가가 살짝 붉어진 채로 입을 열었다.“엄마...”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최수빈의 마음이 단번에 무너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시큰거리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녀는 주시후를 보지 않았다. 대신 심종연에게 시선을 고정된 채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심 대표님, 시후를 진심으로 아껴 주셨으면 합니다. 아빠가 되고 싶어서 품은 마음이어야지, 누군가를 견제하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돼요.”그동안 심종연이 주시후를 데려가고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게 만든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 말은 미리 해 두어야 했다.심종연은 경계심이 서린 최수빈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그리고 다가가려는 주시후를 곁으로 끌어당겨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빠라고 불리게 한 이상, 아이를 소홀히 대할 일은 없습니다. 다른 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와 주 대표님 사이의 일은 아이에게까지 번지지 않을 겁니다.”“그랬으면 좋겠네요.”최수빈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주시후의 붉어진 눈가도, 허공으로 뻗은 작은 손도 외면한 채 그대로 돌아섰다.“엄마...”울음이 섞인 주시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아이는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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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4화

주예린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임하은의 살짝 불러온 배를 빤히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최수빈은 빠르게 다가왔다. 가슴 안쪽이 이유 없이 시큰거리며 꽉 조여 왔다.그녀는 주예린이 주민혁을 만나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부녀가 가까이 지내는 것도, 피로 맺어진 관계라는 걸 알기에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주예린이 임하은과 친해지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곧 주민혁의 아내가 될 여자, 그의 아이를 품고 있는 그 존재는 마치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최수빈을 아프게 했다.“주예린, 이리 와.”최수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긴장한 듯했다.그녀는 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주예린은 잠시 멈칫하며 최수빈을 한 번, 주민혁을 한 번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엄마, 나 아빠랑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우리 해온시로 가는 비행기 타야 해. 다음에 또 아빠랑 놀자, 응?”최대한 부드럽게 달랬지만, 최수빈의 시선은 임하은에게 고정된 채 말투는 차가웠다.“임하은 씨, 제 딸에게서 좀 떨어져 주세요.”그러자 임하은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거두고 주민혁을 바라봤다. 눈빛에는 억울해하는 기색이 담겨있었다.주민혁은 주예린을 안은 채 최수빈을 바라봤다.“최수빈, 하은이도 악의는 없었어. 그냥 아이를 좋아해서...”“내 아이를 좋아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최수빈은 한 걸음 다가가 주민혁의 품에서 주예린을 받아 안았다. 그러고는 아이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말을 이어갔다.“민혁 씨, 우린 이미 정리했잖아요. 민혁 씨는 민혁 씨의 인생이 있고 나도 내 인생이 있어요. 그리고 예린이는 내 딸이에요. 상관없는 사람과 너무 가까워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상관없는 사람이라니요?”참다못한 임하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저 민혁 씨의 약혼자예요. 앞으로는 예린이의...”“그만.”주민혁이 낮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확연히 가라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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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5화

최수빈은 주예린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곧 이륙했다.주예린은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던 아이는 최수빈의 옷자락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엄마... 아빠랑 그 이모, 결혼하는 거예요?”서류를 정리하던 최수빈의 손이 순간 멈췄다. 종이 가장자리를 스친 손끝에 얕은 자국이 남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봤다.고개를 한껏 내린 주예린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 묻어 있었다.마음이 아려 왔지만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대한 부드럽게 목소리를 낮췄다.“응. 아빠도 자기 인생이 있는 거야.”“그럼... 아빠가 이제 보러 안 오는 거예요?”주예린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배어 있었고 옷자락을 쥔 손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최수빈은 아이를 품에 끌어안아 천천히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고는 다정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아니야. 아빠는 언제까지나 네 아빠야. 꼭 보러 오실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항상 예린이 곁에 있을게. 알겠지?”주예린은 최수빈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기내는 고요했다.에어컨이 돌아가는 희미한 소리만 흐르는 가운데, 딸을 안은 최수빈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씁쓸함을 삼켰다.어른들의 선택이 결국 아이에게 상처로 남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할 수 있는 건 딸이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뿐이었다.비행기가 해온시 공항에 착륙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공항을 나섰다.해온시 특유의 습기를 머금은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며칠째 팽팽하게 긴장돼 있던 신경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집에 도착해보니 도우미가 이미 저녁을 준비해 둔 뒤였다.주예린은 몇 숟갈 먹더니 졸리다며 칭얼거렸고 최수빈은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재웠다.딸의 잠든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다음 날 아침.주예린을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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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6화

그는 고개를 돌려 진호성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원장님, 오늘은 하은이의 이후 업무 배치에 대해 상의드리러 왔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팀에 적응해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자 합니다.”진호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염려 마세요. 이미 하은 씨 자리는 마련해 두었습니다. 수빈 씨 팀으로 배치했어요. 수빈 씨가 이끌어주면 금방 업무에 익숙해질 겁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임하은이 자신의 팀으로 오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앞으로 매일 임하은과 함께 일해야 하고 거기에 주민혁의 간헐적인 방문까지 더해진다면, 그 자체로 그녀에게는 분명 큰 부담이었다.업무 보고가 시작되자 최수빈은 의식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프로젝트에만 집중했다.은산시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과 현재 직면한 문제들, 그리고 이후의 추진 계획까지 차분하게 정리해 진호성에게 설명했다.임하은은 옆에서 간간이 전문적인 의견을 보탰다. 생각이 명확하고 논리가 치밀한 것이 확실히 실무 역량은 뛰어났다.최수빈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일에 있어서는 임하은이 쉽게 얻기 힘든 인재라는 사실을.보고가 끝나자 진호성은 최수빈에게 임하은을 데리고 사무실을 둘러보며 업무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하라고 했다.두 사람은 진호성의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는 고요했고 발걸음 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먼저 말을 꺼낸 건 임하은이었다. 조심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수빈 씨,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개인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프로젝트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이 사업은 국가 항공우주 산업과도 직결된 중요한 일이잖아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줄 수는 없으니까요.”최수빈은 임하은을 바라보았다.그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있었고 이전에 느껴졌던 날 선 기운은 사라진 채 일에 대한 진지함만 남아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최수빈이 말했다.“괜한 걱정 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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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7화

“이제 센서 오차 보정 방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겠습니다. 임하은 씨, 그쪽 알고리즘 모델은 새로운 진전이 있나요?”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봤다. 시선은 임하은이 비친 영상에 멈췄다.화면 속 임하은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배경으로는 호텔 객실의 통유리창 너머 네온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막 입을 열려는 순간, 화면 한쪽에 낯익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주민혁이었다.그는 집에서 입는 편안한 차림으로 물컵을 든 채 카메라 밖을 지나쳤다. 마치 제 집을 오가는 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최수빈의 손에 쥔 마우스가 순간 멈췄다. 심장이 무언가에 꽉 쥐어짜인 듯 조여들며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억지로 시선을 거두고 손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목소리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임하은 씨? 시작해 주세요.”임하은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오차 보정 모델은 1차 반복 개선을 마쳤습니다. 데이터는 공유 문서에 올려두었고요, 테스트 결과 오차율은 0.3% 이내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예상 기준에는 부합합니다.”임하은은 막힘없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러나 화면 속에는 다시 주민혁의 모습이 비쳤다. 그가 몸을 숙여 임하은에게 무언가를 말했지만 소리는 마이크에 걸러져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임하은이 고개를 들며 짓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만 화면에 보였다.최수빈은 눈을 내리깔고 문서에 빼곡히 적힌 수치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억지로라도 일에만 집중하려 애썼다.‘두 사람 곧 약혼하잖아. 함께 사는 게 당연하지. 난 그 일에 마음이 흔들릴 자격도, 입장을 따질 이유도 없어.’회의는 그대로 이어졌고 종료를 앞두고 임하은이 불쑥 그녀를 불렀다.“수빈 씨, 잠깐만요.”“무슨 일이죠?”최수빈이 물었다.“해온시에 막 와서 아직 이쪽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항공우주 연구원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정착하려고 하는데... 출퇴근도 편한 데로요. 해온시에 오래 계셨으니까 괜찮은 아파트 단지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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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8화

그녀는 문득, 자신이 임신했을 때도 주민혁이 이렇게 데려다주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한 번은 야근이 늦어져 한밤중에 연구원을 나섰는데 차 옆에 기대 잠든 그가 보였다. 몸에는 얇은 외투 하나만 걸친 채였다.깨우려고 다가가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는 웃으며 말했다.“얼마를 기다려도 안 졸려.”그때의 그는 눈빛에 빛이 있었고 말투에는 온통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임하은을 대하는 모습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최수빈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가슴속에서 시큰거리는 감정이 밀려왔다.어떤 사람과 어떤 일들은, 결국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되어 마음속에 끝내 메울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게 마련이다.“수빈 씨,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임하은이 그녀의 기색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괜찮아요.”최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가시죠. 오전에 기술 심의 회의가 있어서 미리 준비해야 해요.”사무실에 들어서자 동료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아 있었다.최수빈은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마음속에 일렁이던 감정들을 모두 눌러 담았다.과거에 대한 아쉬움에 매달려 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일에 집중하고 주예린을 잘 돌보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점심시간, 최수빈이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참에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래로 내린 시선에 송미연의 이름이 보여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최수빈! 솔직히 말해 봐. 주민혁이 그 임하은이랑 약혼한다는 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송미연의 다급한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 담겨있었다. 휴대폰 너머에서도 분노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어제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어. 그 인간 미친 거 아니야? 예전에 너한테 그렇게 굴어 놓고 이제 와서 또 이 짓이라니!”최수빈은 의자에 기대 창밖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바라보며 바람에 흩날리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별일 아니야. 본인 선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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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9화

오후, 실험실 안.최수빈의 손끝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오갔다. 화면 속에서 쉼 없이 흘러가는 데이터는 은빛 물줄기처럼 반짝였고 맞은편 자리의 임하은과 정확히 맞물려 움직이고 있었다.두 사람은 무인기 항법 시스템의 핵심 데이터 연산을 함께 진행 중이었다. 프로젝트를 실제로 구현하기 전, 가장 중요하고도 까다로운 단계였다.임하은의 실력은 최수빈의 예상 이상이었다.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터치패드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알고리즘 모델의 하위 코드를 순식간에 불러냈고 변수에 대한 감각과 논리 정리 능력 덕분에 전체 연산 속도가 거의 30%나 빨라졌다.“여기 오차 임계값을 0.02%만 더 낮춰도 될 것 같아요. 지난주 풍동 실험 데이터랑 같이 적용하면 안정성이 더 좋아질 거예요.”임하은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기술에 완전히 몰입한 목소리였고 재벌가 출신 특유의 꾸밈이나 여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최수빈은 그녀의 흐름에 맞춰 수치를 조정했다.곧 화면 위의 시뮬레이션 곡선이 한층 더 매끄럽게 정리됐다. 두 사람의 호흡은 마치 수년간 함께 일해 온 동료처럼 자연스러웠다.조작대 옆에는 두툼한 기술 문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기밀’이라고 표시된 파일 옆에는 막 내려온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최수빈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이어지는 작업으로 쌓인 피로가 잠시 가셨다.그때 임하은이 갑자기 손을 멈췄다. 화면에 멈춰 선 데이터 묶음을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알고 있어요. 수빈 씨랑 민혁 씨가 서로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거. 결혼도 했고 예린이도 가졌고 나중에 이혼했다는 것도요.”최수빈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손에 들린 커피잔이 살짝 흔들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임하은을 바라봤다. 햇빛을 받은 옆얼굴은 유난히 차분했다. 도발하려는 기색도 떠보려는 기색도 전혀 없이, 그저 담담히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실험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서버가 돌아가는 낮은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최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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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0화

최수빈은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손끝으로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임하은의 시선에 담긴 기대와 탐색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어떤 입장을 확인해 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실험실 밖에서는 오가는 동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멀리 있는 회의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이어졌다. 그런 사소한 소음들이 오히려 최수빈의 생각을 또렷하게 정리해 주었다.그녀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신 뒤, 차분하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약혼식은 두 분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잖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하는 게 맞죠. 저와 민혁 씨는 지금 아이의 부모일 뿐이에요.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건 적절하지도 않고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잖아요.”잠시 멈칫하다가 또다시 임하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예린이는, 때가 되면 아이의 방식으로 축하를 전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얼굴에 잠깐 아쉬움이 스쳤지만 임하은도 더 이상 설득하려 들지는 않았다.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힘이 실려 있었다.조작대 옆에 놓인 커피는 서서히 식어 갔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다시 기술과 숫자만 남은, 엄격한 업무의 분위기로 돌아갔다.최수빈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화면 속 데이터를 바라보며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지는 걸 느꼈다.약혼식 초대를 거절한 건 과거의 감정과 완전히 선을 긋는 일이자 앞으로의 삶을 분명히 정리하는 선택이었다.앞으로 그녀는 주민혁의 사적인 삶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고 지나간 감정이 현재의 일과 삶을 흔들게 두지도 않을 생각이었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데이터 연산이 끝났고 두 사람은 최종 결과를 서버에 전송해 테스트를 걸었다.화면에 ‘제출 완료’ 알림이 뜨자 최수빈은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저녁 무렵.최수빈과 임하은은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네온 불빛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오후에 진호성이 급하게 잡은 약속 자리였다. 무인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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