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절반쯤 정리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려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최수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수... 수빈 씨, 괜찮으세요?”려운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주 대표님이요... 사실 사정이 좀 있습니다.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실 수 없을까요?”최수빈은 가볍게 웃더니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려 비서님,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예전 일들도 다 넘기려고 했고요. 그런데 민혁 씨는 사과조차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매달리듯이 용서할게요, 다시 시작해요라고 말하는 게 맞나요?”그건 너무 비참했다.최수빈은 이미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했고 주민혁의 거절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어쩌면 그녀가 억지로 주민혁의 곁에 남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었을지도 몰랐다.전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마지막 옷 한 벌을 캐리어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잠든 딸을 내려다본 그녀는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예린아, 이제 엄마랑 집에 가자.”...타야 할 비행기는 오후 비행기였다.최수빈은 점심 무렵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하나 남아 있어 주예린을 도우미에게 맡겼다.항공우주 연구원 회의실.최수빈은 상석에 앉아 무인기 프로젝트 관련 기술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촘촘하게 나열된 수치와 매개변수 위를 손끝으로 짚어가며 주변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심종연이 기술팀과 함께 들어왔다.검은 정장이 그의 반듯한 체형을 더 또렷하게 드러냈고 얼굴에는 예전의 떠보는 듯한 기색 대신, 철저히 업무적인 태도만 남아 있었다.“수빈 씨, 많이 기다리셨죠?”그는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손을 거두며 말했다.“프로젝트 적용 단계에서 필요한 장비 구매 목록을 일부 조정했습니다. 세부 사항을 함께 확인하고 싶네요.”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해 둔 자료를 앞으로 밀었다.“이쪽은 저희가 산출한 핵심 부품 손실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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